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함께 1. 고두쇠, 방자가 되어 성현의 반열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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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4 16:54 조회 10,129회 댓글 0건본문
언필칭 동방의 고요한 아침나라라고 하는 조선국에 숙종 임금이 나라님 자리를 꿰차고 있
을 때의 일이렷다. 한양에서 천릿길 머나먼 곳 전라도 하고도 남원 고을에 방자(房子)라는
인물이 살고 있었으니, 그의 사람됨은 이미 이름에서 다 드러나고도 남음직하렷다. 이를테
면 방자라는 이름은 중국 땅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라 일컫는 공자·맹자·순자·묵자·
노자·장자·손자·열자·관자·한비자 같은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子)’ 돌림자
라는 것이다. 이는 방자가 살아생전에 이미 저 세상 사람들인 자자(子字) 성현들과 같은 반
열에 올라 있음을 뜻하는 것 아니겠는가. 조선은 중국을 형님나라처럼 떠받드는 처지라 인
물조차도 중국 인물을 우러르기에, 방자가 그들을 형님으로 모신다고 해서 뭐 한 치라도 어
긋남 있으랴.
물론 방자가 처음부터 방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본디 이름은 고두쇠였다. 고두쇠란
작두날을 끼우는 쇠기둥에 가로지른 쇠막대를 말한다. 고두쇠는 작두날이 빠지지 않게 하
면서 작두질을 할 수 있게 하는 구실을 하는데, 그만큼 꼭 필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방자는 정작 누가 자신에게 고두쇠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지 모른다. 자신을 길
러준 외할머니가 ‘고두쇠야!’라고 부르니까 그저 자신의 이름이 고두쇠인 줄 알 뿐이다. 본
디 성도 있었을 것인데 성은 무엇인지 아예 모른다. 애당초 아비가 누군지 모르고 어미는 남
원 관아에 딸린 기생이었다는 것만 아는데, 아비는 출생 이전에 사라졌고 어미는 출생 후 얼
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 버린 탓이다.
고두쇠는 할머니랑 관아 밖 주막거리에서 어려서부터 줄곧 살았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
도 어머니처럼 관기 출신이었단다. 할머니는 딸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뜬 뒤 그 딸이 남긴
아비도 알 수 없는 핏덩어리를 거두어야 했으니 그 인생도 꽤나 박복하다 할 것이다. 고두쇠
는 할머니 주막에 단골로 들락거리던 이방아전의 주선으로 관아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모 할멈, 고두쇠도 인자 대가리 굵어졌은께 지 밥벌이라도 하라고 관아로 데려가 심
부름이라도 시켜 볼까? 통인이네 방자네 하는 심부름꾼 말이시.”
“하이고, 말씸이라도 고맙소. 애비 에미 얼굴도 모르는 놈 저만치 컸은께 인자 지 밥 벌이
만 혀도 출세지, 출세여.”
“출세라고 헐 것까지는 없고, 마침 신관 사또 자제 도령이 딸랑이 없이 왔은께 고두쇠를
그 도령 방자로 붙여주면 딱 쓰겠다 싶어서…….”
그리하여 고두쇠는 관아로 들어가 이 사또의 외아들인 이몽룡의 잔심부름을 거들게
되는 책방 방자가 된 것이다. 방자가 된 고두쇠의 인생 유전이 이러하나, 방자가 되자마자
그는 주막에서 잔뼈 굵어지도록 익힌 눈치코치를 십분 발휘하여 다른 통인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자리를 점하여, 자자 항렬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렷다.
방자가 관아에 들어오자마자 사또의 외아들과 붙어살게 되니 은근슬쩍 시샘하는 통인
들도 적지 않았다.
“저 방자로 들어온 고두쇠란 놈, 뭐 하던 놈이여?”
“나도 몰러. 들리는 소문에 기대면 애비 에미 얼굴도 모르는 놈이디야. 옛날 옛날 어떤 사
또가 외입해서 난 놈이라는 말도 있고…….”
“오입이 아니고?”
“아따 그 사람 문자 속 깊지도 않음시롱 따지기는……. 오입이라믄 잘못 들어간 것인디,
사또가 나라님 허가 난 관아 기생하고 정을 통한 것인께 잘못 들어갔다고 할 순 없고 바깥으
로 들어간 것이 것제. 안집 구녘 말고 바깥집 구녘 말이여.”
“잉? 그라믄 고두쇠 저놈 에미는 기생였단 말이여?”
“그렇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이제, 내도 자세히는 몰러.”
그러나 관아의 통인들은 고두쇠가 방자로 들어와 불알에서 방울 소리가 날 정도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게 기특하여 차츰 호의적인 관심을 보였다. 사실 부지런한 방자 덕에 자신들
의 신역이 훨씬 수월해진 것도 있어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들 방자를 귀여워하고 밥 자리든
술 자리든 꼭 데리고 다니게까지 되었다. 그때부터 방자라는 호칭도 다른 통인들은 쓰지 않
고 오로지 고두쇠한테만 쓰게 되고 보니, 성현의 탄생 조짐을 다 알아본 까닭이리라.
그런데 방자가 관아에서 자리를 잡을수록 누구보다 좋아하는 이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사또의 외아들인 이몽룡이렷다. 그러잖아도 한양 살다 천리 먼 남원 고을에 아버지를 따라
오고 보니 물 설고 산 설고 사람 선 것까지는 이냥저냥 견딜 만한데 하루하루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양 살 땐 걸핏하면 또래 악동들과 함께 삼청동 집을 나서 저잣 거리로 산으로
강으로 쏘다니며 놀아제꼈는데, 남원 고을에 오고 나선 어디 갈 데도 없고 같이 놀 벗도 없어
답답하고 답답하여 이대로 그냥 지나다간 가슴에 불이 날지도 모를일이었다. 그런 판에 나이가
자신과 어금버금해 보이는 고두쇠가 책방 방자로 들어왔으니 이 아니 좋을손가.
몽룡은 본디 공부를 좋아하는 학동이라기보다는 틈만 나면 말썽을 일으키는 악동이었다.
이런 그를 두고 그의 아버지는 늘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으리라.
“허허, 몽룡이 녀석이 나중에 뭐가 되려고 도대체 공부엔 관심이 없고 밖으로 싸다니기만
하는지 모르겠구먼.”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몽룡의 어머니는 몽룡을 가졌을 때 꾼 태몽이 꺼림칙하였다.
