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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함께 [세계의 십대와 함께 즐기는 문학] 지옥이 되어 버린 학교에서 탈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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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12-27 18:26 조회 6,12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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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욱 작가. 번역가

‘찌질이, 중상위권, 양아치, 날라리, 대장’은 청소년 겨울 외투의 등급 명칭이다. 친구를 따돌리고 짓밟아 올라야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고 암암리에 가르치는 어른들이 있기에, 학교는 거의 모든 학생들을 폭력의 고리로 엮는 조직이 되었다. 하루에도 여러 건의 왕따 기사가 신문 헤드라인에 오를 정도로 폭력이 만연한 사회. 현 사회의 축도인 학교에서 왕따에 시달리다 못해 목숨을 스스로 끊은 아이의 기사를 볼 때면, 과연 무엇이 청소년들을 가해자로 만들고 또한 피해자로 만들었는지 심사숙고 해보게 된다.




학교는 즐거운 배움터여야 하는데, 제법 많은 학생들에게 지옥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매일 어떤 괴롭힘을 당할지 모른 채, 아무한테도 고통을 털어놓지도 못한 채, 공포에 떨며 등교하는 청소년들이 많다. 이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학교가 사라지길 꿈꾼다. 필자가 ‘왕따’를 다룬 이번 호 글을 쓰기 위해 가장 먼저 꺼내든 책은 캐나다의 여성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일곱 번째 소설 『고양이 눈』이다.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강한 이 여성 성장 소설은 화가인 일레인이 그림을 통해 왕따였던 학창 시절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사회가 규정한 가치기준에 따르지 않으면 동료들에게 조롱을 받고, 끝내는 따돌림을 당한다. 어린 시절부터 유일한 놀이 상대인 오빠와 자연 속에서 벌레나 곤충을 모으고 전쟁놀이를 하며 지낸 일레인은 도시로 전학을 간다. 그리고 그곳 학교에서 머리에 커다란 리본을 매단 그레이스, 캐롤, 코딜리어를 만나게 된다. 이들이 하는 이야기나 행동은 선머슴아 같은 일레인에게는 생소하면서도 지루하고 하찮게만 느껴진다. 한편 자신들의 여성 문화를 인정하기는커녕, 시큰둥하게 여기며 겉도는 일레인의 행동은 코딜리어를 대장으로 하는 학교 친구들의 눈엣가시가 된다. 캐롤은 일레인의 모든 행동거지를 다른 학급에 있는 코딜리어에게 전하고, 코딜리어는 일레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교정하려 든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끊임없이 칭찬을 받고 싶은 이들에 비해 독립적 성향이 강한 일레인은 왕따일 수밖에 없
었다. 하지만 아무리 독립적인 일레인이라지만 막상 왕따가 되자, 자기 검열을 수시로 행하게 되고, 자신을 괴롭히는 가해자들의 문화와 가치관을 근거로 스스로의 실수를 문책하기에 이른다. “코딜리어는 오늘 내가 한 말을 전부 되짚어 보면서 잘못된 것을 찾아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한다. 내가 답을 찾아내면 다시 말을 걸어줄 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을 위한일이다. 그들은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이고, 내가 개선되도록 돕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암시하듯, 일레인은 교묘하게 자신을 조절하려 드는 코딜리어 일행과의 힘겨루기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어떻게든 그들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여자아이들이 행하는 폭력이 은밀히 감춰져 있음도 느끼게 된다. 악의적 의도를 친절로 포장한 이들의 가증스러움을 깨달은 뒤, 자신을 괴롭히고 왕따 시키는 이들에게 침묵으로 대응하지만, 침묵이 오히려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 또한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과 친한 오빠에게 일러바칠 수도 없다. 증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는 제 아무리 친오빠라도 자신을 믿어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일레인을 괴롭히는 여자아이들은 겉으로는 순해 보이고, 그들의 세계는 평화롭게까지 보인다. 그들 사이로 침투하여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 이상, 남자들이나 어른들은 사악한 농담과 악독한 소문을 일부러 만들어내는 여자애들의 잔인성을 목격하기는 힘들다.




