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함께 2. 야외 수업 좋을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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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5 16:29 조회 8,462회 댓글 0건본문
방자의 예측대로 몽룡은 바깥바람을 쐬자고 자꾸만 졸라댔다.
“방자야, 날씨가 너무 좋아 환장하겠구나. 이런 날엔 바람 쐬러 밖으로 나가야 되지 않겠냐?”
“뭔 소리라요? 내 사는 이날 이때까지 날씨 때문에 환장한 사람 보들 못했소. 뻥도 어지
간히 치슈. 그라고 관아 안에도 바람이 부는디 꼭 바깥까지 나가서 바람을 쐬야겄소?”
방자는 짐짓 헛기침까지 해 가며 몽룡을 을러댔지만 몽룡도 물러서지 않는구나.
“바람이라고 다 같은 바람이 아니라서 그런다.”
“바람이 다 거그서 거그제, 안 바람 바깥바람 뭐가 다르다고 그러슈?”
“관아 안에선 뻣뻣한 사람 콧바람밖에 쐴 게 더 없지 않느냐. 나 같은 청춘은 나가서 보들
보들 야들야들한 사람들 분 바람도 좀 쐬야 숨이 쉬어지거든.”
“이 몸도 그 나이 겪어 봐서 아는디, 분 바람 쐬 봐야 가심이 벌렁거려 숨 쉬기만 더 어렵
게 되우.”
방자가 나이깨나 더 먹은 티를 내 보지만 몽룡은 막무가내구나.
“그래도 괜찮아! 숨이 탁 막힌들 어떠랴!”
방자는 어이가 없었다. 책방 도령 몽룡이 시방 똥구녘에 단단히 바람이 든 것이다. 이걸
어쩌나……. 방자는 눈을 반쯤 감고 코를 벌름거리는 몽룡을 세차게 불렀다.
“도련님!”
“어이쿠! 귀청 떨어지겠다. 나 귀 안 먹었으니까 살살 좀 불러라!”
“시방 살살 부르게 생겼소? 도련님이 넋이 다 나가 있는디.”
“내가 뭔 넋이 나가 있다고 그러느냐?”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러시요? 이래봬도 내가 눈치 구 단 코치 씹 단 해서 눈치코치 씹구
단이오!”
“뭐라고? 씹 뭣이라고?”
“눈치코치 씹 구단이란게 그러네. 안됐소. 이팔 씹육 세에 벌써 귀까지 멀고.”
“또 씹이냐? 나 귀 안 멀었다니까! 입은 걸어 가지고!”
“내가 입을 어따 걸었다고 그러시우? 도련님이야말로 씹이라는 말만 나오면 그냥 좋아
서 입이 벌쭉허니 헤벌어져 갖고 귀에 가서 걸리는구만요.”
“내 말은 그런 말이 아니고, 네가 하는 말이 상스럽다고! 암튼, 그런 상말을 마구 쓰면 되
겠느냐?”
“히, 책방 도령께서 듣기에 쪼깐 거시기한가유? 그럼 도련님은 점잖게 들어앉아 책이나
읽으시유. 괜시리 나까지 엉덩짝 들썩거리게 하지 말고. 나는 모르겄슈. 인자 들어가서 심부
름해야 되우.”
방자가 몽룡을 두고 돌아서려 하자, 몽룡이 다급히 불렀겄다.
“방자야! 너무 매몰차게 그러지 말고 나랑 밖에 좀 나가자, 응?”
“허 참, 넘들은 관아에서 못 살아서 난린데 도련님은 왜 자꾸만 밖으로 나가자고 해 싸
시오?”
“아까도 얘기했구만. 계집들 분 바람 좀 쐬자니까!”
“인자 아주 대놓고 노골적이시구만유. 계집들 분 바람 쐬러 나가자고라? 그럴라믄 먼저
사또 영감한테 허락부터 맡으시오.”
“그 영감이 잘도 허락해 주겠다. 허락 맡아 나갈 거면 내가 왜 너한테 이렇게 매달리겠느
냐? 눈치코치 몇 단이라며? 네가 알아서 나 좀 제발 살려 다오.”
“히, 그런 일이 뭐 별거라고 살려 달라고까지 그러우?”
“아, 말귀 못 알아듣는 방자 때문에 내 청춘 다 조지게 생겼구나!”
몽룡은 짐짓 자기 가슴을 치며 답답한 속내를 내비쳤으나 방자가 누군가? 방자는 콧방
귀도 안 뀌며 여전히 딴전만 부릴 뿐이렷다.
“내가 말귀 못 알아듣는 게 뭐 있다고 나 때문에 청춘을 다 조져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라님으로부터, 아니 사또 영감으로부터, 아니 이방 나리로부터 책방 방자로 임명을 받아
도련님을 잘 받들어 도련님이 공부하는 데 애로사항이 없게 해 드리는 게 내 임무요. 청춘 조
지지 않으려면 분 바람 쐬자 하지 말고 공부를 해야 하는 것 아니오?”
“네 말이 구구절절 공자님 말씀이지만 그래도 이 좋은 날에 내 청춘이 아깝지 않느냐?”
“허 참, 도련님이야말로 되게 말귀 못 알아듣는구만요. 아까운 청춘을 계집들 궁둥이 따라
다니며 분 냄새나 맡아서야 되겄소? 자나깨나 죽으나 사나 공자 왈 맹자 왈 따라 해야지라잉.”
“공자 왈 맹자 왈이 그렇게 좋으면 너나 따라 하렴! 나는 방자 왈이 더 좋으니까 너를 따
르련다!”
“힝? 시방 뭔 소리다요? 방자 왈이 더 좋다고라? 나를 따른다고라?”
“그래! 네가 하란 대로 할 테니까 나 좀 살려다오!”
방자는 기가 막혔다. 몽룡이 발정이 단단히 나긴 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이
태 전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 춘향이는 어리고 향단이는 막 물이 오르는 참이었다. 자신은 그
런 향단이를 보면 견딜 수가 없었다. 밤마다 술청에서 꼭 껴안고 살을 부벼도 다음 날이면 또
보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향단이 몸에서 나던 분 냄새며 살 냄새가 좋았던 것이
다. 시방 몽룡이 그런 것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다 이해하고 사정을 짐작할 만했다. 그
래서 몽룡에게 다짐을 두어 본다.
