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잡이 길잡이 [나와 청소년문학]잡지 <청소년문학>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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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9-21 16:33 조회 6,042회 댓글 0건본문
박상률 소설가
내가 지은 책의 책날개에 지은이 약력을 쓸 때 빠트리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계간 <청소년문학>의 편집주간을 오랫동안 맡았다는 것이다. <청소년문학>은 2006년 여름 호로 창간하여 2011년 겨울에 마지막 책을 펴냈다. 2011년 겨울 호가 통권 23호였으니, 햇수로 무려(?) 6년간이나 편집주간을 맡았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6년보다 더 긴 세월을 잡지에 바친 사람이 많아 내가 겪은 6년은 우스울 수도 있지만, 이 땅에서 처음 펴낸 청소년문학 관련 잡지였는지라 선례가 없어 애를 많이 먹은 탓에 그렇게 표현한다.
예나 지금이나 문학 동네에서는 미운 사람에게 문학 잡지를 하라고 권하면 된다는 속언이 있다. 그만큼 문학 잡지는 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런데 문학 잡지 가운데에서도 청소년문학 잡지는 더 어려웠다!
<청소년문학>을 시작할 때 창간호에서 나는 호기롭게 선언했다. <청소년문학>은 무엇보다도 걷기와 같은 책이 될 것이라고!
예나 지금이나 문학 동네에서는 미운 사람에게 문학 잡지를 하라고 권하면 된다는 속언이 있다. 그만큼 문학 잡지는 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런데 문학 잡지 가운데에서도 청소년문학 잡지는 더 어려웠다!
<청소년문학>을 시작할 때 창간호에서 나는 호기롭게 선언했다. <청소년문학>은 무엇보다도 걷기와 같은 책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이러한 모든 현상을 보고 새로운 의미를 담을 종이책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속도감 있는 다른 매체들과 달리 종이책은 느리게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느림의 과정에서 독자는 느끼고 생각하고 정리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것이다. 인간의 사고 기제는 자신의 걸음 속도와 같이 갈 때 가장 이상적으로 작동한다고 하지 않은가. 종이책은 바로 걷기와 같은 것이다. 인터넷 같은 매체는 뜀박질인데, 인간은 빨리 뛰면서는 깊은 생각을 하기 어렵다.
<청소년문학>은 바로 걷기와 같은 책이 될 것이다. 온갖 매체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한 아이들이 종이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다듬도록 할 것이다. 정신없이 뛰던 아이들이 걸으면서 숨을 고르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도록 할 것이다.
<청소년문학>은 바로 걷기와 같은 책이 될 것이다. 온갖 매체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한 아이들이 종이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다듬도록 할 것이다. 정신없이 뛰던 아이들이 걸으면서 숨을 고르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도록 할 것이다.
– <청소년문학> 2006년 여름 호 ‘창간호를 펴내며’
<청소년문학>의 창간호 머리말을 쓸 때가 2006년 봄이었으니, 10년 세월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강산이 많이 변했다. 청와대 전 입주자였던 이 머시기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큰 강을 다 도륙 내고도 아무 일 없이 살고 있다. 그는 죽지도 않은 강을 살린다며 말의 혼란을 일으켰다. 말이 혼탁해지면 생각하는 것조차도 같이 타락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 가방끈이 긴 추종자들은 그의 말을 좇아 사람들을 겁박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산과 강 모두 지금 신음하고 있다. 지금 산과 강뿐만 아니라 거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도 비명에 가깝다. <청소년문학>은 그런 어른들의 신음 소리보다 더 절실한 아이들의 신음 소리를 담아냈다. 대한민국의 강산이 망가져 가는 만큼 아이들의 삶도 더욱 망가졌다.
<청소년문학>을 처음 준비할 때에 무엇보다도 심혈을 기울인 것은 아이들의 독서 환경이다. 텔레비전, 인터넷, 휴대전화기, 온갖 영상물 등이 아이들로 하여금 책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는 ‘유혹물’이었다. 어른들은 일찌감치 그런 것에 빠져들어 허우적대고 있었다. 어른들은 차치하고 아이들만이라도 그런 것에 중독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몸부림했다. 그래서 ‘종이책을 읽자’며 종이 잡지를 창간했던 것이다. 종이책은 일단 자기 머리로 생각을 하게 해 준다는 생각을 했다. 종이책 아닌 것에서도 얻을 것은 많지만 다른 매체들은 대부분 너무나 ‘핑핑’ 도는 속도 경쟁을 부추긴다. 틈이 없다. 그래서 생각할 여유가 없다. 이미 주어진 대로 머리를 작동하거나 손가락을 놀리기만 하면 된다.