아들 이름으로 꿈 몽(夢)자에 용 룡(龍)자를 쓰지만 사실 꿈 속에서 본 것은 용이 아니라
지렁이였던 것이다. 자고로 큰 인물이 되려면 꿈부터 예사롭지 않아야 하는데 기껏 땅속이나
헤집고 다니는 지렁이 꿈을 꾸었으니 아들이 공부엔 해찰이나 부리며 밖으로만 싸대는 게
꿈 탓이련 할 수밖에.
“허허 부인, 지렁이도 진서론 토룡(土龍)이라 하오. 땅속에 사는 용이란 말이오.
그러니 꿈에서 용을 본 건 마찬가지오.”
몽룡 어머니는 남편의 그럴싸한 해몽에 적이 마음이 놓이긴 해도걱정스런 마음을 아주 떨쳐낼 순 없었다.
몽룡이 남원에 오고 보니 우선 자신과 짝패가 되어 놀 만한 또래가 없다는 게 이만저만
못 마땅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사또이다 보니 모두들 자신을 사또 이상으로 받들어
주려고만 하지 또래 벗 하나 붙여 주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직위나 신분이 모두들
사또 아래이다 보니 그 누구도 자신과 허물없이 지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참에 고두쇠가
관아로 들어와 책방의 방자가 되었으니 어찌 좋지 않을 수 있으랴.
“얘, 방자야.”
“이름 놔 두고 방정맞게 방자가 뭐유? 내 이름은 고두쇠유.”
“고두쇠는 네 이름이고 여기서 하는 일은 방자 일이렷다. 사실 말이지 고두쇠라 그러면 마당쇠나 돌쇠처럼 쇠자 돌림이어서 좀 그렇잖니. 기왕이면 공자 맹
자처럼 자자 돌림인 방자가 훨씬 낫지. 하하!”
몽룡이 방자를 처음 본 날 방자라고 부르자, 방자 녀석 맹랑하게 제 이름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게 밉지 않았다. 우선은 무엇보다 나이가 궁금했다. 몽룡은 양반 위엄을 잃지 않고
점잖게 물었다.
“얘, 고두쇠야, 아니 방자야. 올해 몇 살 먹었느냐?”
“도령보다는 더 묵었을 것이오.”
몽룡은 도련님도 아니고 그냥 도령이라고 하는 방자가 슬쩍 얄미웠다. 그러나 양반 체면
에 상놈하고 그런 것 가지고 다투기도 민망하여 애써 태연한 척했다.
“나는 이팔청춘 꽃띠인 십육세인데.”
“나로 말할 것 같으믄 왕꽃띠인 이구 씹팔세요.”
“씹팔세? 그놈 참 입 한번 걸구나. 그렇다면 네가 나보다 두 살 더 먹었단 말이냐?”
“허! 더하고 뺄 것도 없이 딱 두 살 차이가 지는구만. 그라고 보믄 내가 형님이네.”
“데끼, 상놈이 형님 되는 법이 어디 있나?”
“양반이고 상놈이고 낫살 더 높으면 형님은 형님이제, 그게 뭐 어째서?”
“허 참, 너 관아 물 먹고 살라면 제대로 좀 배워야 쓰겠다. 여봐라, 게 통인 없느냐?”
그러자 책방 안쪽 마루 뒤에서 방자보다 더 작은 사내가 종종거리며 뛰쳐나왔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내가 불렀으니까, 네가 왔겠지.”
“그럼, 무슨 일로?”
몽룡은 어이가 없었다. 한양에선 집안의 종이든 심부름꾼이든 사근사근하기가 막 깎아
놓은 배 같았는데, 남원 고을 아랫것들은 한결같이 퉁명스러운데다 싸라기 밥만 먹고 살았
는지 말 끝자락은 다 잘라먹고 위아래도 없이 꼭 반말 투로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몽룡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방자를 흘깃 바라보며 애써 위엄서린 목소리로 말
할 수밖에. 기실은 눈앞에 뛰쳐나온 통인 녀석도 마뜩찮다. 그래도 관아 물 좀 먹은 고참 통
인 녀석한테 싫은 내색 할 수 있나.
“저 새로 온 방자 녀석 교육 좀 시켜라.”
“교육이라믄 무슨 교육 말씀이신지…….”
“저 녀석은 나를 대하는 법도 아직 모르니라!”
이번엔 방자가 어이없을 차례이다. 도령이 먼저 나이가 몇이냐고 해서 알려주었을 뿐이
다. 이어 자신이 두 살 어리다고 해서 그럼 내가 형님이네 했더니, 뜬금없이 통인을 불러 자
신을 대하는 법을 가르치라니…….
통인은 사또 자제가 자신들보다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는지를 일러주었다. 그러니 무조
건 굽실굽실하며 ‘예, 예’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방자는 여태껏 누구한테도 굽실거려 보
지를 않았다. 비록 할머니가 주막을 할지언정, 손자인 자신은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자유
롭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뎬장, 두 살이나 어린 게 사또 아들이라고 되게 건방지네. 내가 먹은 밥 그릇 수만 따져도
지보다 몇 백 그릇은 더 될 것이고, 가운뎃다리 가지고 왼손질 한 것만 혀도 지보단 더 했을
것이고, 처녀 불알을 만진 것만 혀도 지보단 더 만져 보았을 것인디, 어린 것이 어디서…….”
통인 역시 방자의 볼멘소리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하지만 관아 생활이 어디 그런가. 사
또라면 자신들의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는데.
“방자 너 말이여, 관아 살이 지대로 할라믄 말투부터 쪼깐 보드라워져야 쓰것다.”
“그러는 이녁은 말 뽄새가 보드라운 줄 아시오?”
“너보단 그려도 훨썩 보드랍제. 관아에서 먹은 밥그릇 수가 얼만디. 암튼 사또는 말이여,
나라님 대신으로 남원 고을 백성을 다스리러 온 것이여. 그 말은 사또 아들도 같은 급인께 같
은 대접을 혀야 한다 그 말이여.”
“그라믄 아들래미도 애비 따라 고을을 잘 다스릴 생각부터 해야제, 윽박지르기나 하믄
쓰간디.”
“아랫것들이 높은 사람들헌티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이 잘 다스리는 것이란 말이여.”
