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함께 [교사의 책 ]수업,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1-24 11:28 조회 6,642회 댓글 0건본문
정재연 서울효제초 사서교사
초보 교사 시절, 우연히 한 학생의 4학년 1학기 사회 교과서를 보게 되었다. 해당 페이지는 우리나라 시도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 배우는 단원이었는데, 인천을 예시로 강화도의 유물유적 사진이 함께 실린 것으로 기억한다.(지금은 ‘2009 개정 교육과정’이 도입되면서 내용이 바뀌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학생의 필기 내용이었다. 교과서 여백이 모자라 포스트잇까지 붙여 가며 빼곡히 적은 내용들은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학기말에 해당 학년의 사회 시험에는 강화도에 대한 문제가 상당수 출제되었다.
초등교육과정을 처음 접하는 초짜 사서교사의 눈으로는 이 모든 장면이 낯설었다. 분명 교과서에 제시된 해당 단원의 목표는 우리 시도의 변화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 학교는 종로 한복판에 위치했는데, 왜 서울 대신 인천을 배우고 게다가 시험까지 보았을까?
교사에게 교과서는 대체 어떤 의미인가?
그렇게 초등교육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교과서의 위력은 대단했다. 교과서의 일부를 수업 중에 다루지 않았는데, 하필 그게 일제고사에 나와서 학부모와 교장의 항의로 학교가 발칵 뒤집힐 만큼 교과서는 ‘신’이었다. 그런데 대놓고 교과서 자체를 버리자고 말하는 교사가 있다. 바로 『선생님은살아 있는 교육과정 이다』의 저자 김용근이다.
『선생님은 살아 있는 교육과정이다』김용근 지음|물병자리|2014
그가 맨 처음 지적하는 것은 교육과정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당위의 말이아니다. 교사 개개인의 성찰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본문은 반복해서 미디어세대가 선물한 “정신산만병”에 빠져버린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책임을 아이들이 아닌 교사, 즉 우리에게 묻는다. 아침에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컴퓨터 부팅인지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는 것인지 묻는 저자의 질문에 당당할 이가 몇이나 될까? 이런 자기반성을 바탕으로 하기에 “교육의 기본 주체는 사람이다. 교사는 스스로 그 중요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11쪽)라는 말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저자는 과연 어떻게 교사의 존재 가치를 찾았을까? 본문에서는 책 전체의 2/3 정도 되는 분량인 200여 페이지에 걸쳐 국어·수학·과학·사회·음악 등 각 교과별로 김 교사가 현장에서 실천해 온 대안적 교육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각 장을 여는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대한 비판 부분, 즉 기능 중심의 개념주입식 교육이며 교육철학 자체가 없다는 날카로운 지적은 마음을 답답하게 하지만, 각 교과별로 제안된 교육의 방향성과 실천 모습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그가 제시하는 수학교육의 한 부분을 살펴보자.
“‘7=4+3’의 계산 방법은 ‘나누어주는 것’, 즉 아이들이 자기 자신의 일부를 내어 주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이타적인 태도를 가지게 만든다. (중략) 셈하기를 잘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나누어 쓸 것인가, 즉 삶을 어떻게 살까에 해당한다.”(94쪽) “‘2+5=7’ 따위의 계산 방식은 알게 모르게 아이들의 욕심을 강화시키고 있다. 좀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만드는 것 이다. 결국 알게 모르게 탐욕(소유욕)의 태도를 지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104쪽)
그래서 셈은 “4+3=7보다는 7=4+3으로 가르쳐야 한다.”라는 결론 앞에 무릎을 치게 되며, 전 교과에 걸쳐 “전체에서 부분을 지향”하는 그의 교육관이 어째서 “도덕적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다가서는지 이해되기 시작한다. 타 교과도 같은 교육적 성찰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다. 옛이야기를 통한 국어수업, 동네학으로 알아가는 사회수업, 살아 있는 소리로 청각을 길러 주는 음악수업, 집짓기 등 융합교육뿐만 아니라, 차라리 도덕교과 자체를없애 버리라는 지적도, 교장 없이 평교사 협의체를 두자는 지적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읽어 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교육관의 바탕에는 발도르프 교육 철학이 자리한다. 하지만 이 책을 단순히 공교육형 발도르프 교육이라고 범위를 축소시키고 싶지는 않다. 저자는 방법에 대한 모방보다는 “아이들 발달단계에 맞는 교육과정을 수립해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우리에게 맞는 실천 방법을 모색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에게 교과서 버리기의 가능성을 경험시켜 줄 것이다.
