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만화 [읽어볼 만화면]정치는 우리 곁에 — 정치에 관한 만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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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12-06 21:00 조회 6,190회 댓글 0건본문
가을이라고 하면 흔히 뻔하게 꺼내는 것이 독서의 계절, 우수와 낭만의 계절 그런 식의 이야기다. 하지만 몇 년마다 한번씩,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가을은 그보다 좀 더 첨예한 함의를 담아내는 계절이다. 5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겨울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이 압축되고 경합을 벌이며 온갖 말과 말과 또 말들을 쏟아내는 ‘정치의 계절’ 말이다. 너도나도 갑자기 귀를 열어 경청하겠다고 나서고, 자신만이 서민의 힘이 되어줄 것이라느니 역사를 반성한다느니 경제가 중요하다느니 온갖 세상 멋져질이야기들이 난무한다. 온 세상이 정치에 관심이 꽂혀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또 한편, 이 시기는 정치 무관심, 혹은 정치 혐오를 확인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도저히 오늘날 한국사회에 자리를 차지하면 곤란한 결격 정치인이 적잖은 고정 지지율을 자랑하기도 하고, 복지 정책의 예비 수혜자들이 그간 복지 정책을 망쳐온 후보를 지지하며, 정책에 대한 세심한 논의보다는 팬심의 열기에 휩싸인 비건설적 논쟁에 학을 떼기도 한다. 저 위에서 정치하는 높은 분들이 무엇을 하든, 당장 여기 나에게는 변화가 없다는 식의 자포자기도 흔히 등장한다.
민주제 사회에서, 정치란 어떤 의미인가. 교과서에서 암기하게 하는 제도 명칭들 나열 말고, 왜 우리는 직업 정치인이 아니라도 정치라는 복잡하고 전문적인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만 한다는 것인가. 선거권이 아직 없다한들, 미리 관심 기울여 보는 것이 나쁠 것 없다. 투표해야 민주시민 뭐 그런 낯간지러운 캠페인 말고, 어쩌면 멋진 만화책 몇 권을 읽으면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저 위의 정치, 여기 밑의 삶
흥미 위주로 대충 보도하는 저급한 언론사들의 보도만 보는 것에 익숙해지면, 정치를 무슨 저 높은 곳에서 잘나신 양복 입고 배지를 단 양반들이 서로 머리 잡고 싸우다가 끝나는 것쯤으로 착각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학교에서, 가족에서, 회사에서, 사회 곳곳에서 민주제 정치의 절차를 경험하며 그것에 참여하는 것으로 당장의 생활 조건을 바꾸는 사례를 피부로 늘 느끼지 않으면, 그보다 굳이 힘들고 귀찮게 관심 기울이고 참여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냥 피상적 수준에서 대통령 잘못 뽑으면 고생이고 잘 뽑으면 우리나라 만세, 그 정도만 이해하고 지나갈 따름이다. 하지만 정치 과정은 그렇게 대단히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생활과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다. 민주제라는 방식이기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정치 참여라는 것은 민주시민의 의무 뭐 그런 엄청난 것이기 이전에, 젓가락을 들어야 자장면을 먹을 수 있다는 평범한 자기 몫 찾기의 차원이 된다.
정치 체제에 따라서 일상의 삶이 얼마나 흔들릴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제라는 것이 결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여러 방식으로 후퇴할 수 있는지, 나아가 그 속에서 그래도 어떻게든 사람들은 살아가며 더 나은 무언가를 꿈꾸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페르세폴리스』(마르잔 사트라피, 새만화책)다. 이란 출신 작가가 그린 자전적 만화로, 80년대 이란의 정치 격동기에 성장기를 거친 한 소녀의 이야기다. 다분히 개방적이지만 왕정이었던 사회에서, 대중 혁명을 통해 무슬림 원리주의 성향의 강한 종교 공화국으로 탈바꿈하여 억압적 사회가 된 시기 말이다. 아직 어리기에 정치의 세부 과정을 전혀 알지 못하지만, 일상의 모습들을 통렬하지만 유머러스하게 관찰하는 마르지의 시선에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이전 정치체제에서 상류층이었던 부모, 공산주의 운동가였던 삼촌, 재미있는 서방 락음악을 못 듣게 하는 수염 기른 자경단원들, 어쨌든 새로운 재미를 찾아내는 동네 친구들 등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선보인다. 그러나 경쾌한 묘사의 뒤에는 정치의 변화로 인해 억압적 사회로 변한 세상의 무게가 짙게 깔린다.
