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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함께 5. 남녀 십육 세 지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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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7 21:47 조회 7,64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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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가 춘향이와 향단이를 발견하고 몽룡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몽룡은 좋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구나. 방자는 몽룡을 연방죽 가에 데려가 세워 놓고 물 찬 제비처럼 벌써 두 계집에게 가서 수작을 부렸것다.

“오래 기다렸구만 인자 오는 것이여?”
방자 말에 아무 대꾸 없이 향단은 막바로 몽룡부터 찾았다.
“새끼 사또는 어디 있댜?”
“새끼 사또가 뭐냐? 우리 되련님한티.”
“음마마! 이 머시마 하는 말 좀 봐라잉. 내가 그 도령이 누군지 알기나 허겄냐? 지가 저번 날 새끼 사또라고 했음시롱.”
“으흠, 향단아 너 뭔 말을 고로코롬 하냐? 말투를 쪼깐 보드랍게 해야 쓰겄다.”
“내 말이 어때서?”

“자고로 관아살이 지대로 할라믄 말 뽄새부터 보드라워……, 잉, 내가 시방 뭔 말을 하고 있댜.”
“나는 고두쇠 너처럼 관아살이 할 일 없은께 신경 꺼라잉.”
방자와 향단이의 수작이 길어지자 춘향이 더 못 참고 끼어드는구나.
“니들 둘은 만나기만 하믄 사랑 싸움하는 것이여, 뭐여? 사람 옆에 놔두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셈이여?”
“맞어. 내 정신 잠 봐. 시방 우리 되련님이 쩌그 연방죽에서 기다리고 있단께.”
춘향이가 샐쭉 토라진 투로 대꾸했것다.

“꽃은 여그 있는데 나비는 어디서 뭘 허는 것이여?”
“니가 꽃이 어쩌구 물이 어쩌구 했잖이여. 연방죽이 딱 꽃 피고 물 있는 디잖이여.”
“그 도령, 쉬운 말도 참 어렵게 알아묵는구만.”
“나비가 쪼깐 덜 된 애벌레라서 그랴. 다른 디 가지 말고 여그 있어라잉. 내 얼른 가서 되련님 모시고 올게.”
방자는 부리나케 몽룡이 있는 연방죽 쪽으로 뛰어갔것다. 몽룡은 몽룡대로 볼이 잔뜩 부은 채 방자를 보자마자 골을 냈것다.
“춘향이를 만들고 있었느냐?”

“아따, 고새 또 토라졌구만. 춘향이를 만들라믄 늙은 월매하고 배를 맞춰야 되는디, 나는 그런 밑지는 장사 안 허우. 난 아직 팔팔한 씹팔 세유.”
“미치겠네.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날 따돌려 놓고 너만 재미 본 거 아니냐고?”
“아따 누가 따돌렸다고 그래유? 다 일이 되게 할란께 미리 자락 좀 펼쳐서 까느라 그랬구만.”
“자락 펴서 까는데 뭔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려?”

“뎬장, 넨장! 그라믄 인사치레할 틈도 없이 일이 진행되는 줄 아슈? 치사는 못할망정 이게 뭐유? 나는 가볼란께 인자부턴 되련님이 알아서 해보슈.”
방자가 짐짓 심술을 부리자 몽룡은 다시 매달릴 수밖에.
“내가 방자 형님 없이 어떻게 혼자 해보냐? 골내지 말고 같이 가자.”
“진작에 고렇게 나와야제. 자, 갑시다!”

방자와 몽룡은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춘향이와 향단이는 절 마당 한쪽의 돌로 깎은 장승 모양의 석인상이 있는 곳에서 둘을 기다리고 있었것다. 춘향이는 잠깐 벗었던 장옷을 다시 뒤집어썼다. 남원 고을 높디높은 사또 자제 이몽룡에 대한 소문이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정작 얼굴을 맞대고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벌렁거리는 건 어쩔 수 없구나.
“향단아, 고두쇠 안 보이냐?”
향단이가 목을 빼고 살펴보았것다. 어둠 속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 이가 고두쇠 같았다. 옆엔 사또 자제 이도령이 붙어 있는 것 같은데, 고두쇠보다 키가 더 커보였다.

