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함께 [방자曰曰]10. 방자 가라사대 사랑의 시작은 곧 사랑의 완성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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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4 22:27 조회 12,769회 댓글 0건본문
한편 몽룡의 아버지 이사또가 동부승지 직을 명 받아 한양으로 간 뒤 변학도라는 이가 새로 남원 사또 직을 맡아 왔것다. 신관 사또 변학도는 문장도 어지간히 갖추었고 풍채도 그럴싸하게 넉넉하여 겉보기엔 호인이 따로 없으나 속 쓰는 건 세상 보기 드물게 좀스럽기 짝이 없는 위인이었다.
변사또에게도 이몽룡과 동갑인 아들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수룡이렷다. 그도 명색이 양반집 자제인데 태몽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의 어머니, 수룡을 잉태했을 때 논두렁 물꼬 밑 얕은 물에서 미꾸라지가 파닥거리며 노는 꿈을 꾸었것다. 그렇다고 아들 이름을 미꾸라지와 관련하여 지을 수는 없는 일. 물꼬 밑 얕은 물일망정 물은 물이로다. 미꾸라지일망정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물에서 노는 용으로 수룡水龍이 되었으니 그 이름은 지렁이 꿈에서 비롯한 몽룡이라는 이름보다 훨씬 더 절묘하다 할 것이다.
수룡은 남원에 오자마자 춘향이 소식부터 챙겼다. 그러나 이미 구관 사또 자제 몽룡이 춘향이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시샘이 일고 분이 나기 시작했것다. 한양 살 때 몽룡이와 어울려 놀 때는 동무였지만 지금은 저주의 대상이 되었으니, 여자를 두고선 영원한 적은 있어도 영원한 벗은 없는 법이렷다.
“이런 씨부럴, 우리 아버지는 남원 사또가 왜 몽룡이 아버지보다 더 늦게 된 거야. 에에 씨, 한발 늦었잖아!”
그런데 변수룡이 춘향을 두고 당장 다투어야 할 이는 이미 한양으로 떠나간 몽룡이가 아니라 바로 남원 고을의 최고 실력자인 자기 아버지 변학도였으니 꼬여도 심하게 꼬인 셈이렷다. 변수룡이야 이팔청춘 꽃띠이니까 암내 맡으며 저자거리를 헤매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가관인 것은 그의 아비 신관 사또 변학도였다.
변학도가 사또로 부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기생 점고렷다. 춘향이 소문을 알고 있는 그. 끝내 춘향이가 안 나타나자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것다. 기생 딸이면 저도 기생인데 일부종사 한다며 감히 사또 수청을 거부한 춘향을 잡아들여 옥에 가두었것다. 이어 춘향 어미 월매가 이 사또 시절에 환자로 꾸어간 관아 곡식을 세 배로 갚으라 하였으니, 이방들조차도 입을 짝 벌릴 수밖에. 월매는 새삼 사또가 바뀐 세월을 실감하며 춘향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노리개는 물론 돈 될만한 세간을 모두 내다 팔아 환자를 정리하였것다.
수룡은 춘향이가 옥에 갇히자 기회는 이때다 싶어 재빠르게 옥으로 춘향이를 찾아갔것다. 춘향이를 보니 과연 듣던 바 그대로 절세 미인이었다. 옥살이를 하느라 얼굴은 수척해보였지만 그래서 더욱 기품 있는 자태가 빛나 보였다.
수룡은 춘향을 보자마자 건들거리며 말을 건넸다.
“네가 춘향이라는 기생이구나. 내 말만 잘 들으면 여기서 고생할 필요가 없다. 내 말 들을 테야?”
“기생? 어디서 굴러먹다 온 인간이기에 나를 그렇게 보는 것이유?”
“어? 너, 기생 맞는 거 아냐?”
춘향,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것다.
“누군디 여그 와서 행패냐고?”
“나? 나를 아직 모르는구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또 어르신의 큰 자제 되는 수룡이라고 한다.”
“사똔지 감똑인지 아들 한번 물짜게 싸질러 놓았구만.”
“뭐? 뭐라고?”
“나는 이녘 같은 종자하곤 대거리하기 싫은께 다른 디나 가보시오.”
춘향이에게 놀림을 받았다고 여긴 수룡은 옥졸을 다그쳐 춘향이를 옥방 문 앞까지 끌고 오게 하였것다. 막상 춘향이 얼굴을 더 가까이 보게 되자 음심이 작동하여 춘향이 손목을 슬며시 잡는데, 바로 그때 방자와 향단이 사식으로 넣어줄 음식을 가지고 왔것다.
방자가 옥졸에게 아는 체 인사를 하더니 바로 수룡을 째려보았것다.
“야, 인마 너, 뭣인디 춘향이를 희롱하는 것이여?”
곁에 있던 옥졸이 안절부절못하며 대신 대답했것다.
“방자야, 신관 사또 자제분이 춘향이 보려고 온 것이여.”