아이들의 독서 환경을 나쁘게 한 건 새로운 매체들만이 아니다. 더 나쁜 것은 모든 것을 시험 위주로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학교 관련 어른들의 속셈이었다. 논술이니 대학입학 시험이니 하는 것을 들먹여 아이들에게서 책 읽기의 즐거움을 빼앗은 뒤, 독서마저도 성적으로 줄 세우려 하는 어른들. 하지만 나는 나쁜 환경에 빠진 아이들의 처지를 나쁘게만 보지 않고 애써 긍정적으로 보면서 어떤 환경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청소년문학>을 처음 준비할 때에 무엇보다도 심혈을 기울인 것은 아이들의 독서 환경이다. 텔레비전, 인터넷, 휴대전화기, 온갖 영상물 등이 아이들로 하여금 책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는 ‘유혹물’이었다. 어른들은 일찌감치 그런 것에 빠져들어 허우적대고 있었다. 어른들은 차치하고 아이들만이라도 그런 것에 중독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몸부림했다. 그래서 ‘종이책을 읽자’며 종이 잡지를 창간했던 것이다. 종이책은 일단 자기 머리로 생각을 하게 해 준다는 생각을 했다. 종이책 아닌 것에서도 얻을 것은 많지만 다른 매체들은 대부분 너무나 ‘핑핑’ 도는 속도 경쟁을 부추긴다. 틈이 없다. 그래서 생각할 여유가 없다. 이미 주어진 대로 머리를 작동하거나 손가락을 놀리기만 하면 된다.
아이들의 독서 환경을 나쁘게 한 건 새로운 매체들만이 아니다. 더 나쁜 것은 모든 것을 시험 위주로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학교 관련 어른들의 속셈이었다. 논술이니 대학입학 시험이니 하는 것을 들먹여 아이들에게서 책 읽기의 즐거움을 빼앗은 뒤, 독서마저도 성적으로 줄 세우려 하는 어른들. 하지만 나는 나쁜 환경에 빠진 아이들의 처지를 나쁘게만 보지 않고 애써 긍정적으로 보면서 어떤 환경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요즘 아이들이 처한 환경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 인터넷 글쓰기 같은 게 가벼운 것 같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문자를 활용한다. 게다가 휴대전화가 나오자 ‘이제 문자는 영영 끝나는군’ 했다. 그러나 오히려 문자 보내기 기능이 있어 아이들은 그걸 더 활용한다. 좁은 글자판에 글자 수를 맞춰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아이들은 그것조차도 잘 활용하여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문자로 소통하는 것이다. 또 인터넷에 개인 블로그나 카페 같은 것이 생겨 시나 소설의 짧은 대목이 예전보다 더 많이 소개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오히려 의미 있게 살피며 그걸 적극 활용하고자 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작년에 시작한 사이버문학광장 안의 글틴 같은 코너를 보라. 아이들은 이미 그 마당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이버 공간 안에서의 한계를 벗어나 현실 공간 안에서의 만남이나 글쓰기 활동을 하고자 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작년에 시작한 사이버문학광장 안의 글틴 같은 코너를 보라. 아이들은 이미 그 마당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이버 공간 안에서의 한계를 벗어나 현실 공간 안에서의 만남이나 글쓰기 활동을 하고자 한다.
–<청소년문학> 2006년 여름 호 ‘창간호를 펴내며’
실제로 그렇다. 요즘 아이들을 두고 책을 읽지 않느니, 독해 능력이 떨어지느니 하지만 전적으로 옳은 말은 아니다. 단지 종이책을 덜 읽긴 하지만 나름대로 글을 읽으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세상이 열리면서 아이들은 예전보다 글쓰기를 더 많이 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글자를 많이 접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글자를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속의 글은 미처 생각할 틈 없이 휙휙 지나가는 터라 글의 맥락을 돌아볼 틈이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 요즘 아이들도 나름대로 글을 쓴다. 어쩌면 예전 아이들보다 글을 쓸 기회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요즘 아이들의 글쓰기는 거의가 그림이나 사진 위주의 이미지를 안내하는 정도이다. 워낙 이미지에 길들여지다 보니 글로 상황을 그려내지 못한다. 웬만한 것은 사진으로 대체하고, 사진 밑에 설명만 붙인다. 글이 많으면 읽어 내지도 못하고 글로 상황을 그려 내지도 못한다. 앞에서 독해 능력이 떨어지는 것만도 아니라고 했지만, 시험에 나오는 것만을 두고 보면 독해 내지 이해 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그런 것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어리둥절해하고 횡설수설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사이버문학광장의 ‘글틴’ 같은 것도 공간만 사이버상이지 실제는 시, 소설, 생활글 등이 밑바탕을 이루었다. <청소년문학>은 새로운 환경의 변화를 나름대로 수용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글을 읽고 글을 쓰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그런데 지금은 <청소년문학>을 못 낸다. 