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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잡이 길잡이 [슈퍼히어로의 '사소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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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5-31 19:00 조회 5,59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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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전우치전김현양 옮김 | 문학동네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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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이 사람보다 유명하고, 이 사람만큼 바쁜 인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의 관공서마다 이름을 내밀어야 하고, 은행 일 처리하는 사람들이라면 발 벗고 도와줘야 한다. 그런가 하면 세간 사람들의 대화에도 끼어들어야 하니 바빠도 한참 바쁜 게 분명하다. 이 사람,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 이만하면 눈치 챘을 거라 믿고 공개한다. 바로 ‘홍길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홍길동이 슈퍼히어로라고?
워낙 친숙한 인물이어서 홍길동을 슈퍼히어로라고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슈퍼히어로 하면 슈퍼맨이나 배트맨이지, 어째 홍길동이냐고 타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길동의 능력을 보면 놀랄 게다. 일단 상(相)을 한번 보자. 비록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관상녀가 거짓으로 꾸며낸 소리지만 의미심장하다. “이 공자의 상을 보니 천고의 영웅이요, 일대의 호걸이옵니다.” 얼굴에서 풍기는 상뿐 아니라 품고 있는 마음 또한 넉넉하다. “가슴속에 조화가 무궁하고 미간에 산천 정기가 영롱하오니 과연 왕이나 제후의 기상이옵니다.”
얼굴과 마음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 능력도 가히 초인적이다. “육도삼략((六韜三略)과 천문지리(天文地理)를 공부”한 길동은 둔갑술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데 “갑자기 길이 끊어지고 층암절벽이 앞을 가리니 진퇴유곡”을 만드는 재주 또한 지녔다. 어디 그뿐인가. 진언(眞言)을 외우니 “홀연 한바탕 검은 구름이 일어나며 큰비가 퍼붓듯이 쏟아지 고 모래와 돌을 날”리기도 한다. 자객의 칼을 뺏는 요술(妖術)과 축지 법 정도는 능력 축에도 못 든다. 이쯤 되면 길동을 슈퍼히어로로 인정 하기에 모자람이 없지 않을까.
능력이 출중하다고 모두 슈퍼히어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키피디 아는 슈퍼히어로의 역할로 “초인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악과 싸 우는 주인공 역할을 담당”한다고 정의한다. “악과 싸우는 주인공”이 라는 조건에 길동보다 더 부합하는 인물이 있을까. 도둑 무리의 우두 머리가 된 홍길동은 무리의 이름을 활빈당, 즉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던 도둑의 무리”라고 짓는다. 『홍길동전』은 활빈당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조선 팔도를 다니며 각 읍 수령에게 의롭지 못한 재물이 있으면 탈취하고, 몹시 가난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자가 있으면 구제하며, 백성은 해치지 아니하고, 나라에 속 한 재물은 추호도 범하지 아니하니….”
길동의 능력과 관련한 재미있는 우리 놀이 하나가 있다. 바로 ‘들돌 놀이’다. 호부호형하지 못했던 깊은 한 때문에 집을 떠나야만 했던 길 동이 “정처 없이 가다가 한 곳에 다다랐는데” 그곳이 마침 “도적의 소 굴”이었다. 은밀한 소굴에 들어섰으면 응당 제지하고, 심하면 죽였어 야 했지만 이 도적들의 행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오히려 두목을 정 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던 도적들은 길동의 “사람됨이 녹록지 않음을 반기며”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는 영웅이 모여 있으나 아직 두목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 만일 뛰어난 능력이 있어 참여하고자 한다면 저 돌을 들어보라.”
길동이 들어 올린 돌은 “천 근”이었다. 길동은 천 근 돌을 “수십 보 를 걸어가다가 던지”는 괴력을 발휘했다. 길동이 들어 올린 바위 들기 의 원조가 바로 우리 선조들이 오래 전부터 행했던 ‘들돌 놀이’다. 고 김열규 선생은 『한국인의 자서전』에 서 들돌 놀이에 관해 자세히 소개하 는데, 지금도 “영호남 해안 지대 마 을에서는 심심찮게 이 들돌이 잊혀 진 기념물로 남아 있음”을 볼 수 있 다. 사실 들돌, 즉 큰 바위를 들어 올 리는 일은 “사내아이가 남자 어른이 되는 영예로운 일”이었다. 일손 하나 가 소중한 그 시절, 어른이 되는 일은 가족의 경사이자 마을의 버팀목이 되는 일이었다.
