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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함께 4. 수수께끼 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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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2 14:22 조회 6,99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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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룡은 방자가 춘향이를 데려오지 못하자 몹시 실망을 하였것다. 그렇다고 춘향이가 냈다는 수수
께끼를 안 들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춘향이가 낸 수수께끼란 게 뭐냐?” “두 갠디요, 하나는 삼강오소에 동몽롱 어쩌구저쩌구라 잘
알아듣지 못했시유. 다른 하나는 나비가 꽃을 따른다든가 꽃이 나비를 따른다든가 하는 것이었고,
아니었나? 기러기가 물을 따른다 했던가, 물이 기러기를 따른다 했던가? 내 참 헷갈려 죽겄네.”
“앞의 것은 나도 뭔 소린지 잘 모르겠고, 뒷것은 알 듯 말 듯 하다만…….”

몽룡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방자가 그런 몽룡을 채근했다.
“뭔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허유? 춘향이가 낸 수수께끼가 공자 맹자 책에는 안 나오는 말인갑쥬?”
그 순간 몽룡이 바로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것다.
“알았다! 알았어!”“공자 맹자 책에 나오는 소린갑지유?”“히야! 그런 소리가 공맹의 책에야 나오
겠느냐?”

“근디 왜 좋아하는디유?”“통하는 사람끼리는 어떻게든 통하기 마련이라서 그렇지!”“뭐가 통했
는디유?”“춘향이가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제 마음을 수수께끼 속에 담아 알려 준 것이지.”
방자는 어이가 없었다. 춘향이와 몽룡이 서로를 언제 보았다고 둘이 통한단 말인가. 몽룡의 말이
사실이라면 춘향이 그 계집도 꽤나 앙큼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렷다.

“그나저나 뭔 뜻이기에 통하니 마니 해싸시우?”
몽룡은 대단한 비밀을 알아낸 것처럼 좋아하며 히히거리는데, 방자는 몽룡이 그럴수록 비위가
상하고 배알이 꼴렸것다. 춘향이가 자신에겐 쌀쌀맞게 굴면서 아직 얼굴도 모르는 사또 아들한텐
둘만이 통하는 말을 먼저 던진 것 같아서였으니 그럴 수밖에.
“얘, 방자야.”

몽룡이 제법 위엄을 갖추어 방자를 불렀것다.
“사람 앞에 놔두고 왜 부르시우?”“내 말 좀 들어 볼래?”“뎬장,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할 판인께 뜸
들이지 말고 싸게싸게 풀어 놓으시우.”
심사 뒤틀린 방자의 대꾸, 좋게 나갈 리 있나. 그러든 말든 몽룡은 눈치코치 없이 자기 생각뿐.
“춘향이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신호를 보낸 거야.”

“아, 근께 쓸데없이 말 빙빙 돌리지 말고 바로 직빵으로다가 말해 보란게요.”
“나비가 꽃을 따른다는 말은 꽃인 자기는 가만히 있을 테니 나비인 이 몸더러 오라는 얘기 아니
겠냐?” “꿈보다 해몽이 더 좋구만유. 춘향이야 꽃 가운데에서도 왕이라 할 수 있제만 되련님이 나비
는 무슨 나비, 나방이라믄 몰라두…….”

“더 들어 봐, 기러기가 물을 찾는다는 얘기는 물은 가만히 있으니 기러기가 알아서 날아오라는
얘기 아니겠냐?”
“그라믄 시방 되련님이 이참엔 기러기가 되는 것이우? 참말로 웃기네. 제비 같으믄 또 몰
라…….”“내가 너처럼 지저대는 제비인 줄 아느냐? 나는 꽃 찾는 나비이자 물 찾는 기러기다, 이 말
씀이야.”

“춘향이가 뭘 몰라도 되게 모르는구만.”
“뭘 모른단 말이냐?”“나비는 꽃한티 날아가기 전에 애들 나비채에 잡혀 들어갈 수도 있고, 기러
기는 한철 지나믄 또 다른 디로 날아가는 걸 모른단 말이지라우.”
“너는 왜 쉬운 걸 자꾸만 어렵게 뒤집어 놓고 그래?”

“되련님도 내 나이 묵어 보소. 세상만사 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께 그러지라우.”
“알았다, 알았어. 그란께 방자 가라사대 조심하라는 말이지?”“되련님보다 춘향이가 더 걱정이
라서 그런 것이제.”
“걱정은 뚝! 나는 나비가 되어 꽃을 찾아가면 그만이고, 기러기가 되어 물을 찾아가면 만사형통
이다!”

