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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함께 6. 새끼 사또가 방자 모시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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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4 18:33 조회 8,07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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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에서 춘향이를 만나고 온 몽룡은 몸과 마음 모두 흥분 상태에 빠져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것다. 그도 그럴 것이 춘향이의 미모가 소문보다 훨씬 더 뛰어난 데다,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춘향이가 자신을 내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없지 않았는데 춘향이도 자신이 싫지 않은 것 같았다. 더구나 춘향이의 부드러우면서도 당찬 말투는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하였것다. 세상에 태어나 이런 황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게 다 복을 잘 타고난 까닭이리라. 마침 아버지가 남원 부사로 내려오게 되고, 춘향이 소꿉친구인 고두쇠가 책방 방자로 들어온 것 모두 예삿일이 아니리. 나중에 한양 동무들이 알게 되면 시샘이 나서 죽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통쾌하고 가슴이 벌떡거렸다. 어떡하든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을 자야 되는데 너무 좋아 잠이 싹 달아나버렸것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방자가 세숫물을 대령해 놓고 깨우는구나.
“되련님! 해가 시방 하늘 한가운디를 다 차지하고 있소. 빨랑 일어나 세수하슈.”
몽룡이 자리에서 미적거리다 가까스로 일어나 눈을 비비며 방을 나서자 방자가 미운 소리를 한다.
“밤에 잠 안 자고 뭐 했길래 눈이 토끼 눈맨치로 뻘거유?”

“방자 왈, 방자 가로되, 방자 가라사대, 두루두루 열심히 읊느라 도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인자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도 상당허게 하네유. 방자 왈은 무슨……. 춘향이 분내에 취해서 잠을 못 잤구만유.”
몽룡이는 춘향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것다.

“우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이 몸이 나이 헛 묵은 줄 아시유? 건너다 보믄 절터고 내려다 보믄 집터유. 괜시리 눈치코치 씹구 단인 줄 아시우?”
몽룡은 방자 입에서 때때로 터져나오는 ‘눈치 코치 씹구 단’이라는 말이 이제는 무척 정겹고 그럴싸하게 느껴졌것다.
“맞아. 책방 도령 몽룡이 다 인정한다. 방자 형님 눈치 코치는 절간에서도 새우젓 얻어먹을 수 있는 실력이다!”
“아침부터 호들갑 그만 떨고 세수부터 허슈.”

“참 나, 이젠 치켜주어도 지청구네.”
방자는 속으로 씁쓸했다. 춘향이가 자기한텐 데면데면하다 못해 어느 순간 쌀쌀맞기까지 하더몽룡에겐 어찌 했기에 이리 좋아하나.
“춘향이 만나고 온 것이 그케 좋슈?”
“좋지! 근데 너는 안 좋냐?”
“내가 좋을 게 뭐 있겄수?”

“하긴……. 춘향이가 방자 너보단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방자가 픽 웃었다. 이 어린 도령이 별 생각을 다 하고 있구만. 방자, 씁쓸하지만 짐짓 능청을 아니 떨 수가 없구나.
“아직 젖비린내 나는 춘향이 같은 애는 난 흥미 없슈.”
“그렇지? 넌 춘향이한텐 흥미 없지? 내가 보니 향단이가 너한텐 훨씬 더 어울려!”
“생각은 되련님 자유인께 맘대로 생각하슈.”

방자가 세수 끝낸 몽룡에게 수건을 건넨다. 몽룡은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면서도 싱글벙글이다. 방자는 몽룡이 좋아하는 티를 내면 낼수록 속이 상했것다. 멱 감을 때 슬쩍슬쩍 본 춘향이 알몸이 눈앞에 삼삼하게 그려진 탓이었다.
‘고것이 결국 몽룡이가 더 좋다 이 말이제. 으이구 속 터져!’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하인이고 몽룡은 주인이다. 그것도 남원 고을에선 제일 윗자리에 있는 사또의 아들이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애초에 쳐다보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춘향이같이 얼굴 잘나고 글 잘하는 애를 어찌 쳐다본단 말인가.
 
언감생심이다. 그간 소꿉동무로 지낸 것만도 복이라면 복이렷다. 남원 고을에서 그 누가 자신처럼 춘향이와 가까이 지낼 수 있었겠는가. 춘향이와 살 비비며 본격적으로 뒤엉켜보진 못했지만 자신만큼 춘향이 몸을 잘 아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그래도 향단이하곤 확실히 매듭을 지어 놓지 않았는가. 향단이도 그만하면 자신에겐 과분하다. 얼굴도 밉상은 아니고, 성질도 수더분하니 무던하고, 몸피도 넉넉하여 복스럽다. 다만 글 배운 게 없어 진서는커녕 언문조차 한 글자도 모른다.