“뭣이라고? 신관 사또 자제가 춘향이를 왜 봐? 그 애비에 그 자식이구만. 다 똥 싸다가 퍼질러 낳은 인간들이고만.”
“뭣이라고? 너, 방자라고 했느냐?”
수룡이 짐짓 위엄을 차리며 방자를 불렀것다.
“그래, 전관 사또 자제 책방 방자 노릇 한 사람이다. 왜?”
“방자 주제에 어디서 까불어?”
“방자 주제? 이런 땐 한 방 먹이는 게 방자 주제다!”
바로 그 순간 방자 주먹이 수룡의 턱 밑으로 날아가 꽂혔것다. 수룡은 마른 검불 더미 쓰러지듯 넘어져 한참을 지나도 일어나지 못하다가 겨우 일어나 꽁무니를 빼며 소리 질렀것다.
“방자 너, 오늘이 니 제삿날인 줄 알아라!”
그런 말에 방자가 콧방귀나 뀌겠는가.
“한 방 주먹에 빌빌거리는 자식이 뭘 어쩌겠다고.”
방자와 향단이는 춘향이를 위로하고 바깥 소식을 전해준 뒤 물러갔다.
방자는 몽룡이 한양으로 간 뒤 책방 방자 자리를 물러나왔다. 방자는 그새 이름처럼 되어버려 여전히 방자로 불리게 되었다. 방자는 얼마 곧 향단이와 물 한 그릇 떠놓고 성례를 치렀다. 이어 할머니가 하는 주막을 대신 맡았다. 주막 등에는 몽룡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아바지 주막’이라는 글을 써넣었것다.
방자가 수룡을 주먹으로 한 방 때려준 날 밤이었다. 주막집 밖이 소란스럽더니 관아의 군노들이 들이닥쳤다. 방자는 짚이는 데가 있었지만 짐짓 태연히 물었것다.
“형님들 으짠 일이요?”
“말 마라, 방자야. 니가 사또 자제 변 도령을 때린 탓에 너 잡으러 왔다.”
“시방 나를 잡으러 왔다고라?”
“그렇다니까!”
“뎬장 넨장 맞을 시상이네. 맞을 짓거리 한 놈 정신 차리게 한 방 쥐어박았더니 나를 잡아가겠다고?”
“암튼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께. 일단 앞장서라.”
“그라믄 갑시다.”
“방자야, 너무 서운해 마라. 우리도 죽을 맛이다. 곤장이라도 맞게 되믄 집장 사령한티 알아서 살살 쳐달라고 할 틴께 너도 알아서 소리 지르고 뻗어라.”
“이깟 일에 곤장까지 들먹이우.”
“아니다, 사또 아들놈이 사또보다 더 지랄이다.”
동헌 마당에 들어서니 사방에 횃불이 대낮처럼 환한데, 사또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있고, 그 옆엔 수룡이 거들먹거리며 서있었것다. 눈치코치 19단의 방자, 직감으로 잘못 걸려들었구나라고 느끼는데, 사또 호령이 동헌 마당을 채운다.
“저놈이 감히 사또 아들을 욕보였단 말이냐?”
“아버님, 맞습니다. 제가 옥방 시찰 하는데 저놈이 춘향이란 년하고 내통하면서 나를 때렸습니다.”
“그래 어딜 어떻게 맞았느냐?”
“턱을 주먹으로 세게 한 방 맞았습니다.”
“그럼, 네가 당한 대로 저놈을 한 방 때리도록 해라.”
수룡은 방자 곁으로 다가와 주먹으로 방자 턱을 강타했것다.
방자, 성질 같으면 바로 한 방을 되먹여주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어 가만히 한 대 맞아주고 말았다.
“저놈이 맷집이 보통이 아니구나. 그렇다면….”
변 사또가 사또 체면도 팽개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자에게 가더니 머리통을 쥐어박는다.
“네가 죄수년하고 내통을 허고 감히 내 아들을 때리기까지 했단 말이지?”
방자, 꼿꼿이 서서 변 사또를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벌주자고 달려드는 인간들하곤 말을 섞지 않는 게 제일이렷다.
변 사또, 묵묵부답을 하는 방자 꼴을 보니 화가 더욱 치밀었다. 더더구나 춘향이 사식까지 들여보내며 내통하였다 하지 않은가. 그래서 집장 사령더러 곤장으로 볼기를 매우 치도록 하였것다.
집장 사령도 군노들한테 부탁을 받기도 했지만 방자를 잘 알기에 요령껏 봐주며 매질을 살살하였으나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봐주며 때리는 매도 수십 대를 맞다보니 방자 엉덩이 살이 터져 버렸다. 밤새 실신할 때까지 닦달을 당한 방자는 주막 단골 군노의 등에 업혀 주막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며 향단이가 놀라 자빠진 건 더 말해 무엇하리.