“이 형님하곤 통한 게 없는디 뭐가 만사형통이우? “만사형통은 뭔 일이든지 잘 된다는 말이야!”
“딱 맞는 말이네. 일이 잘 될라믄 형님을 통해야제. 흠흠.” “아이고 두야!”
“으짜든 내사 모르겄소. 그저 사또 자제란께 불 찾아드는 나방인지 물 차고 오르는 제비인지도
모름시롱 실수했구만. 춘향이가 큰 실수 혔어!”

방자는 괜히 춘향이 말을 전했다고 후회했으나, 몽룡은 춘향이 한 말이 의외로 쉽게 풀어져 어깨
춤이 절로 추어질 판이었다. 얼마나 고대하고 고대하던 일인가. 남원 가면 반드시 춘향이를 만나 뜨
거운 사랑을 해 보는 게 소원 아니던가.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알면 한양 동무들도 부러워 죽을 것이다.

관아로 돌아온 바로 그날 저녁부터 몽룡은 춘향이를 빨리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앉지도 못하고 서
지도 못하고 꼭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왔다 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하는구나. 그런 까닭에 더는 견딜
수 없어 방자를 졸라 보기도 하고 다그쳐 보기도 했지만 방자는 한 달이 다 지나도록 요지부동이렷다.
“빨리 춘향이를 보러 가야 할 것 아니냐?”“춘향이 보는 일이 뭐가 그리 급허우?”“내가 그 일보다
더 급한 게 그럼 무엇이냐?”

“허 참, 책방 되령이 그런 소리 하믄 쓰간디요? 자나깨나 앉으나서나 누우나 뻗으나 공자 왈 맹자
왈 열심히 지성으로 읽어서 과거 준비해야 쓸 것 아니오?”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그러니 방자 너는 춘향이를 만나러 갈 날이나 받아라.”

“초파일은 벌써 지났고 단오도 막 지났은께 인자 칠월 칠석이나 백중날이나 되어야 춘향이를 바
깥에서 볼 수 있은께 잊어불고 기다려야 쓰겄소.”
“네가 춘향이 집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날까지 기다려야 되는데?”

“그때 절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께 그라지라. 춘향이도 그날엔 절에 가지유. 그라고 칠월 칠석이
나 백중 때쯤 되어야 절간 연방죽에 물도 차고 꽃도 핀단 말이유. 수수께끼에 나온 말이 딱 그 말 아
니우. 꽃 피고 물 차면 오라고! 꽃 피고 물 차는 곳이면 딱 절집인디, 아마도 광한루에서 가차운 만복
사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우.”“나 참, 미치겠네. 그 말은 나더러 나비 되고 기러기 되어서 아무 때고
오라는 말이라니까!”

몽룡이 가슴을 치다 머리를 쥐어뜯다 하며 발악을 했것다. 그렇다고 방자가 그 정도 기세에 눌리
겠는가.
“아니란께 그러네유. 그 말은 만날 날과 장소까지 다 들어 있는 말이란께요. 그란께 미리 헛물 켜
지 말고 쪼깐 진득허니 기다리슈.”

그래도 몽룡은 물러나지 않고 차마 하지 못했던 말까지 뱉어냈것다.
“아무래도 네가 밤마다 춘향이랑 만나서 노느라고 나를 따돌리는 것 아니냐?”
“내 참, 듣자듣자 헌께 별시런 말을 다 듣네. 그것도 다 옛날 이야기제, 요샌 그런 일 없소이다.”
“그럼 옛날에는 밤마다 놀았단 말이냐?”
순간 몽룡이 두 눈에 불꽃이 이는구나.

“놀다 뿐이오? 홀딱 벗고 목욕할 때 망도 봐줬제.”
방자가 태연히 지나가는 말 하듯 하나 몽룡은 머리꼭지가 아주 돌 지경이로다.
“뭐라고? 이제 보니 네가 아주 엉큼하고 음흉한 놈이구나!” “그런 소리 마쇼. 나도 한때는 뜨거운
피가 팔팔 끓는 씹육 세였다우.” “그럼 지금은?”“지금이야 마구 놀기엔 쪼깐 거시기한 나이 씹팔 세
아니우. 다 이 형님이 알아서 만사형통 해 줄 틴께 너무 보채지 마시우.”
“형님 같은 소리 자꾸만 할래? 십팔 세면 뭐가 거시기한데?”