다만 잡지 환경이 바뀌어서만은 아니다. 10여 년전에, 경제적으로 더 어려울 때에도 내던 잡지였다. <청소년문학>뿐만 아니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다른 잡지도 나오지 않는다. 정부에서고 기업에서고 출판사에서고 청소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되어 언론에 오르내릴 땐 모두들 입에 거품을 물고 ‘학교 교육이 어쩌고, 가정교육이 저쩌고’ 하지만 이내 곧 조용해지고만다. 그렇기에 정부도 지원을 않고 기업도, 출판사도 지원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아이들을 대상으로 돈벌이하는 것에만 몰두한다. 아이들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그런 건 상관할 바가 아니다. 다들 나 몰라라 한다. 그 사이 아이들은 더욱 멍들어 간다. 사회 경제적으로 무척 성숙한 사회 같지만 우리 사회는 결코 성숙한 사회가 아니다. 청소년 잡지 하나 유지할 수 없는 나라이다. 오로지 신자유주의 기치 아래에서 수익이 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 수익도 당장 나야 한다. 절대로 기다릴 수 없다. 이런 상황인데 <청소년문학>을 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청소년문학>이 폐간이 아니라 휴간이라 생각하고 다시 펴낼 날을 기다린다. 그래서 몇 해 전에 잡지 <청소년문학>에 대해 이런 의견을 밝혔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글자를 많이 접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글자를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속의 글은 미처 생각할 틈 없이 휙휙 지나가는 터라 글의 맥락을 돌아볼 틈이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 요즘 아이들도 나름대로 글을 쓴다. 어쩌면 예전 아이들보다 글을 쓸 기회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요즘 아이들의 글쓰기는 거의가 그림이나 사진 위주의 이미지를 안내하는 정도이다. 워낙 이미지에 길들여지다 보니 글로 상황을 그려내지 못한다. 웬만한 것은 사진으로 대체하고, 사진 밑에 설명만 붙인다. 글이 많으면 읽어 내지도 못하고 글로 상황을 그려 내지도 못한다. 앞에서 독해 능력이 떨어지는 것만도 아니라고 했지만, 시험에 나오는 것만을 두고 보면 독해 내지 이해 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그런 것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어리둥절해하고 횡설수설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사이버문학광장의 ‘글틴’ 같은 것도 공간만 사이버상이지 실제는 시, 소설, 생활글 등이 밑바탕을 이루었다. <청소년문학>은 새로운 환경의 변화를 나름대로 수용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글을 읽고 글을 쓰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그런데 지금은 <청소년문학>을 못 낸다. 다만 잡지 환경이 바뀌어서만은 아니다. 10여 년전에, 경제적으로 더 어려울 때에도 내던 잡지였다. <청소년문학>뿐만 아니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다른 잡지도 나오지 않는다. 정부에서고 기업에서고 출판사에서고 청소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되어 언론에 오르내릴 땐 모두들 입에 거품을 물고 ‘학교 교육이 어쩌고, 가정교육이 저쩌고’ 하지만 이내 곧 조용해지고만다. 그렇기에 정부도 지원을 않고 기업도, 출판사도 지원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아이들을 대상으로 돈벌이하는 것에만 몰두한다. 아이들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그런 건 상관할 바가 아니다. 다들 나 몰라라 한다. 그 사이 아이들은 더욱 멍들어 간다. 사회 경제적으로 무척 성숙한 사회 같지만 우리 사회는 결코 성숙한 사회가 아니다. 청소년 잡지 하나 유지할 수 없는 나라이다. 오로지 신자유주의 기치 아래에서 수익이 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 수익도 당장 나야 한다. 절대로 기다릴 수 없다. 이런 상황인데 <청소년문학>을 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청소년문학>이 폐간이 아니라 휴간이라 생각하고 다시 펴낼 날을 기다린다. 그래서 몇 해 전에 잡지 <청소년문학>에 대해 이런 의견을 밝혔다.
마침표(.)를 칠 수 없어 쉼표(,)를 쳤다. 내게 잡지 <청소년문학>은 그런 존재다. 내가 생을 마칠 때까지 마침표를 칠 수 없는 내 사랑의 대상. 내게 문학의 한 갈래로서의 청소년문학 역시 영원히 마침표 없는 문학이다. 그러니 잡지 <청소년문학>이라고 다르겠는가. 잡지 <청소년문학>은 지금 쉬고 있다. 하지만 잠깐 쉴 수는 있어도 이대로 마칠 수는 없다. 그래서 쉼표로 시작했다.
–<기획회의> 327호, 2012년 9월, ‘<청소년문학>의 의미’
그렇다. <청소년문학>을 이대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누군가가 다시 맡아 쉼표(,)를 빨리 걷어 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 책의 책날개 약력은 이렇게 달라질 것이다. 계간 <청소년문학> 초기에 편집주간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