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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함께 9. 사랑은 눈물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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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27 22:31 조회 6,67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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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몽룡이와 춘향이 둘은 갈수록 사랑놀이의 기술이 늘어 이젠 거의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
으니, 때는 여름 가고 가을바람에 오동나무 잎이 서걱거리며 뜰을 쓸고 다니는 참이렷다.

몽룡의 거동 보니 밤마다 춘향이 집에서 외박한 뒤 새벽에 이슬 맞고 돌아오는 밤손님이 따로
없었것다. 하지만 얻은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사랑에 취한 건 좋은데 도대체 공부를 할 수
없어 마음은 초조하고, 게다가 밤마다 합을 이룬 까닭에 얼굴은 수척하여 반쪽이 되었것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공부에 너무 전념하여 몸을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과거가 무언지……. 이러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잡겠다. 몽룡아, 쉬어가면서 공부하고 한약
달인 것 열심히 먹도록 해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느니라. 공부도 몸이 있고 나서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느냐.”

어머니가 몸 생각을 해줄 때마다 몽룡은 속으로 뜨끔했다. 그러나 어찌 표를 낼 수 있으랴.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약은 잘 먹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요강물에 빠져 죽은 사람
은 있어도 공부에 빠져 죽은 사람은 없답니다. 차라리 공부하다 죽으면 가문과 저의 영광이지요.”
그 말을 하는 내내 몽룡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죽을 만큼, 몸이 축날 만큼 공부에 빠졌다면 덜
부끄럽겠지만, 자신은 지금 춘향이에 빠져 있다. 예로부터 사랑에 빠져 죽은 사람은 부지기수이
다. 자신도 이제 그 대열에 들어섰다. 사랑을 하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춘향과 몽룡 두 청춘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정은 더욱 깊어지고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 초조 상태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 밤 역시 몽룡은 춘향이 방에서 젊은 정을 맘껏 나누고 있는 참이
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방자가 몽룡을 급히 찾았것다.

“되련님! 사또 영감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왜 그러신다냐?”
“내가 그 속을 어찌 알겠습니까? 어서 들어가 보슈.”
“뭐 짐작 되는 일 없느냐?”
“한양에서 연락관이 와서 관아가 발칵 뒤집힌 것 같은디 나 같은 놈이 무슨 일인지 으찌께 알
겄슈.”

“방자 왈, 방자가 눈치코치 십구 단이라던데 아직 그걸 파악 못했단 말이냐?”
이 대목에서 방자가 가만 있겠는가.
“짐작 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니지유.”

“뭔데?”
몽룡의 눈이 빛났것다.
방자는 태연하다.

“아, 사또 자제가 도둑장가 든 게 한양까지 소문이 났는갑쥬.”
“미친 놈! 내가 무슨 도둑장가를 들었다고 그래? 널리 알릴 수 없어 구메혼인을 한 것뿐이지.”
“업어치나 메치나, 똥이나 변이나, 다 그게 그거 아니겄수.”
“암튼, 한양에서 연락관이 오는데 나를 왜 찾는다냐…….”
“시방 이바구질 할 시간 없어유. 빨랑 들어가서 직접 알아보란께유.”

몽룡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춘향이 집을 나와 동헌으로 가 아버지를 만났다. 부른 지가
한참 되어, 책방에서 동헌까지 열 번도 더 왔다갔다 하고도 넘칠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야 아들이
나타나자 노여움이 얼굴 가득했것다.
“이놈아, 아비가 찾으면 후딱 달려와야지, 어딜 쏘다니다 이제야 나타나느냐? 집안에 경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여태껏 뭐했느냐?”
“광한루에 밤바람 좀 쐬러 나갔습니다.”

“광한루가 네 외갓집이라도 된단 말이냐? 이 밤에 사또 아들놈이 거기서 무슨 볼일이 있다고!”
“공부하다 잠깐 바람 좀 쐰 것뿐입니다. 그런데 무슨 경사가 있습니까? 혹시 어머니가 제 동생
을 보셨습니까?”
“야! 이놈아, 네 어미가 할머니 소리 들을 때가 다 되었는데 무슨 동생 타령이냐? 그런 게 아니
고 아비에게 동부승지를 맡기는 교지가 내려왔다.”

“한양에서요?”
“그렇지. 임금님 곁으로 가는 거지.”
몽룡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비 앞에서 웬 한숨을 그리 길게 쉬는고? 너는 아비가 승진하여 내직으로 들어가는데 기쁘
지 않느냐?”