“에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소. 내가 하라는 대로 할 테요?”
몽룡이 방자 손을 감싸 쥐는데, 보기에 참으로 애처롭구나.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할 것이다.”
“뎬장 맞을, 낫살깨나 먹은 이 몸이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도련님한테 감히 할 수 없
는 걸 시키겄소?”“그게 뭐냐?”“그리 어려운 건 아니오.”“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도련님이 분명히 이녁 입으로 씹육 세라고 했지유?”
“그야 내 나이가 그러니까.”
“나는 분명 씹팔 세란 말이우, 그란께……. ”
방자가 뜸을 들이자 몽룡의 목구멍으로 침이 꼴딱 넘어가는구나.
“그러니까 뭐?”
“음, 나보고 형님이라 하시유.”
“뭐라구? 양반인 내가 상놈인 너보고 형님이라 하라고?”
“왜, 싫소? 싫으면 고만두시오. 금방까지 방자 왈을 따른다더니 말이 달라지네유. 아무리
어린 나이라지만 으째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대유. 도련님하고 속 터놓고 상종하긴 쪼깐 어렵
겄소. 인자 나는 가 볼라요. 공자 왈 맹자 왈이나 열심히 따라 하시오.”
말을 마친 방자는 자신의 손을 싸고 있는 몽룡의 손을 뿌리치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
다. 이 판국에 몽룡이 방자를 급히 불러 세우지 않을 수 있으랴.
“얘, 방자야.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고 가야지.”
“맘이 변했소?”“내가 형님이라고 부르면 내 소원 들어 줄 테야?”“이 몸은 도련님처럼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종자가 아니오. 내가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함시롱 강아지맨치로 왈왈거
려야 쓰겄소? 강아지 왈왈은 안 헐 것인께 걱정 팍 붙들어 매쇼.”
“그래 그렇다면, 방자 형님……. ”
“쪼깐 세게 하시오. 배곯은 모기도 그보다는 더 크게 울겠소. 들릴락 말락 하게 하면 아무
소용없소. 바로 무효요, 무효!”“그래도 남들 귀가 있는데……. ” “싫으면 관두시오, 에헴.”
“에잇 모르겠다. 방자 형~ 님~.”
“아따, 하려거든 제대로 하시우. 형님 소리가 마포 바지 방귀 새듯 흩어져 힘알탱이가 없
구만유.”
몽룡이 가슴을 탁탁 치면서 난감해 한다.
“어이쿠 가슴이야, 꼭 해야 돼?”
“싫으면 관두시라니까요.”“약속 꼭 지켜야 돼!”“이 몸은 약속 지키는
걸 생활신조로 삼는 사람이오.”
“그렇다면, 에잇 모르겠다, 방자 형님!”
드디어 몽룡의 입에서 형님이라는 소리가 크게 나왔다. 방자는 그제
야 고개를 끄덕였다.
“됐소. 왜 그러시오 아우님? 헤헤, 도련님도 형님이 생겨 좋지 않소?”
“강아지 왈왈거리듯 실없는 소리 작작하고, 이제 약속이나 지켜!”
“약속이야 지키지요. 그런데 분 냄새 맡으려면 단옷날에 나가야 하
오.”“그럼 오늘은 못 나간단 말이냐?”
“오늘 나가 봐야 동네 똥개들 싸질러 놓은 개똥 냄새밖에 맡을 게 없소.”
몽룡의 낯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구나.
“그렇게 낙태한 고양이 삶아 먹은 시어미 꼬라지 내보일 것 없소. 내
일이 바로 단옷날이오. 그란께 오늘 하루는 착실히 책방에서 보내시우.
그래야 사또 영감도 좋아라 할 것 아니우.”
몽룡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얼굴빛이 바로 달라지는구나.
“알았어, 알았으니까 내일은 꼭 데리고 나가야 돼!”
몽룡은 책방으로 들어가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렸다. 딱히 보고 싶은
책이 잡히지 않았다. 오로지 뜨거워진 불두덩을 식히고 싶은 마음뿐이
었다.
“천자문 만자문 다 뒤져도 봄 춘 자 바람 풍 자보다 더 좋은 말 없으니공자 왈 바람 가운데엔 봄바람이 최고요, 사서삼경 다 뒤져도 계집 녀 자
보다 좋은 말 없으니 맹자 왈 사람 가운데엔 계집이 최고니라. 남원관아 다 뒤져도 봄바람 불락 말락 하고 계집 인간 눈에 안 띄니 어떡하랴. 어서 어서 봄바람아 불어라 계집아 내게 와라, 춘향이부터 오너라. 공자 왈 봄 춘 바람 풍, 맹자 왈 계집 녀, 방자 왈 봄 춘향기 향이라, 성현들 가라사대 향기 가운데엔 봄바람에 묻어나는 계집들 분 냄새가 최고라 했으니, 엥?”
몽룡은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읊고 있는 말에 스스로 놀라 실없이 웃고 말았다. 게다가 방자 왈이라니? 생각해보니 방자
라는 놈이 참으로 흉악한 놈이 아닐 수 없었겄다. 상놈인 주제에 감히 사또 아들인 자신보고 형님이라 하라니. 그런데도 뭣에 씐 것인지 방자가 곧대로 말해 버린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으리. 그러나 이내 곧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사또 아들인 자신의 나이를 관아 사람들이 모를 리 없잖은가. 거짓 나이를 말했다가 나중에 방자한테 꼬투리를 잡혀 더한 봉변을 당하면 어찌할 것
인가. 그렇다면 기왕에 방자에게 형님이라고까지 불러 주었으니 잘구슬려서 남원 고을 계집들 분 냄새나 실컷 맡아보아야 하리라.
한양 살 때와 달리 이곳 남원에선 바깥출입이 쉽지 않다. 한양에서야아버지가 나라님 사시는 궁에 들어가자마자 집 밖으로 나갔다 퇴궐하기 전에 들어오면 그만이었는데 여기선 관아에 갇혀 사는 꼴이니 들고나는 게 다 사또인 아버지한테 알려지기 십상이었다.