“아따, 두 번만 더 잘 다스리다간 고분고분이 말랑말랑이 되것어. 내 알아묵었은께 그만
허더라고잉.”
“듣자헌께 지렁이 토룡 꿈 꾸고 난 아들이라 쪼깐 부잡하디야. 그란께 한 살이라도 더 먹
은방자 니가 이해하고 잘 모시도록 혀.”
“한 살이 아니라 두 살이나 더 묵었단께! 오뉴월 하루 볕이 어딘데, 두 살이나 더 먹은 형
님한테…….”
“아이고 두야! 너 땜시 내 머리가 무쟈게 아프게 생겼다잉. 난 도령님 분부 받들어 너한티
교육했은께 앞으로 이런 일로 나 오라가라 하는 없도록 혀라잉. 알어묵었냐?”
“뎬장, 알어묵었은께 가보쇼잉. 뭐 이런 디가 다 있어!”
몽룡은 방자가 초면부터 뻣뻣하게 나왔지만 내심 싫지는 않았다. 자신보다 나이도 두 살
이나 더 먹었으니 뭐든 기대고 부릴 만할 것 같았다. 한양 벗들은 죄다 난다 긴다 하는 집 자
제들이긴 했지만 입에선 아직 젖비린내가 나는 듯하여 함께 도모할 만한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저 방자 녀석은 뭔가 통할 것 같았다.
한양에서 듣자니 남원골엔 춘향이라는 계집이 인물 잘 나고 문자깨나 꿰고 있어 어울릴
만 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남원부사가 되어 떠난다 하니 벗들이 침을 꼴딱 삼키며 부
러워들 했다. 몽룡도 한양을 떠나는 건 싫었지만 춘향이는 만나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하늘
이 돕는 것 같았다. 조선 팔도 많고 많은 고을 가운데 남원고을이라니!
하루 이틀 지나며 보아하니 방자도 차츰 관아 생활을 익혀 나가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도
이젠 깎듯이 ‘도련님’이라 부르고 자신이 궁금해 하는 바깥세상 일도 물으면 묻는 대로 잘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아직 춘향이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남원 고을에서 자신보다
더 나은 자리에 있는 젊은이는 없을 테니 분위기부터 먼저 익힌 뒤 방자 앞세워 한번 안면 트
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한양에서야 아버지의 벼슬자리가 그다지 앞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
러나 이 고을에선 맨 앞자리다. 아,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기에 일단은 아버지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책방에서 착실히 지내기로 했다. 사실 아버지는 남원 부사로 부임하여 객사에 들자
마자 자신을 불러 단단히 이르기도 했다.
“이참에 아비가 멀리 전라도 남원 땅까지 외직으로 나온 건 몽룡이 너 때문이기도 하다.
한양에서 그대로 더 있다간 노는 일에만 정신 팔려 과거 공부는 뒷전이라 자칫 우리 이씨 가
문의 영광이 끊길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든 게 사실이다. 아비가 외직에 있을 때 두문불출
하고 한 삼 년 착실히 공부하여 등과하도록 하라. 알겠느냐?”
“네, 잘 알았습니다, 아버님.”
대답이야 그렇게 했지만 몽룡이 마음은 이미 관아 담을 넘어 춘향이한테 가 있었다.
아직 먼 발치에서조차 얼굴도 본 일이 없는데 어인 까닭인지 몰랐다. 듣자하니 춘향 어머니는
관아에서 물러난 퇴기로 한양 자하골 살던 성 아무개 참판이 남원고을 부사로 내려 왔을 때
정을 받아 춘향을 낳았다 한다. 그렇다면 춘향이는 아무리 아비가 참판 벼슬을 하고
물러났다 해도 어미를 따라 신분은 역시 기생이다. 기생이라면 해볼 만했다. 내가 누군가?
이 고을에선 최고 가는 사또의 아들 아닌가! 몽룡은 춘향이 이미 자신의 품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맘 같으면 방자 앞세우고 당장이라도 춘향이를 만나러 가고
싶지만 아직은 때를 더 보아야 했다. 아버지의 심기도 살펴야 했고, 관속들의
눈과 입도 조심해야 했다. 쉬 이룰 수 있는 일을 서둘다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직 방자한테도 춘향이 건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딴청만 부렸다.
“얘, 방자야.”
“예, 말씀하십시오, 도련님.
방자 스스로도 제 입에서 도련님이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게 신기했다. 처음과 달
리 고두쇠라는 이름 대신 방자라는 직책으로 불리는 게 나쁘지 않아서일 것이다. 귀동냥한
걸로 미루어 보면 양반들은 입만 열면 공자왈 맹자왈 아닌가. 진서야 어찌 쓰는지 모르지만
그런 공자와 맹자하고 같은 항렬이면 나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방자라 불리는 것에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방자의 품격을 높이기로 마음먹은 터였다.
“남원 고을 젊은이들은 어디에서 많이 노느냐?”
방자는 어이가 없었다. 이 어린 책방 도령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았다.
“어디서 놀다뇨? 촌구석 젊은이들이 놀 새가 어디 있다요? 날마다 일하기도 바쁜디.”
“아니 그래도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쉬는 날은 있을 것 아니냐?”
“쉬는 날은 비 오는 날인디, 그날은 따땃한 아랫목에 드러누워 등짝이나 지지믄 되제 어
딜 나가요 나가긴.”
“그래도 단오 날이나 초파일 같은 때는 집 안에 안 있을 것 아냐.”
“단오날은 광한루 같은 데 나가 바람 쐬고, 초파일엔 선원사 같은 절에 가긴 가지요.”
“내 말이 그 말이여. 단오나 초파일 같은 날 젊은이들은 어디서 노느냐 이 말이었어.”
몽룡은 흡족해했다. 단오 날이나 초파일에 관아 밖을 나가면 춘향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
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방자는 순간 번개 치듯 몽룡의 꿍꿍이속이 그려졌다. 자신이 누군가. 주막집에서 잔뼈가 굵
은 사람 아닌가. 눈치코치 발달할 대로 발달해 앉아서 천 리를 보고 서서는 구천 리를 보니 합해
서 만 리를 보는 사람 아닌가. 아비 어미 없이 주막 하는 할머니 손에 자란 까닭에 척 보면 착이
다. 이름하여 눈치 9 단에 코치 10단! 도합 눈치코치 19단인 자신의 감각에 시방 몽룡의 속이 다
들여다보인 것이다.