“거시기는 귀신도 모르는 것인께 너무 많이 알라고 허들 마소. 자칫하믄 많이 다쳐유. 그냥 그런
가보다 해유. 나이는 헛 묵는 게 아니우. 이 형님 심사 뒤틀리게 하믄 춘향이허고 사랑은커녕 발뒤꿈
치도 못 볼 것인께 알아서 하시우.”
몽룡이 가슴을 치며 내놓고 억지 소리를 하는구나.
“아무래도 방자 네가 나 먼저 춘향이 건든 것 아니냐? 단옷날에도 나 먼저 웃국 떠먹는 수작을 하
느라 그리 지체한 것 아니었느냐?”

몽룡이 애써 말투는 점잖게 하지만 벌써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시샘이 나서 죽겠다는 꼬락서니
구나. 그러든 말든 방자는 느긋하기만 하니 그 속을 알 수 없구나.
“뭔 말을 고로코롬 징그럽게 한다요? 사랑을 시작도 하기 전에 의심병부터 들어부렀소? 열불 내
지 말고 가만 기다려 보슈. 나는 물정 모르는 되련님처럼 꽃 보고 허둥대는 나비가 아니고 물 보고 첨
벙대는 기러기도 아니우. 이런 일은 서두르는 게 아니우.
다 때를 봐야 하는 것이우.”

몽룡은 도저히 말로 방자를 해볼 수 없어 씩씩거리며 손을 휘저어 책상 위 책을 쓸어 버렸것다. 방자는 어이없
어 기가 막힌다.
“책이 뭔 죄라서 그러우?”
“네가 뭔 상관인데?”“아따 책 펴 놓은 디서 한 장도 더 안 넘어가고 먼지만 폭 쌓였는디, 열심히 읽어 한 장이라
도 더 넘길 생각은 안 허고 아예 뒤집어불믄 되겄수?”
“그런 소리 하려면 책방 방자 노릇 그만하고 주막으로 다시 돌아가!”“그 말 시방 참말이우?”
방자가 두 눈에 힘을 잔뜩 주고서 몽룡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것다. 몽룡은 오금이 저리며 아차 싶었지
만 그냥 있을 수밖에.

“세상 성질 뻗치는 대로 살려 하지 마슈. 큰 바가지 작은 바가지 다 따로 쓰일 디가 있듯이 아랫것도 다 쓰일 디
가 있는 법이오. 이 몸이 어쩌다가 책방 방자 노릇 한다고 되련님 맘대로 함부로 내치고 들이고 하는 것 아니우. 되
련님이 아직 어려서 뭘 몰라 그러는데, 꽃도 피어야 나비가 찾아가고 물도 차야 기러기가 날아가는 법이우.”
몽룡은 방자의 말에 한마디도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사실 춘향을 만나야 하는 청춘사업이 방자 없이 되겠는가. 또 자신보다 나이가 두 살 더 많은 만큼 사랑법도 더
많이 알지 않은가. 게다가 저자거리에서 어려서부터 잔뼈가 굵은 터라 무슨 일에서든 자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
을 정도로 수완이 좋다. 거기에 더해 춘향이와는 소꿉친구라 임의로운 사이 아닌가.

그런데 바로 그 사실이 좀 꺼림칙하기는 하다. 방자말대로라면 살 섞는 일은 향단이하고만 해 보았다는 것
인데 그 말이 참말일까? 엉큼하고 음흉스러운 방자가 춘향이까지 어찌 해 보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 그래서 자
꾸만 미적미적 미루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그래서 먼저 웃국 떠먹은 거 아니냐고 다그쳐 본 것이다.



그러나 이내 곧 고개를 저었다. 방자가 아무리 그래보아야 저 무식한 인간을 선녀 같은 춘향이가 눈길 한번
주었겠는가. 제가 아무리 나이 더 먹었다고 형님 운운하지만 반상의 구별이 엄연한데 나를 모른 척하겠는가. 무
엇보다도 나는 주인이고 저는 하인 아닌가. 그것도 나는 사또 아들이고 저는 책방 방자로 들어온 신분 아닌가. 그
렇지만 방자는 나름대로 함부로 할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왠지 방자 앞에선 자꾸만 주눅이 든다. 그러면서도
싫지 않다. 그렇다면 어떡하든 방자를 구워삶아 춘향이를 만나야 하리라.