방자 할머니, 매 맞고 돌아온 방자를 보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자리에 눕고 말았다. 향단이가 정성스레 보살폈건만 할머니는 나이를 못 이겨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방자를 불러 유언을 하였것다.
“방자 니가 춘향이 때문에 욕을 봤는디, 사실은 춘향이하고 니가 배다른 동기간이다. 앞으로도 서로 잘허고 살아야 쓴다.”
“할머니, 그게 무신 말씀이슈?”
“니 아부지도 춘향이 아부지하고 같은 성참판이란 말이제.”
방자는 가슴이 철렁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동안 춘향이에게 연심을 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자신과 춘향이 사이에 몽룡이 나타난 게 더할 나위 없이 다행한 일이었것다.
방자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더 듣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더 이상 자초지종을 풀어놓지 못 한 채 끝내 눈을 감고 말았으니, 한평생 방자에게 숨겼던 아비를 마지막에 찾아주고 돌아간 것이로다.
하긴 이제 와서 새삼 출생의 비밀을 더 알아 무엇하겠는가. 몽룡이 입버릇처럼 찾던 공자도 사생아 아니던가. 공자의 아버지는 어느 조그마한 고을 수비대장 정도밖에 안 되는 군인이었다
는데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는 남원 사또를 거친 참판이면 벼슬자리는 그럴싸했것다. 그렇다면 공자와 비록 같은 자자 돌림이 되긴 했지만 자신의 가문이 더 괜찮았던 것 아닐까?
‘고런 것이 시방 뭔 문제여. 공자는 그래도 자기 어머니가 스물 다섯까지는 살아서 어머니 얼굴이라도 아는디 난 어머니 얼굴도 모르잖이여.’
한편 관아의 공사를 방해한 혐의로 옥에 갇힌 춘향이는 밤에는 사또가, 낮에는 수룡이가 찾아와 온갖 회유와 협박을 하였으나 오로지 이도령 생각뿐이었다.
과거에선 낙방 거사가 되고, 집안은 풍비박산 결단이 나자 죽더라도 춘향이나 보고 죽자며 길을 나선 몽룡은 열흘도 넘게 걸어 걸어 가까스로 남원 땅에 이르렀것다. 남원 가까운 고을에 이르러 점심 얻어먹은 들녘의 농부들에게 들으니 신관 사또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가 옥에 갇혀 있는데, 한양 간 이도령인지 몽룡인지 하는 놈은 일자 소식 하나 없다고 욕을 해댔다. 몽룡은 자신의 신분을 밝힐 처지가 못 돼 더욱 속울음만 삼킬 수밖에.
이윽고 남원 고을에 들어서니 낯익은 관아며 광한루 모두 그대로인데 짧은 사이에 사람 신세 이렇게 뒤집어질 줄 몰랐으니 세상사 참 무상타 아니할 수 없구나.
몽룡은 일단 춘향이 집으로 갔것다. 하지만 거지꼴 차림에 춘향 어미 월매한테 있는 모욕 없는 모욕 다 당하고 내쫓기고 말았구나. 월매는 양반에게 대를 물려가며 속았다는 생각을 하니 속이 불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시방 이게 누구여?”
“날세, 그간 잘 지내셨는가? 장모! 나, 이도령이우.”
“그래, 이도령인 줄 몰라서 그러우? 왜 이런 차림이냐 이거우.”
“말도 마시우. 한양 가자마자 아버지 벼슬 길이 끊어져 가산이 다 거덜이 나 아버지는 서당 훈장질이고,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갔소. 나는 춘향이나 만나 돈냥이나 얻어 가려고 왔소.”
몽룡은 과거 떨어졌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 엉뚱하게도 거짓말을 둘러댔다.
“뭣이 으짜고 저째? 이래서 내가 양반 종자를 못 믿는 것이여. 그 꼴로 와서 춘향이를 보겄다? 어림도 없는 소리.”
“장모, 너무 그러지 마소. 양반이 한번 잘못 되니 꼴이 말이 아니오. 그래도 옛 정분을 생각해서 찾아왔는데 찬밥이라도 밥이나 한 덩이 주소.”
“거지도 상거지가 따로 없구만. 이도령인지 잡도령인지 하는 망할 놈 때문에 춘향이는 잡혀가 옥에 있고 집안 살림은 다 거덜 나 새앙쥐 볼가심거리도 없은께 다른 집에 가서 얻어먹든지 말든지 혀! 낯부닥도 뻔뻔한 한양 상거지 이가놈아!”
월매, 쌀쌀 맞기가 엄동설한 서릿발보다 더하다. 몽룡은 하릴없이 춘향이 집을 물러났것다.
눈에 익은 집 눈에 익은 골목이지만 그새 사람 인심이 변했다. 어쩌면 자기 자신이 가장 많이 변했는지 모른다. 몽룡이 월매에게 박대를 당하고 춘향이 집을 나가자 누런 황구가 뒤에 대고 짖는다. 몽룡이 돌아보니 황구가 꼬리를 내린다.