저자가 교육에 대한 본질을 발도르프에서 발견했고, 그 안에서 교육과정의 새로운 모습을 꿈꾸었다면, 우리는 아니 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타인의 교육과정이 아무리 철학적이고 좋더라도 그대로 따라한다면, 본질적으로 그냥 교과서를 쭉 읽어 주는 수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자, 이제 그 고민을 제대로 시작해 보자.
나를 내려놓기, 수업 보기의 시작
『수업, 어떻게 볼까?』서근원 지음|교육과학사|2013
“당신이 생각하는 교육이란 무엇입니까?” 보통 교육학자들은 이 질문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본인의 경험과 연구 결과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교사들도 대부분 그러하다. 자신이 만든 기준에 따라 수업을 바라보고, 아이들이 내가 제시하는 기준을 내면화시키기 바란다. 그런데 『수업, 어떻게 볼까?』의 저자 서근원 교수는 좀 다르다. 자신의 교육관을 세련된 언어로 정리하는 대신, 반대로 독자에게 되묻는다. 지금 당신은 어떤 관점으로 교육을, 수업을 바라 보느냐고. 그리고 권한다. 나를 내려놓고 타인의 시선으로 수업을 바라보면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지 ‘같이’ 가 보자고. 저자가 제시하는 수업 보기 방식인 “아이 눈으로 수업 보기”는 상당히 낯설다. 모든 종류의 체크리스트를 버리고, 단지 수업을 보고 기록한다. “평가하지 않고, 이해하는 방향으로 관찰”하며, “정답 대신 질문을 가지고”(251쪽) 수업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내(관찰자)가 아닌 수업자와 학습자 입장에서 실제 어떤 경험이 이루어졌는지를 재구성하게 한다. “타인의 행위를 타인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232쪽) 실천하는 동시에 “학생과 수업을 바라보는 교사의 시선을 전환”(245쪽)하는 과정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이 철저히 질문과 대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때문에 남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깨닫는 경험이 뒤따른다. 같은 수업을 이리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되고, 정작 아이는 교사인 내 의도와는 별개로 “저마다의 방식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저마다 의미 있는 방식으로 학습해 나감”(284쪽)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내 안의 굳건히 자리 잡은 ‘교육은 이래야 한다’는 신념을 조금씩 내려놓도록 돕는다.
그렇게 “교사가 의도하거나 가르치는 대로 학습하게 된다”는 생각이 “신화”였음을 희미하게 느끼게 될 즈음, 진정한 “수업개선은 교육철학의 변화와 깨달음에 있다.”(283쪽)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은 남다르다. 교사가 주체가 되어 기준을 내세우며 가르치는 교민(敎民)에서, 대화를 통해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깨치도록 하는 회인(誨人)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왜 우리가 연수라는 이름 아래 소비자의 위치에만 서 있어 왔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저자는 수업은 이래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는 대신, 조금은 더디지만 교사들 스스로 깨달아가며 “학생들이 스스로 깨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조언하는 역량”(45쪽)을 기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여기에 더하여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단순히 교실속 수업 개선에 그치지 않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게 “교사가 의도하거나 가르치는 대로 학습하게 된다”는 생각이 “신화”였음을 희미하게 느끼게 될 즈음, 진정한 “수업개선은 교육철학의 변화와 깨달음에 있다.”(283쪽)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은 남다르다. 교사가 주체가 되어 기준을 내세우며 가르치는 교민(敎民)에서, 대화를 통해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깨치도록 하는 회인(誨人)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왜 우리가 연수라는 이름 아래 소비자의 위치에만 서 있어 왔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저자는 수업은 이래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는 대신, 조금은 더디지만 교사들 스스로 깨달아가며 “학생들이 스스로 깨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조언하는 역량”(45쪽)을 기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여기에 더하여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단순히 교실속 수업 개선에 그치지 않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누군가의 마음을 읽고 내 마음을 열어 그를 향해 흘러들어가는 방법도 배웠다. (중략) 이러한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서로 분리되어 있던 수업자・관찰자・아이가 마음속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아이 눈으로 수업 보기 작업은 교사들이 저마다의 교실에서 고립된 채로 자신만의 담을 쌓고 살아가는 학교의 문화를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287쪽)