이제 겨우 코 밑이 거뭇해지는 어린 것이 공부는 뒷전이고 바깥으로 나돌 생각이나 하다
니. 안 봐도 싹수가 노랬다. 저것이 시방 아는 이가 없으니 아직 쉽게 나가지 못하고 이리저
리 잔머리만 굴리는 중이렷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물어볼 것도 없이 계집을 만
나고 싶어서일 것이다. 발정 난 수캐는 암내 풍기는 암캐를 용케 알아보지 않던가. 이 어린
도령이 이제 막 발정이 나기 시작한 것이리라. 아마 불두덩이 이제 막 거웃이 나려고 근질근
질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불알이 아직 다 여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방자 형님 것 정도는 돼야제 어린 것이 감히…….’
몽룡은 이미 방자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
몽룡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방자의 눈앞에 춘향과 향단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춘
향의 어머니 월매가 꾸리는 주막집이 자신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춘향이와 향단이하
곤 어려서부터 소꿉친구로 지내온 사이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두 계집이 갑자기 자기와 내
외를 하기 시작했다. 춘향이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나 뭐라나 하는 진서까지 써 가며 제법
유식한 티까지 냈다. 그렇다면 일곱 살 되자마자 같이 안 놀았어야지, 열다섯 열여섯 되도록
같이 실컷 놀아놓고선 갑자기 낯선 사람 보듯 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춘향이가 성 참판이라는 벼슬아치를 아비로 해서 태어난 아이란 건 남원 고을에선 모르
는 이가 없다. 물론 춘향이 어미 월매가 관아 밥을 먹은 관기였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그
런데도 춘향은 자기 어미처럼 기생 노릇을 하지 않고 양반 행세를 한다. 게다가 향단이라는
몸종까지 거느리면서 말이다. 비록 주막을 하고 있지만 양반의 씨를 이은 까닭에 몸종도 부
릴 만큼 재산이 안으로 많이 있는 성싶었다.
몸종인 향단이가 춘향이보다 나이가 많아 방자 자신과 동갑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내외
는 향단이가 먼저 했다. 어느 날 향단이 가슴이 봉긋 솟는가 싶더니 방자에게 괜히 짜증을 부
려댔다. 저만 그러면 그만일 터인데 기껏 잘 놀다가 순간 토라져서 가만히 있는 춘향이를 재
촉하여 서둘러 집으로 가버리기도 했다. 그러다 이태 정도 지나자 그때부턴 춘향이조차 내
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엔 광한루 옆 냇가에서 밤에 두 계집이 멱을 감을 땐 방자가
망을 보아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그런 일은 없다.
두 계집이 멱 감던 일을 떠올리니 갑자기 아랫도리가 묵직해졌다.
“향단아, 너 이젠 여자가 되어버린 거여?”
춘향이가 향단이 젖가슴을 만지면서 하는 소리이다.
“아이 참, 아가씨도. 처음부터 여자지 새삼 왜 그러시유?”
그때 방자는 안 보는 척하면서 어둠 속의 둘을 훔쳐보았다. 이런 땐 그믐 밤이 아니고 보
름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머릿속으론 향단이의 복숭아 같은 가슴이 그려졌다. 그런 날
엔 춘향이가 잠 들면 슬며시 향단이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술청에 이미 손님은
없고 둘만 있어 참 좋았다. 할머니는 가는귀가 먹은데다 일찍 자리에 누워 코까지 골며 자는
터라 둘이 술청에서 꼭 붙어 있어도 잘 알지 못했다. 향단이와는 그런 사이였다.
곧이어 춘향이도 향단이처럼 가슴이 솟아 올랐다. 아무리 속치마 말기로 눌러 묶어도 밖
으로 삐져 나온 가슴살은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방자는 어느 때부턴가 춘향이 가슴께는 감
히 바라볼 수도 없었다. 춘향이 가슴을 바라보는 순간 눈이 멀어 버리는 것 같아서였다.
춘향이까지 여자가 되어 버린 뒤론 둘이 냇가에서 멱을 감는 일이 아예 없어져 버렸다.
방자는 못내 아쉬웠다. 이제야 뭔가 손에 잡힐 듯 말 듯했는데.
향단이의 출생 유래는 아무도 모른다. 관아에서 물러난 퇴기 집에서 몸종 노릇하는 아이
의 신분이니 그저 그렇고 그럴 뿐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출생도 보잘
것없기는 마찬가지다. 할머니가 한번도 말해 주진 않았지만 눈치로 보면 아버지가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춘향이처럼 아버지가 양반이었을까? 기생은 아
무하고나 잠자리를 갖지 않잖아. 그래봐야 뭐 하나. 지금 자신은 주막집 손자로 아무런 기대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춘향이는 복 받은 계집이다. 신분도 확
실히 알 수 있고 얼굴도 반반한데다 문자 속까지 갖추었으니 저만한 복을 타고나기도 쉽지
않으리라.
아쉽고 아쉬울 뿐이다. 이젠 감히 다가가기도 쉽지 않은데, 그 전에 춘향이하고 진하게
사랑이라도 나누어 볼 걸. 향단이하곤 밤이면 만나 꽤나 여러 번 뒤엉켜 보았지만 춘향이는
감히 그래 보지 못했다. 춘향이하곤 여남은 살 때 소꿉놀이하다 입술을 슬쩍 겹쳐 본 적은 있
지만 그땐 아무런 느낌도 없어 그대로 끝이었다. 그 뒤로 손이나 잡아 보았을까? 기억도 없
다. 계집애가 원체 도도한데다 쌀쌀 맞아서 철들고 나자 내외가 보통 심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몽룡인지 몽롱인지 하는 사또 아들래미가 자꾸만 걸린다. 아무래도 그 녀석
이 발정이 단단히 난 성싶다. 머지않아 바깥바람을 쐬자고 성화일 텐데 어찌해야 하나. 두 계
집에겐 미리 알려 몽룡이 나갈 땐 집 밖 출입을 하지 말라고 할까? 그런다고 고것들이 내 말
을 듣기나 할까? 다른 때는 꿈쩍도 않고 집에 붙어 있지만 단옷날엔 그네 뛰러 광한루에 나
오고, 초파일엔 탑돌이 하러 선원사에 가지 않는가. 괜히 몽룡이한테 광한루와 선원사 얘길
했나 보다. 말눈치를 빨리 알아채고 말머리를 재빨리 다른 데로 돌렸어야 하는데…….