“아가씨! 오고 있어유.”
장옷을 뒤집어쓴 춘향이는 그 소리에 몸을 돌려 담벼락 쪽을 마주했것다. 아무리 견우 직녀 만나는 칠석날이라지만 남녀가 유별한 건 분명한 일이렷다.
방자는 몽룡을 데리고 춘향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몽룡은 긴장하고 있는지 걸음걸이가 뻣뻣해 보였다. 방자가 그런 몽룡을 놀린다.

“시도 때도 없이 춘향이 타령하더니 막상 춘향이를 볼라고 헌께 겁나요?”
“겁나긴…….”
“근디 뭣땀시 풀 먹인 광목맨치로 뻣뻣하다요?”
“이런 일 처음이라서 그러지.”
“그렇게 학수고대허드만 별일이네.”

“문자 쓰지 마라. 내가 언제 학 모가지처럼 길게 빼고 기다렸단 말이냐?”
“인자 딴 소리 하는 것 봐. 이 방자 형님 닦달 댈 때는 언제고……. 그라고 나도 명색이 책방 방잔디 문자 쪼깐 쓰기로서니 뭐가 잘못이유?”
“암튼 잔말 말고 춘향이부터 찾아 보아라.”
“이미 찾아서 쩌그다 세워 놓고 왔는디 또 찾을 것 뭐 있다요.”
드디어 넷이 만나는 순간이로다. 어슴푸레한 달빛이지만 연등불이 있어 거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라 청춘남녀 넷은 어렵지 않게 접선했것다. 몽룡은 조금 전과는 달리 아주 당당하게 양반집 도령 티를 내는구나.

“나는 몽룡이라 하는데, 누가 춘향인고?”
묻는 품을 보니 관아 동헌에서 아랫것들 내려다보며 잔뜩 위엄을 보이는 사또 꼴로, 새끼 사또라 할 만한, 딱 그 짝이렷다.
“내가 춘향인디 무슨 일로 날 보자 했소?”
춘향이가 장옷으로 얼굴을 더 가리며 바로 맞받아쳤것다.
몽룡이 춘향이 낸 수수께끼를 들어 대꾸했다.
“꽃 있으면 나비가 찾는 게 땅의 이치이고, 물 있으면 기러기 날아오는 게 하늘의 이치이렷다.”
이 대목에서 방자가 가만 있겠는가.

“아니, 언제까정 꽃 타령 물 소리만 하고 있을 거여? 밤은 짧고 갈 길은 먼디 말이여. 후딱후딱 본론으로 들어가더라고잉.”
방자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짐짓 큰소리를 낸 뒤 향단이 손목을 잡아끌고 자리를 피해준다.
“얘, 방자야!”
몽룡이 급히 방자를 부르지만 방자는 이미 사람들 무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 버리는구나. 둘만 남은 몽룡과 춘향은 바야흐로 탐색전에 들어갔것다.
“얘, 춘향아, 내가 너를 보기까지 얼마나 오매불망했는지 아느냐?”
“내가 그 속을 어떻게 알겄소.”

“한양에까지 네 명성이 자자하여 내 이생에 기어코 너를 보고서야 다른 일을 하리라 일찌감치 다짐하였느니라. 그래서 칠석날을 맞이하여 직녀를 만나는 견우의 심정으로 나왔느니라.”
“남원 고을 하찮은 소녀가 어찌 그 먼 한양에까지 알려졌단 말이우?”
춘향이 싫지 않은 음색으로 답하는구나.

“꽃이 향기가 너무 진하고 물이 넘쳐난 까닭 아니겠느냐.”
몽룡이 춘향이 쪽으로 바짝 다가갔것다. 춘향이 움찔하는 성싶더니 그대로 있구나. 춘향이 몸에서 풍기는 분내가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얼마나 맡고 싶던 내음인가. 몽룡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허벅지를 살짝 꼬집어 보았다. 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게 웬 만복인가, 축복인가.

