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함께 [세계의 십대와 함께 즐기는 문학] 독일인이 반성하는 2차 세계대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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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11-26 15:20 조회 6,694회 댓글 0건본문
김영욱 작가. 번역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올해로 정전 60년을 맞이했습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비무장지대에 상주하고 있는 중립국감시단의 일과를 조명해주는 프로그램을 보았지요.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그리고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의 일원으로서 제 자신이 전쟁을 안다고 할 수 있나,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절대로 조금도 안다고 할 수 없더군요. 전쟁은 책이나, 영화, 사진 등의 매체로 간접 경험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전쟁의 체험은 말로 적절히 표현되거나 문장으로 완벽히 옮겨놓을 수 없는, 공포의 한가운데에 무방비로 놓이는 악몽이니까요.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전쟁 몽마의 돌연한 출몰에 가위에 눌린 채로 잠에서조차 깨어나지 못하고 신음하는 전쟁세대들에게 그것은 어떻게든 떨쳐내고 싶은 유령인 것이죠.
유다의 자손들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지 불과 20년 만에 또 다른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독일은 전쟁배상금을 갚아 나가야 했고, 1930년대 대공황에 실업자로 전락한 많은 국민들은 민족주의를 외쳐대는 독일 파시즘의 슬로건에 열광했습니다. 그 시절 유럽 내 유대인들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와 능욕의 시간을 인내해야만 했지요. 사실을 말하자면, 오래전부터 떠돌이 신세였던 유대인들에 대한 미움은 나치나 독일 국민들에게 한정된 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라고 믿지 않았으며, 그저 수많은 사기꾼들과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바로 그러한 행위를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늘날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지.”(94~95쪽)의 인용구처럼,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유대인은 낯설고 불길한 존재였지요.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낙후된 경제 상황 속에서도 재건을 꿈꾸던 독일 국민들은 수차례의 화폐개혁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1인칭 주인공 ‘나(라인하르트)’의 아버지도 실업자인데 반해 위층의 동갑내기 프리드리히 아버지는 우체국 공무원으로 생활도 비교적 풍족한 유대인입니다.
책의 내용은 1925년에 일주일 간격으로 태어난 독일인 나와 유대인 프리드리히가 한 지붕 아래에서 너나없이 지내는 유치원 시절의 단란한 몇 장면을 보여주고, 곧바로 유대인–너와 독일인–나로 구별되고 분리되는 초등학교 이후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베를린의 서민 주택가를 배경으로 작가는 히틀러가 독일을 그의 손아귀에 넣으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낱낱이 보여 줍니다. 어떤 이는 나치에 동조하고, 어떤 이는 유약한 마음 때문에 따돌림을 받기 싫어서, 혹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 유대인을 몰아내지요. 이를테면 나와 프리드리히의 가족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주인 레싱 씨가 그 극단의 예입니다. 반면 나의 부모님은 나치의 맹목적인 반유대주의와 이들을 악랄하게 배척하는 것에 심리적으로 완전히 동조할 수 없지만,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치당에 가입을 하고 일자리를 얻어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건 아니지요. 곤경에 빠진 프리드리히의 아버지 슈나이더 씨를 옹호하고, 이들을 내쫓기 위해 레싱 씨가 극단의 처방을 내걸 때에도 맞서서 이들을 변호해주니까요. 심지어 위험을 무릅쓰고 슈나이더 씨네로 숨어들어온 랍비를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지만, 레싱 씨의 밀고로 한밤중에 쳐들어온 경찰에 의해 숨어 있던 프리드리히를 제외하고 랍비와 슈나이더 씨는 끌려가 되돌아오지 못하게 됩니다. 때는 전쟁 선언 후 베를린 시내 공습이 시작되기 직전입니다.