자신도 진서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겨우 더듬더듬 언문이나 깨득할 정도이다. 어차피 사랑을 문자 속으로 하는가. 몽룡은 자신보다 문자 속이 깊어도 결국 자신의 도움으로 사랑을 찾아 나서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니 문자 속 깊지 않은 향단이와 사랑을 나누는 일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방자는 애써 자신을 다독거렸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그러니 굳이 갈잎을 먹으려 나설 필요가 없다고.
방자 속내야 어떻든 몽룡은 오로지 춘향이 생각뿐이다.

“방자야, 춘향이 집 멀지 않지?”
“십 리는 족히 될 것인디.”
“십 리고 백 리고 오늘 저녁에 갈 수 있는 거지?”
“에헴, 나야 소싯적에 축지법을 배워놔서 하루저녁에 백 리도 갈 수 있제만 책방 되령이 갈 수 있겄소?”
“춘향이 만나러 가는 길은 백 리 아니라 천 리라도 갈 수 있어! 만복사도 걸어갔다가 왔잖아!”

“아이고 두야!”
방자는 몽룡이 하는 꼴이 어이가 좀 없기는 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자신도 향단이와 매듭 지을 때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그리고 저녁마다 얼마나 속을 태웠던가. 몽룡이 사또 자제라는 신분도 잊고 자신 앞에서 가리는 것 없이 구는 것이 한편으론 고맙기도 했다. 그럼에도 두 살이나 더 먹은, 인생의 형으로서, 또 책방 방자로서 어린 도령을 잘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골치가 적잖이 아프기도 했다.

몽룡은 하루 종일 책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전에 없는 일이었다. 중대 거사를 앞두고 웬일인가 싶었다. 방자는 방문을 살짝 열고 들여다보았다. 몽룡이 책상 앞에 붓을 들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되련님 공부 많이 했슈?”
“그럼!”

“근디 오늘은 왜 공자 왈 맹자 왈이 안 튕겨 나온다요? 하다 못해 방자 왈이라도 씨부렁거려야 되잖소.”
“그렇게 왈왈거리는 것들만이 공부가 아니니까 그렇지.”
“그라믄 무신 공부 하고 있는 거유?”
몽룡이 붓을 놓고 책상 뒤로 한 무릎 물러났다.
“어휴, 이제 다 됐다! 이리 들어와서 이것 좀 보아라.”

방자는 책상을 내려다보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가 핑 돌았것다. 책방에서 왈왈거리는 소리가 왜 나지 않는가 했더니, 몽룡이 아침 나절 내내 꼼짝 않고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아니, 여그다 용모파기해 놓은 이가 누구요?”
“헤헤. 누군지 모르겠어?”
“관아에서 급히 잡아들여야 할 죄수라도 있소?”

“아니.”
“고것이 아니믄, 인자 과거 공부는 꾀도 나고 자신도 없은께 그만두고 방향을 틀어 도화서 화원 시험이라도 볼 생각이유?”
“아니.”
“그렇다믄, 심심해서 대여섯 살 먹은 애들처럼 낙서를 해본 것이유?”
“아니.”

“허, 갑자기 애가 되었수? ‘아니’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다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믄 뭣땜시 여그다 이런 상판대기를 그려 놓았소? 다 큰 되령이?”
방자가 콧바람을 씩씩 불어대며 마구 다그치건만 몽룡은 뭐가 좋은지 그저 실실 웃으며 태연자약할 뿐이렷다.
“저녁에 춘향이 잡으러 가려고!”
“엥? 그라믄 이 그림이 시방 춘향이 낯짝이유?”

“딱 보면 춘향이랑 닮지 않았어?” “
춘향이 낯부닥은커녕 뒤꼭지도 안 닮았소.”
몽룡이 입을 삐쭉 내민다.
“네가 그림을 볼 줄 모르는구나!”

“볼 줄 모르긴 뭘 모른다고 그러유. 누가 뭐래도 춘향이는 내가 제일 잘 아는디, 닮은 구석이라곤 눈 씻고 찾아도 없구만유.”
“네가 춘향이를 뭘 잘 알어? 춘향이를 제일 잘 안다는 놈이 이 그림 보고도 춘향이를 몰라봐? 너는 춘향이를 모르는 거야. 춘향이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비슷하게라도 그렸어야 알아보제. 이 그림 보고 누가 춘향이를 떠올리겄소. 난 죄수 잡아들일라고 용모파기해 놓은 줄 알았네.”

