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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잡이 길잡이 [왕샘의 교단독서일기] 일상적인 공간을 바꾸는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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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12-31 09:47 조회 5,87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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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지윤 인천 경인여고 국어교사
 
1. 일상적인 아침
학교를 향해 집을 나선 아이들의 아침은 버스를 기다리는 일로 시작된다. 초조한 마음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대기시간이 자꾸 지연되는 전광판을 바라보며 속 태웠던 경험은 누구나 한두 번 겪기 마련이다. 만석이라고 다음에 오는 차를 타라며 버스가 지나쳐 가면 아이는 멘붕이 된다. 버스가 도착하고, 아이는 서둘러 버스에 오른다. 아직 피곤을 털어내지 못하고 힘없이 늘어진 어깨를 고단하게 기대고 흔들리며 아이는 손잡이를 움켜쥔다. 지각을 힐난하는 선생님의 표정을 떠올리며차창으로 흘러가는 등굣길의 어지러움을 눈을 감아 몰아낸다. 버스 안은 피로를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자란 잠을 채우는 숨소리로 가득하다.
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오고 있는 시간, 선생님들은 교실에서 아이들을 기다린다. 원래는 차분하게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라는 자율학습 시간이지만, 선생님들은 아직 오지 않은 아이들부터 확인하기에 분주하다. 졸업 후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전문계 학생들에게 출결은 성적만큼이나 비중 있게 관리되어야 할 사항이다. 중학교 때부터 시간관리가 느슨했던 학생들에게 거리가 멀어진 고등학교로 출발하는 아침 등교는 힘겨운 미션이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책상 위에 머리를 내려놓는 아이들은 정신없이 잠에 빠져든다. 버스 안의 풍경이 교실에서 또 한 번 재현된다.
“버스가 오지 않는데 그럼 어떡하란 말이에요?” 지각을 꾸지람하는 나의 말에 볼멘소리로 항의하는 아이. 자신의 지각 사유를 정당하게 인정해 주지 않는 나에 대한 원망과 자신을 제 시간에 바래다주지 못한 버스에 대한 속상함이 짜증으로 바뀐다. 여전히 부재중인 아이에 대해 부모님과 전화로 통화하며 정보를 교환하지만, 매일 아침 습관이 되어 버린 기다림으로 맥 빠진다. 설레지않는 두 가지의 기다림이 학교 밖과 학교 안에서 매일 계속된다.
『버스』폴 커시너 지음│이예원 옮김│미메시스│2014
 
2. 버스를 기다리는 일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녀와 내가 하늘이 점지한 인연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침이면 나는 그녀가 매일 지나치는 그 자리에 나가 그녀를 기다렸다. 사랑의 증표도 잊지 않고 바쳤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관계는 나날이 그 깊이를 더해 갈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헤어진 그녀를 다시 한 번 보려고 돌아서다가, 그녀가 다른 사내를 태우는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러나 내가 받은 충격을 당신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가슴찢기는 상심의 고통 속에 몇 날 며칠이나 길거리를 방황했는지 모른다. 지나치는 다른 버스에는 눈길조차 줄 수 없을 정도였다. 회사에 나갈 기력은커녕 집에 갈 마음도 없었다. 제대로 바닥을 친것이었다. 그때 돌연 그녀가 돌아왔다. 깊은 내면에서 우러난 그 포근한 빛으로 날 보듬듯 에워싸며 설사 다른 남자들을 만난대도 이젠 개의치 않는다. 그녀와 함께 하는 동안은 그 무엇도 나를 건드릴 수 없다.(24쪽, 업타운 로맨스편)
 