결말은 참혹합니다. 다들 지하 공습대피소로 숨어들었을 때, 유대인 체포를 피해 프리드리히는 거리를 떠돌다 포화 속에서 홀로 죽게 되거든요. 작가는 뒤늦게라도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신들의 만행과 독일인에 의해 발발한 세계대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들의 영혼에게나마 사죄를 전하는 의미에서 이 책을 집필했을 것입니다.
피아노와
꽃잎 한 장
전쟁 포로와의 금지된 사랑을 섬세하고 낭만적으로 그린 작품 『첫사랑』의 작가 구드룬 파우제방은 1928년생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군인으로 동원되어 전장에 나간 아버지를 둔 작가의 마을에는 전쟁 포로들이 하루 종일 농부들의 일을 돕고 저녁 땐 숙소인 낡은 건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파우제방은 2012년에 이 작품을 썼지요. 무려 여든다섯 살에 발표한 작품이자, 다분히 자기회고적인 이야기입니다. 비록 전쟁 중 그의 고향마을에 채석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 주인공 한니처럼 사춘기 소녀도 아니었지만 말이죠. 그러나 그는 자기 집에 온 포로 미셸에게서, 필리프가 그러했듯이, 풀피리 부는 법을 배웠고, 감시가 소홀한 때에는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철통같은 우편 보안을 뚫고, 한니의 엄마처럼 파리에 있는 미셸의 부모님에게 당신의 외아들이 자신의 집에 건강하게 머물고 있음을 알려주었대요. 이 작품을 감상할 때, 여러분은 한니를 작가의 분신으로, 필리프를 미셸의 분신으로 놓고 보세요. 전쟁으로 인한 금지된 사랑과 강제된 이별의 아픔이 절절하게 느껴질 수 있을 테니까요.
프랑스의 영화감독 르네 클레망이 1938년에 만든 <금지된 장난 Jeus Interdits>(1952)에서처럼 전쟁 중인데도 이상하리만큼 목가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첫사랑』은 참으로 아름다운 책입니다. 한니라는 열네 살 소녀의 이룰 수 없었던 첫사랑 이야기이면서, 전쟁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니는 전쟁에 오빠 위르겐과 남동생 알프레드를 빼앗깁니다. 첫사랑인 플리프와의 사랑도 허무하게 끝이 납니다.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독일 낭만주의 시인 휠더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 1770~1843)의 시 「고향(Heimat)」을 떠올리게 됩니다. 정조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은 돌아갈 것을 희망하는 전쟁터의 군인들, 적국의 땅에 버려진 전쟁포로들, 남편과 아들과 애인을 전장으로 보내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여인들, 금지된 사랑으로 헤어진 애인과의 재회를 기다리는 연인들이 영원한 안식처를 그리는 ‘향수(鄕愁)’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이것이 한 편의 서정시라면 말이죠.
반딧불의 잔존
“너 자신은 철로의 레일이다. 녹슬고 얼룩이 진, 은빛으로 번뜩이는 아름답고 막연한 레일이다. 너는 정거장으로 나뉘고 역 사이에 묶여 있다.”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이별 없는 세대」의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그가 누굴까요? 감성 풍부한 시인이지만 히틀러에 비판적이었던 이유로 러시아 전선에 끌려가 몇 차례의 독방 신세와 사형 선고를 겪고, 26살에 요절한 독일 전후문학의 첫 자리에 놓이게 된 대문호입니다. 아니, 그는 문학을 통해 죽음의 문 앞에서 ‘빛의 문학’을 위해 고민했던 한 병사였습니다. 폭력 없는 세상을 위해서라면 처절하게 절망스러운 상황을 딛고서라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끝내 포기하려 하지 않으려 애썼던 휴머니스트였지요. 그런 그가 군복무 시절 수백만 명의 목숨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나치 정권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답니다. 물론 그 대가는 혹독했지요. 하지만 영하 40도로 떨어지는 냉골 독방에서도 그는 문학이 발하는 광채로 생명의 씨앗이 잔존하는 하찮은 온갖 것들을 끌어안았습니다. 페터 헤르틀링의 『크뤽케 Krűcke』(1986)의 에르하르트 빔보는 흡사 볼프강 보르헤르트 같습니다. 외다리 빔보는 군인이었으나, 나치 친위대에 저항했던, 심지어 1944년 8월에는 슈타우펜베르그에서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전장에서 다리 한 쪽을 잃은 불구의 반전용사이지요. 그는 한 소년,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를 여읜, 어머니마저 피란 중에 놓쳐 버리고, 빈에 있는 이모 집을 찾아 헤매는 토마스를 거둡니다.