방자와 실랑이를 벌이며 하루하루를 억지로 보내다보니 칠월 칠석날이 드디어 하루 앞으로 다가왔것다.
방자 가라사대, 칠월 칠석은 견우 직녀가 만나는 날로 사월 초파일 버금가는 절집 명절이라 절에 처녀 총각
들이 많이 모여들어 초이레 달일망정 떴다 지도록 어울려 논다고 했것다. 춘향이도 향단이와 칠석 불공을 드리
러 절에 오니 그때 자연스레 만나자는 것이었다. 뜸 들여야 할 때 솥뚜껑을 미리 열면 밥이 설고,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고 했것다.

방자 말씀이야 구구절절 옳은 소리이지만 이내 청춘은 어이할꼬. 몽룡은 방자가 두 살씩이나 더 먹은 걸 무
슨 벼슬처럼 내세우며 느긋해하면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그러나 방자 없이 될 청춘사업이 아니니 방자 거
동 배알이 꼴리고 눈꼴이 시어도 참을 수밖에. 사실인즉슨 그동안 몽룡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억지로 들여다보느라 죽을 맛이었다. 방자는 저녁이면 자기 할머니가 꾸리는 주막집에 슬쩍 다녀오는 눈치였
다. 그런 줄 알면서도 몽룡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설마 저 혼자서 춘향이를 만나고 오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
으로 아무 일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몽룡은 억지로 책 읽는 시늉을 하며 무료하게 책장을 넘기었다.

“공자 왈 나비는 꽃을 따르고 맹자 왈 기러기는 물을 찾으니…….”
바로 그때 방자가 오더니 소리를 냅다 질렀다.
“되련님! 시방 글 읽는 거유? 육자배기 하는 거유?”
“내가 뭘?” “아따 공자님이 꽃 치레 허고 맹자님이 기러기 물 먹는 소리 했겄소?”“그런 성현들도
할 것 다 했느니라.”

“어거지 그만 부리시우. 차라리 탱자 왈 유자 왈이라믄 모르겄소.”
“그래, 알았다. 그런 거라면 자신 있지. 어디 한번 들어 보아라. 음, 방자 가라사대, 탱자 왈 탱탱한
춘향이 젖가슴에 유자 왈 유두 젖꼭지 오디 같이 검붉으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칠석날이 바로 내일
이라,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이 몽룡이와 춘향이도……. 공자 왈 먼 데서 벗이 오니 이 아니 좋을쏘
냐, 방자 왈 몽룡이 춘향이를 찾아가니 이 아니 좋을쏘냐.”

방자, 몽룡이 책 읽는 시늉에 기가 막혀 허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구나.
“아이고 두야. 내 머리가 다 아프네. 어린 되령 상사병에 쓸 약이 무엇이다냐!”
“무엇이긴 무엇이냐. 춘향이만 만나면 내 병은 감쪽같을 것이로다.”
“알았소. 알아 묵었은께 내일 실수 없도록 하시우.”
그 말에 몽룡이 방자에게 바짝 다가가며 반색을 하는구나.
“그간 춘향이 소식 알아 온 모양이구나.” “소식은 무슨……. 내일 밤에 만복사에 가 있으믄 내가 간
다고 기별했소.”

“왜 방자 네가 가? 내가 가야지.” “그럼 되련님 혼자 가시우. 나는 책방 지킬 틴께.”“알았어, 알았어.
우리 둘이 같이 가는 거지?” “그라믄 둘이 가야 일이 되제, 되련님 혼자 가서 되겄소?”
“근데 누구한테 기별했어? 춘향이한테 확실하게 한 거여?” “향단이한티 했소. 그라믄 안 되우?”
“향단이만 나오고 춘향이는 안 나오면 어떡하려고?”

“나비가 가는데 꽃이 없겄소? 기러기가 가는데 물이 없겄소? 방자가 가는데 계집이 없겄소? 되
련님 가는데 방자가 없겄소? 그란께 염려 꽉 붙들어 매시우.”
“아, 역시 방자 형님이시다!” “이럴 때만 형님이래…….”
몽룡은 방자를 추켜세우는데, 방자는 좋아 자지러지는 몽룡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로다. 사
또 아들이라는 신분도 잊고 채신머리없이 굴며 그저 계집을 만나러 가고 싶어 하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것이다.