“노랑아, 내 비록 이런 꼴로 나타났다만 이 집 주인 같은 사람이다. 이제 너도 몰라보고 문전박대를 하느냐. 너무 그러지 마라.”
생각해보니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이제 어디로 가나. 바람 부는 대로 발길 닿는대로 떠돈다는 말도 있지만 바람 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떠돌기도 쉽지 않은 일이로다.
관아 안에 있는 옥으로 가서 춘향을 보자니 문지기며 관원들 모두 자기를 알아볼 텐데 이런 거지꼴로 갈 수도 없어 난감하였도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발길은 자신도 모르게 방자 주막으로 가는구나.
방자네 주막이 밤인데도 환해서 가만 들여다보니 사람들 오고 감이 분주하고, 주막 등에는 방자가 썼음직한 ‘아바지 주막’이라는 글자가 삐뚤빼뚤 씌어져 있었것다.
방자한테 속아 ‘아바지’라고 부른 일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며, 그 시절이 마냥 그리울 뿐이었다.
몽룡이 무슨 잔칫날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막마당에 들어서니 향단이가 먼저 알아보고 반기는데 하얀 소복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이어 방자가 상복 차림으로 나오는데, 매 맞은 뒤끝이라 걸음걸이가 어색하다. 방자는 몽룡의 거지 차림을 보고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차림은 거지꼴이어도 혹시 몸속에 마패 같은 것 숨기지않았남?”
“과거도 떨어지고 집안도 다 망해 진짜 거지가 된 거야….
양반이 한번 잘못되면 더 못 쓰게 된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 됐어.”
그렇다 하더라도 방자는 몽룡의 말을 믿을 수 없어 몽룡의 옷을 뒤졌으나, 끝내 마패는 나오지 않았다.
방자는 그간 춘향이가 당한 일이며 자신이 당한 일들을 간단히 추려 몽룡에게 들려준 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이고, 암행어사라도 되어 나타날 줄 알았던 도령이 어사는커녕 과거급제도 못 하고 거지꼴로 나타났으니 춘향이도 인자 꼼짝없이 죽게 생겼구나. 우리 할머니는 나 때문에 죽고 춘향이는 도령 때문에 죽게 생겼으니 줄초상이 따로 없구만.”
몽룡은 방자가 춘향이 때문에 끌려가 매 맞은 일이며 매 맞고 돌아온 손자 때문에 할머니가 세상 뜬 연유를 듣자 더욱 비감한 마음이 들었지만 뭐라고 할 말이 없어 눈물만 주루룩 흘릴 뿐이었다.
장례 음식이지만 한 상 걸게 차려 내오자 몽룡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후딱 먹어치웠것다.
방자는 그런 몽룡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향단이는 눈물만 훔치는구나.
그 무렵 옥중의 춘향이는 사또한테 닦달을 당하고 옥방 벽을 할퀴며 울음 울다 새벽녘에 살짝 잠이 들었것다. 꿈속에 몽룡이 준 거울로 얼굴을 고치다 떨어뜨렸는데 거울이 산산이 깨지고 마는구나. 춘향,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품안의 거울은 그대로인데 가슴 한쪽이 싸하구나.
통행금지를 푸는 쇠북 소리가 나자 마침 꿈 해몽 잘한다는 장님이 옥방과 면한 골목을 지나갔것다. 춘향이 퍼뜩 한 생각이 떠올라 옥졸을 불러 장님을 불러달랬다. 평소 춘향이에게 인정을 써주던 옥졸이라 춘향이 청을 들어주었것다. 장님이 옥문 앞에 다가오자 춘향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봉사님, 저는 춘향이라 하는디요, 바라는 쳤지만 아직 날도 다 새지 않아 어두운디 어딜 그리 바삐 가십니까?”
“아이구, 말로만 듣던 춘향이가 여그 갇혔구만. 눈먼 소경이 날이 새나 안 새나 못 보는 건 마찬가진데 나다니는 시간을 가릴 것이 뭐 있겄소. 근디 날 왜 불렀소?”
“지가 쪼깐 전에 꿈을 꾸었는디 꿈속에서 한양 간 도련님이 준 거울을 깨뜨렸습니다. 몸에 지닌 거울은 말짱합니다만 혹시 도련님한티 뭔 일이 난 것 아닐까유?”
“어디 보자….”
장님 점쟁이는 옥문으로 손을 넣어 춘향이 팔목을 짚는다. 이어 춘향이 허벅지를 더듬는다. 춘향이가 망칙스러워 몸을 뒤로 뺐것다.
“내가 눈이 안 보인께 점괘 뽑기전에 먼저 점 볼 사람 형상을 살피는 것인디, 뺄 것 뭐 있남.”
춘향이는 장님의 손길이 징그러워 계속 몸을 뒤로 빼건만 점쟁이는 여전히 춘향이 팔목을 쥐고 서 꿈 풀이를 해준다.