“저라고 기쁘지 않겠습니까만, 이제 막 글 읽기에 속도가 붙었는데 다시 한양으로 돌아갈 생
각하니 번잡해서 그럽니다.”
“번잡할 것 뭐 있겠느냐. 뒷정리는 내가 하고 나는 며칠 뒤 한양으로 갈 테니까 너는 단출한 차
림으로 식구들과 내일 바로 떠나거라.”
“내일 당장요?”
“그래.”

몽룡은 입이 탁 닫히고 가슴이 막혔다. 하지만 누구 안전인가? 아버지는 관아의 구실아치들
에게만 어려운 존재가 아니라 늦둥이로 외아들인 자신에게도 어려운 존재이다.
몽룡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느낌이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아버지 앞을 물러
나와 어머니에게 갔겄다.

“어머니, 제가 지금 병이 나서 먼길을 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아버지께 잘 말씀 드
려서 며칠 말미를 달라고 하십시오.”
“네 얼굴이 반쪽이 되긴 했다만, 병이 있다는 소린 지금 처음 듣는구나.”
“병도 그냥 병이 아니라 죽을 병입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알아먹게 해봐라.”

몽룡은 울면서 춘향이와 있었던 일을 자초지종 자세히 이르지 않을 수 없었것다. 몽룡의 얘기
를 다 듣고 난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분을 터뜨린다.
“나는 네가 그간 공부하느라 얼굴이 축나는 줄 알았는데 밤마다 개구멍서방 노릇하느라 그랬
구나.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밤마다 마실 나갔다 이슬 맞고 들어오다니! 그간 괴이한 소문이 돌
아도 널 믿고 아버지한테도 아무 말씀 안 드렸더니, 이제 보니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어머니, 제 사정을 좀 돌봐주십시오.”

“들을 것 없다. 네가 양반집 자제로 태어나 천한 퇴기 딸하고 백년가약을 맺었단 말이냐? 백
일가약도 아니고 백년가약을 네 맘대로 맺다니! 이건 양반집안 신세 망치는 일이고 네 신세조차
망치는 짓이다. 당장 물러가 한양 갈 준비나 해라! 병은 무슨 죽을 병! 이 녀석이 상사병이 들었구
만. 상사병엔 멀리 떼어 놓는 게 최고니라!”

몽룡은 믿었던 어머니마저 자신을 나무라자 다리에 힘이 풀려 어머니 앞을 물러나왔다. 앞일
을 어찌 해야 좋을지 방책이 서지 않았다.
몽룡은 일단 춘향이를 만나야 될 것 같아 다시 춘향이 집으로 갔다. 춘향이를 보자 울음이 쏟
아졌것다.

“아니, 도련님? 어쩐 일로 울며 들어옵니까?”
몽룡은 아무 말도 못하고 더 섧게 울기만 할 뿐이었다.
“사또께 꾸중이라도 들으신 겁니까? 아니면 집안에 초상이라도 난 것입니까? 그도저도 아니
면 남원 건달들에게 붙들려 욕을 봤나요?”
몽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라믄, 네댓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챙피하게 징징 짜고 다니시우?”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뭐가요? 알아묵게 얘길 해야지요?”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가시게 되었다.”
“그라믄 집안에 경사가 난 것인데 왜 운단 말이오?”
“아버지한텐 경사지만 나한텐 불행이라 그렇지.”
“아버지가 잘되믄 아들도 잘된 것인데, 도련님한테 불행이라니요?”
“우리가 헤어지게 생겼으니까 그렇지.”

“우리가 왜 헤어진단 말이오?”
“나보고 내일 당장 한양으로 올라가란다.”
“그것 잘됐네유. 도련님이 먼저 한양 가서 자리 잡은 뒤 기별만 하면 나도 올라가면 되잖아유.”
“그게 그렇지가 않다.”
“그럼 또 뭐가 있는디유?”
“네 얘기를 아버지한텐 꺼내지도 못하고 어머니한테만 말씀 드렸는데 꾸중만 몇 바가지 듣고
말았다.”

“그라믄 시방 나를 한양으로 못 데려간다, 이 말이오?”
몽룡이 차마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힘없이 끄덕거리는데, 춘향은 악이 곧바로 바쳐 온몸을 가
을바람에 수수 이파리 떨 듯하는구나.
“뭣이 으짜고 저째요? 시방 하는 말이 말인 줄 알고나 허시유? 나를 여그다 내팽개치고 도련
님 혼자서만 한양으로 내빼겠다고라?”