그럭저럭 하루를 보내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으나 몽룡은 도시 잠이 오지를 않아 죽을 맛이
렷다. 이 밤만 자고 나면 그토록 그리고 그리던 춘향이를 만난다 생각하니 심장이 벌렁거리고 귓구
멍이 윙윙거리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는가 싶었다. 방자와 함께 어느 시냇가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
서 여자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 미처 시냇물에서 발을 거두어
물기도 닦지 못했다. 여자들은 몽룡이가 있든 말든 하얀 종아리를 드러낸 채 물속을 거닐고 있었다.


몽룡은 되레 멋쩍어 바짓가랑이를 추스르며 방자를 찾았다. ‘방자야! 방자야!’ 마구 부르는데 아랫
도리가 척척해지면서 잠이 깼다. 이어 밤꽃 향기가 책방에 가득 찼다.
아침이 밝았으나 몽룡은 멍했다. 간밤에 망측하면서도 짜릿한 꿈을 꾸어서 그런지 머릿속이 어
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그새 방자는 세숫물을 받아 놓고 일어나라 채근이다.

“해가 시방 중천에 떠서 뱅뱅 돌고 있소. 빨랑 일어나 세수하슈.” “세수 하고나면 바로 만복사 가
는 거야?” “만복사는 이따 저녁에 가지 대낮에 뭐하러 가우?”“뭐하긴? 춘향이 만난다고 했잖아?”
“춘향이는 달 뜨믄 만날 것이우. 낮엔 칠석 불공 드리는 여자들 천지요.”
“그러면 우리도 낮에 가서 빌어야지. 절 이름도 무엇이든 빌기만 하면 만복을 다 준다고 만복사
아니겠느냐?”“그래서 춘향이랑 잘 엮어달라고 빌 참이우?”

“그걸 말이라고 묻느냐? 그러니까 낮에 가자.”
“못 갈 건 없지만, 사또 자제가 넘들 눈에 띄어 좋을 것 뭐 있소?”“누가 나를 안다고 그래?”
“남원 고을에 사또가 둘만 되아도 모를 것인디, 사또가 딱 하난께 자제까정 다 알제 모른다요.”
“지금부터 언제 밤 되기를 또 기다린단 말이냐?”“아무 소리 말고 공자 왈 맹자 왈 열심히 외쳐대
슈. 그래야 저녁에 바깥출입 허락 맡을 것 아니우.”

“에잇, 방자 너는 아무 때고 바깥 드나드는데 난 왜 허락 맡고 나가야 돼?”“뎬장 넨장 맞을, 그걸
시방 몰라서 묻는 것이유? 사또 자제라서 그런 것 아니오?”
“이런 땐 내가 방자 하면 안 돼? 나, 사또 아들 하기 싫어!”
방자가 픽 웃었다.
“인자 별 까탈을 다 부리는구만유. 복 터진 소리 그만 허슈. 사또 자제는 아무나 되는지 아시우?”

방자의 얼굴에 잠깐 그늘이 지는구나.
‘내가 어쩌다가 이 어린 녀석 뚜쟁이질까지 하게 되었다냐. 그려도 어떡혀. 먹고살기 힘든 시상
에 사또 관아 책방에 빌붙어 밥벌이하게 된 것만도 어딘디…….’
몽룡은 동헌으로 사또를 만나러 갔것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를 보니 감히 밤마실을 나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왔으니.

방자가 몽룡을 보고 확인하듯 물었것다. “사또 영감한티 허락 맡었수?”
몽룡의 표정이 시무룩하다. “아버진 워낙 관아 일에 바쁘셔서…….”
방자가 픽 웃었것다. “그래서 말도 못 붙여 보고 왔다는 거유?”몽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믄 어쩔 셈이우?” “나도 몰라. 방자 네가 알아서 해 줘.”
“내가 알아서 해 줄래도 이것만은 그럴 수가 없구만유.”

“네 옷 입고 그냥 나가자.” “큰일 날 소리 허고 있소 시방! 문지기들이 되련님 얼굴을 다 아는디 나
가길 어디 나가요? 사또 영감한티 일러 바치믄 애먼 나까지 혼난단 말이유.”
“그럼 할 수 없네. 단오 때처럼 어머니한테 가서 허락 맡을 수밖에.”
“그렇게라도 해유 그럼. 알리고 나가야 문지기들이 가만히 있을 것 아니유.”

몽룡은 바로 어머니한테 갔것다.
“어머니, 오늘이 칠석날인데요…….” “칠석날이 너랑 무슨 상관이누?”
“만복사라는 절에 가서 사람들 구경도 하고 내 소원도 빌고 싶어서요.”
“아니, 공맹을 섬기는 유가 집 자제가 절집 명절에 간다고?”