여자아이들에 비해 남자아이들의 폭력은 개방되어 있는 편이다. 두 번째로 읽은 책 『초콜릿 전쟁』의 내용은 남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학교 전통의 이름으로 실시되던 초콜릿 판매 거부를 홀로 행하다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되는 제리 르노가 주인공이다. 한편 그를 가장 괴롭힌 남학생 아치 코스텔로는 일레인을 괴롭힌 코딜리어와 비교 가능하다. ‘야경대’라는 비밀 조직의 우두머리인 아치는 매우 조직적으로 교사의 권위조차 조롱할 수 있을 만큼 영악한 존재이자, 권력을 끝까지 즐기는 잔인한 유형이다. 신입생을 왕따 시키는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아치는 희생양을 정해두고 계획적으로 집단구타로 몰고 간다. 학생들 사이에서 비공식적 권력의 상징으로 통하는 그는 자신이 통제하는 학생 집단의 권력을 활용하려는 차기 교장 후보 레온 선생의 욕망을 누구보다 잘 읽어 낸다. 그는 악용되는 학교의 공식적 권력 앞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전교생을 야경대원들의 하수인처럼 부린다. 심지어 자신이 처한 상황이 불리할 때에는 대중 심리를 조작하여 공범의식을 부추긴다. 이야기의 말미에서 야경대 깡패들에게 죽을 만큼 두들겨 맞으면서도 초콜릿 강매를 거부했던 주인공 제리 르노가 억압에 끝까지 저항한 소영웅으로 그려질 수 있는 것도 그 반대편에 아치 코스텔로 같은 악랄한 반영웅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의 공권력에 맞서 부당한 질서에 균열을 일으킨 제리. 그의 사물함에 붙어 있는 포스터 “내 감히 우주를 어지럽히랴?”는 결과적으로 허망하다. 부당한 권력에 타협할 줄 모르던 제리는 결국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한 자를 처단하려는 아치 코스텔로의 제안이 교활한지 알면서도 받아들인다. 사나이의 명예 회복과 복수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벌어진 이 권투시합은 이미 패배자가 정해진 마지막 게임이나 다름없었다. 이길 확률이 거의 없는 이 시합이야말로 아치 코스텔로의 권력을 확고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될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인생이 부패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진정으로 이 세상에 영웅은 없으며,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조차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제리 르노의 최후는 기실 실패한 영웅의 운명과 겹친다. 그러나 비록 패배자일지언정, 양심에 의해 판단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정의에 대한 믿음을 행동으로 일관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야말로 힘없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아기장수가 아니겠는가?

『초콜릿 전쟁』에서 제리는 학교의 구조적 모순에 원칙으로 맞섰다가 붕괴되고 만다. 공생적이거나 기생적인 권력 구조는 끊임없이 왕따를 생산해 낸다. 비단 악에 물들기 쉬운 학생들만이 아니라, 이들이 모방하고 있는 기성 사회는 이를 통해 공포 분위기마저 조성한다. 공포야말문학로 현 체제를 유지하는 거대 시스템인 것이다. 누군가를 왕따로 만드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문화된 법규를 버젓이 바꿀 수 있는 행태도, 내부 비리의 발각을 피해 거짓말을 해대는 행태도 트리니트 스쿨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구조적 위선 앞에서 학생 개개인은 무력하다. 하지만 제리 같은 아이가 최소한 몇 명이라도 모여 힘을 낸다면, 왕따 문화를 은근히 묵인하는 학교 문제를 조심씩이라도 천천히 해결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제리는 생각에 있어서 무능하지도, 판단에 있어서 무능하지도, 행동에 있어서 무능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악에 전염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로 얽힌 동물 생태계와 학교 사회는 어쩐지 흡사하다. 사냥꾼의 대열에 끼지 않으면, 누구든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을 학교에서 배우는 아이러니라니!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소설에서보다 더 끔찍하고 더 무시무시한 감옥에 다름 아니다.




<집으로 돌아가자>라는 미니앨범을 내고 가수로 데뷔한 가와카미 미에코. 그 후 그녀는 「끝으로, 찌를 거야 찔릴 거야 자, 됐어」란 독특한 제목의 시를 발표하여 일본 문단에 등단하고 2007년에는 『젖과 알』이란 소설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왕따 따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소위 잘 나가는 가와카미 미에코가 쓴 『헤븐』을 보자. 필자는 우리와 유사한 학교 제도를 지닌 일본 사회에서 ‘왕따’를 바라보는 시각과 더불어 청소년 소설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리고 “용기를 잃지 마. 너를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어딘가 틀림없이 있어.”라는 메시지를 통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발견했다.