“춘향아, 네 얼굴 좀 보게 장옷 좀 내려 보아라.”
“이 어두운 디서 뭘 보시겠다고 그러세유.”
“연등 불빛이 과히 어둡지 않구나.”
몽룡이 춘향이 쓰고 있는 장옷을 벗기려 들자 춘향이 스스로 장옷을 내린다.
“아!”

몽룡이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오는구나.
“과연 듣던 그대로 미인이구나! 화첩 그림 속의 미인이 살아 밖으로 걸어 나온들 춘향이 너만 하겠느냐!”
“과분한 말씀이옵니다.”
춘향이 짐짓 겸손한 말투로 자세를 낮추자 몽룡은 더욱 몸이 달아오르는구나.
“아니다, 내 평생 너 같은 미인은 첨 보는 바이다. 명성이 헛소문이 아니었고, 내 마음이 끌린 게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도다.”

몽룡은 기껏 열여섯 해를 산 자신이 평생 어쩌고저쩌고 한 게 쑥스러웠다. 그러나 무슨 말이든 춘향이를 칭송하는 말이면 마구 하고 싶어지는 걸 어쩌나. 자신의 입담이 달리는 게 한스러울 뿐이렷다. 이런 때는 멋진 시 한 수가 저절로 나와 주어야 하는데 머리가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게 다 공부 안 한 탓이렷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송팔대가 시문은 놔두고 선배 한량들 시조라도 착실히 읽어둘 걸.
“춘향아, 우리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디 가서 편히 얘기 나누자꾸나.”
“여긴 절간이라서 따로 갈 만한 곳이 없사옵니다.”
춘향은 저절로 공손해지는 자신의 말투에 스스로 놀랐다. 참 별일이었다.

“절에 가서도 눈치만 빠르면 새우젓도 얻어먹는다고 했는데, 아무러면 우리 둘이 가 있을 만한 데가 없겠느냐?”
몽룡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만복사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눈치 빠르게 뭘 하고 말 것도 없었다. 이런 때엔 자칭 눈치코치 19단인 방자가 있어야 하는데 방자는 향단이랑 벌써 사라지고 없다. 몽룡은 방자가 향단이 손목을 잡고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방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여기다 두고 저만 재미 보러 가 버리면 어떡해…….’
몽룡은 속으로 투덜거려 보았지만 기실 방자는 자리를 피해 준 것이어서 대놓고 원망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방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서서 이러고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무언가 춘향이에게 말을 걸어 쑥스러움을 없애고 사랑의 진도도 나가야 할 터였다. 몽룡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 턱을 당긴 채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어떡하든 오늘 저녁 춘향이하고 가까워져야 하리라. 그래도 명색이 사내 아닌가. 사내 대장부로서 일생일대 가장 긴요한 일을 만났는데 그냥 물러나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생각해 보니 춘향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방자가 구체적으로 가르쳐준 게 없는 것이었다. 자신도 그저 춘향이를 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지 깊이 알아본 것도 없었으니.

“얘, 춘향아, 방자하곤 소꿉동무라면서?”
기껏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란 게 이런 싱거운 소리였다.
“어려서부터 이웃에서 사는지라 늘 어울려 지냈지유.”
몽룡은 목욕할 때 방자가 망을 봐줬다는 말이 떠올라 확인하고 싶었으나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빙 에둘러 말을 해본다.

“어렸을 땐 뭐하고 놀았더냐?”
“글쎄, 인자 기억도 잘 나지 않는구먼유. 남녀칠세부동석이라 점차 자라면서 내외를 했은께유.”
“그렇지. 남녀칠세면 벌써 부동석해야지. 근데 지금 몇 살 되었느냐?”
“이팔에 십육으로 꽉 찬 이팔청춘 열여섯이우.”
“어, 그래? 나는 사사십육으로 버릴 것 하나 없는 십육 세인데!”
몽룡은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이 발끈 쥐어지며 기운이 막 솟는 것 같았다.

“천생연분이로고! 그럼 태어난 일시는 어떻게 되느냐?”
“부처님 태어난 사월 초파일 한밤입니다.”
“그래? 그것 참 요상하구나. 나는 사월 초파일 저녁상 물린 바로 뒤인데!”
“그럼 도련님과 제가 한날 비슷한 시간에 태어난 것이우?”