“거울이 깨졌다는 건 파경인디, 파경은 부부간에 이별 수가 있다는 말이여. 그란께 시방 서로 헤어져 있는 것일 티고, 근디 실제 거울은 말짱하다는 건 본디마음은 변함없이 그대로라는 것일세. 곧 소식이 올 모양이구만.”
변사또에게도 이몽룡과 동갑인 아들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수룡이렷다. 그도 명색이 양반집 자제인데 태몽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의 어머니, 수룡을 잉태했을 때 논두렁 물꼬 밑 얕은 물에서 미꾸라지가 파닥거리며 노는 꿈을 꾸었것다. 그렇다고 아들 이름을 미꾸라지와 관련하여 지을 수는 없는 일. 물꼬 밑 얕은 물일망정 물은 물이로다. 미꾸라지일망정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물에서 노는 용으로 수룡水龍이 되었으니 그 이름은 지렁이 꿈에서 비롯한 몽룡이라는 이름보다 훨씬 더 절묘하다 할 것이다.
수룡은 남원에 오자마자 춘향이 소식부터 챙겼다. 그러나 이미 구관 사또 자제 몽룡이 춘향이와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시샘이 일고 분이 나기 시작했것다. 한양 살 때 몽룡이와 어울려 놀 때는 동무였지만 지금은 저주의 대상이 되었으니, 여자를 두고선 영원한 적은 있어도 영원한 벗은 없는 법이렷다.
“이런 씨부럴, 우리 아버지는 남원 사또가 왜 몽룡이 아버지보다 더 늦게 된 거야. 에에 씨, 한발 늦었잖아!”
그런데 변수룡이 춘향을 두고 당장 다투어야 할 이는 이미 한양으로 떠나간 몽룡이가 아니라 바로 남원 고을의 최고 실력자인 자기 아버지 변학도였으니 꼬여도 심하게 꼬인 셈이렷다. 변수룡이야 이팔청춘 꽃띠이니까 암내 맡으며 저자거리를 헤매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가관인 것은 그의 아비 신관 사또 변학도였다.
변학도가 사또로 부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기생 점고렷다. 춘향이 소문을 알고 있는 그. 끝내 춘향이가 안 나타나자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것다. 기생 딸이면 저도 기생인데 일부종사 한다며 감히 사또 수청을 거부한 춘향을 잡아들여 옥에 가두었것다. 이어 춘향 어미 월매가 이 사또 시절에 환자로 꾸어간 관아 곡식을 세 배로 갚으라 하였으니, 이방들조차도 입을 짝 벌릴 수밖에. 월매는 새삼 사또가 바뀐 세월을 실감하며 춘향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노리개는 물론 돈 될만한 세간을 모두 내다 팔아 환자를 정리하였것다.
수룡은 춘향이가 옥에 갇히자 기회는 이때다 싶어 재빠르게 옥으로 춘향이를 찾아갔것다. 춘향이를 보니 과연 듣던 바 그대로 절세 미인이었다. 옥살이를 하느라 얼굴은 수척해보였지만 그래서 더욱 기품 있는 자태가 빛나 보였다.
수룡은 춘향을 보자마자 건들거리며 말을 건넸다.
“네가 춘향이라는 기생이구나. 내 말만 잘 들으면 여기서 고생할 필요가 없다. 내 말 들을 테야?”
“기생? 어디서 굴러먹다 온 인간이기에 나를 그렇게 보는 것이유?”
“어? 너, 기생 맞는 거 아냐?”
춘향,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것다.
“누군디 여그 와서 행패냐고?”
“나? 나를 아직 모르는구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또 어르신의 큰 자제 되는 수룡이라고 한다.”
“사똔지 감똑인지 아들 한번 물짜게 싸질러 놓았구만.”
“뭐? 뭐라고?”
“나는 이녘 같은 종자하곤 대거리하기 싫은께 다른 디나 가보시오.”
춘향이에게 놀림을 받았다고 여긴 수룡은 옥졸을 다그쳐 춘향이를 옥방 문 앞까지 끌고 오게 하였것다. 막상 춘향이 얼굴을 더 가까이 보게 되자 음심이 작동하여 춘향이 손목을 슬며시 잡는데, 바로 그때 방자와 향단이 사식으로 넣어줄 음식을 가지고 왔것다.
방자가 옥졸에게 아는 체 인사를 하더니 바로 수룡을 째려보았것다.
“야, 인마 너, 뭣인디 춘향이를 희롱하는 것이여?”
곁에 있던 옥졸이 안절부절못하며 대신 대답했것다.
“방자야, 신관 사또 자제분이 춘향이 보려고 온 것이여.”
“뭣이라고? 신관 사또 자제가 춘향이를 왜 봐? 그 애비에 그 자식이구만. 다 똥 싸다가 퍼질러 낳은 인간들이고만.”
“뭣이라고? 너, 방자라고 했느냐?”
수룡이 짐짓 위엄을 차리며 방자를 불렀것다.
