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잡이 길잡이 책 읽기, 자유인으로 성장하는 디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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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5 15:55 조회 5,575회 댓글 0건본문
얼마 전 기회가 있어 「리영희 저작집」을 뒤적거린 적이 있습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나에게는 리영희 선생의 독서론만 눈에 띄더군요. 리영희 선생은 우리 사회가 군사독재로 얼룩
졌을 때 신문과 책을 통해 참된 것을 알리기 위해 모진 고난을 겪으셨던 분입니다. 외신기자 생활
을 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요. 필화라고, 권력자가 불편해 할 글을 써서 직장에서 몇 차
례 쫓겨나고 감옥에도 들어가셨던 분입니다. 7,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리영희 선생을
일러 ‘사상의 은사’라 일컬었습니다. 그 분의 글을 읽으며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뜯겨나가는
충격을 느꼈던 겁니다. 중국혁명과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파헤친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책들이 유명하답니다.
책 , 실천하는 지성을 키우다
리영희 선생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충성과 복종을 강요한 타락한 권력의 허위의식에 맞
선 날카로운 비판정신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실천하는 지식인을 대표할만한 분이지요. 리영
희 선생이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대변자가 된 데는 책 읽기가 큰 힘이 되었답니다. 특별히 중
국현대소설의 아버지라 할 루쉰의 영향이 가장 컸다는군요. 「리영희 저작집」을 읽다 보면 루쉰
을 읽으며 배우고 실천한 것이 무엇인지 여러 차례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한번 여
쭈어 보고 싶어지지요? 리영희 선생이 루쉰에게서 배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고 말입니다. 이
에 대해 해명한 글이 있어 인용합니다.
“루쉰의 작품이 중국인의 영원한 사랑을 받는 까닭은 그가 동시대의 대중을 멀리서 내려다보면서 외치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중국 농민을 감
성적으로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무지와 탐욕, 우직과 이기주의, 위선과 교활함, 이웃에
대한 냉혈적 무관심, 약육강식의 무자비함을 담담하게 그러나 냉혹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원
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사회고와 인간고를 겪고 있었던 동시대인들을 루쉰은 너무나 사
랑했던 것이다. 동포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 바로 노신 사상의 전부다. (중략) 그러므로 지난 한 시
대에 내가 이 사회와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간접적으로 노
신의 정신과 문장을 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역할을 자처했고 그것에 만족한다.”
(『스핑크스의 코』, 97~98쪽)
좀 어려운가요? 우리는 자기가 속한 민족의 잘못을 들춰내 말하는 것을 꺼립니다. 그렇지 않
으면 매국노라고 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루쉰의 미덕은 어려운 형편에 놓인 같은 민족의 편을
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과 부족한 점도 솔직하게 까발리
는 데 있었습니다. 아마 요즘 같으면 ‘악플’에 시달리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루쉰은
소설과 평론을 통해 이런 일을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이 되었다
는 말입니다.
지금이야 중국이 많이 발전했지만, 루쉰의 시대에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동북
아지역을 호령하던 중국이 한낱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아편전쟁에서는 영국에
게 패해 땅을 빼앗겼고, 청일전쟁에서는 일본에 패했습니다. 덩치만 크지 힘은 없는 바보 같은
신세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은 옛날 잘 나가던 시절만 생각하고 당시 중국이 겪
고 있던 어려운 일에는 애써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영국이나 일본을 탓할 뿐, 자기반성이 없었
던 거지요.
이때 따끔하게 일침을 놓은 것이 바로 루쉰입니다.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건강하면
감기에 안 걸리는 법입니다. 우둔하고 아둔하니 당했다고 한 것이지요. 루쉰의 소설『 아Q정전』
이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은 유명한 작품입니다. 리영희 선생은 루쉰에게 동감과 비판 정신을
함께 물려받았던 것이지요. 남이 알까 무서운 우리의 잘못된 부분도 과감히 드러내고, 그 부분
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세상에 알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온갖 고초를 다
겪었지만 말입니다.