슈퍼히어로는 신체적 능력도 출중 해야 하지만, 그것보다 악을 물리치 고 주변 사람들은 돕는 일이 우선이 었다. 슈퍼히어로와 들돌 놀이의 함 수는 이 대목에서 자명해진다. 큰 바 위를 들어 올려 자신이 한 사람의 성 인, 즉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거듭났 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아울 러 그 존재감이 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오롯이 쓰임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 세상에 배웠다 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은 걸핏하면 드잡이에 주먹 자랑이나 한다. 한 사람의 주체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즘 세태와는 달라도 한참 다른 우리 선조들의 삶의 방식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조선판 팩션 『홍길동전』
홍길동은 실존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보면 “강도 홍길동을 잡았으니 나머지 무리도 소탕하게 하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어 “홍길동을 도와준 엄귀손의 처벌을 의논하다.”라는 구절도 나온다. 엄귀손은 당상의 벼슬을 하고 있던 사람으로 홍길동과 연루되어 남해(南海)로 유배가 결정되었으나 이내 옥사한 실존 인물이다.
강도 홍길동이 의적으로 변한 것은 전적으로 지은이 허균의 공이다. 허균은 한 세기 전 떼도둑의 수괴로 이름을 날린 홍길동을 차용해, 요즘 말로 의적 홍길동이라는 팩션(faction)을 만들어 낸 것이다. 팩션이지만 『홍길동전』이 당시 사회에 던진 함의는 묵직하다. 일단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해 보자. 대개의 슈퍼히어로들이 그렇지만 길동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알고 싶어 했다. 표면적인 길동의 이력은 이런 것이다. “둘째아들의 이름은 길동으로 시비(侍婢, 곁에서 시중을 드는 계집종) 춘섬의 소생이었다.”
그렇다. 길동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것처럼 서자였다. 당연히 호부호형, 즉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다. 단지 ‘서자’라는 사소한 정체성을 인식한 것이 아니다. 그간 길동은 살았으되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삶을 살았다. 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가 불러야 마땅한 호칭을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순간, 길동은 다시 태어났다. 그것은 길동이 평생 넘어야 할 화두이기도 했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의 주인공 에이해브는 흰고래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를 잘리는 아픔을 겪는다. 광기 어린 집착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에이해브의 집념은 한쪽 다리를 잘린 그 순간 배태되었다. 흰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었다는 자각이 에이해브로 하여금 평생 바다를 떠다니게 했던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길동과 에이해브처럼 자신이 처한 결함과 결핍을 깨닫는 순간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길을 찾곤 한다. 철학자 강신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을 지배하던 비루함을 극복하기 시작”함으로써 “사랑의 기쁨을 지킬 수 있는 주인”(『강신주의 감정수업』 중에서)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존재의 근원을 찾는 행위가 꼭 자신의 비루함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길동은 자신의 비루함을 발견함으로써 스스로의 나아갈 바를 알았을 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얼마든지 ‘나는 누구인가’라고 인식 할 수 있다. 미국의 현대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도런스 켈리 는 함께 쓴 책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 데카르트 철학을 빌려 존재 자 체를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기반을 둔 존재, 즉 자신의 사적 생각과 욕망 을 통해 정의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적 견해에서 만일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내부를 바라보는 것(내가 어떤 생각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지 스스로 묻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허균의 혁명정신과 그 한계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자는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물이나 불, 범이 나 표범보다도 더 두렵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자들은 백성들을 제멋대로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는다. 도대체 어째서 그러한가.”
『홍길동전』의 지은이인 허균이 쓴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중 「호민론」의 한 대목이다. ‘호민(豪民)’이란 “남모르게 딴마음을 품고 틈 만 엿보다가 시기가 오면 일어나는 사람들”이며 “자기가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의 부조리에 도전하는 무리들”이다. 시절이 하 수상해 호 민의 봉기가 일어나면 “일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백성들로 자기의 권 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이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며 얽매인 채 사는 사람들”인 항민(恒民)과 “수탈당하는 계급이라 는 점에서 항민과 마찬가지이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윗사람을 탓하 고 원망”하는 원민(怨民)이 “저절로 모여들고 … 살기를 구해서 따라 일어서게” 된다.