이 이야기는 전쟁 중 독일 나치당이 점령했던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합니다. 이야기의 화자 토마스 슈람은 독일인으로, 13세 소년이자, 외톨이죠. 헬러 가 9번지에 사는 이모를 찾아 나선 토마스는 이모를 찾지 못하면, 길거리 비렁뱅이가 되거나 국제적십자가 주선하는 양육 가정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토마스와 외다리 사내의 만남은 빈 시내에서 이뤄집니다. 토마스는 귀찮아하는 에르하르트를 졸졸 따라다니고, 결국 외진 숲속 그의 움막에서 신세를 지게 되지요. 외다리는 자신을 ‘크뤽케’로 부르라고 합니다. 목말이란 뜻이지요.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토마스를 떨쳐 내야겠다는 본래의 의도와 달리, 엄마가 어딘가에는 반드시 살아 있을 거라는 믿음과 달리, 둘의 관계는 외톨이들이 그렇듯이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서른세 살의 크뤽케는 차츰 소년 토마스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되지요. 그런데 러시아에서 후퇴하던 중 잃어버린 그의 다리는 이따금 환상통증을 일으킵니다. 고향 브레슬라우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그에게 잃어버린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많은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한마디로 그는 모든 것을 잃은 불구입니다. 남은 것이라곤 목말과 토마스이죠. 그런데 토마스가 그의 희망이 되어 줄 수 있을까요?
작가 페터 헤르틀링은 외다리의 전직 장교 출신 사내와 떠돌이 소년과의 우정을 통해 ‘불구가 된 시대상황’을 독일이 아닌 독일 밖에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또한 두 사람이 고향을 찾아 돌아가는 과정을 중대한 과업을 수행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쯤해서 그들을 실어 나르는 기차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흔히 역사나 시간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은유로서의 ‘기차’. 앞서의 보르헤르트의 인용 시에서도 설핏 언급된 기차와 기찻길. 벗어날 수 없는 궤도를 따라 가는 기차는 언제나 정해진 시각에 떠납니다. 아무쪼록 이 둘도 마지막으로 주어진 고향 행 열차를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썼고, 어떻게든 둘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기차가 도달한 목적지가 꿈에 그리던 고향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작가는 ‘실향’의 주제를 인간 고유의 ‘회귀본능’과 서로 낮은 것들끼리 끌어안으려는 ‘인류애’로 풀어냈습니다. 거창한 이데올로기로 구원할 수 없는 뭇 생명들 사이의 진한 사랑은 잔잔하지만 끊임없이 흐르는 물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말을 걸어옵니다. 어둠속에서 명멸하는 반딧불처럼 어느 누군가에게 내민 손은 나머지 길을 안내해줍니다. 어쩌면 반나치 행위로 혁명을 도모했던 에르하르트 빔보, 즉 크뤽케가 평범한 소년 토마스를 통해 깨달은 것은 ‘진정한 혁명이란 역사의 기관차를 세우는 것’이라는 발터 벤야민의 테제보다 한결 소박하고 구체적인 사랑이란 게 아닐까요? ‘밤과 빗속에서 빛의 탑이 되고 싶다’던 볼프강 보르헤르트가 전후세대 독일 문학을 연 작가라고 할 때, 페터 헤르틀링은 그 잔존하는 불빛을 기어이 따라간 후배 작가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역사는 앞에 있고
미래는 등 뒤에 있다
한반도 전쟁 종료와 더불어, UN과 북한 측이 맺은 휴정협정에 따라 남과 북이 바로 인접하지 못하고 자유로운 소통마저 불가능한 채로 반세기 이상을 지나온 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에 의해 동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은 1990년 10월, 분단체제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을 허물며 종전 반세기 만에 통일국가로 거듭났습니다. 통일 후 불거진 민족 단합의 과제와 터키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이주해온 이민자의 수용과 융합 문제는 인종청소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그들만의 업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앞서 겪기 시작한 이 이중 과제는 오랫동안 분단 대한민국이 미뤄왔던 숙제이자, 다인종 다문화사회로 변모해 하는 현재 시점에서 보다 절실히 느껴지는 바가 많습니다.