“춘향이가 내 죄수다! 나를 사랑에 빠뜨린, 사랑의 죄수!”
“허, 중증이구만!”
“뭔 말이여?”
“고치기 어렵다는 말이우.”
“무얼?”
“되련님 병.”

“내가 뭔 병이 걸렸다고?”
“눈에서 콩깍지 떼어내야 할 병.”
“내 눈에 뭔 콩깍지가 씌었다고?”
“그러지 않고선 이럴 리 없제.”
둘은 그림을 두고 한참을 옥신각신했것다. 그림의 먹물이 마르자 몽룡은 그림을 두 번 세 번 잘 접어 품안에 넣는구나.
“그걸 뭐 품에 넣기까지 허유?”
“춘향이를 잡으러 가야 하니까.”

“춘향이 얼굴은 내가 눈 감고도 알아볼 수 있소.”
“그건 네 사정이고.”
“되련님 사정은 뭔데?”
“이 얼굴 그림에 사랑의 맹서도 적고 내 청춘의 다짐도 달은 뒤 수결까지 놓아 가보로 두고두고 물려줄 테야.”
“춘향이가 싫다면?”

“싫을 리가 있나.”
“춘향이 코가 얼마나 높은디.”
“그래봐야 눈 아래 코다.”
“콧대는 눈퉁이보다 더 튀어나와서 훨씬 더 높은디.”
“맞는 말이야. 그렇게 높은 콧대라서 방자보다는 몽룡이를 택했겠지!”

방자는 더 말리고 자시고 할 필요를 못 느꼈다. 몽룡은 이미 춘향이에게 푹 빠져 무슨 말을 해도 자기 멋대로 끌어댄다. 이럴 땐 상대가 뭐라 하든 아무 소리 말고 대거리를 하지 않는 게 상수이리.

몽룡은 점심을 먹고도 오후 내내 책방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혼자 중얼거리다 낄낄거리다 했것다. 문틈으로 몽룡의 모습을 들여다본 방자는 그때마다 확 문을 열어젖히고 싶었지만 그만 꾹 참았다. 방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몽룡의 머리가 어찌 되지 않았는지 싶었다.

해가 하늘 가운데서 서쪽으로 살짝 기우는가 싶자 몽룡이 방자를 찾았것다.
“방자야, 나갈 준비하자.”
“아직 해가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는디, 나가긴 어딜 나가요?”
“어딜 나가다니? 춘향이 잡으러 가야지.”

“춘향이 잡아 올 거믄 사또 영감 허락 맡으시유.”
“이런 일엔 그 영감 허락 없어도 되잖아.”
“남원 고을 백성을 잡아 올라믄 고을 수령의 명령이 있어야 할 것 아니우?”
“아따 방자 너, 말귀 되게 못 알아듣는다.”

“내가 또 뭔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그러시우? 뜬금없이 죄도 없는 춘향이를 잡으러 간담시로라?”
“사랑의 죄는 당사자끼리 해결하는 것이지 사또가 끼어들 사안이 아니잖아.”
“그렇다 혀도 사또 영감 퇴청이나 해야 관아 밖을 나갈 수 있슈.”
“네 말대로 아직 해가 떨어질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그 영감이 언제 동헌에서 나간단 말이냐.”

“시간이 약인께 쪼깐 기다려보슈.”
“방자 네가 어떻게 좀 해보면 안 될까?”
“내가 뭘 해봐유? 해를? 사또 영감을?”
“우리 둘이 관아를 슬쩍 벗어나는 것 말이야.”

“그건 기다려야 된단께요.”
“방자 네가 궁리하면 다 방법 있잖아.”
“나라고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겄소?”
“나 참, 방자 너 맘에 들었다 안 들었다 해.”
“사돈 넘 말하고 있네유. 나는 아닌 줄 아슈? 나도 하루에도 몇 번씩 되련님이 맘에 들었다 안 들었다 허구만유.”

몸이 일단 달아오르자 몽룡은 계속 방자를 채근했것다.
“해 어디쯤 떨어졌느냐?”
“하늘 한가운데서 한 뼘 가웃 아래로 내려온 뒤로 꼼짝도 않고 있소.”
“그 해 몹시 나쁘다. 방자야 동헌에 불 꺼졌느냐?”
“아직 불 켜지도 않았수.”

“그 영감 참 나쁘다. 빨리 불 켰다 꺼야 할 것 아니냐!”
“날이 어두워져야 불을 켜든 말든 하지유.”
“방자야, 해 제 집으로 들어갔느냐?”
“오도가도 않고 있소. 해 지려면 아직 당당 멀었수.”
“방자야, 동헌에 불 꺼졌느냐?”
“꺼지긴요. 인자 막 켰슈.”

