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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잡이 길잡이 부모의 마음, 책과 함께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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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8 20:55 조회 5,36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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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온전한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누군가는 친구일때도 있고, 선생님일 경우도 있으며, 이름 모를 ‘키다리 아저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 중 가장 헌신적인 사랑을 주는 사람은, 대개 우리는 그들의 사랑을 잊고 살지만, 바로 부모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이야 뒤틀린 사랑 이야기가 전부인 TV 드라마지만, 과거에는 사모곡思母曲을 비롯한 부모님의 사랑을 기리는 작품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가끔, 감사합니다. 그러나 때론 반항도 합니다. 벌써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선친先親을 향해 번갈아 감사와 반항을 하곤 합니다. 반항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닮고 싶지 않았던 그이의 모습을 쏙 빼닮았음이죠. 그럼 감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 역시 닮고 싶지 않은 모습을 쏙빼닮았기 때문입니다. 그이의 삶은 결국 제게 큰 바위 얼굴이었고, 반항은 또 다른 감사의 표출이 아닐는지요. 결국 선친의 삶은 제 삶 속에서 이어지고, 다시 제 아들들에게 저 역시 부모라는 이름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오이디푸스, 아버지와 경쟁하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통해 보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항상 사랑과 존경의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은 경쟁 관계였고, 또 어떤 아버지와 딸은 애증과 연민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의 모든 자녀들이 그러하듯, 어머니의 사랑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되는 자녀들이 문학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무지렁이 삶을 살면서도 고귀한 꿈을 간직한 아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어머니가 있기도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경쟁 관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문학 작품은 아마도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 등장하는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와 아버지 라이오스일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경쟁에는 자의自意란 없습니다. 오로지 아폴론의 신탁神託에 의한, 타의他意에 의한 경쟁인 셈입니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는 아들에게 살해될 것이라는 신탁을 신봉한 나머지 아들 오이디푸스를 버리고, 결국에는 아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물론 『오이디푸스 왕』을 아버지와 아들의 경쟁 구도로만 읽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그리스 비극』을 쓴 연세대 임철규 명예교수의 말처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불안정성과 삶의 표면적 아름다움 아래 있는 잠재적인 공포 등 인간 실존의 불확실성에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질문과 대답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며 수많은 문학 작품으로 재현되었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스트라빈스키가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도 합니다. 한편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왕의 동기와 감정과는 무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아버지에 대한 질투와 혐오 경향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연민과 애증으로 점철된 리어 왕과 코딜리아

경쟁 관계에 있던 아버지와 아들에 이어 연민과 애증으로 점철된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 왕』에 등장하는 고대 브리튼 왕국의 리어 왕은 세 딸에게 왕국을 나눠주고 말년의 한유閑遊를 즐기고자 합니다. 첫째 딸 고너릴과 둘째 딸 리건은 말로는 형언할 수는 사랑을 고백하지만, 막내 딸 코딜리아는 아버지가 듣지 못하는 목소리로 “코딜리아는 뭐라고 말하지? 그저 사랑만 할 뿐, 그리고 침묵을 지킬 수밖에”라고만 읊조립니다.

하지만 “은총과 건강, 아름다움, 명예가 있는 삶보다도 폐하를 사랑합니다.”라고 했던 두 딸은 아버지를 배신하고, 리어 왕은 왕의 권좌는 물론 딸들마저 잃어버리고 유리방황하게 됩니다. 결국 스스로가 내친 코딜리아와 재회하지만 그녀는 주검일 뿐 말이 없습니다.

어쩌면 『리어 왕』의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수많은 부모들이 헌신과 사랑으로 자녀들을 섬기지만,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오늘날 자녀들은 부모의 단물만을 빼먹고 말 뿐이죠. 또 하나,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성한 말의 잔치로 고백되는 사랑은 그 수명이 짧을지라도, 그 대상을 향한 묵묵한 사랑은 때론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영원합니다.