(계속)
을 때의 일이렷다. 한양에서 천릿길 머나먼 곳 전라도 하고도 남원 고을에 방자(房子)라는
인물이 살고 있었으니, 그의 사람됨은 이미 이름에서 다 드러나고도 남음직하렷다. 이를테
면 방자라는 이름은 중국 땅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라 일컫는 공자·맹자·순자·묵자·
노자·장자·손자·열자·관자·한비자 같은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子)’ 돌림자
라는 것이다. 이는 방자가 살아생전에 이미 저 세상 사람들인 자자(子字) 성현들과 같은 반
열에 올라 있음을 뜻하는 것 아니겠는가. 조선은 중국을 형님나라처럼 떠받드는 처지라 인
물조차도 중국 인물을 우러르기에, 방자가 그들을 형님으로 모신다고 해서 뭐 한 치라도 어
긋남 있으랴.
물론 방자가 처음부터 방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본디 이름은 고두쇠였다. 고두쇠란
작두날을 끼우는 쇠기둥에 가로지른 쇠막대를 말한다. 고두쇠는 작두날이 빠지지 않게 하
면서 작두질을 할 수 있게 하는 구실을 하는데, 그만큼 꼭 필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방자는 정작 누가 자신에게 고두쇠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지 모른다. 자신을 길
러준 외할머니가 ‘고두쇠야!’라고 부르니까 그저 자신의 이름이 고두쇠인 줄 알 뿐이다. 본
디 성도 있었을 것인데 성은 무엇인지 아예 모른다. 애당초 아비가 누군지 모르고 어미는 남
원 관아에 딸린 기생이었다는 것만 아는데, 아비는 출생 이전에 사라졌고 어미는 출생 후 얼
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 버린 탓이다.
고두쇠는 할머니랑 관아 밖 주막거리에서 어려서부터 줄곧 살았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
도 어머니처럼 관기 출신이었단다. 할머니는 딸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뜬 뒤 그 딸이 남긴
아비도 알 수 없는 핏덩어리를 거두어야 했으니 그 인생도 꽤나 박복하다 할 것이다. 고두쇠
는 할머니 주막에 단골로 들락거리던 이방아전의 주선으로 관아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모 할멈, 고두쇠도 인자 대가리 굵어졌은께 지 밥벌이라도 하라고 관아로 데려가 심
부름이라도 시켜 볼까? 통인이네 방자네 하는 심부름꾼 말이시.”
“하이고, 말씸이라도 고맙소. 애비 에미 얼굴도 모르는 놈 저만치 컸은께 인자 지 밥 벌이
만 혀도 출세지, 출세여.”
“출세라고 헐 것까지는 없고, 마침 신관 사또 자제 도령이 딸랑이 없이 왔은께 고두쇠를
그 도령 방자로 붙여주면 딱 쓰겠다 싶어서…….”
그리하여 고두쇠는 관아로 들어가 이 사또의 외아들인 이몽룡의 잔심부름을 거들게
되는 책방 방자가 된 것이다. 방자가 된 고두쇠의 인생 유전이 이러하나, 방자가 되자마자
그는 주막에서 잔뼈 굵어지도록 익힌 눈치코치를 십분 발휘하여 다른 통인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자리를 점하여, 자자 항렬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렷다.
방자가 관아에 들어오자마자 사또의 외아들과 붙어살게 되니 은근슬쩍 시샘하는 통인
들도 적지 않았다.
“저 방자로 들어온 고두쇠란 놈, 뭐 하던 놈이여?”
“나도 몰러. 들리는 소문에 기대면 애비 에미 얼굴도 모르는 놈이디야. 옛날 옛날 어떤 사
또가 외입해서 난 놈이라는 말도 있고…….”
“오입이 아니고?”
“아따 그 사람 문자 속 깊지도 않음시롱 따지기는……. 오입이라믄 잘못 들어간 것인디,
사또가 나라님 허가 난 관아 기생하고 정을 통한 것인께 잘못 들어갔다고 할 순 없고 바깥으
로 들어간 것이 것제. 안집 구녘 말고 바깥집 구녘 말이여.”
“잉? 그라믄 고두쇠 저놈 에미는 기생였단 말이여?”
“그렇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이제, 내도 자세히는 몰러.”
그러나 관아의 통인들은 고두쇠가 방자로 들어와 불알에서 방울 소리가 날 정도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게 기특하여 차츰 호의적인 관심을 보였다. 사실 부지런한 방자 덕에 자신들
의 신역이 훨씬 수월해진 것도 있어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들 방자를 귀여워하고 밥 자리든
술 자리든 꼭 데리고 다니게까지 되었다. 그때부터 방자라는 호칭도 다른 통인들은 쓰지 않
고 오로지 고두쇠한테만 쓰게 되고 보니, 성현의 탄생 조짐을 다 알아본 까닭이리라.
그런데 방자가 관아에서 자리를 잡을수록 누구보다 좋아하는 이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사또의 외아들인 이몽룡이렷다. 그러잖아도 한양 살다 천리 먼 남원 고을에 아버지를 따라
오고 보니 물 설고 산 설고 사람 선 것까지는 이냥저냥 견딜 만한데 하루하루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양 살 땐 걸핏하면 또래 악동들과 함께 삼청동 집을 나서 저잣 거리로 산으로
강으로 쏘다니며 놀아제꼈는데, 남원 고을에 오고 나선 어디 갈 데도 없고 같이 놀 벗도 없어
답답하고 답답하여 이대로 그냥 지나다간 가슴에 불이 날지도 모를일이었다. 그런 판에 나이가
자신과 어금버금해 보이는 고두쇠가 책방 방자로 들어왔으니 이 아니 좋을손가.
몽룡은 본디 공부를 좋아하는 학동이라기보다는 틈만 나면 말썽을 일으키는 악동이었다.
이런 그를 두고 그의 아버지는 늘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으리라.
“허허, 몽룡이 녀석이 나중에 뭐가 되려고 도대체 공부엔 관심이 없고 밖으로 싸다니기만
하는지 모르겠구먼.”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몽룡의 어머니는 몽룡을 가졌을 때 꾼 태몽이 꺼림칙하였다.