“그래, 전관 사또 자제 책방 방자 노릇 한 사람이다. 왜?”
“방자 주제에 어디서 까불어?”
“방자 주제? 이런 땐 한 방 먹이는 게 방자 주제다!”
바로 그 순간 방자 주먹이 수룡의 턱 밑으로 날아가 꽂혔것다. 수룡은 마른 검불 더미 쓰러지듯 넘어져 한참을 지나도 일어나지 못하다가 겨우 일어나 꽁무니를 빼며 소리 질렀것다.
“방자 너, 오늘이 니 제삿날인 줄 알아라!”
그런 말에 방자가 콧방귀나 뀌겠는가.
“한 방 주먹에 빌빌거리는 자식이 뭘 어쩌겠다고.”
방자와 향단이는 춘향이를 위로하고 바깥 소식을 전해준 뒤 물러갔다.
방자는 몽룡이 한양으로 간 뒤 책방 방자 자리를 물러나왔다. 방자는 그새 이름처럼 되어버려 여전히 방자로 불리게 되었다. 방자는 얼마 곧 향단이와 물 한 그릇 떠놓고 성례를 치렀다. 이어 할머니가 하는 주막을 대신 맡았다. 주막 등에는 몽룡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아바지 주막’이라는 글을 써넣었것다.
방자가 수룡을 주먹으로 한 방 때려준 날 밤이었다. 주막집 밖이 소란스럽더니 관아의 군노들이 들이닥쳤다. 방자는 짚이는 데가 있었지만 짐짓 태연히 물었것다.
“형님들 으짠 일이요?”
“말 마라, 방자야. 니가 사또 자제 변 도령을 때린 탓에 너 잡으러 왔다.”
“시방 나를 잡으러 왔다고라?”
“그렇다니까!”
“뎬장 넨장 맞을 시상이네. 맞을 짓거리 한 놈 정신 차리게 한 방 쥐어박았더니 나를 잡아가겠다고?”
“암튼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께. 일단 앞장서라.”
“그라믄 갑시다.”
“방자야, 너무 서운해 마라. 우리도 죽을 맛이다. 곤장이라도 맞게 되믄 집장 사령한티 알아서 살살 쳐달라고 할 틴께 너도 알아서 소리 지르고 뻗어라.”
“이깟 일에 곤장까지 들먹이우.”
“아니다, 사또 아들놈이 사또보다 더 지랄이다.”
동헌 마당에 들어서니 사방에 횃불이 대낮처럼 환한데, 사또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있고, 그 옆엔 수룡이 거들먹거리며 서있었것다. 눈치코치 19단의 방자, 직감으로 잘못 걸려들었구나라고 느끼는데, 사또 호령이 동헌 마당을 채운다.
“저놈이 감히 사또 아들을 욕보였단 말이냐?”
“아버님, 맞습니다. 제가 옥방 시찰 하는데 저놈이 춘향이란 년하고 내통하면서 나를 때렸습니다.”
“그래 어딜 어떻게 맞았느냐?”
“턱을 주먹으로 세게 한 방 맞았습니다.”
“그럼, 네가 당한 대로 저놈을 한 방 때리도록 해라.”
수룡은 방자 곁으로 다가와 주먹으로 방자 턱을 강타했것다.
방자, 성질 같으면 바로 한 방을 되먹여주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어 가만히 한 대 맞아주고 말았다.
“저놈이 맷집이 보통이 아니구나. 그렇다면….”
변 사또가 사또 체면도 팽개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자에게 가더니 머리통을 쥐어박는다.
“네가 죄수년하고 내통을 허고 감히 내 아들을 때리기까지 했단 말이지?”
방자, 꼿꼿이 서서 변 사또를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벌주자고 달려드는 인간들하곤 말을 섞지 않는 게 제일이렷다.
변 사또, 묵묵부답을 하는 방자 꼴을 보니 화가 더욱 치밀었다. 더더구나 춘향이 사식까지 들여보내며 내통하였다 하지 않은가. 그래서 집장 사령더러 곤장으로 볼기를 매우 치도록 하였것다.
집장 사령도 군노들한테 부탁을 받기도 했지만 방자를 잘 알기에 요령껏 봐주며 매질을 살살하였으나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봐주며 때리는 매도 수십 대를 맞다보니 방자 엉덩이 살이 터져 버렸다. 밤새 실신할 때까지 닦달을 당한 방자는 주막 단골 군노의 등에 업혀 주막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며 향단이가 놀라 자빠진 건 더 말해 무엇하리.
방자 할머니, 매 맞고 돌아온 방자를 보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자리에 눕고 말았다. 향단이가 정성스레 보살폈건만 할머니는 나이를 못 이겨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방자를 불러 유언을 하였것다.
“방자 니가 춘향이 때문에 욕을 봤는디, 사실은 춘향이하고 니가 배다른 동기간이다. 앞으로도 서로 잘허고 살아야 쓴다.”