순임금, 효의 사상을 전파하다
서양의 신화와 고전이 아버지와 자녀의 뒤틀린 관계를 묘사했다면, 동양의 신화에 등장하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지극히 모범적입니다. 동양 신화에서 요임금과 함께 태평성대의 군주의 대명사로 불리는 순임금은 ‘만고의 효자’입니다. 한 눈에 눈동자가 둘인 기이한 아이여서 ‘중화重華’라고 불리기도 했던 순임금은 장님인 아버지의 매질을 참고 또 참았습니다. 몽둥이로 때리려고 하면 도망쳤는데, 맞기 싫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살인범이 될까 저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순에게 사람들은 좋은 농토는 물론 고기가 잘 잡히는 어장을 양보해줄 정도였고, 결국에는 요임금의 대를 이어 임금 후보에 오르기까지 합니다. 요임금은 순에게 두 딸을 시집보낼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계모는 순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지붕 위에 일을 시키고 불을 지르기도 하고, 술에 취하면 죽여 버리기로 작당을 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두 부인이 기지를 발휘한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겁니다. 마침내 임금의 자리에 올라서도 순은 부모를 대함에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복동생 상을 제후에 봉하기도 합니다. 결국 악인들도 감화를 받아 선한 길로 인도됩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순임금의 행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마천이 순임금 시대를 맛깔스럽게 정리한 이유는 요순시대를 이상향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임금이 부모처럼 자애한 나라, 자녀들이 부모를 해처럼 우러르는 나라를 사마천을 꿈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중국의 사상가들은 충과 더불어 효를 숭상했고, 그것은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규정하는 커다란 하나의 잣대가 되었습니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으로 아들과 대화하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조건은 물론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있는 것을 물론 없는 것까지도 모두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마음이 깊어 엇나간 사랑을 종종 보긴 하지만, 그래도 부모의 사랑은 오로지 내리사랑입니다.

로마의 황제였던 콤모두스는 재위 기간(180-192) 동안 정치보다 곡예, 요술과 같은 예술에 몰두했습니다. 때론 검투사로 나서 검투장을 긴장시키는가 하면, 맹수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기도 한, 어떻게 보면 무모한 황제였습니다. 결국 신하에게 살해당했고, 제국은 돌이킬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정치가로서 콤모두스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에게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사랑을 받았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콤모두스가 어리광 피우는 아들이었을 거라는 생각이나, 그의 아버지 아우렐리우스가 온실의 화초처럼 아들을 대했을 거라는 섣부른 상상은 하지 말도록 합시다. 철학자이자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적을 침입을 막기 위한 수많은 전쟁에 나서면서도 일기를 통해 삶의 정리했고, 그 안에 자신만의 철학적 사색을 가감 없이 담아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저 유명한 『명상록』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교육과 악, 자연의 조화와 질서, 쉼, 인간의 의무, 목적의식, 고통, 죽음, 우주의 질서 등의 철학적 명제에 대해 자신의 논리를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필치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세간 사람들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후기 스토아학파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실천 윤리를 강조한 스토아학파의 명맥은 결국 아우렐리우스를 통해 현실 정치에 발현된 것이라고도 주장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명상록』은 아우렐리우스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콤모두스가 탐독한 것이 바로 『명상록』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콤모두스는 아버지만큼 뛰어난 황제도 아니었고, 철학적 소양도 부족한, 한마디로 실패한 황제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아우렐리우스가 자신만의 기록에 충실하기 위해 『명상록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죠. 『명상록』은 명백히 자신의 대를 이어 황제에 오른 콤모두스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으라는 일갈이 그곳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콤모두스의 성공 혹은 실패와는 상관없이, 『명상록』은 한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피보다 진한 부성애의 또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어머니』, 아들의 혁명 동지가 되다
아버지의 사랑이 선 굵은 그것이라면, 어머니의 사랑은 잔잔함 가운데 빛나고, 자녀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다시 뛰도록 합니다.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가 바로 그런 사랑을 절절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물론 “러시아 문학에서 노동 계급에 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소설” “인류에 의해 축적된 모든 물질적, 정신적 가치를 보존할 만한 능력을 갖춘 하나의 힘으로 노동 계급을 다룬 최초의 소설”이라는 평가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런 큰 함의보다 저는 제목 그대로 ‘어머니’가 주는 사랑에 눈물겨워 합니다. 라게냐 닐로브나는 무지와 가난, 남편의 술주정과 폭력에 시달리는 러시아의 무지렁이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 빠벨 블라소프가 술로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노동자에서 혁명가로 환골탈태하는데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또 한 명의 혁명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닐로브나가 거치게 되는 혁명의 과정은 그 시절 혁명에 가담한 지극히 평범한 노동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촌로村老의 혁명에 대한 헌신은 아들에 대한 사랑에 다름 아니었고, 그 사랑이 결국 아들을 진정한 혁명가로 키워낸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물과 불을 가리지 않는, 때론 혁명의 당위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것과 함께 산화할 수 있는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책으로 만나는 부모님
한 사람의 고유한 인격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교감하며 만들어지는 것이며, 부모는 항상 든든한 지지자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다룬 책들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100만 부를 훌쩍 넘긴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도 있고, 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그리운 박완서 선생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등장하는 강한 생활력과 유별난 자존심을 지닌 어머니의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책 읽기의 마무리는 항상 작은 실천을 동반해야 합니다. 그럼 이렇게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몇 권의 책으로 부모님을 만나보셨다면, 지금 바로 부모님 댁에 전화 한 통화 넣어보도록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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