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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잡이 길잡이 [편집자의 시선 청소년 인문 책 짚어보기]쉽고 재미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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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3-10 21:29 조회 6,82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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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은 출판사들이 청소년 시장에 뛰어들었다. 아무래도 학교도서관이라는 출판계 불황과는 약간 거리를 둔 안정적인 수요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주변을 둘러보면, 과거에는 성인을 대상으로 출간했을 법한 내용의 책들이 ‘쉽고 재미있는’ 편집을 거쳐 청소년 대상으로 나오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청소년 인문학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항상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과연 공부가 언제 한번이라도 ‘쉽고 재미있던’ 적이 있었는가 싶다. 요즘 청소년들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책을 읽지 않는다는 한탄도 들리지만, 한창 또래 문화에 어울려야 할 십대 때 스마트폰은 책가방 속에 틀어박혀 울리지도 않고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도움이 되는’ 책만 붙들고 있는 학생이 있다면 그게 더 무서운 일 아닐까?

공부라는 건 대개는 새로운 지식을 접하는 일이고, 새로운 지식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의 나열일 때가 많아 몇 장만 읽으면 지루하기 마련이고, 지루하면 졸리고, 졸리면 짜증나서 읽기 싫은 게 평범한 우리들의 십대 시절이었을 것이다. 책상과 화학적으로 결합해 산더미 같은 책들을 촉매로 서울대 간 주변의 아는 누구는 잠시 잊어버리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인문학 강좌나 도서들을 권하는 수많은 글들은 달콤한 거짓말을 한다. “꼭 입시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청소년들이 살아갈 10년, 20년 뒤 미래에는 인문학적 소양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라고. 역시 먹고 사는 일은 무서운 것이다. 당장 내년에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릴지 어쩔지도 모르는 판에, 그래도 좀 배웠다고 하는 어른들이 학생들과 자녀걱정에 근심하는 학부모들을 상대로 듣기 좋은 말과 때로는 다른 아이들에게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선전들을 쏟아내고 있으니.

#2
편집자 입장에서 청소년 인문학 책을 기획하고 원고를 청탁하고 탈고된 원고를 받아들었을 때 누구나 겪는 공통적인 상황이 있다면, ‘이거 너무 어렵잖아!’ 아닐까 싶다. 아마도 많은 청소년 책 편집자들이 이런 경우에 부딪히면, 원고에서 너무 전문적인 내용을 다룬 부분을 덜어내고, 너무 세세한 부분도 덜어내고, 교과서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 부분을 쳐낸 다음 신국판 기준으로 200쪽 안팎으로 줄어든 분량을 열심히 쉬운 문장으로 다듬느라 고생할 것이다.

그런 다음 컬러 도판과 멋진 디자인의 도움을 받아 마무리하면, 얼핏 보기에도 ‘재미있어 보이는’ 청소년 인문학 책이 탄생한다. 이제 남은 건 도서관 납품을 위한 각종 추천도서 선정에 도움이 될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증정도서를 보내고, 관련 매체에 광고를 하고 서점 이벤트를 벌이며 판매지수가 올라가길 기다리는 일뿐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 걸까? 책을 잘 만들고 못 만들고를 떠나서, 정말 이렇게 축약하거나 전체 맥락이나 배경을 간략히 처리한 채 특정 부분만을 다룬 책을 청소년들에게 권해도 되는 것일까? 텍스트의 힘이 약해도 디자인의 힘으로 팔리면 그것도 그냥 팔린다고 좋아해야 하나? 차라리 마케팅비로 몇 년째 10퍼센트에서 늘지 않는 저자 인세를 올려 주면 혹시 서점에서 싫어하지는 않을까?

가끔 서점에 나가 잘 팔리는 청소년 책들, 특히 인문학 책들을 보다 보면 스스로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아 부끄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도서출판 다른에 다니는 동안 만든 <세계사 가로지르기 시리즈>는 중학생이 읽기에는 다소 어렵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사물이나 관념을 키워드로 세계사 전체를 설명한다는 시도가 지금과 같은 흐름에서는 청소년 대상으로 적절치 않은 기획이었을지도 모른다. 20권에 달하는 국내 저작물 시리즈라는 점도 순식간에 편집해서 세트로 묶어 납품이나 홈쇼핑 등으로 매출을 올리기 어려운 조건이다. 그나마 문광부와 교과부, 그리고 각종 독서 관련 단체에서 추천도서로 선정해 준 덕분에 꾸준히 판매가 늘고 있어서 중간에 멈추지 않고 내년 봄에는 완간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청소년들이 인문학 책을 읽는, 혹은 읽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학교에서 시켜서’일 것이다. 그리고 10년, 20년 뒤에도 학교에서 시키는 과제를 안 하고 학교를 다니는 건 학생으로서 참 괴로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시리즈를 만들 때, 굳이 다 안 읽어도 독후감 쓸 수 있도록 머리말과 맺음말을 본문 축약형으로 성실하게 달아 주었다. 좀 더 관심이 가면 본문을 읽으며 교과서에 나올 일 없는 상식들도 찾아보라고 일러스트 대신 가급적이면 유명한 사진들로 도판을 채웠다. 내용의 난이도는 서울대 가려는 학생이라면 100퍼센트 이해 가능한 정도이지만, 무리해서 쉽게 풀어 쓰려고 맥락을 훼손하는 편집은 하지 않았다. 기획의도가 원래 입시에 초점을 맞추지 않아 학교 내신에는 별 도움이 안 되겠지만, 만일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것이 정말 있어서 질풍노도 시기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면 청소년들에게 권하기에 부끄럽지는 않은 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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