“그렇지, 그렇지.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만난 오늘도 바로 사월 초파일 버금가는 절 명절 아니냐. 게다가 견우 직녀처럼 우리가 만났으니 이런 걸 하늘이 낸 인연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 이르겠느냐? 우리 어머니가 날 잉태하실 적에 우리 아버지가 한 무릎만 뒤로 더 물렀거나 네 어머니가 너 잉태하실 적에 너의 아버지가 한 무릎만 바짝 더 앞으로 당기셨으면 우리는 태어난 시도 같을 뻔했구나!”

“어찌 그런 것까지 계산을……. 그래도 다행입니다. 제가 도련님보다 조금 뒤에 태어났으니까요.”
“그렇지, 그렇지! 같은 시에 태어난 것보다 잠깐 사이를 두고 연이어 태어났으니, 날 따라 네가 세상에 왔구나! 날 만나기 위해 네가 하늘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왔어!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구나!”
몽룡은 너무나 좋아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태세였다.



“좋다, 좋아! 동갑에 한날 한 밤에 연달아 태어난 너와 내가 하늘이 맺어준 배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우린 아마도 전생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경우가 있겠느냐?”
몽룡이 지금까지 머뭇거리던 자세에서 벗어나 춘향이 손을 덥석 쥐었것다. 춘향이는 온몸이 짜르르하며 벼락 맞은 대추나무마냥 온몸에서 순식간에 진액이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으니, 이 무슨 조화 속인고.

“얘, 춘향아! 내가 너를 만나려고 아버지가 남원 고을 부사로 오게 되었나보다. 더구나 책방 방자로 네 소꿉동무 고두쇠가 들어와 나랑 너를 이렇게 연결까지 시켜주니 이게 다 예삿일이 아니구나. 이게 삼생의 인연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몽룡은 신이 나서 마구 떠들어댔다. 춘향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몽룡과 인연은 인연인 것 같은데 철들고 난 뒤 이렇게 사내와 단 둘이 있어 본 적이 없어 얼떨떨하기만 했다. 소꿉동무 고두쇠하고도 향단이 없인 따로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처음 본 몽룡은 자기 손을 쥐고서 좋아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춘향이가 슬며시 손을 뺐다. 몽룡이 잠깐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손을 쥐었다.

“남녀 칠 세엔 부동석이지만 남녀 십육 세면 지남철이라, 처녀총각 제 짝 찾아 만나면 저절로 붙게 되어 있느니라. 너도 시경을 읽어 알겠지만 물새는 암컷 수컷 서로 불러 짝을 지어 물가에서 놀고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라 했다. 이제 드디어 평생 그리던 내 짝을 만났구나. 더구나 우리는 삼생의 인연으로 만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려므나…….”

몽룡은 춘향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춘향은 뭔가에 홀린 듯했지만 제 스스로는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아 손을 몽룡에게 맡긴 채 엉거주춤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춘향은 몽롱한 채 그대로 있고, 몽룡은 먹잇감을 보고 입 터진 제비 새끼들 지져대듯이 마구 재잘거렸것다.
“춘향아, 오늘 우리가 드디어 만나 상견례를 하였으니 내일 또 만나 맷돌처럼 아주 한 짝이 되자꾸나. 오늘은 사람들 이목도 있고, 마땅한 자리도 찾기 어려우니 내일 내가 너의 집으로 가마.”
춘향이 움찔했다. 몽룡이 진도를 마구 빼는 것 같아서였다.

“그건 좀 어렵겠습니다. 과년한 처자 집에 점잖으신 사또 자제께서 왕림하시면 좋지 않은 소문이 나유.”
“그건 걱정 마라. 방자하고 같이 다니면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춘향은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입 밖에 나오지를 않았다. 연등 불빛 아래 드러난 몽룡은 이목구비 수려하고 키도 길고, 미끄러운 한양 도령이 싫을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남원 땅을 다스리는 사또의 자제가 아닌가. 하지만 이럴 땐 어찌해야 하는지 정말이지 잘 모르겠다. 자신만 남겨 놓고 사라진 고두쇠와 향단이가 은근슬쩍 고맙기까지 했다.