‘내일이 단옷날이렷다. 방자 왈 단옷날에 젊은이들이 광한루 같은 데
에 나와 논다고 했것다. 그렇다면 춘향이도 단옷날은 광한루에 나올 것아닌가. 음, 내일 일단 광한루를 가자고 해야겠다.’
그러나 남원 관아에서 산 뒤로 처음 하는 바깥출입인지라 부모님 허락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그게 고민이었다.
‘단오 명절을 맞이하야 광한루 구경하면서 시도 몇 수 짓고 호연지기도 기른다고 얘기해야지. 그러기 위해선 오늘이라도 공부하는 흉내를 좀 내야 하는데……. ’
몽룡은 내일만 생각하면 몸이 달아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춘향이라는 계집이 품 안에 든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봄 춘 향기 향, 봄에는 꽃이 피고 꽃은 향기를 품으니 그 향기는 벌 나비를 부른다.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검을 현! 누를 황! 하늘과 땅사이에 꽃이 피고 벌 나비 춤추는 봄이라, 방자 왈, 방자께서 가라사대,단옷날은 광한루에 젊은 계집들이 나와 노는 날이라 분 냄새 배인 분 바람이 천지간에 지천으로, 엥,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하늘은 검고 땅은 누런데 그 사이의 인간들은 죄다 젊은 계집들이로다, 엥? 엥? 엥?”
몽룡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책을 보고 있어도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일 뿐이었으니.
그때 사또는 동헌에서 이런저런 서류를 뒤적이며 있었다. 듣자 하니 책방에서 아들놈이
책을 읽는 건지 장타령을 하는 건지 파리를 쫓는 건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러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로다,
“저게 지금 무슨 소리인고? 다 큰 놈이 문틈에 불알이 낀 것이냐, 배아지를 깔고 옹알이
를 하는 것이냐, 그도 저도 아니면 파리를 잡는 것이냐? 이봐, 게 아무도 없느냐?”
통인이 쪼르르 달려가니 사또 왈 책방에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라 일렀것다. 통인
이 책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보니 몽룡이 책을 펴 놓고 뭐라 궁시렁궁시렁거리는데 다 책 읽
는 소리로 들릴 뿐이렷다. 다시 사또에게 내달려 도련님이 착실히 책을 읽고 있는 중이라 아
뢰었더니 사또 왈 가서 목낭청을 들라 이르는 것이었다. 낭청은 사또 밑에서 이런저런 수발
을 들며 말벗이나 하는 구실아치인데 성이 목가였다. 목낭청이 채신머리없이 고개를 끄덕
거리며 동헌에 드니 사또가 길게 목을 가다듬은 뒤 말씀을 시작하였겄다.
“자네 왔는가?”“사또께서 부르셨으니 왔지요.”
“소리 들었는가?”
“무슨 소리가 저자 거리에 도는갑쥬?”
“그런 소리 말고, 책방에서 우리 아이가 책 읽는 소리 말일세.”
“그야 책방에선 당연히 책 읽는 소리가 날 테지요.”
“그냥 나는 소리가 아니라서 그러네.”
“그럼 장타령 소리라도 들으셨는갑쇼?”
“허허, 우리 아이가 사서삼경 읽는 소리일세. 한양에선 도대체 책을 읽지 않았는데 남원
에 오고 보니 아이가 싹 달라졌네. 원래 재주 있다는 말을 많이 듣던 아이였네.”
“제주엔 원래 말이 많지요.”
“허 참, 그 말이 아니라 내 말은 아이가 지금 책을 읽는다는 거네, 책을!”
“마땅히 읽어얍죠. 정승도 하고 판서도 하려면 읽어얍죠.”
“정승 판서야 감히 바라겠는가만 내 죽기 전에 과거 급제는 해야지.”
“급체만 않으면 급제야 못 할 것 없고, 정승은 못 해도 장승은 하겠지요.”
“뭣이라고? 자네 지금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있는가?”
“글쎄 저도 오락가락해서……. ”
“예끼 이 사람, 아직 노망 들 나이도 아니구만 쉰내 나는 소리만 하고 있네, 그만 물러가게.”
“예, 예. 물러가라면 저는 물 건너갑지요.”
목낭청이 체머리를 흔들며 뒷걸음질로 물러나자 사또는 퇴청할 준비를 했다.
몽룡은 저녁 내내 끙끙 대다가 설핏 잠이 들었으나, 여느 때와 달리 새벽 일찌감치 일어
나 방자를 찾았다. 방자가 하품을 길게 하며 투덜댔다.
“아이 참, 새벽 댓바람부터 웬 소란이유?”
“너는 속도 편하다. 잠이 오냐 지금?”
“지금 잠을 안 자면 언제 자는데유?”
“오늘이 단옷날이렷다.”
“단옷날은 잠도 안 잔단 말이유?”
“어서 약속대로 바깥바람 쐬러 가야지.”
“이따 해나 중천에 떠야지 벌써부터 나가서 뭐하시게요. 지금 나가면 동네 똥개들밖에
없단께유.”“언제 해 뜨기를 기다린단 말이냐? 어서 가자.”
“아따 도련님 성질 한번 되게 급하시네유. 그 성질에 어째 씹육 세밖에 못 먹었다유. 급한
대로 한 세 씹 살쯤 먹어 버려야지.”
“고놈 참 말 많다. 아무리 급해도 삼십 살은 싫다. 어서 나갈 준비나 하자.”
“아니, 약속 잊어먹었소? 형님한테 고놈이라니요?”“아이쿠 방자 형님, 제가 실언을 했습
니다. 약속 지키십시오.”
방자,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고개를 젓는데 제법 무게가 잡히는구나.
“먼저 동헌에 들어가서 사또 영감한테 허락을 맡으시오.”
“뭐라 해야 허락이 떨어진단 말이냐?”
“그야 도련님 사정이지유, 제가 뭐라고 해 줄 말이 없네유. 아침부터 오입 나간다 할 수도 없고.”
“고놈의 입! 밤이면 오입 나간다 해도 된다던? 그런 말 당최 입 밖에
꺼내지도 마라!”