아들 이름으로 꿈 몽(夢)자에 용 룡(龍)자를 쓰지만 사실 꿈 속에서 본 것은 용이 아니라
지렁이였던 것이다. 자고로 큰 인물이 되려면 꿈부터 예사롭지 않아야 하는데 기껏 땅속이나
헤집고 다니는 지렁이 꿈을 꾸었으니 아들이 공부엔 해찰이나 부리며 밖으로만 싸대는 게
꿈 탓이련 할 수밖에.
“허허 부인, 지렁이도 진서론 토룡(土龍)이라 하오. 땅속에 사는 용이란 말이오.
그러니 꿈에서 용을 본 건 마찬가지오.”
몽룡 어머니는 남편의 그럴싸한 해몽에 적이 마음이 놓이긴 해도걱정스런 마음을 아주 떨쳐낼 순 없었다.
몽룡이 남원에 오고 보니 우선 자신과 짝패가 되어 놀 만한 또래가 없다는 게 이만저만
못 마땅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사또이다 보니 모두들 자신을 사또 이상으로 받들어
주려고만 하지 또래 벗 하나 붙여 주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직위나 신분이 모두들
사또 아래이다 보니 그 누구도 자신과 허물없이 지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참에 고두쇠가
관아로 들어와 책방의 방자가 되었으니 어찌 좋지 않을 수 있으랴.
“얘, 방자야.”
“이름 놔 두고 방정맞게 방자가 뭐유? 내 이름은 고두쇠유.”
“고두쇠는 네 이름이고 여기서 하는 일은 방자 일이렷다. 사실 말이지 고두쇠라 그러면 마당쇠나 돌쇠처럼 쇠자 돌림이어서 좀 그렇잖니. 기왕이면 공자 맹
자처럼 자자 돌림인 방자가 훨씬 낫지. 하하!”
몽룡이 방자를 처음 본 날 방자라고 부르자, 방자 녀석 맹랑하게 제 이름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게 밉지 않았다. 우선은 무엇보다 나이가 궁금했다. 몽룡은 양반 위엄을 잃지 않고
점잖게 물었다.
“얘, 고두쇠야, 아니 방자야. 올해 몇 살 먹었느냐?”
“도령보다는 더 묵었을 것이오.”
몽룡은 도련님도 아니고 그냥 도령이라고 하는 방자가 슬쩍 얄미웠다. 그러나 양반 체면
에 상놈하고 그런 것 가지고 다투기도 민망하여 애써 태연한 척했다.
“나는 이팔청춘 꽃띠인 십육세인데.”
“나로 말할 것 같으믄 왕꽃띠인 이구 씹팔세요.”
“씹팔세? 그놈 참 입 한번 걸구나. 그렇다면 네가 나보다 두 살 더 먹었단 말이냐?”
“허! 더하고 뺄 것도 없이 딱 두 살 차이가 지는구만. 그라고 보믄 내가 형님이네.”
“데끼, 상놈이 형님 되는 법이 어디 있나?”
“양반이고 상놈이고 낫살 더 높으면 형님은 형님이제, 그게 뭐 어째서?”
“허 참, 너 관아 물 먹고 살라면 제대로 좀 배워야 쓰겠다. 여봐라, 게 통인 없느냐?”
그러자 책방 안쪽 마루 뒤에서 방자보다 더 작은 사내가 종종거리며 뛰쳐나왔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내가 불렀으니까, 네가 왔겠지.”
“그럼, 무슨 일로?”
몽룡은 어이가 없었다. 한양에선 집안의 종이든 심부름꾼이든 사근사근하기가 막 깎아
놓은 배 같았는데, 남원 고을 아랫것들은 한결같이 퉁명스러운데다 싸라기 밥만 먹고 살았
는지 말 끝자락은 다 잘라먹고 위아래도 없이 꼭 반말 투로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몽룡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방자를 흘깃 바라보며 애써 위엄서린 목소리로 말
할 수밖에. 기실은 눈앞에 뛰쳐나온 통인 녀석도 마뜩찮다. 그래도 관아 물 좀 먹은 고참 통
인 녀석한테 싫은 내색 할 수 있나.
“저 새로 온 방자 녀석 교육 좀 시켜라.”
“교육이라믄 무슨 교육 말씀이신지…….”
“저 녀석은 나를 대하는 법도 아직 모르니라!”
이번엔 방자가 어이없을 차례이다. 도령이 먼저 나이가 몇이냐고 해서 알려주었을 뿐이
다. 이어 자신이 두 살 어리다고 해서 그럼 내가 형님이네 했더니, 뜬금없이 통인을 불러 자
신을 대하는 법을 가르치라니…….
통인은 사또 자제가 자신들보다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는지를 일러주었다. 그러니 무조
건 굽실굽실하며 ‘예, 예’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방자는 여태껏 누구한테도 굽실거려 보
지를 않았다. 비록 할머니가 주막을 할지언정, 손자인 자신은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자유
롭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뎬장, 두 살이나 어린 게 사또 아들이라고 되게 건방지네. 내가 먹은 밥 그릇 수만 따져도
지보다 몇 백 그릇은 더 될 것이고, 가운뎃다리 가지고 왼손질 한 것만 혀도 지보단 더 했을
것이고, 처녀 불알을 만진 것만 혀도 지보단 더 만져 보았을 것인디, 어린 것이 어디서…….”
통인 역시 방자의 볼멘소리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하지만 관아 생활이 어디 그런가. 사
또라면 자신들의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는데.
“방자 너 말이여, 관아 살이 지대로 할라믄 말투부터 쪼깐 보드라워져야 쓰것다.”
“그러는 이녁은 말 뽄새가 보드라운 줄 아시오?”
“너보단 그려도 훨썩 보드랍제. 관아에서 먹은 밥그릇 수가 얼만디. 암튼 사또는 말이여,
나라님 대신으로 남원 고을 백성을 다스리러 온 것이여. 그 말은 사또 아들도 같은 급인께 같
은 대접을 혀야 한다 그 말이여.”
“그라믄 아들래미도 애비 따라 고을을 잘 다스릴 생각부터 해야제, 윽박지르기나 하믄
쓰간디.”
“아랫것들이 높은 사람들헌티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이 잘 다스리는 것이란 말이여.”
“아따, 두 번만 더 잘 다스리다간 고분고분이 말랑말랑이 되것어. 내 알아묵었은께 그만
허더라고잉.”