춘향은 눈꼬리를 치켜세운 채 눈썹을 파르르 떨며 악다구니를 썼다. 춘향이 속에 저런 모습이
어디 들어 있었을까 싶었다. 춘향이는 아예 발버둥을 치며, 치맛자락을 쫙 찢어발기는데 얼굴 표
정이 금세라도 무슨 일을 낼 것만 같다. 몽룡이 아무 말 못하고 바라만 보자 춘향은 더욱 악이 바
쳐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두 손으로 비벼 뭉치더니 몽룡 앞에 내던졌다. 몽룡은 할 말이 없
어 춘향을 달래지 못하는데 춘향은 본격적으로 신세 한탄에 들어갔것다.

여보시오 동네방네 남원고을 사람들아
이팔청춘 춘향이가 사람한나 잘못만나
몹쓸신세 다되었소 아리땁던 이팔청춘
이런저런 말들어서 구슬리고 맹서하며
천년만년 굳은약속 이제와서 뱉어버려
끈떨어진 연신세라 한양양반 모진줄은
진즉부터 알았지만 이제와서 당해보니
징하구나 독하구나 좋다하며 들이칠땐
간쓸개도 내놓더니 뜬금없이 이별기별
무심하게 던져놓네 애고애고 설운신세
무정할사 이도령아 가려거든 어서가소
우는꼴도 비는꼴도 보기싫소 속보이오

춘향이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몽룡을 원망하며 가슴을 쥐어뜯었건만 월매는 어린것들이
사랑싸움을 하는 줄 알았것다.
“눈꼴 시고 귀 간지러워서 못 참겄네. 사랑싸움도 엔간히 해라 이것들아. 이러다 오늘 저녁 생
송장 둘 실려 나가게 생겼구만. 내참, 아니꼽고 넘사시러서 못 듣겄네. 이내 신세 박복하여 딸년
사랑싸움까정 들어야 하는구나.”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춘향이 우는 소리가 그치지 않으니, 아무래도 무슨 변고가 생겼나 싶
었것다. 참다 못해 춘향이 방으로 월매 건너가는구나. 세상에! 방 안 꼴이 말이 아니렷다. 춘향이
는 너부러져 있고, 머리는 쥐가 뜯어먹은 것 같고, 몽룡은 구석에 앉아 청승맞게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춘향아, 시방 이 꼴이 뭣이다냐? 싸울 일 있어도 곱게 싸워야제, 방 안에서 아주 난장질을 하믄
어떡한디야? 니 에미가 죽은 것도 아니고, 도령도 멀쩡하고만 뭔 울음을 고로코롬 울어댔다냐?”
“도련님이 날 버리고 간다는데 곱게 싸워지겄소!”
“뭣이라고? 시방 그게 뭔 소리다냐?”

“도련님이 내일 한양으로 올라가는디 나는 두고 간단 말이우.”
월매, 기가 탁 막힌다. 예전에 성 참판이 한양 갈 때도 똑 이런 식이었다. 먼저 가서 기별하면
오라 하더니, 나중엔 춘향이 젖 떨어지면 올려 보내라더니, 그 전에 자신이 세상 떠버렸것다. 월
매, 독이 오른다. 딸년 춘향이도, 이도령 몽룡이도 다 꼴 보기 싫다.

춘향이년 이자리서 혀빼물고 자진해라
더살아서 무슨영화 더볼거냐 너죽은몸
저리잘난 양반도령 한양갈때 지고가게
이자리서 죽어줘라 이러기에 안된다고
처음부터 말렸더니 대를물려 처량신세
면할길이 없이됐다

몽룡이라고 월매의 독설을 피할 수 있겠는가. 월매는 이번엔 몽룡을 향해 퍼붓기 시작했것다.

이보시게 잘난도령 처음부터 층이진께
인연맺지 말랬는데 감언이설 혀를놀려
우리딸년 신세망쳐 에미까지 가슴터져
오장육부 검게변해 이원망을 어디가서
풀란거요 넘들웃음 귓등으로 넘겨가며
곱게기른 우리딸년 부족한게 뭣이라고
한입으로 두말하고 백년가약 무색하게
백일가약 가까스로 해보자고 우리모녀
감쪽같이 속여왔소 애고애고 설운지고



몽룡은 월매의 매서운 눈길을 피해 겨우 한마디 했것다.

“장모, 너무 이러지 마시오. 나라고 가고 싶어 가겠소? 또 간들 아주 가겠소? 그리고 아주
간들 춘향이를 잊겠소? 그러니 너무 그러지 말고 내 말좀 들어보소.”
“이도령인지 저도령인지, 말 한번 잘했소. 아주 가도 춘향이를 잊지 않
겠다고? 그런 말이 시방 입 밖으로 나오는 것 본께 속이 아주 거무티티한 사람이네.”