“그럼 그 영감 퇴청했느냐?”
“일이 끝나야 퇴청하지유.”
“네가 어떻게 좀 해보지?”
“내가 사또유? 뭘 어떻게 해봐유?”
“사또 하는 일 어렵지 않다. 도장만 쾅쾅 박으면 되느니라.”
“그리 쉬우믄 되련님이 가서 하슈.”

몽룡은 방자를 붙들고 실없는 수작을 한참이나 계속 하는구나.
마침내 어둠이 관아에 가득 찼다. 몽룡은 동헌에 불 꺼지고 아버지가 퇴청하기만을 기다렸것다. 오늘따라 사또는 빨리 물러가지 않으니 몽룡은 애가 달아 죽을 지경이로다.

“다른 집 노인들은 일찌감치 집에 들어가 코 골고 뻗는데 우리 집 영감은 왜 집에도 빨리 안 들어가는 것이냐.”
몽룡이야 애가 달든 말든 방자는 시큰둥하다.
“그야 고을 일이 막중하야 쉽게 손이 털어지지 않아서일 테지요.”
“자기 아들 병 난 사정도 모르는 사또가 고을 일은 뭘 얼마나 잘 알겠느냐.”

“아들 병이야 머리 검은 짐승이믄 다 한 번은 걸리는 것인께 굳이 사또 영감이 나서서 돌볼 것까지야 뭐 있겄소.”
“방자 너는 도대체 누구 편이냐?”
“편은 무슨……. 말인즉슨 그렇다 이 말씀이지유.”
“방자야.”
“예, 되련님.”
“웬일로 그리 순하냐?”

“뎬장 넨장, 새삼 왜 그러시우? 방자 이 사람은 항상 순합니다요.”
“그래? 동헌에 불 꺼졌느냐?”
다시 몽룡의 실없는 수작이 시작되는구나. 방자는 은근히 짜증이 인다.
“되련님이 직접 가서 보고 오슈. 방자 다리 병 나게 생겼슈.”
“그러니까 사또 영감 빨리 퇴청 시키라니까!”
“허참, 내가 안 시키나유?”

방자, 검지를 머리에 대고 빙빙 돌린다. 몽룡이 얼른 알아차리고 손을 내젓는다.
“나, 머리 안 돌았다.”
“근디 뭔 소리를 고로코롬 앞뒤 없이 하시유?”
“몰라서 묻느냐? 춘향이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냐.”
그때 마침 사또 퇴청을 알리는 소리가 길게 났것다.
“하인들 물리랍신다~~.”

몽룡이 좋아라 박수를 쳤것다.
“이제야 영감이 물러가는가보다!”
이윽고 동헌에 불이 꺼졌것다. 드디어 몽룡이와 방자의 활동 시간이 된 것이렷다. 어차피 때마다 허락을 맡고 나들이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번부턴 둘이 알아서 눈치껏 바깥나들이를 해야 한다.

“방자야, 오늘은 또 어디 가느냐?”
관아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방자를 보자마자 가로막았것다.
“아따, 형님, 오늘도 변함없이 고생 많으시우. 되련님 모시고 밤 마실 쪼깐 댕겨올라유.”
문지기, 방자 뒤를 따라오는 몽룡을 보고 놀란다.
“누구랑 간다고? 어이쿠, 도련님, 안녕하시유?”
“나는 안녕하네만, 자네가 고생이 많네.”
몽룡이 아무리 지렁이 토룡 태몽으로 세상에 나온 인물이지만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가락이 있어 꾸물거리지 않고 제법 상전 티를 냈것다.

“형님, 이따 쪼깐 늦더라도 이해해줘유. 안에서 찾으믄 바람 쪼깐 쐬고 온다 했다구 말씀 드리고유.”
방자는 엽전 한 닢을 얼른 문지기 손에 쥐어주며 관아 문을 나섰다.
“뭐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디……. 도련님, 그라믄 마실 잘 댕겨오세유. 오늘 파수는 제가 말뚝으로 보니께 아무 걱정 마시고유.”

방자는 몽룡을 데리고 관아 담을 지나 주막거리를 지나 저잣거리로 나섰다가 다시 저잣거리로 주막거리로 빙빙 돌았것다.
“춘향이 집이 이렇게 멀어?”
“십 리는 족히 된다고 말했잖이유.”