“암튼 허락 맡아 오시오. 허락만 맡아 오면 나귀 대령하겠소.”
사실 몽룡은 난감했다. 단옷날이라 해서 특별히 바깥나들이를 해야 할 명목이 없었던 것
이다. 더구나 아버지는 자나깨나 그놈의 과거 얘기뿐이었다. 지방에 있을 때 착실히 공부해
서 소년 급제를 해야 한다는 거였다. 일단 어머니한테 얘기를 해보기로 했다. 어머니라면 하
루쯤 융통성을 발휘해 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몽룡은 세수를 하고 옷을 갖춰 입은 뒤 어머니한테 갔다.
“네가 이 아침에 웬일이냐?”“의논드릴 게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면 아버지랑 같이 하지.”
“어머니만 살짝 아시면 됩니다.”
“무슨 일로 그러느냐?”
“오늘이 단옷날입니다. 그래서 광한루 좀 나가 보려고요.”
“단옷날이면 사또 아들이 광한루 나가야 된다는 풍습이라도 있다더냐? 게다가 오늘 같
은 날은 광한루가 번잡할 것인데 뭐 하러 나가려고?”“남원 고을 풍속도 살피고, 시흥도 돋우
어 보려고요. 단오 명절을 맞아 일종의 야외 수업을 해 보고 싶은 겁니다.”
“글쎄, 아버지가 아시면 어떠실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한시도 쉬지 말고 과거 공부 하라고
성화인신데다 사또 아들이 저자거리를 함부로 돌아다니는 게 볼썽사나울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버지한텐 아무 말씀 마시기 바랍니다. 책방 방자랑 살짝 나갔다 오겠습니
다. 오늘 잠깐 쉬려고 어제 늦게까지 책 읽었습니다.”
“네가 정 그렇다면 광한루 구경이야 할 수 있지만 씨름판이나 소싸움 판 가운데는 기웃
거리지 말고 경치만 구경하고 시나 몇 수 건지고 돌아오렴.”
“고맙습니다, 어머니.”
몽룡은 너무 좋아 자신의 처지도 잊어먹고 까불거리며 두 가랑이 사이에서 비파 소리가
날 정도로 빨리 책방으로 돌아왔다.
방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놀리듯 한 마디 했다.
“사또 자제분께서 그렇게 체통 없이 나대시면 안 됩니다유.”
“안 될 것 뭐 있냐? 드디어 바깥나들이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안에서 허락하셨나유?”
“그럼! 야외 수업 한다고 했더니 아주 좋은 생각이라 하시더라!”
“누가요? 사또 영감께서요?”“아니, 어머니가.”
“사또 영감 아시면 경치겠네요.”
“경을 치더라도 그건 어머니 몫이고, 나는 일단 어머니한테 허락 맡았으니 됐잖아!”
이제 방자가 바빠질 차례렷다. 방자는 서둘러 나귀를 대령하고 다른 통인에게 술상까지
챙겨달라 했으니, 그 거동이 볼 만하구나.
나귀에 올라 탄 몽룡을 볼작시면 세수 깨끗이 한 얼굴은 신수가 훤한데, 여러 색깔로 쫙
물들인 부채로 햇빛 살짝 가렸으나 귀한 집 자제 그대로 표 나고, 모시 도포에 긴 머리 넓게
땋아 댕기 달아 숫총각 표시까지 다 드러냈겄다. 나귀 고삐 쥔 방자는 한껏 거드름 피우며 관
아 문을 나와 광한루로 길을 잡는데, 길가의 계집들은 안 보는 척 몽룡의 행차를 슬쩍슬쩍 곁
눈질하는구나.
나귀를 바삐 몰아 광한루에 이르고 보니 단청 알맞게 먹은 건물이 반기는구나. 나귀에서 내
려 오작교 건너고 맑은 시내 흐르는 곁에 자리 깔고 앉으니 무릉도원도 이보다 더하진 않으렷다.
“방자야, 술 꾸러미 끌러 보아라. 흘리지 않고 잘 간수해 왔느냐?”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다른 건 몰라도 이 몸이 주막집 손자 아니오. 아까운 술을 왜 흘리
겄소.”“좋다 좋다! 야외 수업 좋을시고! 이런 날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냐!”몽룡이 방자더러술을 재촉하는데 방자는 딴전이다.
“어차피 우리 둘 다 장가도 안 간 댕기머리인데다, 내가 형님하기로 했으니 낫살 순으로
마셔야 하지 않겄소?”
몽룡은 방자가 자기 주제도 모르고 걸핏하면 나이를 들먹이는 게 적잖이 비위가 상했다. 그
러나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자신의 청춘사업 진행엔 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업
자 내지는 안내자가 되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짐짓 심화를 누르며 너그럽게 말했으니.
“그야 무슨 상관이냐, 너 먼저 마시고 나도 한 잔 주렴.”방자가 호리병에서 술을 따르다
말고 다시 딴죽을 건다.
“기왕이면 한 잔 따라 보소. 술은 장모가 따르더라도 여자가 따라 주는 게 맛있다는데 이
자리에 여자는 없은께 고것까정 바랄 수는 없고, 도령 술이라도 한 잔 받아야겄소.”몽룡은
아무 말 않고 방자가 쥔 술잔에 술을 반쯤 따라주었다. 그 잔을 받아 목구멍에 털어 넣듯 한
방자가 잔에 술을 가득 부어 몽룡에게 건네는데 술 치는 품이 제법 이골이 난 꼴이로다.
“술은 잔에 가득혀야 제 맛이고, 계집은 품안에 꼭 품어야 제 맛입니다. 다음부턴 술잔을
채우기 바라유. 이번엔 처음인께 그냥 넘어갑니다만.”
방자는 주막집 손자답게 술 마시는 법에 대해 제법 알은 체를 했다. 몽룡은 처음과 달리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방자와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야외 수업 이만하
면 최고였다. 주법도 배우고 방자와 친해지기도 하니, 이 어찌 최고라 하지 않을쏘냐! 이제
저쪽 그네 뛰는 마당에서 춘향이라는 계집만 찾아내 이 자리로 데려오면 그만이다. 참으로
술맛 날 일만 남은 것이렷다. (계속)
“방자야, 날씨가 너무 좋아 환장하겠구나. 이런 날엔 바람 쐬러 밖으로 나가야 되지 않겠냐?”