“장모, 고정하시오. 이번엔 못 데려가도 다음번에 데려갈 거요.”
“지금 당장 눈앞에서도 못 데려가는 사람이 나중에 무슨 재주로 데려간단 말이오?”
“내가 알아서 다 할 것이오. 좌우지간 지금은 곤란하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시게.”
“기다릴 일이 따로 있제, 나는 더 못 기다리겄소! 성 참판 때부터 내 겪
어본께 양반들이라는 인간 종자는 입만 벌리믄 거짓말만 해쌌는 거짓말의
달인들이던데 양반 종자인 도령 말을 내가 으찌께 믿고 기다린단 말이오!”
월매는 이제 넋두리를 내놓고 풀어놓기 시작한다.

“한양 간 잘난 이도령 기다리다 내딸 춘향이 머리에 백설이 내려앉고 이 내 몸은 백골 되믄 그
때 가서 무슨 소용있단 말인가. 젊은 청춘 한 번 가면 그때가서 님이 온들 뭘 돌이킬 수 있을까.
내한 번 양반한티 속았으믄 두 번 다시 안속아야 하거늘 이 늙은 년의 신세 박복하야 대를 물려
양반하티 속는구나!”
월매가 몽룡을 마구 닦달을 해대는 사이 춘향이가 겨우 정신을 차려 말려본다.

“어머니, 그만 하시우. 도련님도 그러고 싶어 그러겄소. 시방 도련님 속도
말이 아닐 것이오. 당장 먼길 떠나야 하니까 너무 몰아치지 마시오.”
“하이구, 니년이 그래도 서방이라고 도령 역성을 드는구나. 너 잘났다!
잘난 도령에 잘난 딸년, 아주 지 짝끼리 지대로 만났구나!”
“어머니,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우. 인자 고정하시우.”
춘향이가 가라앉은 덕분에 몽룡이 가까스로 기운을 얻어 입을 열었것다.

춘향이야 고맙구나 너와내가 다짐한일
내반드시 지킬테니 내가보고 싶을때면
이거울을 보려므나 나의마음 거울같이
언제까지 맑고빛나 먼지터럭 하나없이
깨끗하고 미끌매끌 할터이니 나를보듯
거울보고 막힌심사 비춰보며 시름달래
다시만날 그날까지 달이달달 날이 날날
기다리고 기다려서 다시보자 다시보자

몽룡은 품속에서 거울을 꺼내 춘향에게 건네주었것다.
춘향이, 거울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다시 울음을 운다.
“도련님, 정말로 이별을 하는 것이우? 날 놀려보느라 거짓으로 농 삼아 헌 말이믄 지금이라도
되돌려 놓으시믄 좋겄소. 애고애고!”

몽룡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나 자신의 힘으론 이 상황을 되돌릴 수가 없어 그저 눈물만
주루룩 흘릴 뿐이었다. 춘향이는 손에 끼고 있던 옥가락지를 빼 몽룡에게 건네주는구나.
“도련님도 춘향이가 생각날 때마다 이 가락지를 보세유. 내 사랑은 도련님밖에 없어유. 죽을
때까지 도련님 곁에서 둥근 가락지매치로 빙빙 돌 거유.”
“고맙다, 춘향아. 우리 반드시 다시 만나 옛날 이야기하며 살자꾸나.”

밤은 깊어 인경 소리도 진즉 났는데 둘은 떨어질 줄 모른다. 그렇다고 이별을 안 할 수도 없으
니, 새벽이 다 되도록 둘은 울며 훌쩍이며 밤을 꼴딱 새우는구나.
방자가 새벽같이 달려와 몽룡을 찾았다. 이제 정말로 이별을 할 시간이다. 사랑은 결국 눈물
을 남기고 만 것이다. 둘이 이별을 하지 못하고 하도 섧게 우는지라 월매도 모진 말을 더 못하고
뒤돌아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긴 한숨을 토할 뿐이었다.

