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만화 [읽어볼 만화면]생명에 관한 만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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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7-07 19:55 조회 6,298회 댓글 0건본문
꽤 많은 문화권에서, 봄은 곧 생명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겨울이 죽음에 가까운 이미지라면, 그것이 지나가고 날이 따뜻해지며 다시 새로운 싹들이 피어오르는(뭔가 구태의연한 표현 같다) 기간은 정반대의 무엇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 방식은 다르지만, 생명만큼 보편적으로 높은 가치가 부여되곤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자신의 생명이야 당연히 생물로서 소중한 것이며,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면서 사회가 만들어진다. 존중해도 되는 생명, 빼앗아도 어쩔 수 없는 생명의 경계를 그어 가면서 지켜야 할 우리 편과 그렇지 않아도 되거나 타도해야 할 타자에 대한 관념이 생긴다. 그저 유기체의 전기적 신호와 화학적 자기유지 기제가 돌아가는 과정일 뿐인데도, 그개체에 대해서는 한번 끊어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회적인 것이면서도 다른 생명체를 잉태하여 이어지는 모습은 언제나 경이롭다. 이렇듯 생명은 자신은 물론, 함께하는 존재들에 대한 존중이 시작되는 원천이자 모든 의미의 시작이다. 생명에 대한 자세야말로 모든 인간사의 근간이고, 인간사를 소재로 삼는 인간들의 이야기 상상력을 낳는다. 생명이란 서로 관여하는 것 생명이라는 현상을 가장 먼저 인식하는 방법은, 죽음을 통해서다. 한번 멈추면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현상이 있기에, 생명은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당연하지 않은 그 생명은 소중하고,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는 순간에 어떤 식으로 서로와 관계하는 지가 가장 극적이고 근본적인 울림을 준다.
『조명가게』(강풀, 재미주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명 기구를 파는 골목길 끝 가게에 어느 날부터 한밤중에 이상한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는데, 어떤 이는 손톱이 뒤집혀 있고, 어떤 이는 온몸에서 늘 비 오듯 땀을 흘리기도 한다. 이들은 세상의 이치와 다른 존재들인데, 조명가게에서 그들이 찾는 것은 무엇인가. 이 작품은 강풀 작가 특유의 다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진행시키는 방식에, 주인공들이 수사를 진행한다기보다는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는 방식의 미스터리를 구사한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선 왜 그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지, 그들을 한꺼번에 묶는 비극적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지 등이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더욱 중요하게 드러나는 것은, 삶과 죽음은 거울상이며, 결국 어디든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삶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이며, 죽음 역시 사람들의 세상이고 사람들이 맺는 관계 속에 움직인다. 삶을 선택하든 죽음을 받아들이든, 그 안에서 사람들끼리의 애정과 배려, 화해와 이해로 마음들이 연결된다.
비단 생사의 교차점 정도의 격정적 순간이 아니라도, 생명이란 서로 관여하는 것일 때 의미가 있다. 『치키타 GUGU』(TONO, 조은세상)는 귀엽고 부드러워 보이는 그림체와는 달리, 생사의 비정함에 대해 건조하게 그려내는 작품이다. 주인공 치키타 구구는 어릴 때 식인요괴에게 온 가족이 당한 주술사 가문의 홀로 남은 후손이다. 그의 보호자이자 친구는 라 라므 데라르로, 가족을 몰살시킨 바로 그 요괴다. 액면상으로 치키타는 데라르에게 사육되고 있는 상태인데, 100년 동안 건강하게 잘 키운 후 잡아먹으면 엄청난 맛이 난다는 특이체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인간의 자연 수명 기간 동안 물적으로나 심적으로나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가족으로서의 정이 싹튼다.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점에서 마치 과격한 판타지 버전의 ‘어린 왕자’같은 격인데, 그 와중에서 여러 다른 인물들과 에피소드를 통해서 복수와 원한의 악순환, 비정함과 그 안에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의 애착 등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포식의 관계지만 진심으로 배려하는 것과, 대등하게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는 것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 쉽게 우위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서로에게 관여를 키우다 보면, 생명은 소중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살아있기에 길들여진 서로에게 마음을 줄 수 있는 것, 바로 그런 관여를 가능하게 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공존에 관하여