그러나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 “교육에 대한 그 인식의 전환은 언어적 설명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며”(52쪽) 또한 “지향하는 것(誨人)과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이 일관성 있도록 해야”(44쪽) 하기 때문이다. 책도 책이지만, 일단 부록에 실린 워크숍 보고서 두 편을 먼저 읽고, 방학 중 열리는 워크숍과 익산에서 격주로 이루어지는 공부 모임에 뛰어가길 권한다. (연수 정보는 ‘이해마을:비움 http://cafe.naver.com/shizhong’를 참고.) 그렇게 치열하게 그리고 함께 손잡고 “수업이 적절한지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준거는 학생의 의미 있는 학습”(73쪽)이라는 말의 의미를 찾아보자.
학생 중심 수업, 우리만의 색깔 찾기
아이 입장에서 수업을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학교가 교육 공동체라는 말은 대체 무엇이 바뀐다는 걸까? 완벽한 답은 아니지만, 조금은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한다. 이번에 소개할 주인공은 한울중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이다. 이들은 서울형 혁신학교에 근무하며 참 많은 일들을 겪는다. 아무래도 주로 수업이 주된 일들인데, 그들도 수업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여느 다른 혁신학교들처럼 배움의 공동체를 도입하였다. 하지만 곧 대대적인 혼란에 빠진다. “아이들은 모둠 토론 시간을 잡담으로 채우기 시작했고”(60쪽) 공개수업과 수업 참관, 심지어 수업연구회 역시 “새로운 수업을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63쪽)라고 고백한다. “1학기를 마쳤을 때 우리는 배수의 진을 치고 임한 전투에서 패배 일보 직전에 몰린 것과 같았다.”(65쪽)라고 말할 정도로 상황은 썩 좋지 못했던 듯하다.
『아이들이 몰입하는수업 디자인』남경운 외 지음|맘에드림|2014
그렇게 그들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진 옷(공개 수업, 컨설턴트, 배움의 공동체 등)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별 뾰족한 대안 없이 답답한 마음을 모아 “수업모임”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결정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우연히 공개수업을 위한 활동지를 검토했는데, 중등이라 타 교과의 교사들이 수업자의 교과에 무지(?)하다보니, 의도하지 않게 스스로가 학생의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휴! 이래서 과학이 싫구나!”, “이 지문은 좀 어려워서 뭔가 문장을 직접 구안해 내야 할 것 같아요.”, “왼쪽 그래프가 헷갈려요.” 등 활발한 소통을 통해 수업이 조금씩 바뀌어 간다.
그리고 이렇게 수업을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은 또 다른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미 수업의 흐름과 아이들의 학습 흐름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252쪽)에, 공개 수업 참관 시 온전하게 아이들의 반응만을 관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들은 많은 것을 깨달아 간다. 교사가 순서대로 가르치더라도 아이들은 “순서대로 학습하지 않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의 학습 경험은 모두 다르다는 것과 마주하게 된 것. 그래서 그들은 “틀렸어.”라는 말보다 “왜 안 썼어?”라는 말에 주목할 수 있게 되고, 아이 개개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수업을 준비”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범교과 수업모임에서 수업 공동설계” 하기가 아직 모든 일상 수업에까지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외부에서 답을 찾지 않고 치열한 고민 속에서,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냈다는 점이 마음을 뜨겁게 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자신감을 나누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