“뭔 소리라요? 내 사는 이날 이때까지 날씨 때문에 환장한 사람 보들 못했소. 뻥도 어지
간히 치슈. 그라고 관아 안에도 바람이 부는디 꼭 바깥까지 나가서 바람을 쐬야겄소?”
방자는 짐짓 헛기침까지 해 가며 몽룡을 을러댔지만 몽룡도 물러서지 않는구나.
“바람이라고 다 같은 바람이 아니라서 그런다.”
“바람이 다 거그서 거그제, 안 바람 바깥바람 뭐가 다르다고 그러슈?”
“관아 안에선 뻣뻣한 사람 콧바람밖에 쐴 게 더 없지 않느냐. 나 같은 청춘은 나가서 보들
보들 야들야들한 사람들 분 바람도 좀 쐬야 숨이 쉬어지거든.”
“이 몸도 그 나이 겪어 봐서 아는디, 분 바람 쐬 봐야 가심이 벌렁거려 숨 쉬기만 더 어렵
게 되우.”
방자가 나이깨나 더 먹은 티를 내 보지만 몽룡은 막무가내구나.
“그래도 괜찮아! 숨이 탁 막힌들 어떠랴!”
방자는 어이가 없었다. 책방 도령 몽룡이 시방 똥구녘에 단단히 바람이 든 것이다. 이걸
어쩌나……. 방자는 눈을 반쯤 감고 코를 벌름거리는 몽룡을 세차게 불렀다.
“도련님!”
“어이쿠! 귀청 떨어지겠다. 나 귀 안 먹었으니까 살살 좀 불러라!”
“시방 살살 부르게 생겼소? 도련님이 넋이 다 나가 있는디.”
“내가 뭔 넋이 나가 있다고 그러느냐?”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러시요? 이래봬도 내가 눈치 구 단 코치 씹 단 해서 눈치코치 씹구
단이오!”
“뭐라고? 씹 뭣이라고?”
“눈치코치 씹 구단이란게 그러네. 안됐소. 이팔 씹육 세에 벌써 귀까지 멀고.”
“또 씹이냐? 나 귀 안 멀었다니까! 입은 걸어 가지고!”
“내가 입을 어따 걸었다고 그러시우? 도련님이야말로 씹이라는 말만 나오면 그냥 좋아
서 입이 벌쭉허니 헤벌어져 갖고 귀에 가서 걸리는구만요.”
“내 말은 그런 말이 아니고, 네가 하는 말이 상스럽다고! 암튼, 그런 상말을 마구 쓰면 되
겠느냐?”
“히, 책방 도령께서 듣기에 쪼깐 거시기한가유? 그럼 도련님은 점잖게 들어앉아 책이나
읽으시유. 괜시리 나까지 엉덩짝 들썩거리게 하지 말고. 나는 모르겄슈. 인자 들어가서 심부
름해야 되우.”
방자가 몽룡을 두고 돌아서려 하자, 몽룡이 다급히 불렀겄다.
“방자야! 너무 매몰차게 그러지 말고 나랑 밖에 좀 나가자, 응?”
“허 참, 넘들은 관아에서 못 살아서 난린데 도련님은 왜 자꾸만 밖으로 나가자고 해 싸
시오?”
“아까도 얘기했구만. 계집들 분 바람 좀 쐬자니까!”
“인자 아주 대놓고 노골적이시구만유. 계집들 분 바람 쐬러 나가자고라? 그럴라믄 먼저
사또 영감한테 허락부터 맡으시오.”
“그 영감이 잘도 허락해 주겠다. 허락 맡아 나갈 거면 내가 왜 너한테 이렇게 매달리겠느
냐? 눈치코치 몇 단이라며? 네가 알아서 나 좀 제발 살려 다오.”
“히, 그런 일이 뭐 별거라고 살려 달라고까지 그러우?”
“아, 말귀 못 알아듣는 방자 때문에 내 청춘 다 조지게 생겼구나!”
몽룡은 짐짓 자기 가슴을 치며 답답한 속내를 내비쳤으나 방자가 누군가? 방자는 콧방
귀도 안 뀌며 여전히 딴전만 부릴 뿐이렷다.
“내가 말귀 못 알아듣는 게 뭐 있다고 나 때문에 청춘을 다 조져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라님으로부터, 아니 사또 영감으로부터, 아니 이방 나리로부터 책방 방자로 임명을 받아
도련님을 잘 받들어 도련님이 공부하는 데 애로사항이 없게 해 드리는 게 내 임무요. 청춘 조
지지 않으려면 분 바람 쐬자 하지 말고 공부를 해야 하는 것 아니오?”
“네 말이 구구절절 공자님 말씀이지만 그래도 이 좋은 날에 내 청춘이 아깝지 않느냐?”
“허 참, 도련님이야말로 되게 말귀 못 알아듣는구만요. 아까운 청춘을 계집들 궁둥이 따라
다니며 분 냄새나 맡아서야 되겄소? 자나깨나 죽으나 사나 공자 왈 맹자 왈 따라 해야지라잉.”
“공자 왈 맹자 왈이 그렇게 좋으면 너나 따라 하렴! 나는 방자 왈이 더 좋으니까 너를 따
르련다!”
“힝? 시방 뭔 소리다요? 방자 왈이 더 좋다고라? 나를 따른다고라?”
“그래! 네가 하란 대로 할 테니까 나 좀 살려다오!”
방자는 기가 막혔다. 몽룡이 발정이 단단히 나긴 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이
태 전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 춘향이는 어리고 향단이는 막 물이 오르는 참이었다. 자신은 그
런 향단이를 보면 견딜 수가 없었다. 밤마다 술청에서 꼭 껴안고 살을 부벼도 다음 날이면 또
보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향단이 몸에서 나던 분 냄새며 살 냄새가 좋았던 것이
다. 시방 몽룡이 그런 것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다 이해하고 사정을 짐작할 만했다. 그
래서 몽룡에게 다짐을 두어 본다.