책을 통해 자유인을 꿈꾸다
책 읽기로 변화하고 성장한 이에게는 특유의 책 읽는 법이 있게 마련입니다. 리영희 선생에게도
우리가 귀 담아 들을만한 독서론이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자유인이 되기 위
한 독서’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독서는 다르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유인을 목표로 하는 모두의 노력이다.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염원에서 출발하는 누구나의 제한 없는 자기창조의 노력이다. 조금 어렵게 표현하
면, 사람은 독서를 통해서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제약에도 스스로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존
재가 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자기에게 필요한 상황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
자유인이란 무엇인가? 무지와 몽매와 미신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이다. 고대 인간이
물질적 법칙과 현상의 원리를 깨우치는 긴 과정을 통해서 오늘의 물질적 자유인이 된 과정이다.
독서는 곧 과학이었고 지적 자유인의 식량이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475~476쪽)
모르면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고, 그 말에만 따라 살게 되어 있
습니다. 결국에는 다른 사람의 명령대로 살아가는 꼭두각시 같은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이런 삶
을 일러 자유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결정해 살아가려면 두루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책 읽기만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법칙을 알지 못했을 때 인간은 거기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치면 무서워 벌벌 떨던 옛사람을 생각해보면 무슨 뜻
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리를 알면 전혀 다른 현상이 벌어지지요. 묶여 있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할 줄 알게 됩니다. 오늘날 인류가 엄청난 발전을 이룬 이유가 어
디 있는지 알 수 있겠지요? 이쯤 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성경 말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은 우리를 모름에서 앎으로 바꾸어 줍니다. 그 앎이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알고 보면, 우
리는 책이라는 거인의 목말을 탄 난쟁이일 뿐이지요. 만약 책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알고 있
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읽어야 알고 알아야 성장한다는 것, 그것이 진보이고 발전이
라는 것, 이때 비로소 우리가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는 양 날개로 난다
다음 단계로 리영희 선생이 강조한 것은 지성적 자유인이 되기 위한 책 읽기입니다. 직접 한 말
씀은 어려워서 인용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상당히 중요한 지적입니다. 자유가 방종이 되지 않고
남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성으로 무장한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가 무엇이
며, 왜 자유로워야 하며, 그 자유가 내 삶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내가 속한
공동체나 인류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고민하고 그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하는 거
지요. 하긴, 지성이라는 말 자체가 책 읽기와 떼려야 뗄 수 없기도 합니다. 책을 많이 읽고 깊이
이해해서 우리 사회에 뜻있는 발언을 하는 사람을 일러 지성인이라 하니까요. 그리고 지성인은
권력에서 자유로워져 비판적인 말도 할 줄 아는 용기를 갖추고 있게 마련이지요. 자유와 지성은
같은 말이라는 뜻입니다.
또 리영희 선생은 전문성과 지성을 두루 아우르는 사람이 되기 위해 독서해야 한다고 힘주
어 말합니다.
“자유는 곧 지성이다. 원숙한 지성이 자유인을 만든다. 이상적인 지성적 삶(인생), 즉 자유인
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에서 특정 전문적 기능을 획득 발휘하면서 동시에 높은 수준의 인류
보편 공통적 문화(즉 교양) 창조에 참여하거나 문화적 결과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같은
인생이고자 하는 것이 현대의 독서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477쪽)
나는 이 말이야말로 요즘의 청소년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왜 공
부하나요? 당연히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 꿈은 대체로 직업으로 표현됩니다. 예
를 들면 ‘선생님이 되고 싶다’, ‘의사가 되고 싶다’, ‘변호사가 되고 싶다’ 등이지요. 이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가정을 이루고, 공동체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도
전문영역에서 남보란 듯 큰 성취를 이루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그치면 안 됩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하거나 사
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리기 위해서만 아니라, 문화를 창조하거나 이해하고 즐기는 사람이 되
기 위해서도 공부해야 합니다. 그 문화란, 결국에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다
양한 모색과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진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만 잘하는 ‘범생’
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문화를 아는 ‘멋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이루기 위해서라
도 책을 읽어야 한다니, 만약 아직도 책 읽기가 습관이 되지 않은 친구가 있다면 한번 반성해볼
필요가 있을듯합니다.
리영희표 독서론에는 선생의 삶이 오롯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
까. 삶의 무게가 배어있지 않은 책 읽기란 얼마나 의미 없던가요. 달리 말하자면, 치열한 삶에서
비롯하지 않은 독서론은 우리를 책의 세계로 이끌지 못합니다. 지성적 자유인으로 살아온 리영
희 선생이기에, 책 읽기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이제,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큰소리로 말합시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라고. 무지와 몽매,
억압에서 풀려난 그리고 문화를 창조하고 누리는 교양 있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
다. 루쉰처럼, 리영희처럼!
