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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함께 들꽃을 닮은 지영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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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1 13:53 조회 6,90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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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이 어깨의 삶의 무게
늦은 밤 지영(가명)이에게 문자가 왔다. 통화가 가능할지를 물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더니 받지 않는
다. 그리고 잠시 후 전화가 왔다.
“선생님, 늦게 죄송해요. 집 밖에 나와서 전화를 드리느라고요. 동생이 안 들어왔어요. 지금 문자
왔는데 이제 가출할 거래요. 어떡해요? 엄마한테는 말 못하겠어요. 흑흑”

지영이 어깨가 무겁다. 이제 막 비행을 시작한 중학교 2학년 남동생이 지영이의 어깨에 잔득 얹혔
다. 그렇지 않아도 새아버지 눈치도 봐야하고 주인집 눈치도 봐야한다. 그리고 이제 겨우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 늦둥이 이복동생과 산후 몸조리를 잘하지 못한 엄마도 모두 지영이 어깨를 누르고 있
다. 원하는 고등학교에 가려면 성적도 올려야 하고, 반 친구들과도 잘 지내야한다. 2년 동안 지영이
가 얼마나 힘들게 하루하루를 견뎌 왔는지를 잘 알기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지영아! 우선 동생이랑 같이 노는 아이들을 내가 아니 수소문 해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봐.”
전화를 끊고 바로 지영이 동생을 찾는 문자를 돌렸다. 다행히 우리학교의 정보원(?)들에게서 문자
가 왔고 동생의 가출 원인이 새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라는 것과 지금 학교 근처 놀이터에 있다는 것
도 알게 되었다. 지영이에게 문자로 새롭게 얻은 정보를 알리고 진행상황을 알려달라고 했다. 새벽 1
시 문자가 왔다.
“동생을 만났어요. 아버지가 주무신다고 해서 집에 데리고 왔어요. 걱정하실까봐 연락드려요. 내
일 학교에서 봬요.”

지영이 속이 얼마나 까맣게 타 들어갔을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쉽게 잠을 잘 수 없었다. 지영이 역시 중학교 1학년 때 몇 번을 뛰쳐나왔던 집이다. 다행히 지영이의 방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큰 누나만 찾는 두 동생들을 차마 모른 체 할 수 없었고, 인터넷쇼핑몰을 하고 싶다는 꿈도 생겨 방황으로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기에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창가에서 노란 꽃을 만나기를…
다음날 아침 지영이는 일찍 학교에 왔다. 그리고 교육복지실 청소를 하고 있던 나를 도왔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쓸고 닦았다. 그리고 함께 창문을 닦다가 우리 둘이 동시에 창문 아래에 참외덩굴에 눈이 멈추었다. 참외덩굴은 향유풀을 칭칭 감고 올라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을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선생님, 저 보라색풀이 불쌍해요.”

“그러게 타고 올라오라고 끈을 매어 줘야겠다. 향유가 숨 막히겠는걸.”
“‘향유’는 사람 이름 같아요. 그 옆에 있는 풀 이름이 뭐예요?”
아는 풀이 아니라서 지영이에게 도감을 건네며 찾는 법을 알려주며 찾아보라고 하고 나는 바로 매어 줄 줄을 찾았다. 그리고 지영이와 함께 줄을 매어 주러 나갔다. 참외덩굴 옆에 나무젓가락을 심고 단단하게 노끈 한 쪽을 묶고 나머지 한 쪽은 교육복지실 창살에 묶었다.

“와! 이대로 넝쿨이 자라면 교육복지실 안에서도 노란 참외꽃을 볼 수 있겠어요.”
나는 조심조심 참외넝쿨 끝을 팽팽한 노끈에 살짝 감아두었다. 그러자 지영이는 향유풀에 칭칭 감겨 있는 다른 넝쿨 하나를 풀기 시작했다.

“어, 꺾여 버렸어요. 이렇게 약하다니… 억지로 하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서 어떡해요…”
“참외넝쿨이 꼭 동생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만나는 아이들도 그래. 억지로 하려면 항상 더 큰 문제가 생기더라고. 다른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끈을 매어 주고 따라 올라가도록 살짝 걸쳐주기만 하는 거지. 욕심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게 되더란 말이지.”

종이 치는 바람에 우리는 작업을 멈추었고 다시 바쁜 일상이 시작되었다. 방과 후 지영이가 창문 밖에서 나를 불렀다.
“선생님, 하루 만에 넝쿨이 이 만큼이나 자랐어요. 얘는 줄을 잘 따라 올라가고, 얘는 아래로 내려가서 이 풀 괴롭히고 있고, 어, 얘는 하늘을 날아갈 것인가 봐요. 하하. 이 꽃 정말 이렇게 예쁜지 몰랐어요. 이름이 뭐라고요? 자주 보던 풀인데 이름은 처음 들었어요.”

어렵겠지만 좀 더 단단해지기를…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지영이의 작은 소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화단정리를 시작했고,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만나게 될 여린 그 넝쿨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분명 1교시까지는 지영이가 인사를 했으니 있었고,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도 내가 보았으니 그때까지도 있었다. 5교시 끝나고 학교 화단을 정리하는 아저씨들의 시끄러운 모터 소리를 들었는데… 아마 그때 모두 잘리고 뽑힌 모양이었다.

이제 곧 수업이 모두 끝나고 지영이가 들어올 텐데. 그리고 바로 확인할 텐데 도대체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동안 교육복지실에 있는 식물도감들을 보면서 들꽃 이름도 외우고, 풀이름도 외우며 내년 봄에는 들꽃 화단을 만들자며 꿈에 부풀어 있는 지영이가 크게 실망할 텐데 걱정이 되었다. 지영이도 그렇지만 사실 나 역시 무척 속상했다. 끈을 못 볼 리가 없을 텐데… 끈을 보았다면 누군가 가꾸고 있었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속도 상하고 화도 났다. 그때 지영이가 들어왔다.

“선생님, 놀라지 마세요! 참외 못 먹게 되었어요. 우리 선생님 실망하실까봐 얘기도 잘 못하겠네”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지영이 목소리가 밝았다.
“선생님, 실망하지 마세요. 제가 참외 사드릴게요.”

지영이가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속상했을 지영이었을 텐데…
“사는 게 항상 그래요.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뻥뻥 터져요. 결국 우리 동생 가출했어요. 순하고 착한 아이였는데… 괜찮아요. 그래도 돌아올 거예요. 저도 나가 보고 알았어요. 그리고 샘이 그랬잖아요. 천천히 되는 것뿐이지 안 되는 건 없다고요. 저 이번 기말고사만 잘 보면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5년 뒤 들꽃 여행을 꿈꾸며…
요즘 지영이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서 만나는 풀 이름을 찾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다. 학교에서 잡초를 뽑아 와서 내게 확인시켜 주기도 하고, 예쁜 꽃을 꺾어 와서 도감 사이에 눌러 놓기도 한다.
“선생님,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나라 배낭여행 갈 거예요. 도감하나 들고 들꽃을 찾으러 가는 거죠. 꽤 낭만적이죠? 여름보다는 봄이면 좋겠는데… 봄꽃이 더 예쁘니… 아무튼 선생님도 시간되시면 같이 가요.”

이번에는 꼭 5년 뒤 지영이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 역시 5년 뒤에는 여유가 생겨 지영이와 봄꽃맞이 여행을 가면 좋을 것 같다. 이런 상상을 하니 괜히 비실비실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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