이번 호를 위해 제가 엄선된 작품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직접 체험한 독일 작가(엄밀히 말해 구드룬 파우제방은 체코 영토인 보헤미아 출생으로, 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서독으로 이주했다)들에 의해 독일어로 쓰인 어린이·청소년 문학작품들입니다. 이 책들에서 주목해 봐야할 바는 2차 세계대전 도발 책임국의 국민으로서, 글을 쓰는 지성인으로서 이 세 작가들은 한결같이 자신들 스스로가 혹은 선조가 저지른 만행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그 고통마저도 잠재적인 나의 것으로 전유해 버리는 반성의 힘.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그토록 요청하지만 아직까지도 (비)공식적으로 사과 받지 못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뻔뻔한 만행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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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들
논픽션
『그들의 무덤은 구름 속에』
아네트 비비오르카 지음|최용찬 옮김|난장이|2009
『히틀러의 아이들』
수전 캠벨 바톨레티 지음|손정숙 옮김
지식의풍경|2008
청소년소설
『지리산 소년병』
김하늘 지음|별숲|2012
판타지동화
『말하는 나무 의자와 두 사람의 이이다』
마쯔따니 미요꼬 지음|민영 옮김|창비|1996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올해로 정전 60년을 맞이했습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비무장지대에 상주하고 있는 중립국감시단의 일과를 조명해주는 프로그램을 보았지요.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그리고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의 일원으로서 제 자신이 전쟁을 안다고 할 수 있나,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절대로 조금도 안다고 할 수 없더군요. 전쟁은 책이나, 영화, 사진 등의 매체로 간접 경험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전쟁의 체험은 말로 적절히 표현되거나 문장으로 완벽히 옮겨놓을 수 없는, 공포의 한가운데에 무방비로 놓이는 악몽이니까요.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전쟁 몽마의 돌연한 출몰에 가위에 눌린 채로 잠에서조차 깨어나지 못하고 신음하는 전쟁세대들에게 그것은 어떻게든 떨쳐내고 싶은 유령인 것이죠.
유다의 자손들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지 불과 20년 만에 또 다른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독일은 전쟁배상금을 갚아 나가야 했고, 1930년대 대공황에 실업자로 전락한 많은 국민들은 민족주의를 외쳐대는 독일 파시즘의 슬로건에 열광했습니다. 그 시절 유럽 내 유대인들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와 능욕의 시간을 인내해야만 했지요. 사실을 말하자면, 오래전부터 떠돌이 신세였던 유대인들에 대한 미움은 나치나 독일 국민들에게 한정된 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라고 믿지 않았으며, 그저 수많은 사기꾼들과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바로 그러한 행위를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늘날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지.”(94~95쪽)의 인용구처럼,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유대인은 낯설고 불길한 존재였지요.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낙후된 경제 상황 속에서도 재건을 꿈꾸던 독일 국민들은 수차례의 화폐개혁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1인칭 주인공 ‘나(라인하르트)’의 아버지도 실업자인데 반해 위층의 동갑내기 프리드리히 아버지는 우체국 공무원으로 생활도 비교적 풍족한 유대인입니다.
