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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잡이 길잡이 [책으로 말걸기]말 걸기가 서툰 은영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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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6-08 14:42 조회 6,37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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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은 너무 유치한데…”
처음에는 내게 하는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서가에 있는 사람은 은영(가명)이와 나, 둘뿐이었고, 나 역시 내가 들고 있는 책을 조금 살펴보고 너무 가볍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 책 재미없어?”
“몰라요. 전 그딴 책 안 봐요. 우리나라 소설들은 너무 궁상맞거나 유치해요.”
은영이 목소리가 사뭇 전투적(?)이다. 누가 들으면 혼내고 있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목소리가 높고 앙칼지다.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은영이는 도서실에 오면 자주 만나는 아이이다. 항상 혼자 다니며 점심시간에는 점심도 먹지 않고 바로 내려와서 이렇게 책을 고르고 읽고 있다. 그래서 한 번 이야기를 해 봐야지 했는데 자꾸 미루고 있었던 아이이다.
아이들은 은영이를 잘난 체하는 아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다가가도 항상 쌀쌀맞게 대하고 바라보는 것이 항상 째려보는 것 같다고 말이다.

“네가 읽은 책 중에 재미있는 책 좀 알려줘.”
“쌤이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제가 어찌 알아요?”
“난 소설을 좋아하는데 넌 어떤 작가를 주로 보니?”
“일본 작가나 프랑스 작가 것을 주로 보는데…”

“난 일본 소설은 거의 안 읽는 편이야. 어떨 때는 성으로 불렀다가 이름으로 불렀다가 헛갈려서…”
“그래요? 난 안 그런데…”
그런 대화가 오고 가다가 내가 추천을 받은 소설은 『공중그네』였다. 이 정도의 유명한 소설을 읽지 않은 나를 타박하며 아주 잘난 척을 하며 권해준 소설이었다. 책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주인공 ‘이라부’ 박사는 정말 유쾌한 사람이었다.

다음 날 1교시에 이 책을 반납하러 온 도서실에서 또 은영이를 만났다.
“읽을 만하죠?”
“읽을 만한 정도가 아니라 무척 재미있던데…”
은영이는 빠른 걸음으로 서가에 들어갔다가 바로 책 두 권을 가지고 나왔다.

“그럼 다음에는 『인 더 풀』을 보셔야 해요. 그리고 『면장 선거』. 이렇게 세 권이 이라부 의사 시리즈예요.”
“어…”
내가 말을 붙여 볼 틈도 없이 은영이는 빠르게 도서실을 빠져나갔다.
잠을 줄여 두 권 모두 급히 읽은 후 다음 날 점심시간에 은영이를 기다렸다. 그날도 은영이는 4교시 끝나는 종소리가 나고 오래지 않아 도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은영아! 나 두 권 다 읽었어. 대견하지? 하하”
“전 하루에 다 읽었어요.”
“그런데 난 뒤로 갈수록 별로던데… 사실 이라부 의사가 좀 더 대단한 인물이었으면 하는 기대 같은 것이 있었는데 뒤로 갈수록 그냥 생각 없이 사는 인물 같은 느낌이잖아… 그래서 더 좋은 것 같기도 하지만 굳이 그런 것을 알려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는데 말이야.”

은영이는 공격받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래서 좀 더 구체적인 인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면장 선거』는 일본의 실제 유명 인물을 모델로 쓴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하며 연예인 이야기를 했다. 곧 점심을 먹은 아이들이 도서실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은영이에게 문방구에서 살 것이 있는데 잠시 같이 다녀오자고 했다. 그렇게 해야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은영이에게 점심을 안 먹어도 괜찮은지를 장난스레 물었다. 그러자 한 달 정도 아침도 점심도 안 먹고 있는데 버릇이 되어서 괜찮다고 했다.
“…사실 엄마가 음식점을 하시는데 이웃 가게 아저씨가 저더러 많이 먹는다고 하는 거예요. 학교에서 급식도 많이 먹고 왔냐고 하면서 말이죠. 그날부터 전 엄마 가게에서도, 학교에서도 안 먹어요…”

은영이는 작고 통통한 것이 고집스럽게 보이는 아이였다. 그 방법이 성공하면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며 웃었다. 그리고 또 다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고통에 오래 노출되면 그 사람의 뇌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이상이 생겨 정신과적인 문제가 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은영이는 자신도 정신과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이제까지 진정한 친구가 없었던 것 같다고 하며 말이다. 교실에서도 자신이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아무도 자기 곁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 달째 급식을 먹고 있지 않는데 아무도 자기에게 왜 급식을 먹지 않는지 물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애써 그게 문제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몇 번 했지만 많이 서운했던 모양이다. 엄마도 언니가 고3이니 자신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제가 급식을 먹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급식비가 너무 비싸서예요. 잘 먹지도 않고 맛도 없는데… 엄마 가게가 좀 어렵거든요… 엄마랑 엄마 친구랑 두 분이서 동업해서 하는 건데… 그 날도 내가 엄마 가게에서 밥 먹고 있을 때 아저씨가 ‘네가 이 집 음식 다 거덜 낸다’고 했거든요. 엄마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너무 화가 나요… 그렇다고 제가 화를 낸 건 아니에요. 사실 저는 아무에게도 화를 안 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제게 화가 났는지 물어요.”

은영이에게 가장 관심 있는 것을 물었더니 비즈공예라고 하였다. 그래서 방학 동안 비즈공예교실을 열어 비즈공예 강습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그날부터 은영이는 내게 매일 문자를 보내왔다. 언제 재료를 사러 동대문시장에 갈 것이며, 필요한 것은 무엇 무엇이 있는데 준비해 줄 수 있는지, 그리고 강습을 받을 아이들을 구하였는지… 은영이는 방학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총 4회기 프로그램을 짰고 동대문 시장을 몇 번 오가며 재료도 준비했다. 선뜻 자신의 재료들도 내놓았으며 마지막 날에는 강습을 받는 아이들을 위하여 재료와 함께 초콜릿과 사탕을 예쁘게 개별 포장해서 왔다.
은영이는 정말 훌륭한 강사가 되었다. 누구보다도 세심하게 강습생들을 챙겼으며 준비도 철저했다. 그리고 2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던 우리의 강습 시간은 매번 할 때마다 4시간을 넘겼다. 그러는 동안 은영이는 책에서 조금씩 나와 아이들 곁으로 가기 시작했다.

수업을 시작하기 2시간 전부터 와서 준비를 하는 은영이에게 말을 걸었다.
“나 어제 『남쪽으로 튀어!』 보느라고 새벽에 잤더니 졸리다.”
“그 책, 영화로도 나왔대요. 쌤이 주신 『두근두근 내 인생』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쌤 말대로 궁상맞은 이야기를 발랄하게 쓴 것 같던데요. 어제 지혜(가명, 중1 강습생)랑 문자하느라 책 다 못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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