허균은 선조와 광해군 때 사람으로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겪었다. 당 시 백성 어느 누가 그 전란의 참화를 피해 갔을까만, 허균은 만삭의 아 내가 피난 도중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이내 죽는 비운을 겪는다. 핏덩이 아이도 젖을 먹지 못해 엄마를 따라 저세상으로 갔다. 그때, 임금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에 머물며 여차하면 명나라로 망명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유추해 보면, 허균은 그때 혁명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유학을 배웠지만, 그 좁다란 시각에서 벗어나 불교와 도교 등의 사상을 수용했던 허균은 백성을 초개처럼 버린 군주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길동이 율도국을 치며 왕에게 전한 격서(檄書)에는 “대저 임금은 한 사람의 임금이 아니요, 천하 사람의 임금이라.”라는 대목이 있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귀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재주를 넉넉하게 주고, 천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인색하게 주지는 않았다.”라고 생각했던 허균에게 임금의 목숨이나 무지렁이 민초의 목숨이나 중요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홍길동전』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혁명, 그것을 통한 이상향을 꿈꾼 허균은 왜, 굳이 길동을 율도국의 왕으로 만들어야만 했을까. 그것도 전쟁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조선을 떠나 남경으로 향하던 중 발견한 율도국의 모습은 “사방을 살펴보니 산천이 수려하고 사람들이 번성한 것이 가히 몸을 편안히 할 만한 곳”이며 “그 넓이가 수천 리요, 사방이 막혀 있어 과연 견고하고 풍요로운 나라”였다.
스스로를 “의병장 홍길동”이라 부르며 율도왕에게 전한 격서를 보면 “탕왕이 걸을 정벌하시고, 무왕이 주를 정벌하신 것은 하늘의 이치로 자연히 된 일”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율도국 왕이 실정(失政)을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알다시피 중국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桀)은 폭군의 대명사였고, 중국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는 주색잡기와 포악한 정치로 인심을 잃었던 왕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자. 율도국 왕이 주색잡기에 능하고 폭군이었다면 과연 “사람들이 번성한”, “견고하고 풍요로운 나라”가 될 수 있었을까. 격서로 미루어 짐작할 뿐 『홍길동전』은 율도국 왕의 실정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다.
또 하나, 호민의 봉기를 두둔한 허균이지만, 길동은 율도국 왕이 되어 죽은 아버지를 추존(推尊)해 현덕왕에 봉하고 백 씨와 조 씨 두 부인을 왕비로, 모친을 대비로, 두 명의 장인을 부원군으로 봉한다. 기존 권력자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행태다. 더욱이 70세가 되자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속발관(束髮冠)을 쓰고 학창의(鶴氅衣)를 입은” 백발노인과 함께 천상세계로 가자 아들이 다시 왕위를 잇는다. 아들 대신 순(舜)에게 임금 자리를 내 준 요(堯)임금처럼, 홍수를 다스린 우(禹)에게 다시 지존의 자리를 양보한 순임금처럼, 그 렇게 결말을 내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아니, 아예 왕 없는 세상,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일 구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홍길동전』을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
16세기 궁벽한 땅 조선의 지식인이 호부호형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허균 으로서는 목숨을 내논 장한 일이었다.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허균은 혁명을 꿈꾼 대가로 저자에서 목이 잘리는 참형에 처해졌다. 그럼에도 못내 아쉬운 것은 “사람 대접을 못 받는 것이 평생 한”이 되어 뛰쳐나온 그 굴레로 길동이 다시 돌아갔다는 점이 다. 물론 그마저도 우리가 포용하고 읽어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오늘 우리 시대는 어 디로 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이유가 된다. 길동이 꿈꾼, 아니 허균이 꿈꾼 “사람 대 접” 받는 세상은 오늘 우리 시대에 과연 이루어졌는가. 오늘 우리는, 그저 또 다른 슈퍼 히어로에 열광하며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앞으로도 홍길동은 한국판 슈퍼히어로의 전형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 처럼 후대의 독자들이 『홍길동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단지 새로운 세상을 꿈꾸 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꿈꾼 것을 삶으로 옮겼고, 그 결과 율도국은 (비록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향에 한참 못 미치는 곳이라도 해도) 하나의 이상향으로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자리 잡 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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