중학생인 1인칭 화자 나(남자)는 사시이다. 그래서인지 니노미야 패거리에 불려 다니며 괴롭힘을 당한다. 줄넘기 줄로 손목이 묶이고 걸레를 입에 문 채 라커에 갇히는 심각한 폭력을 당하곤 하지만, 도움을 요청할 친구가 없다. 사실 양심 있는 아이들이라도 니노미야 패거리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친구가 당하는 부당한 폭력을 외면하는 편을 택한다. 이야기의 주인공 나는 걸레를 입에 문 채로 시커먼 라커에 갇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학급의 또 다른 왕따인 고지마를 떠올린다. 온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동급생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는 찌질이 여학생 고지마를. 그러면서 죄책감을 느낀다. 당하고 있는 고지마를 볼 때 느꼈던 도와주지 못하는 자의 비굴함과 자기혐오감이 밀려온다. ‘만일 지금 고지마가 당하고 있는 나를 보면 같은 기분일까?’라며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나는 어느덧 고지마의 친구가 된다.

어느 날 나는 편지를 받는다. 하루 종일 한 교실에 앉아 있어도 절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고지마로부터 온 편지이다. 이윽고 나는 동정 없는 이 얼음장 같이 차가운 세상에서 최초로 친구를 갖게 된다. 그렇게 남자 왕따 나와 여자 왕따 고지마의 우정은 햇빛 반듯한 날, 둘이 전철을 타고 찾아간 미술관에서 이어진다. 나는 고지마가 말한 ‘헤븐’이 한 장의 그림임을 알게 되고, 고지마의 눈물을 목격한다. 한데, 한없이 작고 약해 보이는 고지마의 눈물 앞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나는 무력감을 느낄 뿐이다. 그런 내게 고지마는 나직이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약할지 모르지만, 이 약함은 아주 의미가 있는 약함이거든.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잖아?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나쁜 건지. 우리처럼 당하게 될까봐 보고도 못 본 척, 녀석들의 비위를 맞추고 같이 웃는 반의 모두가 자기 손만은 더럽지 않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 애들은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거야. 그 애들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녀석들하고 완전히 똑같다고. 반에서 그 녀석들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관계가 없는 건 나랑 너뿐이야.”

이쯤에서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스탠포드 모의 감옥 실험이 떠오른다. 실험 참가자들은 불합리한 지배에 맞서지 못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시스템에 복종하고 악의 하수인이 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헤븐』에서 대다수의 아이들이 취한 태도, 혹은 수많은 교실에서도 다르지 않을 방관자 혹은 공모자가 되어버리는 아이들의 태도를 향해 고지마는 일침을 가하고 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누구든 잠재적 왕따인 게 현실이다. 사실 왕따를 만드는 패거리 문화는 사춘기 고유의 질풍노도 때문이 아니다. 어른들 세계에서는 훨씬 오래 전부터 더욱 노골적이고 더욱 은밀하게,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왕따 문화가 고착되어 있다. 세 권의 책을 모두 덮고 나니 하나의 공통점이 마음에 걸린다. 악의 세력과 공범이 되고 마는 평범한 아이들. 그러나 이들도 한 명씩 떼어놓고 보면, 아직은 무지하고 여전히 순박한 정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왕따라는 집단 폭력에 순순히 동조한 가해자라고만 할 수 있을까? 동시에 피해자이지는 않을까? 여러 생각들이 교차한다. 과연 가해에 가담한 이들의 죄목은 무엇이 올바른지 사고할 줄 아는 능력의 결여 탓일까? 아니면,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권위 앞에서 복종하는 편이 개인적 안위를 보장받는 방법임을 어른들의 세계를 통해 미리 알아버린 것일까?

유대인 학살에 적극 가담했지만, 정작 큰 상처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떠오른다. 수백만 죄 없는 유대인을 살육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령은 지키는 것이 도리’라는 칸트의 명언까지 인용하며,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질책한다. 평범한 아이들 사이에서 전염병처럼 퍼진 왕따 현상의 배후에도 ‘악의 평범성’에 물든 사회와 가정과 학교가 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를 어떻게 길러줄 수 있을까? 어른들이 먼저 패거리 문화를 존속시키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 왔던 나쁜 습속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악의 평범성’을 넘어서는 모범을 보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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