“듣자헌께 지렁이 토룡 꿈 꾸고 난 아들이라 쪼깐 부잡하디야. 그란께 한 살이라도 더 먹
은방자 니가 이해하고 잘 모시도록 혀.”
“한 살이 아니라 두 살이나 더 묵었단께! 오뉴월 하루 볕이 어딘데, 두 살이나 더 먹은 형
님한테…….”
“아이고 두야! 너 땜시 내 머리가 무쟈게 아프게 생겼다잉. 난 도령님 분부 받들어 너한티
교육했은께 앞으로 이런 일로 나 오라가라 하는 없도록 혀라잉. 알어묵었냐?”
“뎬장, 알어묵었은께 가보쇼잉. 뭐 이런 디가 다 있어!”
몽룡은 방자가 초면부터 뻣뻣하게 나왔지만 내심 싫지는 않았다. 자신보다 나이도 두 살
이나 더 먹었으니 뭐든 기대고 부릴 만할 것 같았다. 한양 벗들은 죄다 난다 긴다 하는 집 자
제들이긴 했지만 입에선 아직 젖비린내가 나는 듯하여 함께 도모할 만한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저 방자 녀석은 뭔가 통할 것 같았다.
한양에서 듣자니 남원골엔 춘향이라는 계집이 인물 잘 나고 문자깨나 꿰고 있어 어울릴
만 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남원부사가 되어 떠난다 하니 벗들이 침을 꼴딱 삼키며 부
러워들 했다. 몽룡도 한양을 떠나는 건 싫었지만 춘향이는 만나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하늘
이 돕는 것 같았다. 조선 팔도 많고 많은 고을 가운데 남원고을이라니!
하루 이틀 지나며 보아하니 방자도 차츰 관아 생활을 익혀 나가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도
이젠 깎듯이 ‘도련님’이라 부르고 자신이 궁금해 하는 바깥세상 일도 물으면 묻는 대로 잘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아직 춘향이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남원 고을에서 자신보다
더 나은 자리에 있는 젊은이는 없을 테니 분위기부터 먼저 익힌 뒤 방자 앞세워 한번 안면 트
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한양에서야 아버지의 벼슬자리가 그다지 앞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
러나 이 고을에선 맨 앞자리다. 아,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기에 일단은 아버지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책방에서 착실히 지내기로 했다. 사실 아버지는 남원 부사로 부임하여 객사에 들자
마자 자신을 불러 단단히 이르기도 했다.
“이참에 아비가 멀리 전라도 남원 땅까지 외직으로 나온 건 몽룡이 너 때문이기도 하다.
한양에서 그대로 더 있다간 노는 일에만 정신 팔려 과거 공부는 뒷전이라 자칫 우리 이씨 가
문의 영광이 끊길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든 게 사실이다. 아비가 외직에 있을 때 두문불출
하고 한 삼 년 착실히 공부하여 등과하도록 하라. 알겠느냐?”
“네, 잘 알았습니다, 아버님.”
대답이야 그렇게 했지만 몽룡이 마음은 이미 관아 담을 넘어 춘향이한테 가 있었다.
아직 먼 발치에서조차 얼굴도 본 일이 없는데 어인 까닭인지 몰랐다. 듣자하니 춘향 어머니는
관아에서 물러난 퇴기로 한양 자하골 살던 성 아무개 참판이 남원고을 부사로 내려 왔을 때
정을 받아 춘향을 낳았다 한다. 그렇다면 춘향이는 아무리 아비가 참판 벼슬을 하고
물러났다 해도 어미를 따라 신분은 역시 기생이다. 기생이라면 해볼 만했다. 내가 누군가?
이 고을에선 최고 가는 사또의 아들 아닌가! 몽룡은 춘향이 이미 자신의 품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맘 같으면 방자 앞세우고 당장이라도 춘향이를 만나러 가고
싶지만 아직은 때를 더 보아야 했다. 아버지의 심기도 살펴야 했고, 관속들의
눈과 입도 조심해야 했다. 쉬 이룰 수 있는 일을 서둘다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직 방자한테도 춘향이 건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딴청만 부렸다.
“얘, 방자야.”
“예, 말씀하십시오, 도련님.
방자 스스로도 제 입에서 도련님이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게 신기했다. 처음과 달
리 고두쇠라는 이름 대신 방자라는 직책으로 불리는 게 나쁘지 않아서일 것이다. 귀동냥한
걸로 미루어 보면 양반들은 입만 열면 공자왈 맹자왈 아닌가. 진서야 어찌 쓰는지 모르지만
그런 공자와 맹자하고 같은 항렬이면 나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방자라 불리는 것에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방자의 품격을 높이기로 마음먹은 터였다.
“남원 고을 젊은이들은 어디에서 많이 노느냐?”
방자는 어이가 없었다. 이 어린 책방 도령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았다.
“어디서 놀다뇨? 촌구석 젊은이들이 놀 새가 어디 있다요? 날마다 일하기도 바쁜디.”
“아니 그래도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쉬는 날은 있을 것 아니냐?”
“쉬는 날은 비 오는 날인디, 그날은 따땃한 아랫목에 드러누워 등짝이나 지지믄 되제 어
딜 나가요 나가긴.”
“그래도 단오 날이나 초파일 같은 때는 집 안에 안 있을 것 아냐.”
“단오날은 광한루 같은 데 나가 바람 쐬고, 초파일엔 선원사 같은 절에 가긴 가지요.”
“내 말이 그 말이여. 단오나 초파일 같은 날 젊은이들은 어디서 노느냐 이 말이었어.”
몽룡은 흡족해했다. 단오 날이나 초파일에 관아 밖을 나가면 춘향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
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방자는 순간 번개 치듯 몽룡의 꿍꿍이속이 그려졌다. 자신이 누군가. 주막집에서 잔뼈가 굵
은 사람 아닌가. 눈치코치 발달할 대로 발달해 앉아서 천 리를 보고 서서는 구천 리를 보니 합해
서 만 리를 보는 사람 아닌가. 아비 어미 없이 주막 하는 할머니 손에 자란 까닭에 척 보면 착이
다. 이름하여 눈치 9 단에 코치 10단! 도합 눈치코치 19단인 자신의 감각에 시방 몽룡의 속이 다
들여다보인 것이다.