“어차피 갈라질 것, 인자 그만 울고 갈라지그라. 이러다 쓰러지믄 졸지에 송장 둘 칠 일 생기겄다.”
월매 말에 두 사람은 더 붙어 있지 못하고 갈라서는데, 방자도 향단이도 차마 이별 광경을 볼
수 없어 먼 산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한양의 몽룡은 남원에 두고 온 춘향이 생각에 밤이고 낮이고 가슴이 먹먹하고 말라만 갔것다.
당연히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하루 종일 멍한 눈빛으로 보낼 뿐이니 공부가 제대로 되겠는가.
과거 날짜는 부득부득 앞으로 다가오는데 머리를 싸매고 집중을 할 수가 없었것다. 과거 답안
지 크기로 화선지를 잘라 글씨를 써 보지만 붓 지나간 자리는 지렁이 기어간 것 같거나 춘향이 형
상뿐이었으니, 병이 들어도 중증으로 든 것이렷다.

밤낮으로 글을 읽어 문자 속이 확 터져도 과거 급제가 될까 말까 하는데 밤낮으로 춘향이 생
각뿐이니 이를 어찌하나. 집집마다 과거 볼 아들을 둔 집이면 글로는 이태백에 글씨로는 왕희지
되어야 된다며 닦달들이었것다. 어쩌다 조선의 과거 시험 수준이 이리 높아야 하는 거냐며 투덜
대는 사대부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현실은 아무도 무시할 수 없어 그저 자식을 닦달댈 수밖에.
그런데도 몽룡은 글도 제대로 읽지 않고 춘향이 얼굴이나 그리고 있으니 시험은 보나 마나일 터.

그래도 세월은 흘러 마침내 과거 날이 되었것다. 몽룡은 시험장에 가기도 싫었지만 시험에 응
시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도살장 가는 소 발걸음처럼 무겁게 걸음을 걸어 과거장에 이르렀으니.
‘춘당대의 봄빛은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가 시험 문제로 내걸렸것다. 시제를 보자마자 몽룡
은 한숨부터 내쉬는구나. 그도 그럴 것이 춘당대의 춘 자도 춘향이의 춘 자요, 봄빛의 봄도 춘향
이의 봄 춘이니 춘향이와 인연, 시험장까지 이어진 탓이렷다.
몽룡은 붓에 먹물을 담뿍 묻힌 뒤 춘향이를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본 광한루의 봄을 일필휘지
로 써 갈겼것다. 그리고 마지막에 춘향이 이름자까지 풀이했으니.

봄빛 속에 봄 향기 뿜는 사람 오직 하나 있으니
이름하여 춘향이라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더 머리를 싸매고 말 것도 없어 몽룡은 시험 답안지를 일착으로 내고 시험장을 빠져 나왔다.
이를 본 시험관들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당연히 낙방 처리 했것다.
“이몽룡이라면, 동부승지 이한림의 자제 아니오? 그런데 공부를 머리로 안 하고 불알주머니로 한
모양일세. 내 시험관 맡은 이래 이런 답안지는 처음 보오. 어쩐지 빨리 내고 나간다 했더니만…….”

몽룡은 나라에 경사가 있어 다음 철에 치러진 특별 과거에서도 역시 낙방을 했것다. 이제나저
제나 늦둥이 아들의 과거 급제만을 기다리던 몽룡의 아버지는 몽룡이가 연거푸 시험에 떨어지
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구나 시험관들한테 몽룡이가 엉터리 답안지를 낼 정도로 공
부가 안 되어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뒤엔 더욱 낙심하여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그해 겨울도
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몽룡의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뜨고 나더니 몽룡의 어머니도 이듬해 봄 끝자락에 덩달아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말은 안 했지만 몽룡이가 춘향이와 부모 몰래 백년
가약 맺은 일로 남몰래 속을 무던히도 썩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씨 가문의 외아들 몽룡은 졸지에 사고무친 신세가 되고 말았구나.
몽룡의 아버지 본디 성정이 꼿꼿하여 나랏일 말곤 이재 같은 것엔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
본인 당대엔 전답 한 뙈기 늘린 게 없고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전답이나 가까스로 간수할 뿐이
었다. 그나마 세상 뜨면서 기왕 있던 전답은 물론 벼슬살이 하며 받은 녹봉까지 아낌없이 집안의
하인들한테 나누어 주며 모두 면천을 시켜주었으니, 몽룡이 물려받을 재산은 하잘것없었다.

몽룡도 재물엔 춘향이 발뒤꿈치 들여다볼 만큼의 관심도 없어 물려받은 전답마저 제대로 챙
겨볼 생각을 내지 않았으니, 하루아침에 거지 아닌 거지가 되고 말았것다. 과거도 안 된 데다 부
모까지 모두 세상을 뜨는 바람에 순식간에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어버렸다. 몽룡은 이래도 죽을
맛 저래도 죽을 맛이니 기왕 죽을 거면 남원에 가서 춘향이나 보고 죽자며 길을 나서는데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으렷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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