나에게는 리영희 선생의 독서론만 눈에 띄더군요. 리영희 선생은 우리 사회가 군사독재로 얼룩
졌을 때 신문과 책을 통해 참된 것을 알리기 위해 모진 고난을 겪으셨던 분입니다. 외신기자 생활
을 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요. 필화라고, 권력자가 불편해 할 글을 써서 직장에서 몇 차
례 쫓겨나고 감옥에도 들어가셨던 분입니다. 7,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리영희 선생을
일러 ‘사상의 은사’라 일컬었습니다. 그 분의 글을 읽으며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뜯겨나가는
충격을 느꼈던 겁니다. 중국혁명과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파헤친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책들이 유명하답니다.
책 , 실천하는 지성을 키우다
리영희 선생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충성과 복종을 강요한 타락한 권력의 허위의식에 맞
선 날카로운 비판정신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실천하는 지식인을 대표할만한 분이지요. 리영
희 선생이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대변자가 된 데는 책 읽기가 큰 힘이 되었답니다. 특별히 중
국현대소설의 아버지라 할 루쉰의 영향이 가장 컸다는군요. 「리영희 저작집」을 읽다 보면 루쉰
을 읽으며 배우고 실천한 것이 무엇인지 여러 차례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한번 여
쭈어 보고 싶어지지요? 리영희 선생이 루쉰에게서 배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고 말입니다. 이
에 대해 해명한 글이 있어 인용합니다.
“루쉰의 작품이 중국인의 영원한 사랑을 받는 까닭은 그가 동시대의 대중을 멀리서 내려다보면서 외치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중국 농민을 감
성적으로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무지와 탐욕, 우직과 이기주의, 위선과 교활함, 이웃에
대한 냉혈적 무관심, 약육강식의 무자비함을 담담하게 그러나 냉혹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원
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사회고와 인간고를 겪고 있었던 동시대인들을 루쉰은 너무나 사
랑했던 것이다. 동포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 바로 노신 사상의 전부다. (중략) 그러므로 지난 한 시
대에 내가 이 사회와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간접적으로 노
신의 정신과 문장을 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역할을 자처했고 그것에 만족한다.”
(『스핑크스의 코』, 97~98쪽)
좀 어려운가요? 우리는 자기가 속한 민족의 잘못을 들춰내 말하는 것을 꺼립니다. 그렇지 않
으면 매국노라고 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루쉰의 미덕은 어려운 형편에 놓인 같은 민족의 편을
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과 부족한 점도 솔직하게 까발리
는 데 있었습니다. 아마 요즘 같으면 ‘악플’에 시달리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루쉰은
소설과 평론을 통해 이런 일을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이 되었다
는 말입니다.
지금이야 중국이 많이 발전했지만, 루쉰의 시대에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동북
아지역을 호령하던 중국이 한낱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아편전쟁에서는 영국에
게 패해 땅을 빼앗겼고, 청일전쟁에서는 일본에 패했습니다. 덩치만 크지 힘은 없는 바보 같은
신세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은 옛날 잘 나가던 시절만 생각하고 당시 중국이 겪
고 있던 어려운 일에는 애써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영국이나 일본을 탓할 뿐, 자기반성이 없었
던 거지요.
이때 따끔하게 일침을 놓은 것이 바로 루쉰입니다.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건강하면
감기에 안 걸리는 법입니다. 우둔하고 아둔하니 당했다고 한 것이지요. 루쉰의 소설『 아Q정전』
이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은 유명한 작품입니다. 리영희 선생은 루쉰에게 동감과 비판 정신을
함께 물려받았던 것이지요. 남이 알까 무서운 우리의 잘못된 부분도 과감히 드러내고, 그 부분
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세상에 알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온갖 고초를 다
겪었지만 말입니다.
책을 통해 자유인을 꿈꾸다
책 읽기로 변화하고 성장한 이에게는 특유의 책 읽는 법이 있게 마련입니다. 리영희 선생에게도
우리가 귀 담아 들을만한 독서론이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자유인이 되기 위
한 독서’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독서는 다르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유인을 목표로 하는 모두의 노력이다.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염원에서 출발하는 누구나의 제한 없는 자기창조의 노력이다. 조금 어렵게 표현하
면, 사람은 독서를 통해서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제약에도 스스로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존
재가 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자기에게 필요한 상황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
자유인이란 무엇인가? 무지와 몽매와 미신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이다. 고대 인간이
물질적 법칙과 현상의 원리를 깨우치는 긴 과정을 통해서 오늘의 물질적 자유인이 된 과정이다.