“에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소. 내가 하라는 대로 할 테요?”
몽룡이 방자 손을 감싸 쥐는데, 보기에 참으로 애처롭구나.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할 것이다.”
“뎬장 맞을, 낫살깨나 먹은 이 몸이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도련님한테 감히 할 수 없
는 걸 시키겄소?”“그게 뭐냐?”“그리 어려운 건 아니오.”“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도련님이 분명히 이녁 입으로 씹육 세라고 했지유?”
“그야 내 나이가 그러니까.”
“나는 분명 씹팔 세란 말이우, 그란께……. ”
방자가 뜸을 들이자 몽룡의 목구멍으로 침이 꼴딱 넘어가는구나.
“그러니까 뭐?”
“음, 나보고 형님이라 하시유.”
“뭐라구? 양반인 내가 상놈인 너보고 형님이라 하라고?”
“왜, 싫소? 싫으면 고만두시오. 금방까지 방자 왈을 따른다더니 말이 달라지네유. 아무리
어린 나이라지만 으째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대유. 도련님하고 속 터놓고 상종하긴 쪼깐 어렵
겄소. 인자 나는 가 볼라요. 공자 왈 맹자 왈이나 열심히 따라 하시오.”
말을 마친 방자는 자신의 손을 싸고 있는 몽룡의 손을 뿌리치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
다. 이 판국에 몽룡이 방자를 급히 불러 세우지 않을 수 있으랴.
“얘, 방자야.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고 가야지.”
“맘이 변했소?”“내가 형님이라고 부르면 내 소원 들어 줄 테야?”“이 몸은 도련님처럼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종자가 아니오. 내가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함시롱 강아지맨치로 왈왈거
려야 쓰겄소? 강아지 왈왈은 안 헐 것인께 걱정 팍 붙들어 매쇼.”
“그래 그렇다면, 방자 형님……. ”
“쪼깐 세게 하시오. 배곯은 모기도 그보다는 더 크게 울겠소. 들릴락 말락 하게 하면 아무
소용없소. 바로 무효요, 무효!”“그래도 남들 귀가 있는데……. ” “싫으면 관두시오, 에헴.”
“에잇 모르겠다. 방자 형~ 님~.”
“아따, 하려거든 제대로 하시우. 형님 소리가 마포 바지 방귀 새듯 흩어져 힘알탱이가 없
구만유.”
몽룡이 가슴을 탁탁 치면서 난감해 한다.
“어이쿠 가슴이야, 꼭 해야 돼?”
“싫으면 관두시라니까요.”“약속 꼭 지켜야 돼!”“이 몸은 약속 지키는
걸 생활신조로 삼는 사람이오.”
“그렇다면, 에잇 모르겠다, 방자 형님!”
드디어 몽룡의 입에서 형님이라는 소리가 크게 나왔다. 방자는 그제
야 고개를 끄덕였다.
“됐소. 왜 그러시오 아우님? 헤헤, 도련님도 형님이 생겨 좋지 않소?”
“강아지 왈왈거리듯 실없는 소리 작작하고, 이제 약속이나 지켜!”
“약속이야 지키지요. 그런데 분 냄새 맡으려면 단옷날에 나가야 하
오.”“그럼 오늘은 못 나간단 말이냐?”
“오늘 나가 봐야 동네 똥개들 싸질러 놓은 개똥 냄새밖에 맡을 게 없소.”
몽룡의 낯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구나.
“그렇게 낙태한 고양이 삶아 먹은 시어미 꼬라지 내보일 것 없소. 내
일이 바로 단옷날이오. 그란께 오늘 하루는 착실히 책방에서 보내시우.
그래야 사또 영감도 좋아라 할 것 아니우.”
몽룡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얼굴빛이 바로 달라지는구나.
“알았어, 알았으니까 내일은 꼭 데리고 나가야 돼!”
몽룡은 책방으로 들어가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렸다. 딱히 보고 싶은
책이 잡히지 않았다. 오로지 뜨거워진 불두덩을 식히고 싶은 마음뿐이
었다.
“천자문 만자문 다 뒤져도 봄 춘 자 바람 풍 자보다 더 좋은 말 없으니공자 왈 바람 가운데엔 봄바람이 최고요, 사서삼경 다 뒤져도 계집 녀 자
보다 좋은 말 없으니 맹자 왈 사람 가운데엔 계집이 최고니라. 남원관아 다 뒤져도 봄바람 불락 말락 하고 계집 인간 눈에 안 띄니 어떡하랴. 어서 어서 봄바람아 불어라 계집아 내게 와라, 춘향이부터 오너라. 공자 왈 봄 춘 바람 풍, 맹자 왈 계집 녀, 방자 왈 봄 춘향기 향이라, 성현들 가라사대 향기 가운데엔 봄바람에 묻어나는 계집들 분 냄새가 최고라 했으니, 엥?”
몽룡은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읊고 있는 말에 스스로 놀라 실없이 웃고 말았다. 게다가 방자 왈이라니? 생각해보니 방자
라는 놈이 참으로 흉악한 놈이 아닐 수 없었겄다. 상놈인 주제에 감히 사또 아들인 자신보고 형님이라 하라니. 그런데도 뭣에 씐 것인지 방자가 곧대로 말해 버린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으리. 그러나 이내 곧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사또 아들인 자신의 나이를 관아 사람들이 모를 리 없잖은가. 거짓 나이를 말했다가 나중에 방자한테 꼬투리를 잡혀 더한 봉변을 당하면 어찌할 것
인가. 그렇다면 기왕에 방자에게 형님이라고까지 불러 주었으니 잘구슬려서 남원 고을 계집들 분 냄새나 실컷 맡아보아야 하리라.
한양 살 때와 달리 이곳 남원에선 바깥출입이 쉽지 않다. 한양에서야아버지가 나라님 사시는 궁에 들어가자마자 집 밖으로 나갔다 퇴궐하기 전에 들어오면 그만이었는데 여기선 관아에 갇혀 사는 꼴이니 들고나는 게 다 사또인 아버지한테 알려지기 십상이었다.