“춘향이 만나면 어떻게 해야 돼?”
“어떡하긴 어떡해유? 단도직입적으로다가 막바로 밀고 들어가세유.”
“어떻게? 어떻게 밀고 들어가? 이런저런 말부터 해야 할 것 아니냐.”

“그간 씹육 세라고 무던히도 재더만 그나마 나이 헛 묵었구만. 계집이랑 어떻게 해야 하는 것까지 내가 갈쳐줘야 쓰겄수? 사랑은 말로 허는 것이 아니유. 더구나 진서 써가믄서 혓부닥으로 유식헌 소리 허들 말고 몸으로 허슈. 몸으로!”
“몸으로 하란 말이지? 근데 혀도 몸이잖아? 혀로 먼저 하는 것 아녀?”
“되련님! 참말로 맹구짱구같이 굴 거유? 혀 갖고 말만 씨부렁거리지 말고 쓸 데다 제대로 써보시우. 사랑은 혓부닥에서 시작헌께!”

“혀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지? 옳거니! 알았다, 알았어!”
“하여튼 춘향이가 진서 문자 써감시롱 유식헌 소리 씨부렁거리더라도 거기 말려들지 말고 되련님은 몸이 하자는 대로 해보슈. 그게 진도 빼는 데엔 최곤께!”
몽룡은 벌써 몸이 찌릿찌릿하였것다.

마침내 방자는 몽룡을 데리고 이 골목 저 골목 이 거리 저 거리를 마구 휘젓고 다닌 뒤 다시 주막거리가 있는 데로 돌아왔다. 몽룡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아직 멀었느냐고 자꾸만 보챘것다.
춘향이 집은 주막거리에 있긴 했지만 주막등은 내걸려 있지 않았다. 그건 이미 오래 전에 춘향이 어머니 월매가 주막 일을 접은 까닭에 여염집 그대로였다.

춘향이 집 앞에 서자 방자는 아주 익숙하게 대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것다. 두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하나는 월매 방이고 하나는 춘향이 방이렷다. 춘향이 방에는 향단이도 같이 있을 것이다.
인기척이 나자 개가 컹컹 짖어댔다.
“야, 이놈의 똥개야! 나 고두쇠야, 인마. 너는 아무리 오랜만에 본다고 나를 몰라보고 이러코롬 짖는 것이여?”
방자가 개 옆구리를 발로 걷어차자 개가 깨갱 소리를 냈다. 바로 그 소리와 함께 안방 문이 열리며 춘향의 어머니 월매가 밖을 살폈것다.

“노랑아! 왜 그런디야? 엉? 저 시커먼 것이 뭐여? 거기 혹시 밤손님이시유?”
방자가 성큼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했것다.
“밤에 왔은께 밤손님인 건 맞수. 아줌니, 그간 안녕하셨슈?”
“누구여?”
“저유, 고두쇠유.”

“고두쇠가 이 밤중에 뭔 일이다냐? 시방 책방 방자로 들어가 있는 것 아녀?”
“맞아유. 근디 춘향이랑 약속이 있어 찾아왔어유.”
“니가 우리 춘향이랑? 향단이가 아니고?”
그때까지 몽룡은 방자 등 뒤에 서서 두 사람의 수작만 지켜볼 뿐이었다. 밖이 소란하자 춘향이 방에서 향단이가 나왔것다.
“마님, 무슨 일이다요?”

“고두쇠가 찾아왔어야.”
“혼자유?”
“고두쇠 등 뒤에도 시커먼 놈이 한나 더 있는 것 같은디……. 멍석을 말아 지고 온 것 같기도 허고…….”
월매와 향단은 고개를 길게 빼어 방자 뒤를 살폈것다.
“오메! 마님, 새끼 사또가 같이 왔구만유!”

“뭐? 뭣이라고? 사또 새끼가 같이 왔다고?”
“사또 새끼가 아니라 새끼 사또, 아니 사또 자제 도련님이 왔다고유!”
향단이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새 월매는 버선발로 뛰어내려와 마당으로 달렸것다.
몽룡도 이제는 더 가만 있을 수가 없어 앞으로 나서 점잖게 물었으니.
“춘향이 모친 되시는가?”

“그라요만, 도련님이 어찌 이 누추한 집엘 다 오시고…….”
몽룡은 제법 의젓한 티를 냈것다.
“춘향이와 약속한 게 있어 잠깐 들렀네.”

월매, 당황하여 춘향이 방을 보고 소리쳐 부르는디 말이 뒤엉켜 앞뒤가 없구나.
“춘향아! 새끼 사또가 방자 모시고 왔다. 얼른 문 닫고 나와 보그라!”
춘향이, 개떡 같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버선발로 뛰쳐나오는구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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