이제 겨우 코 밑이 거뭇해지는 어린 것이 공부는 뒷전이고 바깥으로 나돌 생각이나 하다
니. 안 봐도 싹수가 노랬다. 저것이 시방 아는 이가 없으니 아직 쉽게 나가지 못하고 이리저
리 잔머리만 굴리는 중이렷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물어볼 것도 없이 계집을 만
나고 싶어서일 것이다. 발정 난 수캐는 암내 풍기는 암캐를 용케 알아보지 않던가. 이 어린
도령이 이제 막 발정이 나기 시작한 것이리라. 아마 불두덩이 이제 막 거웃이 나려고 근질근
질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불알이 아직 다 여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방자 형님 것 정도는 돼야제 어린 것이 감히…….’
몽룡은 이미 방자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
몽룡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방자의 눈앞에 춘향과 향단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춘
향의 어머니 월매가 꾸리는 주막집이 자신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춘향이와 향단이하
곤 어려서부터 소꿉친구로 지내온 사이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두 계집이 갑자기 자기와 내
외를 하기 시작했다. 춘향이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나 뭐라나 하는 진서까지 써 가며 제법
유식한 티까지 냈다. 그렇다면 일곱 살 되자마자 같이 안 놀았어야지, 열다섯 열여섯 되도록
같이 실컷 놀아놓고선 갑자기 낯선 사람 보듯 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춘향이가 성 참판이라는 벼슬아치를 아비로 해서 태어난 아이란 건 남원 고을에선 모르
는 이가 없다. 물론 춘향이 어미 월매가 관아 밥을 먹은 관기였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그
런데도 춘향은 자기 어미처럼 기생 노릇을 하지 않고 양반 행세를 한다. 게다가 향단이라는
몸종까지 거느리면서 말이다. 비록 주막을 하고 있지만 양반의 씨를 이은 까닭에 몸종도 부
릴 만큼 재산이 안으로 많이 있는 성싶었다.
몸종인 향단이가 춘향이보다 나이가 많아 방자 자신과 동갑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내외
는 향단이가 먼저 했다. 어느 날 향단이 가슴이 봉긋 솟는가 싶더니 방자에게 괜히 짜증을 부
려댔다. 저만 그러면 그만일 터인데 기껏 잘 놀다가 순간 토라져서 가만히 있는 춘향이를 재
촉하여 서둘러 집으로 가버리기도 했다. 그러다 이태 정도 지나자 그때부턴 춘향이조차 내
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엔 광한루 옆 냇가에서 밤에 두 계집이 멱을 감을 땐 방자가
망을 보아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젠 그런 일은 없다.
두 계집이 멱 감던 일을 떠올리니 갑자기 아랫도리가 묵직해졌다.
“향단아, 너 이젠 여자가 되어버린 거여?”
춘향이가 향단이 젖가슴을 만지면서 하는 소리이다.
“아이 참, 아가씨도. 처음부터 여자지 새삼 왜 그러시유?”
그때 방자는 안 보는 척하면서 어둠 속의 둘을 훔쳐보았다. 이런 땐 그믐 밤이 아니고 보
름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머릿속으론 향단이의 복숭아 같은 가슴이 그려졌다. 그런 날
엔 춘향이가 잠 들면 슬며시 향단이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술청에 이미 손님은
없고 둘만 있어 참 좋았다. 할머니는 가는귀가 먹은데다 일찍 자리에 누워 코까지 골며 자는
터라 둘이 술청에서 꼭 붙어 있어도 잘 알지 못했다. 향단이와는 그런 사이였다.
곧이어 춘향이도 향단이처럼 가슴이 솟아 올랐다. 아무리 속치마 말기로 눌러 묶어도 밖
으로 삐져 나온 가슴살은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방자는 어느 때부턴가 춘향이 가슴께는 감
히 바라볼 수도 없었다. 춘향이 가슴을 바라보는 순간 눈이 멀어 버리는 것 같아서였다.
춘향이까지 여자가 되어 버린 뒤론 둘이 냇가에서 멱을 감는 일이 아예 없어져 버렸다.
방자는 못내 아쉬웠다. 이제야 뭔가 손에 잡힐 듯 말 듯했는데.
향단이의 출생 유래는 아무도 모른다. 관아에서 물러난 퇴기 집에서 몸종 노릇하는 아이
의 신분이니 그저 그렇고 그럴 뿐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출생도 보잘
것없기는 마찬가지다. 할머니가 한번도 말해 주진 않았지만 눈치로 보면 아버지가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춘향이처럼 아버지가 양반이었을까? 기생은 아
무하고나 잠자리를 갖지 않잖아. 그래봐야 뭐 하나. 지금 자신은 주막집 손자로 아무런 기대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춘향이는 복 받은 계집이다. 신분도 확
실히 알 수 있고 얼굴도 반반한데다 문자 속까지 갖추었으니 저만한 복을 타고나기도 쉽지
않으리라.
아쉽고 아쉬울 뿐이다. 이젠 감히 다가가기도 쉽지 않은데, 그 전에 춘향이하고 진하게
사랑이라도 나누어 볼 걸. 향단이하곤 밤이면 만나 꽤나 여러 번 뒤엉켜 보았지만 춘향이는
감히 그래 보지 못했다. 춘향이하곤 여남은 살 때 소꿉놀이하다 입술을 슬쩍 겹쳐 본 적은 있
지만 그땐 아무런 느낌도 없어 그대로 끝이었다. 그 뒤로 손이나 잡아 보았을까? 기억도 없
다. 계집애가 원체 도도한데다 쌀쌀 맞아서 철들고 나자 내외가 보통 심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몽룡인지 몽롱인지 하는 사또 아들래미가 자꾸만 걸린다. 아무래도 그 녀석
이 발정이 단단히 난 성싶다. 머지않아 바깥바람을 쐬자고 성화일 텐데 어찌해야 하나. 두 계
집에겐 미리 알려 몽룡이 나갈 땐 집 밖 출입을 하지 말라고 할까? 그런다고 고것들이 내 말
을 듣기나 할까? 다른 때는 꿈쩍도 않고 집에 붙어 있지만 단옷날엔 그네 뛰러 광한루에 나
오고, 초파일엔 탑돌이 하러 선원사에 가지 않는가. 괜히 몽룡이한테 광한루와 선원사 얘길
했나 보다. 말눈치를 빨리 알아채고 말머리를 재빨리 다른 데로 돌렸어야 하는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