‘내일이 단옷날이렷다. 방자 왈 단옷날에 젊은이들이 광한루 같은 데
에 나와 논다고 했것다. 그렇다면 춘향이도 단옷날은 광한루에 나올 것아닌가. 음, 내일 일단 광한루를 가자고 해야겠다.’
그러나 남원 관아에서 산 뒤로 처음 하는 바깥출입인지라 부모님 허락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그게 고민이었다.
‘단오 명절을 맞이하야 광한루 구경하면서 시도 몇 수 짓고 호연지기도 기른다고 얘기해야지. 그러기 위해선 오늘이라도 공부하는 흉내를 좀 내야 하는데……. ’
몽룡은 내일만 생각하면 몸이 달아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춘향이라는 계집이 품 안에 든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봄 춘 향기 향, 봄에는 꽃이 피고 꽃은 향기를 품으니 그 향기는 벌 나비를 부른다.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검을 현! 누를 황! 하늘과 땅사이에 꽃이 피고 벌 나비 춤추는 봄이라, 방자 왈, 방자께서 가라사대,단옷날은 광한루에 젊은 계집들이 나와 노는 날이라 분 냄새 배인 분 바람이 천지간에 지천으로, 엥,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하늘은 검고 땅은 누런데 그 사이의 인간들은 죄다 젊은 계집들이로다, 엥? 엥? 엥?”
몽룡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책을 보고 있어도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일 뿐이었으니.
그때 사또는 동헌에서 이런저런 서류를 뒤적이며 있었다. 듣자 하니 책방에서 아들놈이
책을 읽는 건지 장타령을 하는 건지 파리를 쫓는 건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러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로다,
“저게 지금 무슨 소리인고? 다 큰 놈이 문틈에 불알이 낀 것이냐, 배아지를 깔고 옹알이
를 하는 것이냐, 그도 저도 아니면 파리를 잡는 것이냐? 이봐, 게 아무도 없느냐?”
통인이 쪼르르 달려가니 사또 왈 책방에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라 일렀것다. 통인
이 책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보니 몽룡이 책을 펴 놓고 뭐라 궁시렁궁시렁거리는데 다 책 읽
는 소리로 들릴 뿐이렷다. 다시 사또에게 내달려 도련님이 착실히 책을 읽고 있는 중이라 아
뢰었더니 사또 왈 가서 목낭청을 들라 이르는 것이었다. 낭청은 사또 밑에서 이런저런 수발
을 들며 말벗이나 하는 구실아치인데 성이 목가였다. 목낭청이 채신머리없이 고개를 끄덕
거리며 동헌에 드니 사또가 길게 목을 가다듬은 뒤 말씀을 시작하였겄다.
“자네 왔는가?”“사또께서 부르셨으니 왔지요.”
“소리 들었는가?”
“무슨 소리가 저자 거리에 도는갑쥬?”
“그런 소리 말고, 책방에서 우리 아이가 책 읽는 소리 말일세.”
“그야 책방에선 당연히 책 읽는 소리가 날 테지요.”
“그냥 나는 소리가 아니라서 그러네.”
“그럼 장타령 소리라도 들으셨는갑쇼?”
“허허, 우리 아이가 사서삼경 읽는 소리일세. 한양에선 도대체 책을 읽지 않았는데 남원
에 오고 보니 아이가 싹 달라졌네. 원래 재주 있다는 말을 많이 듣던 아이였네.”
“제주엔 원래 말이 많지요.”
“허 참, 그 말이 아니라 내 말은 아이가 지금 책을 읽는다는 거네, 책을!”
“마땅히 읽어얍죠. 정승도 하고 판서도 하려면 읽어얍죠.”
“정승 판서야 감히 바라겠는가만 내 죽기 전에 과거 급제는 해야지.”
“급체만 않으면 급제야 못 할 것 없고, 정승은 못 해도 장승은 하겠지요.”
“뭣이라고? 자네 지금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있는가?”
“글쎄 저도 오락가락해서……. ”
“예끼 이 사람, 아직 노망 들 나이도 아니구만 쉰내 나는 소리만 하고 있네, 그만 물러가게.”
“예, 예. 물러가라면 저는 물 건너갑지요.”
목낭청이 체머리를 흔들며 뒷걸음질로 물러나자 사또는 퇴청할 준비를 했다.
몽룡은 저녁 내내 끙끙 대다가 설핏 잠이 들었으나, 여느 때와 달리 새벽 일찌감치 일어
나 방자를 찾았다. 방자가 하품을 길게 하며 투덜댔다.
“아이 참, 새벽 댓바람부터 웬 소란이유?”
“너는 속도 편하다. 잠이 오냐 지금?”
“지금 잠을 안 자면 언제 자는데유?”
“오늘이 단옷날이렷다.”
“단옷날은 잠도 안 잔단 말이유?”
“어서 약속대로 바깥바람 쐬러 가야지.”
“이따 해나 중천에 떠야지 벌써부터 나가서 뭐하시게요. 지금 나가면 동네 똥개들밖에
없단께유.”“언제 해 뜨기를 기다린단 말이냐? 어서 가자.”
“아따 도련님 성질 한번 되게 급하시네유. 그 성질에 어째 씹육 세밖에 못 먹었다유. 급한
대로 한 세 씹 살쯤 먹어 버려야지.”
“고놈 참 말 많다. 아무리 급해도 삼십 살은 싫다. 어서 나갈 준비나 하자.”
“아니, 약속 잊어먹었소? 형님한테 고놈이라니요?”“아이쿠 방자 형님, 제가 실언을 했습
니다. 약속 지키십시오.”
방자,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고개를 젓는데 제법 무게가 잡히는구나.
“먼저 동헌에 들어가서 사또 영감한테 허락을 맡으시오.”
“뭐라 해야 허락이 떨어진단 말이냐?”
“그야 도련님 사정이지유, 제가 뭐라고 해 줄 말이 없네유. 아침부터 오입 나간다 할 수도 없고.”
“고놈의 입! 밤이면 오입 나간다 해도 된다던? 그런 말 당최 입 밖에
꺼내지도 마라!”