독서는 곧 과학이었고 지적 자유인의 식량이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475~476쪽)
모르면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고, 그 말에만 따라 살게 되어 있
습니다. 결국에는 다른 사람의 명령대로 살아가는 꼭두각시 같은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이런 삶
을 일러 자유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결정해 살아가려면 두루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책 읽기만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법칙을 알지 못했을 때 인간은 거기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치면 무서워 벌벌 떨던 옛사람을 생각해보면 무슨 뜻
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리를 알면 전혀 다른 현상이 벌어지지요. 묶여 있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할 줄 알게 됩니다. 오늘날 인류가 엄청난 발전을 이룬 이유가 어
디 있는지 알 수 있겠지요? 이쯤 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성경 말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은 우리를 모름에서 앎으로 바꾸어 줍니다. 그 앎이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알고 보면, 우
리는 책이라는 거인의 목말을 탄 난쟁이일 뿐이지요. 만약 책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알고 있
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읽어야 알고 알아야 성장한다는 것, 그것이 진보이고 발전이
라는 것, 이때 비로소 우리가 자유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는 양 날개로 난다
다음 단계로 리영희 선생이 강조한 것은 지성적 자유인이 되기 위한 책 읽기입니다. 직접 한 말
씀은 어려워서 인용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상당히 중요한 지적입니다. 자유가 방종이 되지 않고
남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성으로 무장한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가 무엇이
며, 왜 자유로워야 하며, 그 자유가 내 삶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내가 속한
공동체나 인류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고민하고 그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하는 거
지요. 하긴, 지성이라는 말 자체가 책 읽기와 떼려야 뗄 수 없기도 합니다. 책을 많이 읽고 깊이
이해해서 우리 사회에 뜻있는 발언을 하는 사람을 일러 지성인이라 하니까요. 그리고 지성인은
권력에서 자유로워져 비판적인 말도 할 줄 아는 용기를 갖추고 있게 마련이지요. 자유와 지성은
같은 말이라는 뜻입니다.
또 리영희 선생은 전문성과 지성을 두루 아우르는 사람이 되기 위해 독서해야 한다고 힘주
어 말합니다.
“자유는 곧 지성이다. 원숙한 지성이 자유인을 만든다. 이상적인 지성적 삶(인생), 즉 자유인
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삶에서 특정 전문적 기능을 획득 발휘하면서 동시에 높은 수준의 인류
보편 공통적 문화(즉 교양) 창조에 참여하거나 문화적 결과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같은
인생이고자 하는 것이 현대의 독서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477쪽)
나는 이 말이야말로 요즘의 청소년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왜 공
부하나요? 당연히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 꿈은 대체로 직업으로 표현됩니다. 예
를 들면 ‘선생님이 되고 싶다’, ‘의사가 되고 싶다’, ‘변호사가 되고 싶다’ 등이지요. 이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가정을 이루고, 공동체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도
전문영역에서 남보란 듯 큰 성취를 이루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그치면 안 됩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하거나 사
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리기 위해서만 아니라, 문화를 창조하거나 이해하고 즐기는 사람이 되
기 위해서도 공부해야 합니다. 그 문화란, 결국에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다
양한 모색과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진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만 잘하는 ‘범생’
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문화를 아는 ‘멋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이루기 위해서라
도 책을 읽어야 한다니, 만약 아직도 책 읽기가 습관이 되지 않은 친구가 있다면 한번 반성해볼
필요가 있을듯합니다.
리영희표 독서론에는 선생의 삶이 오롯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
까. 삶의 무게가 배어있지 않은 책 읽기란 얼마나 의미 없던가요. 달리 말하자면, 치열한 삶에서
비롯하지 않은 독서론은 우리를 책의 세계로 이끌지 못합니다. 지성적 자유인으로 살아온 리영
희 선생이기에, 책 읽기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이제,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큰소리로 말합시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라고. 무지와 몽매,
억압에서 풀려난 그리고 문화를 창조하고 누리는 교양 있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
다. 루쉰처럼, 리영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