“할머니, 그게 무신 말씀이슈?”
“니 아부지도 춘향이 아부지하고 같은 성참판이란 말이제.”
방자는 가슴이 철렁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동안 춘향이에게 연심을 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자신과 춘향이 사이에 몽룡이 나타난 게 더할 나위 없이 다행한 일이었것다.
방자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더 듣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더 이상 자초지종을 풀어놓지 못 한 채 끝내 눈을 감고 말았으니, 한평생 방자에게 숨겼던 아비를 마지막에 찾아주고 돌아간 것이로다.
하긴 이제 와서 새삼 출생의 비밀을 더 알아 무엇하겠는가. 몽룡이 입버릇처럼 찾던 공자도 사생아 아니던가. 공자의 아버지는 어느 조그마한 고을 수비대장 정도밖에 안 되는 군인이었다
는데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는 남원 사또를 거친 참판이면 벼슬자리는 그럴싸했것다. 그렇다면 공자와 비록 같은 자자 돌림이 되긴 했지만 자신의 가문이 더 괜찮았던 것 아닐까?
‘고런 것이 시방 뭔 문제여. 공자는 그래도 자기 어머니가 스물 다섯까지는 살아서 어머니 얼굴이라도 아는디 난 어머니 얼굴도 모르잖이여.’
한편 관아의 공사를 방해한 혐의로 옥에 갇힌 춘향이는 밤에는 사또가, 낮에는 수룡이가 찾아와 온갖 회유와 협박을 하였으나 오로지 이도령 생각뿐이었다.
과거에선 낙방 거사가 되고, 집안은 풍비박산 결단이 나자 죽더라도 춘향이나 보고 죽자며 길을 나선 몽룡은 열흘도 넘게 걸어 걸어 가까스로 남원 땅에 이르렀것다. 남원 가까운 고을에 이르러 점심 얻어먹은 들녘의 농부들에게 들으니 신관 사또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가 옥에 갇혀 있는데, 한양 간 이도령인지 몽룡인지 하는 놈은 일자 소식 하나 없다고 욕을 해댔다. 몽룡은 자신의 신분을 밝힐 처지가 못 돼 더욱 속울음만 삼킬 수밖에.
이윽고 남원 고을에 들어서니 낯익은 관아며 광한루 모두 그대로인데 짧은 사이에 사람 신세 이렇게 뒤집어질 줄 몰랐으니 세상사 참 무상타 아니할 수 없구나.
몽룡은 일단 춘향이 집으로 갔것다. 하지만 거지꼴 차림에 춘향 어미 월매한테 있는 모욕 없는 모욕 다 당하고 내쫓기고 말았구나. 월매는 양반에게 대를 물려가며 속았다는 생각을 하니 속이 불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시방 이게 누구여?”
“날세, 그간 잘 지내셨는가? 장모! 나, 이도령이우.”
“그래, 이도령인 줄 몰라서 그러우? 왜 이런 차림이냐 이거우.”
“말도 마시우. 한양 가자마자 아버지 벼슬 길이 끊어져 가산이 다 거덜이 나 아버지는 서당 훈장질이고,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갔소. 나는 춘향이나 만나 돈냥이나 얻어 가려고 왔소.”
몽룡은 과거 떨어졌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 엉뚱하게도 거짓말을 둘러댔다.
“뭣이 으짜고 저째? 이래서 내가 양반 종자를 못 믿는 것이여. 그 꼴로 와서 춘향이를 보겄다? 어림도 없는 소리.”
“장모, 너무 그러지 마소. 양반이 한번 잘못 되니 꼴이 말이 아니오. 그래도 옛 정분을 생각해서 찾아왔는데 찬밥이라도 밥이나 한 덩이 주소.”
“거지도 상거지가 따로 없구만. 이도령인지 잡도령인지 하는 망할 놈 때문에 춘향이는 잡혀가 옥에 있고 집안 살림은 다 거덜 나 새앙쥐 볼가심거리도 없은께 다른 집에 가서 얻어먹든지 말든지 혀! 낯부닥도 뻔뻔한 한양 상거지 이가놈아!”
월매, 쌀쌀 맞기가 엄동설한 서릿발보다 더하다. 몽룡은 하릴없이 춘향이 집을 물러났것다.
눈에 익은 집 눈에 익은 골목이지만 그새 사람 인심이 변했다. 어쩌면 자기 자신이 가장 많이 변했는지 모른다. 몽룡이 월매에게 박대를 당하고 춘향이 집을 나가자 누런 황구가 뒤에 대고 짖는다. 몽룡이 돌아보니 황구가 꼬리를 내린다.
“노랑아, 내 비록 이런 꼴로 나타났다만 이 집 주인 같은 사람이다. 이제 너도 몰라보고 문전박대를 하느냐. 너무 그러지 마라.”