책의 내용은 1925년에 일주일 간격으로 태어난 독일인 나와 유대인 프리드리히가 한 지붕 아래에서 너나없이 지내는 유치원 시절의 단란한 몇 장면을 보여주고, 곧바로 유대인–너와 독일인–나로 구별되고 분리되는 초등학교 이후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베를린의 서민 주택가를 배경으로 작가는 히틀러가 독일을 그의 손아귀에 넣으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낱낱이 보여 줍니다. 어떤 이는 나치에 동조하고, 어떤 이는 유약한 마음 때문에 따돌림을 받기 싫어서, 혹은 이득을 얻기 위해서 유대인을 몰아내지요. 이를테면 나와 프리드리히의 가족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주인 레싱 씨가 그 극단의 예입니다. 반면 나의 부모님은 나치의 맹목적인 반유대주의와 이들을 악랄하게 배척하는 것에 심리적으로 완전히 동조할 수 없지만,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치당에 가입을 하고 일자리를 얻어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건 아니지요. 곤경에 빠진 프리드리히의 아버지 슈나이더 씨를 옹호하고, 이들을 내쫓기 위해 레싱 씨가 극단의 처방을 내걸 때에도 맞서서 이들을 변호해주니까요. 심지어 위험을 무릅쓰고 슈나이더 씨네로 숨어들어온 랍비를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지만, 레싱 씨의 밀고로 한밤중에 쳐들어온 경찰에 의해 숨어 있던 프리드리히를 제외하고 랍비와 슈나이더 씨는 끌려가 되돌아오지 못하게 됩니다. 때는 전쟁 선언 후 베를린 시내 공습이 시작되기 직전입니다.
결말은 참혹합니다. 다들 지하 공습대피소로 숨어들었을 때, 유대인 체포를 피해 프리드리히는 거리를 떠돌다 포화 속에서 홀로 죽게 되거든요. 작가는 뒤늦게라도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신들의 만행과 독일인에 의해 발발한 세계대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들의 영혼에게나마 사죄를 전하는 의미에서 이 책을 집필했을 것입니다.
피아노와
꽃잎 한 장
전쟁 포로와의 금지된 사랑을 섬세하고 낭만적으로 그린 작품 『첫사랑』의 작가 구드룬 파우제방은 1928년생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군인으로 동원되어 전장에 나간 아버지를 둔 작가의 마을에는 전쟁 포로들이 하루 종일 농부들의 일을 돕고 저녁 땐 숙소인 낡은 건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파우제방은 2012년에 이 작품을 썼지요. 무려 여든다섯 살에 발표한 작품이자, 다분히 자기회고적인 이야기입니다. 비록 전쟁 중 그의 고향마을에 채석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 주인공 한니처럼 사춘기 소녀도 아니었지만 말이죠. 그러나 그는 자기 집에 온 포로 미셸에게서, 필리프가 그러했듯이, 풀피리 부는 법을 배웠고, 감시가 소홀한 때에는 한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철통같은 우편 보안을 뚫고, 한니의 엄마처럼 파리에 있는 미셸의 부모님에게 당신의 외아들이 자신의 집에 건강하게 머물고 있음을 알려주었대요. 이 작품을 감상할 때, 여러분은 한니를 작가의 분신으로, 필리프를 미셸의 분신으로 놓고 보세요. 전쟁으로 인한 금지된 사랑과 강제된 이별의 아픔이 절절하게 느껴질 수 있을 테니까요.