관여를 좀 더 넓은 범위로 확장시켜 나가기 시작하면, 생명의 공존이라는 화두에 닿게 된다. 내가 직접 관여하는 특정인들을 넘어 하나의 집단, 사회, 인류, 혹은 생물 전체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 무한한 오지랖의 발산일 수도 있고, 커다란 생태주의적 식견일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생명이 함께 공존하며 서로와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될 수 있는 모습이 이상향에 대한 상상이 되곤 한다는 것이다. 고전적인 “사자와 양떼가 함께 뛰노는” 풍경일 수도 있지만, 초인적 능력으로 모두 함께하게 되는 이상향과 좀 부족해도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고 저항하며 무언가를 자유롭게 찾아내는 대안 사이에서 고민하는 좀 더 멋진 이야기도 가능하다. 『넘버 파이브』(마츠모토 타이요, 애니북스)는 ‘청춘’이라는 정서를 꽉 찬 구도와 자유로운 필치의 그림으로 표현해내며 명성을 얻은 작가의 작품답게 바로 그런 모습을 그려낸다. 어느 미래, 생물들은 지금 모습과 다소 달라져 있고 세계를 통치하는 통합정부가 있다. 그리고 9명의 초인들로 이루어진 특공대인 지구평화대 무지개팀이 있는데, 그중 저격수 능력을 지닌 멤버 ‘넘버 파이브’가 탈주한다. 동화적 평화의 이상향으로 세상을 개조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는 넘버원, 그 박제된 이상향에 저항하며 옛 동료들을 물리치는 파이브의 활극이 이어진다. 그리고 작가는, 생명이 모두 서로 연결되어 인식하는 거대한 평화보다는, 평화로울 때도 싸울 때도 비정한 결단의 순간들이 닥치기도 하는 현실 속에서 내달리는 생명의 ‘청춘’의 손을 들어 준다.
그런데 공존은 단순히 우리 인식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끝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세계는 늘 제한적이고, 모르는 것까지도 생명으로 존중할 자세가 갖춰질 때 공존을 논할 수 있다.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대원씨아이)는 일종의 요괴기담 같은 형식을 취하는 작품인데, 여기에는 ‘벌레’라는 원시생명이 존재한다. 생명의 틀을 점점 진화시켜 나간 신체화된 생물에서 많이 벗어난, 생명 그 자체에 훨씬 가까우며 존재방식 자체가 지극히 모호한 것들이다. 사람 사는 곳에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그런 ‘벌레’를 다룰 수 있는 특수한 능력과 훈련을 갖춘 존재들인 충사들이 그런 현상을 보며 개입하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악령을 퇴치하는 퇴마 작업도, 원혼을 풀어주는 무당의 푸닥거리도 아니라, 그냥 벌레라는 현상으로부터 살짝 인간의 생활방식을 지켜내는 정도에 불과하다. ‘벌레’를 완전히 이해하지도 없애지도 못한다는 것은 그냥 전제다. 그속에서 어떻게 전혀 다른 방식의 생명 그 자체와 함께 인간이 공존할 것인가. 모르는 것에 대한 인정, 그 안에서도 공존을 꾀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잔잔한 성찰이 이야기 전반의 정서를 이룬다.
순환, 순리
생명에 대한 존중이 공존의 필요성 역설이라는 수준마저 넘어설 때, 억지로 외치는 생명 찬양이 아니라 순리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인식이 시작된다. 억지로 세상을 뒤바꾸는 이상향이 아니라, 생명을 지금 최대한 존중하며 그 기반에 만들어진 사람들의 관계에서 고난을 줄이고 인간사회로서의 발전을 논하기 시작한다. 뭔가 난해한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야말로 대하서사극 『붓다』(테즈카 오사무, 학산문화사)의 중심에 있는 메시지다. 제목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의 일대기인데, 단순히 불교 경전이나 위인전 읽기와는 접근법이 다르다. 생명의 순환과 역사의 순리 같은 큰 테마를 중심에 놓고, 여러 인간 군상들이 서로 얽히는 과정을 만들어 낸다. 왕자로 태어나 점차 깨달은 자가 되어가는 이가 있으며, 신분차별 속에서 분노와 한을 지니며 좌충우돌하는 이들이 있고, 땅과 사람을 둘러싼 전쟁 서사가 있다. 하지만 중심에 있는 것은, 세상의 순리다. 고난은 고행승들이 주장하듯 달게 받아야 할 시련이 아니라, 올 수도 있고 지나갈 수도 있는 순리의 일부다. 순리를 이해하는 것은 절대자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순환하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중이다. 고난에 분노와 싸움만으로 맞서며 살생을 키우는 길을 피하되, 고난 자체를 결코 미화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것이 그런 길이다. 육식을 안 한다, 고행을 한다는 개별 교리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짓밟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의 고난을 구제하겠다는 지향점이다. 지금 노예가 되어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내세에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며 달콤한 위안을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폭주할 수 있는 화를 스스로 다스리며, 무력저항 속에 몰살당하는 길을 피하고 외교적 노력을 다하며 적합한 기회를 만들어 낸다. 칼로 겨루는 것, 말로 적는 것을 넘어 생명에 대한 근원적 존중의 경지를 인식해 나가는 과정이다. 