생각해보니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이제 어디로 가나. 바람 부는 대로 발길 닿는대로 떠돈다는 말도 있지만 바람 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떠돌기도 쉽지 않은 일이로다.
관아 안에 있는 옥으로 가서 춘향을 보자니 문지기며 관원들 모두 자기를 알아볼 텐데 이런 거지꼴로 갈 수도 없어 난감하였도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발길은 자신도 모르게 방자 주막으로 가는구나.
방자네 주막이 밤인데도 환해서 가만 들여다보니 사람들 오고 감이 분주하고, 주막 등에는 방자가 썼음직한 ‘아바지 주막’이라는 글자가 삐뚤빼뚤 씌어져 있었것다.
방자한테 속아 ‘아바지’라고 부른 일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며, 그 시절이 마냥 그리울 뿐이었다.
몽룡이 무슨 잔칫날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막마당에 들어서니 향단이가 먼저 알아보고 반기는데 하얀 소복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이어 방자가 상복 차림으로 나오는데, 매 맞은 뒤끝이라 걸음걸이가 어색하다. 방자는 몽룡의 거지 차림을 보고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차림은 거지꼴이어도 혹시 몸속에 마패 같은 것 숨기지않았남?”
“과거도 떨어지고 집안도 다 망해 진짜 거지가 된 거야….
양반이 한번 잘못되면 더 못 쓰게 된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 됐어.”
그렇다 하더라도 방자는 몽룡의 말을 믿을 수 없어 몽룡의 옷을 뒤졌으나, 끝내 마패는 나오지 않았다.
방자는 그간 춘향이가 당한 일이며 자신이 당한 일들을 간단히 추려 몽룡에게 들려준 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이고, 암행어사라도 되어 나타날 줄 알았던 도령이 어사는커녕 과거급제도 못 하고 거지꼴로 나타났으니 춘향이도 인자 꼼짝없이 죽게 생겼구나. 우리 할머니는 나 때문에 죽고 춘향이는 도령 때문에 죽게 생겼으니 줄초상이 따로 없구만.”
몽룡은 방자가 춘향이 때문에 끌려가 매 맞은 일이며 매 맞고 돌아온 손자 때문에 할머니가 세상 뜬 연유를 듣자 더욱 비감한 마음이 들었지만 뭐라고 할 말이 없어 눈물만 주루룩 흘릴 뿐이었다.
장례 음식이지만 한 상 걸게 차려 내오자 몽룡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후딱 먹어치웠것다.
방자는 그런 몽룡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향단이는 눈물만 훔치는구나.
그 무렵 옥중의 춘향이는 사또한테 닦달을 당하고 옥방 벽을 할퀴며 울음 울다 새벽녘에 살짝 잠이 들었것다. 꿈속에 몽룡이 준 거울로 얼굴을 고치다 떨어뜨렸는데 거울이 산산이 깨지고 마는구나. 춘향,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품안의 거울은 그대로인데 가슴 한쪽이 싸하구나.
통행금지를 푸는 쇠북 소리가 나자 마침 꿈 해몽 잘한다는 장님이 옥방과 면한 골목을 지나갔것다. 춘향이 퍼뜩 한 생각이 떠올라 옥졸을 불러 장님을 불러달랬다. 평소 춘향이에게 인정을 써주던 옥졸이라 춘향이 청을 들어주었것다. 장님이 옥문 앞에 다가오자 춘향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봉사님, 저는 춘향이라 하는디요, 바라는 쳤지만 아직 날도 다 새지 않아 어두운디 어딜 그리 바삐 가십니까?”
“아이구, 말로만 듣던 춘향이가 여그 갇혔구만. 눈먼 소경이 날이 새나 안 새나 못 보는 건 마찬가진데 나다니는 시간을 가릴 것이 뭐 있겄소. 근디 날 왜 불렀소?”
“지가 쪼깐 전에 꿈을 꾸었는디 꿈속에서 한양 간 도련님이 준 거울을 깨뜨렸습니다. 몸에 지닌 거울은 말짱합니다만 혹시 도련님한티 뭔 일이 난 것 아닐까유?”
“어디 보자….”
장님 점쟁이는 옥문으로 손을 넣어 춘향이 팔목을 짚는다. 이어 춘향이 허벅지를 더듬는다. 춘향이가 망칙스러워 몸을 뒤로 뺐것다.
“내가 눈이 안 보인께 점괘 뽑기전에 먼저 점 볼 사람 형상을 살피는 것인디, 뺄 것 뭐 있남.”
춘향이는 장님의 손길이 징그러워 계속 몸을 뒤로 빼건만 점쟁이는 여전히 춘향이 팔목을 쥐고 서 꿈 풀이를 해준다.
“거울이 깨졌다는 건 파경인디, 파경은 부부간에 이별 수가 있다는 말이여. 그란께 시방 서로 헤어져 있는 것일 티고, 근디 실제 거울은 말짱하다는 건 본디마음은 변함없이 그대로라는 것일세. 곧 소식이 올 모양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