프랑스의 영화감독 르네 클레망이 1938년에 만든 <금지된 장난 Jeus Interdits>(1952)에서처럼 전쟁 중인데도 이상하리만큼 목가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첫사랑』은 참으로 아름다운 책입니다. 한니라는 열네 살 소녀의 이룰 수 없었던 첫사랑 이야기이면서, 전쟁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니는 전쟁에 오빠 위르겐과 남동생 알프레드를 빼앗깁니다. 첫사랑인 플리프와의 사랑도 허무하게 끝이 납니다.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독일 낭만주의 시인 휠더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 1770~1843)의 시 「고향(Heimat)」을 떠올리게 됩니다. 정조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은 돌아갈 것을 희망하는 전쟁터의 군인들, 적국의 땅에 버려진 전쟁포로들, 남편과 아들과 애인을 전장으로 보내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여인들, 금지된 사랑으로 헤어진 애인과의 재회를 기다리는 연인들이 영원한 안식처를 그리는 ‘향수(鄕愁)’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만일 이것이 한 편의 서정시라면 말이죠.
반딧불의 잔존
“너 자신은 철로의 레일이다. 녹슬고 얼룩이 진, 은빛으로 번뜩이는 아름답고 막연한 레일이다. 너는 정거장으로 나뉘고 역 사이에 묶여 있다.”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이별 없는 세대」의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그가 누굴까요? 감성 풍부한 시인이지만 히틀러에 비판적이었던 이유로 러시아 전선에 끌려가 몇 차례의 독방 신세와 사형 선고를 겪고, 26살에 요절한 독일 전후문학의 첫 자리에 놓이게 된 대문호입니다. 아니, 그는 문학을 통해 죽음의 문 앞에서 ‘빛의 문학’을 위해 고민했던 한 병사였습니다. 폭력 없는 세상을 위해서라면 처절하게 절망스러운 상황을 딛고서라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끝내 포기하려 하지 않으려 애썼던 휴머니스트였지요. 그런 그가 군복무 시절 수백만 명의 목숨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나치 정권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답니다. 물론 그 대가는 혹독했지요. 하지만 영하 40도로 떨어지는 냉골 독방에서도 그는 문학이 발하는 광채로 생명의 씨앗이 잔존하는 하찮은 온갖 것들을 끌어안았습니다. 페터 헤르틀링의 『크뤽케 Krűcke』(1986)의 에르하르트 빔보는 흡사 볼프강 보르헤르트 같습니다. 외다리 빔보는 군인이었으나, 나치 친위대에 저항했던, 심지어 1944년 8월에는 슈타우펜베르그에서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전장에서 다리 한 쪽을 잃은 불구의 반전용사이지요. 그는 한 소년,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를 여읜, 어머니마저 피란 중에 놓쳐 버리고, 빈에 있는 이모 집을 찾아 헤매는 토마스를 거둡니다.
이 이야기는 전쟁 중 독일 나치당이 점령했던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합니다. 이야기의 화자 토마스 슈람은 독일인으로, 13세 소년이자, 외톨이죠. 헬러 가 9번지에 사는 이모를 찾아 나선 토마스는 이모를 찾지 못하면, 길거리 비렁뱅이가 되거나 국제적십자가 주선하는 양육 가정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토마스와 외다리 사내의 만남은 빈 시내에서 이뤄집니다. 토마스는 귀찮아하는 에르하르트를 졸졸 따라다니고, 결국 외진 숲속 그의 움막에서 신세를 지게 되지요. 외다리는 자신을 ‘크뤽케’로 부르라고 합니다. 목말이란 뜻이지요.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토마스를 떨쳐 내야겠다는 본래의 의도와 달리, 엄마가 어딘가에는 반드시 살아 있을 거라는 믿음과 달리, 둘의 관계는 외톨이들이 그렇듯이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서른세 살의 크뤽케는 차츰 소년 토마스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되지요. 그런데 러시아에서 후퇴하던 중 잃어버린 그의 다리는 이따금 환상통증을 일으킵니다. 고향 브레슬라우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 그에게 잃어버린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많은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한마디로 그는 모든 것을 잃은 불구입니다. 남은 것이라곤 목말과 토마스이죠. 그런데 토마스가 그의 희망이 되어 줄 수 있을까요?