“암튼 허락 맡아 오시오. 허락만 맡아 오면 나귀 대령하겠소.”
사실 몽룡은 난감했다. 단옷날이라 해서 특별히 바깥나들이를 해야 할 명목이 없었던 것
이다. 더구나 아버지는 자나깨나 그놈의 과거 얘기뿐이었다. 지방에 있을 때 착실히 공부해
서 소년 급제를 해야 한다는 거였다. 일단 어머니한테 얘기를 해보기로 했다. 어머니라면 하
루쯤 융통성을 발휘해 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몽룡은 세수를 하고 옷을 갖춰 입은 뒤 어머니한테 갔다.
“네가 이 아침에 웬일이냐?”“의논드릴 게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면 아버지랑 같이 하지.”
“어머니만 살짝 아시면 됩니다.”
“무슨 일로 그러느냐?”
“오늘이 단옷날입니다. 그래서 광한루 좀 나가 보려고요.”
“단옷날이면 사또 아들이 광한루 나가야 된다는 풍습이라도 있다더냐? 게다가 오늘 같
은 날은 광한루가 번잡할 것인데 뭐 하러 나가려고?”“남원 고을 풍속도 살피고, 시흥도 돋우
어 보려고요. 단오 명절을 맞아 일종의 야외 수업을 해 보고 싶은 겁니다.”
“글쎄, 아버지가 아시면 어떠실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한시도 쉬지 말고 과거 공부 하라고
성화인신데다 사또 아들이 저자거리를 함부로 돌아다니는 게 볼썽사나울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버지한텐 아무 말씀 마시기 바랍니다. 책방 방자랑 살짝 나갔다 오겠습니
다. 오늘 잠깐 쉬려고 어제 늦게까지 책 읽었습니다.”
“네가 정 그렇다면 광한루 구경이야 할 수 있지만 씨름판이나 소싸움 판 가운데는 기웃
거리지 말고 경치만 구경하고 시나 몇 수 건지고 돌아오렴.”
“고맙습니다, 어머니.”
몽룡은 너무 좋아 자신의 처지도 잊어먹고 까불거리며 두 가랑이 사이에서 비파 소리가
날 정도로 빨리 책방으로 돌아왔다.
방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놀리듯 한 마디 했다.
“사또 자제분께서 그렇게 체통 없이 나대시면 안 됩니다유.”
“안 될 것 뭐 있냐? 드디어 바깥나들이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안에서 허락하셨나유?”
“그럼! 야외 수업 한다고 했더니 아주 좋은 생각이라 하시더라!”
“누가요? 사또 영감께서요?”“아니, 어머니가.”
“사또 영감 아시면 경치겠네요.”
“경을 치더라도 그건 어머니 몫이고, 나는 일단 어머니한테 허락 맡았으니 됐잖아!”
이제 방자가 바빠질 차례렷다. 방자는 서둘러 나귀를 대령하고 다른 통인에게 술상까지
챙겨달라 했으니, 그 거동이 볼 만하구나.
나귀에 올라 탄 몽룡을 볼작시면 세수 깨끗이 한 얼굴은 신수가 훤한데, 여러 색깔로 쫙
물들인 부채로 햇빛 살짝 가렸으나 귀한 집 자제 그대로 표 나고, 모시 도포에 긴 머리 넓게
땋아 댕기 달아 숫총각 표시까지 다 드러냈겄다. 나귀 고삐 쥔 방자는 한껏 거드름 피우며 관
아 문을 나와 광한루로 길을 잡는데, 길가의 계집들은 안 보는 척 몽룡의 행차를 슬쩍슬쩍 곁
눈질하는구나.
나귀를 바삐 몰아 광한루에 이르고 보니 단청 알맞게 먹은 건물이 반기는구나. 나귀에서 내
려 오작교 건너고 맑은 시내 흐르는 곁에 자리 깔고 앉으니 무릉도원도 이보다 더하진 않으렷다.
“방자야, 술 꾸러미 끌러 보아라. 흘리지 않고 잘 간수해 왔느냐?”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다른 건 몰라도 이 몸이 주막집 손자 아니오. 아까운 술을 왜 흘리
겄소.”“좋다 좋다! 야외 수업 좋을시고! 이런 날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냐!”몽룡이 방자더러술을 재촉하는데 방자는 딴전이다.
“어차피 우리 둘 다 장가도 안 간 댕기머리인데다, 내가 형님하기로 했으니 낫살 순으로
마셔야 하지 않겄소?”
몽룡은 방자가 자기 주제도 모르고 걸핏하면 나이를 들먹이는 게 적잖이 비위가 상했다. 그
러나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자신의 청춘사업 진행엔 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업
자 내지는 안내자가 되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짐짓 심화를 누르며 너그럽게 말했으니.
“그야 무슨 상관이냐, 너 먼저 마시고 나도 한 잔 주렴.”방자가 호리병에서 술을 따르다
말고 다시 딴죽을 건다.
“기왕이면 한 잔 따라 보소. 술은 장모가 따르더라도 여자가 따라 주는 게 맛있다는데 이
자리에 여자는 없은께 고것까정 바랄 수는 없고, 도령 술이라도 한 잔 받아야겄소.”몽룡은
아무 말 않고 방자가 쥔 술잔에 술을 반쯤 따라주었다. 그 잔을 받아 목구멍에 털어 넣듯 한
방자가 잔에 술을 가득 부어 몽룡에게 건네는데 술 치는 품이 제법 이골이 난 꼴이로다.
“술은 잔에 가득혀야 제 맛이고, 계집은 품안에 꼭 품어야 제 맛입니다. 다음부턴 술잔을
채우기 바라유. 이번엔 처음인께 그냥 넘어갑니다만.”
방자는 주막집 손자답게 술 마시는 법에 대해 제법 알은 체를 했다. 몽룡은 처음과 달리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방자와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야외 수업 이만하
면 최고였다. 주법도 배우고 방자와 친해지기도 하니, 이 어찌 최고라 하지 않을쏘냐! 이제
저쪽 그네 뛰는 마당에서 춘향이라는 계집만 찾아내 이 자리로 데려오면 그만이다. 참으로
술맛 날 일만 남은 것이렷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