초월자의 교리가 아니라 인본주의적 해설이기에, 『붓다』의 생명 존중은 걸작의 경지에 이른다. 물론, 생명이라는 묵직한 개념을 떠올린다고 해서 꼭 거창하고 철학적일 필요는 없다. 그저, 약간 더 근원적으로 존중과 공존에 관해 생각해 보는 정도로도 족하다. 그것을 돕기 위해 이야기들이 있는 것이고, 생명을 보다 뚜렷하게 직시하는 이런 작품들을 골라보는 것이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조명가게』(강풀, 재미주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명 기구를 파는 골목길 끝 가게에 어느 날부터 한밤중에 이상한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는데, 어떤 이는 손톱이 뒤집혀 있고, 어떤 이는 온몸에서 늘 비 오듯 땀을 흘리기도 한다. 이들은 세상의 이치와 다른 존재들인데, 조명가게에서 그들이 찾는 것은 무엇인가. 이 작품은 강풀 작가 특유의 다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진행시키는 방식에, 주인공들이 수사를 진행한다기보다는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는 방식의 미스터리를 구사한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선 왜 그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지, 그들을 한꺼번에 묶는 비극적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지 등이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더욱 중요하게 드러나는 것은, 삶과 죽음은 거울상이며, 결국 어디든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삶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이며, 죽음 역시 사람들의 세상이고 사람들이 맺는 관계 속에 움직인다. 삶을 선택하든 죽음을 받아들이든, 그 안에서 사람들끼리의 애정과 배려, 화해와 이해로 마음들이 연결된다.
비단 생사의 교차점 정도의 격정적 순간이 아니라도, 생명이란 서로 관여하는 것일 때 의미가 있다. 『치키타 GUGU』(TONO, 조은세상)는 귀엽고 부드러워 보이는 그림체와는 달리, 생사의 비정함에 대해 건조하게 그려내는 작품이다. 주인공 치키타 구구는 어릴 때 식인요괴에게 온 가족이 당한 주술사 가문의 홀로 남은 후손이다. 그의 보호자이자 친구는 라 라므 데라르로, 가족을 몰살시킨 바로 그 요괴다. 액면상으로 치키타는 데라르에게 사육되고 있는 상태인데, 100년 동안 건강하게 잘 키운 후 잡아먹으면 엄청난 맛이 난다는 특이체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인간의 자연 수명 기간 동안 물적으로나 심적으로나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가족으로서의 정이 싹튼다.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점에서 마치 과격한 판타지 버전의 ‘어린 왕자’같은 격인데, 그 와중에서 여러 다른 인물들과 에피소드를 통해서 복수와 원한의 악순환, 비정함과 그 안에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의 애착 등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포식의 관계지만 진심으로 배려하는 것과, 대등하게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는 것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 쉽게 우위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서로에게 관여를 키우다 보면, 생명은 소중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살아있기에 길들여진 서로에게 마음을 줄 수 있는 것, 바로 그런 관여를 가능하게 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공존에 관하여
관여를 좀 더 넓은 범위로 확장시켜 나가기 시작하면, 생명의 공존이라는 화두에 닿게 된다. 내가 직접 관여하는 특정인들을 넘어 하나의 집단, 사회, 인류, 혹은 생물 전체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 무한한 오지랖의 발산일 수도 있고, 커다란 생태주의적 식견일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생명이 함께 공존하며 서로와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될 수 있는 모습이 이상향에 대한 상상이 되곤 한다는 것이다. 고전적인 “사자와 양떼가 함께 뛰노는” 풍경일 수도 있지만, 초인적 능력으로 모두 함께하게 되는 이상향과 좀 부족해도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고 저항하며 무언가를 자유롭게 찾아내는 대안 사이에서 고민하는 좀 더 멋진 이야기도 가능하다. 『넘버 파이브』(마츠모토 타이요, 애니북스)는 ‘청춘’이라는 정서를 꽉 찬 구도와 자유로운 필치의 그림으로 표현해내며 명성을 얻은 작가의 작품답게 바로 그런 모습을 그려낸다. 어느 미래, 생물들은 지금 모습과 다소 달라져 있고 세계를 통치하는 통합정부가 있다. 그리고 9명의 초인들로 이루어진 특공대인 지구평화대 무지개팀이 있는데, 그중 저격수 능력을 지닌 멤버 ‘넘버 파이브’가 탈주한다. 동화적 평화의 이상향으로 세상을 개조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는 넘버원, 그 박제된 이상향에 저항하며 옛 동료들을 물리치는 파이브의 활극이 이어진다. 그리고 작가는, 생명이 모두 서로 연결되어 인식하는 거대한 평화보다는, 평화로울 때도 싸울 때도 비정한 결단의 순간들이 닥치기도 하는 현실 속에서 내달리는 생명의 ‘청춘’의 손을 들어 준다.