“칠석날엔 유생들도 절에 가서 소원을 빈답니다. 저도 과거에 빨리 붙여 달라고 칠석 불공을 드
려야겠습니다. 저기, 한양 인왕산 칠성암엔 과거 보러 조선 팔도에서 모인 유생들이 앞다투어 칠석
불공을 드렸잖아요. 남원 만복사는 만 가지 복을 주는 절이라 하니까 이참에 저도 가서 복을 빌어 볼
까 합니다. 더구나 세상 풍속을 알려면 그런 것도 눈에 담아 두어야 할 것 같아서요.”
“아버지 아시면 불호령 떨어질 텐데?”“그러니까 어머니만 살짝 알고 계시면 되잖아요.”
몽룡은 간신히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냈것다. 그 다음엔 점심을 어떻게 먹었는지, 저녁을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고 해가 떨어지자마자 몽룡은 방자를 앞세워 관아를 나왔것다.

“나귀고 뭐고 탈 것 없이 어서 가자!”
“절간이라 나귀 매 놓을 디도 마땅찮긴 해유.”
방자와 몽룡이 다 된 저녁에 바깥나들이를 가는 걸 문지기들이 의아해했으나 어머니한테 허락
맡고 만복사로 칠석 구경 가는 참이니 아무 소리 말라고 입막음까지 당당히 했것다.

몽룡과 방자가 만복사에 이르니 촛불을 밝힌 연등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연등은 어슴푸레한
초이레 달빛 아래 초롱초롱한 빛을 발하며 매달려 있었다. 절 마당은 사람들이 장이 선 것처럼 북적
대니 몽룡은 정신이 없었다. 눈알을 열심히 돌리며 춘향이 어디 있나 살폈것다. 여자들 분내가 코끝
을 간질였다. 기분 좋은 냄새였다. 다행히 자신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실컷 여자들을 훑으
며 눈요기를 했다.

종소리가 길게 은은히 울리는가 싶더니 사람들이 석탑 주위로 모여들어 둥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모두들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입으론 열심히 뭔가를 외워댔다.
방자가 여자들한테 넋 잃은 몽룡을 팔꿈치로 슬쩍 쳤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시우? 우리도 탑돌이나 합시다.”
“타, 탑, 탑돌이? 그래. 그런데 어떻게 하는 건데?” “넘들 하는 대로 따라하믄 되제.”
몽룡이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방자가 한 말씀 거들었것다.

“손은 그라믄 되았고, 입으로 소원을 빌믄서 돌믄 되우.”
“춘향이 만나게 해달라고?”“그보다 먼저 과거 급제 해달라고 해야지라.”
“나는 춘향이가 더 급해!” “맘대로 허슈.”
사람들은 아무 소리 없이 탑을 한 바퀴 두 바퀴 돌다가 삼현육각 잡힌 풍악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일제히 염불을 외기 시작하는구나.

나무아미타부울관세음보사알 / 도세도세백팔번뇌랑벗어나게
탑을따라백팔번맞춰돌아보세 / 한번돌고나면다리병없어지고
두번돌고나면무병장수팔십에 / 세번돌고나면극락왕생이라네
백팔번돌고나면온갖근심없네 / 탑돌고나면부처님가피입으니
도세도세탑따라밤새도록도세 / 나무아미타부울관세음보사알

몽룡은 사람들이 외는 주문 같은 염불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앞사람도 여자, 뒷사람도 여자
였으니 그럴 수밖에. 그저 여자들 치맛자락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머릿속으론 오로지 춘향이
가 나타나기만을 빌고 또 빌 뿐.

춘향아어서와라나비되어꽃보러왔다 / 벌써물이차서기러기가와서기다린다
칠월칠석딱맞추어견우되어내가왔다 / 오작교있든없든직녀되어어서나와라
몇바퀴돌고나니머리까지돌지경이다 / 그러니더숨지말고어서나와짝이되자
몽룡이 중얼중얼하는 바로 그 순간 방자가 몽룡이 옷깃을 급히 잡아끌었것다.

“왔슈!”
“저,엉,마,알?”
몽룡은 믿어지지 않아 더듬거렸다. 사람들이 탑을 돌고 나면 부처님 가피 입는다고 외더니,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바람을 부처님이 들어 주었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드디어 만복이 다 이루어
지는 것이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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