향단이 손목을 잡고 사라진 방자는 향단이와 함께 절 뒤켠에 있는 요사채 곁의 우물가로 갔다. 방자는 석탑 앞을 지날 때 만복사 부처님과 윷놀이 비슷한 내기를 해서 탑돌이 하고 있는 귀신 처녀일망정 색시감을 얻어냈다는 양생이라는 총각이 떠올랐다. 부처님은 없는 색시도 만들어 주는데 자신은 이미 색시감이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 조만간에 향단이와 결혼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빌면 그만이다. 나중에 색시가 귀신으로 밝혀졌을 때 양생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래도 양생은 지조를 지켜 그 처녀만을 그리며 지리산으로 들어가 평생 홀로 살았다지. 거기에 비하면 향단이는 귀신이 아니어서 생이별을 할 리도 없어 자신 홀로 지리산으로 떠날 일은 없으리.

우물가엔 벌써 여러 남녀가 쌍을 이루어 저마다 다정스레 속삭이고 있었다. 요사채 뜰에 앉아 있는 이들도 있었고 우물가 담에 기대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정월 대보름 밤과 함께 오늘 밤도 청춘 남녀에겐 다시없이 좋은 밤이다. 그간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며 서로 애태우던 것을 떠나 내놓고 만날 수 있는 날이 아닌가. 방자와 향단이는 그들 사이에서 엉거주춤 있다가 다시 법당 뒤쪽으로 갔다. 법당 뒤 섬돌에 걸터앉은 방자가 향단이를 곁에 끌어 앉히며 웃었것다.
“헤헤, 우리가 이러고 여그 떡하니 앉아 있으믄 법당 부처님하고 같은 급으로 앉아 있는 셈이네.”

방자에게 잡힌 손을 슬며시 빼며 향단이가 대꾸했다.
“부처님 보고 계신디 망칙하게…….”
“망칙하긴, 부처님은 우리랑 등 대고 돌아앉아 있은께 보고 계시지 않아. 그라고 만복사 부처님은 총각 소원부터 들어주시거든.”

“너는 양생이 아녀. 부처님이랑 내기 한 것도 없잖아.”
“내기 할 것 뭐 있어. 내가 양생맨치로 색시가 없는 것도 아닌디. 그래서 너랑 빨랑 결혼 날 잡게 해달라고 떼만 쓰믄 그만이여. 근디 가만 있자, 여그 있으믄 사람들이 부처님한티 하는 절을 다 받아 묵는 셈이겄네. 다 우리헌티 절 하는 꼴이잖이여.”
“그건 그려.”

방자는 섬돌 위로 두 발을 다 올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어때? 그럴싸하지?”
“니 그런다고 부처님 안 된께 발 풀어라잉. 개 꼬랑지가 여우 꼬랑지 되는 것 봤어?”
“뎬장 맞을, 향단이 너, 나한티 너무 야박하게 그라지 마라잉. 그려도 우리 되련님은 나를 얼마나 인정하는디.”
“그야, 엉큼한 속셈이 따로 있어 너를 부려 먹을라고 그라겄제.”

“엉큼하긴, 그 나이 되믄 다 불이 나게 되아 있어.”
방자가 말을 마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향단이의 입술을 덮쳤다. 향단이가 휙 고개를 돌렸것다.
“어? 왜 이려? 가만 있어 봐.”
“넘들 보믄 으짤라고 그랴. 넘사스럽게시리.”
“보긴 누가 본다고 그랴. 법당 부처님도 등 돌리고 앉아 있다니께.”

둘은 한참을 그렇게 붙어서 서로의 입술을 탐했것다. 처음엔 두 입술만 달싹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곧 동굴 문이 열리고, 방자의 혓바닥 설舌거사가 재빠르게 향단의 동굴 안으로 밀고 들어갔것다. 향단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지만 방자의 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 주막거리 누런 똥개들이 흘레하듯 오랫동안 붙어 있던 둘은 마침내 입가에 흘린 침을 혀로 핥으며 떨어졌다.