그런데 공존은 단순히 우리 인식세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끝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세계는 늘 제한적이고, 모르는 것까지도 생명으로 존중할 자세가 갖춰질 때 공존을 논할 수 있다.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대원씨아이)는 일종의 요괴기담 같은 형식을 취하는 작품인데, 여기에는 ‘벌레’라는 원시생명이 존재한다. 생명의 틀을 점점 진화시켜 나간 신체화된 생물에서 많이 벗어난, 생명 그 자체에 훨씬 가까우며 존재방식 자체가 지극히 모호한 것들이다. 사람 사는 곳에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그런 ‘벌레’를 다룰 수 있는 특수한 능력과 훈련을 갖춘 존재들인 충사들이 그런 현상을 보며 개입하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악령을 퇴치하는 퇴마 작업도, 원혼을 풀어주는 무당의 푸닥거리도 아니라, 그냥 벌레라는 현상으로부터 살짝 인간의 생활방식을 지켜내는 정도에 불과하다. ‘벌레’를 완전히 이해하지도 없애지도 못한다는 것은 그냥 전제다. 그속에서 어떻게 전혀 다른 방식의 생명 그 자체와 함께 인간이 공존할 것인가. 모르는 것에 대한 인정, 그 안에서도 공존을 꾀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잔잔한 성찰이 이야기 전반의 정서를 이룬다.
순환, 순리
생명에 대한 존중이 공존의 필요성 역설이라는 수준마저 넘어설 때, 억지로 외치는 생명 찬양이 아니라 순리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인식이 시작된다. 억지로 세상을 뒤바꾸는 이상향이 아니라, 생명을 지금 최대한 존중하며 그 기반에 만들어진 사람들의 관계에서 고난을 줄이고 인간사회로서의 발전을 논하기 시작한다. 뭔가 난해한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야말로 대하서사극 『붓다』(테즈카 오사무, 학산문화사)의 중심에 있는 메시지다. 제목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의 일대기인데, 단순히 불교 경전이나 위인전 읽기와는 접근법이 다르다. 생명의 순환과 역사의 순리 같은 큰 테마를 중심에 놓고, 여러 인간 군상들이 서로 얽히는 과정을 만들어 낸다. 왕자로 태어나 점차 깨달은 자가 되어가는 이가 있으며, 신분차별 속에서 분노와 한을 지니며 좌충우돌하는 이들이 있고, 땅과 사람을 둘러싼 전쟁 서사가 있다. 하지만 중심에 있는 것은, 세상의 순리다. 고난은 고행승들이 주장하듯 달게 받아야 할 시련이 아니라, 올 수도 있고 지나갈 수도 있는 순리의 일부다. 순리를 이해하는 것은 절대자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순환하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중이다. 고난에 분노와 싸움만으로 맞서며 살생을 키우는 길을 피하되, 고난 자체를 결코 미화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것이 그런 길이다. 육식을 안 한다, 고행을 한다는 개별 교리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짓밟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의 고난을 구제하겠다는 지향점이다. 지금 노예가 되어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내세에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며 달콤한 위안을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폭주할 수 있는 화를 스스로 다스리며, 무력저항 속에 몰살당하는 길을 피하고 외교적 노력을 다하며 적합한 기회를 만들어 낸다. 칼로 겨루는 것, 말로 적는 것을 넘어 생명에 대한 근원적 존중의 경지를 인식해 나가는 과정이다. 초월자의 교리가 아니라 인본주의적 해설이기에, 『붓다』의 생명 존중은 걸작의 경지에 이른다. 물론, 생명이라는 묵직한 개념을 떠올린다고 해서 꼭 거창하고 철학적일 필요는 없다. 그저, 약간 더 근원적으로 존중과 공존에 관해 생각해 보는 정도로도 족하다. 그것을 돕기 위해 이야기들이 있는 것이고, 생명을 보다 뚜렷하게 직시하는 이런 작품들을 골라보는 것이다.
김낙호 만화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