정치의 모습들을 보여 주는 만화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시사만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꽤 많은 시사만화들이 정치와 일상을 접목시키기보다는, 직업정치인들의 암투를 구경시켜 주는 정도에 머물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우리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방향, 기득권들의 이기적 법칙들이 정치과정 속에서 고착되고 나머지 시민들이 소외되며 그들을 위한 바닥을 깔아주게 되는 모습들을 묘사한 탁월한 시사만화 『나는 99%다』(박순찬, 비아북)도 한번 들춰볼 가치가 있다. 그런 식의 나쁜 정치는 대통령만의 것이 아니라 정권 세력 전반, 검찰, 언론, 재벌 등 여러 사회 기득권 세력들이 공고하게 협력하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저항하여 고치기보다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사탕발림을 던질 따름이다. 이런 모습들을 경쾌한 언어와 시각적 리듬감을 갖춘 풍자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표현해 낸다.
정치와 일상에 관하여, 하나의 드라마틱한 줄거리를 갖춘 모험성장 장르물로 만들어낸 작품도 재미라는 측면에서 무척 소중하다. 만화 『쿠니미츠의 정치』(아사키 마사시,안도 유마, 학산문화사)는 일본 정치를 바꿔버리겠다는 거대한 포부를 지닌 주인공 쿠니미츠가 소도시 시장 선거 캠프에서 일하며 겪는 모험을 그려낸다. 전문분야를 다루는 일본 주류잡지만화들이 흔히 그렇듯, 반복적인 대결구도 속에서 점점 더 강력한 적이 나타나고 우군 또한 늘어나며, 그 과정에서 거의 직접적으로 훈계를 던져주는 전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본의 대의 정치 체제의 현실에 대한 매우 세부적인 설명이 들어간다. 기득권 보수정당의 정치인이 지역 유지의 일원으로 지역 개발 이익을 독점하며 부패하는 모습, 좀처럼 새로운 비전을 가진 이가 진출하여 개혁을 하기 힘든 강고한 관료체계 등이 앞을 가로막고, 주인공은 소년만화 특유의 열혈과 진심으로 그런것을 깨트려 나간다. 편의적 해결 방식은 현실과 거리가 있지만, 정상적 역동성을 가진 민주제를 가로막고 시민들의 정치 무관심과 무기력을 불러오는 모습들은 그대로 한국이라고 봐도 위화감이 없다.
나서는 것의 어려움
문제는 나서는 것이 결코 간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제니까 다음 선거에서 사람을 잘 뽑으면 될 것 아닌가, 그런 식의 속 편한 소리나 믿으며 참기에는 너무나 곤란한 상황들이 발생하곤 한다. 사람을 잘 뽑는 것만 해도 무척 힘들며, 뽑힌 사람들이 제대로 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마을 이야기』(오제 아키라, 길찾기)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사회운동 가운데 하나인 ‘나리타 공항 반대 운동’을 다룬 작품이다. 새 국제공항을 만들겠다며 현지에 있는 마을을 철거하는 계획이 세워지고, 마을 사람들은 보상금을 받고 떠나려는 이들과 터전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로 갈라진다. 옆의 마을이 철거대상지였을 때는 남의 이야기 취급했으나, 자신들의 마을로 바뀌자 구경꾼으로 바라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온갖 의사결정의 문제점들이 넘친다. 제대로 된 공청회도 없이 먼저 철거 결정부터 내린 지역 정치 관료들, 그리고 지역민들을 욕심쟁이 취급하는 언론사들이 있다. 몇대에 걸쳐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쓸 만한 땅을 만들어 정상적 지역 공동체를 만들어 살던 지역민들이, 자신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정치에 참여할 경로는 시위와 무력투쟁밖에 없다는 비극을 맞이한다. 그래도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한국의 87년 6월 혁명을 그려낸 『100℃』(최규석, 창비)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의 어려움, 그래도 나서야 하고 나설 만함을 말한다. 하나는 작품의 본편으로, 6월 혁명 그곳에 참여한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들이다. 불만은 있지만 나라님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리라는 식의 평범한 부모세대, 반공교육을 받고 자랐으나 광주민주화항쟁 학살 사진들을 보며 반독재 투쟁에 나서는 대학생들, 노동현장에서 사주의 횡포에 대항하며 조직화를 하는 미싱 노동자들, 자신의 아들이 잡히고 나자 정치가 잘못 굴러가고 있음을 알게 되고 가장 앞에 나서는 나이 든 어머니, 그들 모두가 결국 거리에 나선다. 그렇게 힘들게 얻어낸 것은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한장의 종이다. 여기서 작품은 어쩌면 더 흥미로운 부록으로 넘어가는데,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투표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훨씬 집요한 참여가 필요함을 유쾌하게 설명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작은 제안은 바로 계속적인 관심과 할 수 있는 만큼씩의 지속적인 참여다.
만화 몇 작품을 읽고 난데없이 정치에 관심 넘치는 투철한 이상적 민주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정치 참여의 일상적 필요성을 한번쯤 생각해보고, 정치인들의 활동을 단순화된 선악의 대결이 아닌 구체적 정책들의 마찰로 따져보기 위한 최소한의 영감이라도 얻어내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