“오메, 징한 놈! 뭔 혓부닥이 그케 힘이 세다냐? 부사리 들이받듯 인정사정없이 마구 디밀믄 어떡해?”
“헤헤, 인자 제대로 알았쟈? 혓부닥 어따 쓰는지?”
“어따 쓰긴……. 그놈의 혓부닥 때문에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잖이여!”
“자고로 혓부닥 공사하다 숨 막혀 죽은 일은 없은께 너는 염려 확 붙들어 매도 될 것이여. 에헴.”
향단이가 주먹으로 가볍게 방자의 가슴을 치는데, 방자는 그제야 몽룡이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렷다.
“그나저나 어린 것들은 시방 뭐하고 있을끄나?”
향단이가 볼멘소리를 낸다.

“뭐하긴? 우리처럼 흘레붙고 있을까봐?”
“그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제. 우리 수준 될라믄 한참 멀었어.”
“그라믄 둘 다 유식하여 문자 속 깊을 틴께 진서로 고상한 말 주고받고 있겄제.”
“쳇, 사랑 놀이 하는디 진서가 뭔 필요여. 그냥 원초적으로다가 본능적으로다가 자연적으로다가 몸뚱이 뻗치는 대로 하믄 되제.”

방자가 팔을 뻗어 향단의 허리를 휘감으려 하자 향단이가 내쳤것다.
“아이구, 징그러워. 그만 혀!”
“징그럽긴, 이런 것 안 하고 어른 되는 사람이 어디 있디야. 넘들도 다 허는 것인께 너무 그라지 말더라고잉.”
“알았어. 알았은께, 인자 가보자잉. 우리 아가씨가 나 찾을지 몰라.”
향단이가 엉덩이를 탈탈 털며 일어서니 방자도 아쉬움 더 어쩌지 못하고 따라 일어날 수밖에.
“근디 얘들은 어디 가서 안 오는 거야.”
춘향이가 어색하기 짝이 없어 고두쇠와 향단이를 들먹이자, 몽룡이는 괜스레 헛기침도 하며 애먼 땅바닥만 발로 비벼댔다. 몽룡도 딱히 할 말이 없어 방자를 찾는다.

“방자 이놈이 어디 갔나?”
춘향이 대답이 맹맹하다.
“탑돌이 끝나고 불공 다 드렸으믄 어서 올 일이제…….”
바로 그때 방자와 향단이가 어기적어기적 다가오는 게 춘향이 눈에 띄었것다.
“저기 오는가 보네유.”
방자와 향단이 여유롭게 다가오는 걸 보니, 몽룡이 괜히 멋쩍고 춘향이 역시 쑥스럽구나. 방자, 몽룡을 보고 툭 한마디 건넨다.

“잘들 놀았슈?”
몽룡은 뒤통수만 긁적이고, 춘향은 장옷을 뒤집어쓴다.
“왜들 이러고 있는 것이유?”
“뭘?”
몽룡이 쑥스럽게 툭 한마디 내뱉었것다.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싸운 것이여?”
“싸우긴…….”

“근디 왜 이런 어색한 그림을 보여준단가?”
“허허, 참새가 어찌 붕새의 속을 알리요.”
“붕새? 붕알새 말이여? 난 그런 새 본 적 없는디, 근디 나보고 시방 참새라 한 것이유?”
“뭘 모르면 너무 짹짹거리지 말란 뜻이로다.”
“음마? 되련님이 으째서 갑자기 어른 흉내를 내고 그랴?”
“알았어. 알았은께 나중에 얘기하자.”
몽룡은 앞장서 절 마당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절 마당은 여전히 북적댔다.

“어디로 가는 거유?”
“어디긴? 관아로 가야지.”
“벌써유?”
“너무 늦기 전에 들어가야 내일 또 나오지.”
“내일 바깥 나들이를 또 한다고라? 견우 직녀는 내년 칠석날이 되어야 다시 만나는디…….”
방자, 잠시 발이 뒤엉켜 휘청거리는구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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