애처로운 남자의 애절한 고백이 있다. 다만 고백을 받고 있는 그녀가 ‘버스’이기에 남자가 진지해질수록 상황은 유머스러워진다. 『버스』는 매일 아침 버스를 기다리는 남자와 그를 태우러 오는 버스의 이야기다. 정류장에 나오기 전의 남자나 버스에서 내린 후의 남자는 찾기 힘들고, 오로지 신문을 바라보며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고 내리는 일이 계속된다. 반복적인 일상의 공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만화가 지닌 독특한 상상력으로 버스 안에 낯선 활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만화 속의 버스는 땅으로 향한 도로방향 표지판에 따라 잠수함처럼 가라앉기도 하고, 바닥에 그려 놓은 검은 줄이 점점 커지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버스의 그림자로 바뀌기도 한다. 탈 때는 버스였지만 내릴 때는 비행기가 되거나 길 가던 행인과 달려오던 버스가 부딪히면 버스만이 부서지는 유쾌한 반전이 곳곳에 가득하다. 버스에 타는 승객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무언가를 기대하며 그의 탑승을 지켜보게 된다.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건 버스의 행선지가 학교라는 점이다. 정숙지도로 조용한 교실은 학교에 오기 전 활기 없는 버스 공간의 연장선이다. 나는 학교로 버스를 타고 오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지만, 아이들은 학교에 도착한 순간부터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싶어 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버스란 자신과 친구들을 꿀꺽 삼키고 “준비완료, 이탈리아도 식후경”이라는표시등을 켜는 괴물버스일 수 있다. 아이들이 타고 싶은 버스는 서랍에 양말을 꺼내고 샤워를 하고 토스트로 아침을 먹고 계단을 내려와 정류장으로 가는 34쪽의 버스일까 아니면 탈피하는 순간 비행기로 변신하는 53쪽의 버스일까.
 

버스를 바꿀 수 없다면 교실을 바꿔야 한다. 등교하자마자 알리바이를 증명해야 하는 용의자처럼 심문받거나 무거운 잔소리에 주눅들지 않는 교실, 차분하다 못해 무한수면에 빠져드는 무기력한 정숙보다는 활기찬 수다로 간밤의 안부와 사연을 나누게 하는 교실로 말이다. 그러면 무작정 아이를 찾아 교문을 바라보는 내 기다림의 자세도 조금은 홀가분해질 것이다.
 
3. 여유로운 아침을 돌려받기 위해
 
나는 소위 <실제> 세계라 일컬어지는 세계와 이와 구별되는 다른 세계 간의 갈등에 그리고/혹은 연관성에 늘 관심을 가져왔다. 물질로 구성되는 이른바 <실제> 세계는 질서정연한 전환의 세계이자 논리적이며 예측가능한 결과들의 세계라면 이와 구분되는 세계는 영적인 존재와 환영, 꿈, 망상들로 이루어진 세계로 비합리적이고 예측 불허한 자체적인 규율에 따라 운영되는 세계이다. 나는 우리 삶에 있어서 후자의 영역이 전자만큼이나 실질적인 자리를 차지한다고 믿는다.(90쪽,‘작가의 말’)

네모반듯하게 수업으로 가득 찬 시간표와 정해진 행선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버스 노선도의 권태로움은 보는 이를 억누르는 힘이 있다. 누군가와의 약속으로 볼 때는 편안하고 아름다운 질서의 세계이지만, 예외와 일탈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학교의 정적인 아우라를 갑갑해 하는 아이들에게는 숨이 가빠지는 억압이다. 사람은 마음을 가두고 옥죄는 무언가에 균열을 내고 싶어 한다. 만화가 논리와 질서의 세계에 만들어 내는 균열은 우리를 숨쉬게하고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힘을 준다. 꼭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야할까. 승객이 꼭 사람이어야만 할까. 부딪힌 차는 반드시 부서져야 하는걸까 등등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선입견의 견고한 세계를 자유로운 상상속에서 말랑말랑하게 변형시켜야 한다. 책을 통해 이러한 버스들을 꿈꾸고 만나게 해 주는 일이 학교의 새롭게 반복되어야 할 일상이 아닐까.
 
에셔와 마그리트가 공존하는 초현실적인 버스                                                                                                                            
미국 만화가 폴 커시너의 작품인 『버스』는 1979년 1월 첫 에피소드가 실린 후 6년에 걸쳐 <헤비 메탈>에 연재되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남자와 버스에 대한 짧은 상황극이자 코믹스트립이다. 대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가 주는 웃음의 코드에 공감할 수 있는 건 가장 대중적이며 일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버스를, 초현실적인 반전에 버무렸기 때문이다. 버스 뒷좌석으로 향하는 남자의 발걸음이 어느 순간 공원에 이르고, 바닥에 그려 놓은 그림자가 점점 커져 버스가 하늘에서 내려오며, 버스에 깔려 죽는 작은 벌레에 이어, 커다란 벌레에 밟혀 부서지는 버스를 보여주는 등 초현실적인 반전이 곳곳에 숨어 있다. 버스에서 내려 방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버스 안이 되거나 소실점으로 모여드는 버스와 버스 밖으로 튀어 나가는 남자 승객의 대비 등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는 왜곡된 공간에서 에셔의 영향을, 창문을 열자 앞자리 승객의 상반신이 창문을 따라 이동하는 모습이나 동일하게 복제된 승객들의 모습에서는 마그리트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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