작가 페터 헤르틀링은 외다리의 전직 장교 출신 사내와 떠돌이 소년과의 우정을 통해 ‘불구가 된 시대상황’을 독일이 아닌 독일 밖에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또한 두 사람이 고향을 찾아 돌아가는 과정을 중대한 과업을 수행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쯤해서 그들을 실어 나르는 기차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흔히 역사나 시간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은유로서의 ‘기차’. 앞서의 보르헤르트의 인용 시에서도 설핏 언급된 기차와 기찻길. 벗어날 수 없는 궤도를 따라 가는 기차는 언제나 정해진 시각에 떠납니다. 아무쪼록 이 둘도 마지막으로 주어진 고향 행 열차를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썼고, 어떻게든 둘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기차가 도달한 목적지가 꿈에 그리던 고향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작가는 ‘실향’의 주제를 인간 고유의 ‘회귀본능’과 서로 낮은 것들끼리 끌어안으려는 ‘인류애’로 풀어냈습니다. 거창한 이데올로기로 구원할 수 없는 뭇 생명들 사이의 진한 사랑은 잔잔하지만 끊임없이 흐르는 물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말을 걸어옵니다. 어둠속에서 명멸하는 반딧불처럼 어느 누군가에게 내민 손은 나머지 길을 안내해줍니다. 어쩌면 반나치 행위로 혁명을 도모했던 에르하르트 빔보, 즉 크뤽케가 평범한 소년 토마스를 통해 깨달은 것은 ‘진정한 혁명이란 역사의 기관차를 세우는 것’이라는 발터 벤야민의 테제보다 한결 소박하고 구체적인 사랑이란 게 아닐까요? ‘밤과 빗속에서 빛의 탑이 되고 싶다’던 볼프강 보르헤르트가 전후세대 독일 문학을 연 작가라고 할 때, 페터 헤르틀링은 그 잔존하는 불빛을 기어이 따라간 후배 작가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역사는 앞에 있고
미래는 등 뒤에 있다
한반도 전쟁 종료와 더불어, UN과 북한 측이 맺은 휴정협정에 따라 남과 북이 바로 인접하지 못하고 자유로운 소통마저 불가능한 채로 반세기 이상을 지나온 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에 의해 동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은 1990년 10월, 분단체제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을 허물며 종전 반세기 만에 통일국가로 거듭났습니다. 통일 후 불거진 민족 단합의 과제와 터키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이주해온 이민자의 수용과 융합 문제는 인종청소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그들만의 업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앞서 겪기 시작한 이 이중 과제는 오랫동안 분단 대한민국이 미뤄왔던 숙제이자, 다인종 다문화사회로 변모해 하는 현재 시점에서 보다 절실히 느껴지는 바가 많습니다.
이번 호를 위해 제가 엄선된 작품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직접 체험한 독일 작가(엄밀히 말해 구드룬 파우제방은 체코 영토인 보헤미아 출생으로, 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서독으로 이주했다)들에 의해 독일어로 쓰인 어린이·청소년 문학작품들입니다. 이 책들에서 주목해 봐야할 바는 2차 세계대전 도발 책임국의 국민으로서, 글을 쓰는 지성인으로서 이 세 작가들은 한결같이 자신들 스스로가 혹은 선조가 저지른 만행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그 고통마저도 잠재적인 나의 것으로 전유해 버리는 반성의 힘.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그토록 요청하지만 아직까지도 (비)공식적으로 사과 받지 못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뻔뻔한 만행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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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그들의 무덤은 구름 속에』
아네트 비비오르카 지음|최용찬 옮김|난장이|2009
『히틀러의 아이들』
수전 캠벨 바톨레티 지음|손정숙 옮김
지식의풍경|2008
청소년소설
『지리산 소년병』
김하늘 지음|별숲|2012
판타지동화
『말하는 나무 의자와 두 사람의 이이다』
마쯔따니 미요꼬 지음|민영 옮김|창비|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