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만화 [읽어볼 만화면] 반복에 관한 만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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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6-21 15:17 조회 5,879회 댓글 0건본문
김낙호 만화연구가
살아가는 과정은, 약간의 새로운 것과 많은 익숙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것이 늘 새로운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적응하기에 바빠서 사람도 사회도 금방 에너지를 소진하게 되기에, 그런 파국을 막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것이 넘칠수록 그 반작용으로 다른 부분에서 더욱 익숙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사회가 급변하는 시기일수록 문화적 향수가 한쪽으로 각광 받는다든지, 정치‧사회적 개혁이 강조되는 정국에서 오히려 보수표가 결집된다든지 이런 저런 관찰들을 흔히 할 수 있다. 게다가 사람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회는, 그렇게 모든 것이 쉽게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공통된 맥락이 있다면 비슷한 관계에서 어느 정도 익숙함을 선호하며 비슷한 판단들을 내리고, 결국 조금씩 양상은 달라도 유사한 일들이 반복된다.
즉 세상사의 상당 부분은 반복이다. 반복되는 부분들을 얼마나 권태 없이 잘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다른 부분들을 찾아내며 개선해 나아가는지가 그런 세상을 잘 견디며 발전시키기 위한 관건일 따름이다. 늘 그렇듯, 작품 속 가상의 세계와 이야기를 통해서 좀 더 안전하게 그런 것을 돌아볼 수 있다.
크고 작은 반복
인간사에서 반복이라는 테마를 가장 거대하게 다루는 방식이라면 역사적 과오와 교훈이다. 칼 맑스의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희극으로 그 다음은 비극으로”든, 조지 산타야나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는 그것을 반복하게 된다”든 역사의 중요성에 관한 유명한 격언들이 거의 항상 전제하는 것이 바로 반복이다. 의식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이야기다.
특히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우매한 폭력인 전쟁이라는 소재로 역사를 되짚는 것에서 이런 의식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김태권, 비아북)는 중세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현대 사회에서 반복되는 소수 지배층의 정치적 목적과 다수 군중의 암묵적 동의 속에 이뤄지는 파국의 모습들을 그려낸다. 원래 처음 연재되었을 당시에는 심지어 9/11 테러 직후 국가적 비극을 지렛대 삼은 미국 보수 정권의 대대적 이라크 침공이 이뤄졌고 그에 대해 한국에서 ‘참여정부’가 파병으로 지원했던 시기였고, 더욱 현실 맥락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 가득했다. 대대적 전쟁으로 이어지는 각자의 여러 동기와 과정들이, 지금에 와서는 우매한 광기로 널리 평가받는 십자군 전쟁이나 당시의 이라크 침공이나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풍자였다. 이를 위해 제후들의 이해득실, 군중의 지지 동원 등의 모습들이 신랄하게 묘사된 바 있다. 반면 일정 부분은 반복이라는 테마를 위해 묘사가 과장되어 이후 출간에서 점차 더 역사적으로 정확한 쪽으로 수정되어 나아간 바도 있지만 말이다.
반면 가장 작은 차원의 반복은 일상 그 자체다. 호기심 많은 동네 꼬마가 일상 속에서 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그리는 『요츠바랑!』(아즈마 키요히코, 대원씨아이) 같은 작품도 있지만, 대체로 일상은 익숙한 것의 반복이고 그 안에서 그간 무심결에 지나쳤던 어떤 매력을 난데없이 찾아내고 즐거워하는 쪽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작품이 바로 『보노보노』(이가라시 미키오, 서울문화사)인데, 이상한 숲 속에 사는 아기 수달과 다람쥐, 너구리 등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흔한 동물 유머 만화처럼 손쉬운 개그 상황만 터트리는 식이 아니라, 느릿하고 성찰적인 느낌이 물씬 난다. 대단한 모험 상황을 만들거나 과장된 위기가 등장하기보다는 일상의 반복적 상황에서 천천히, 엉뚱하게 무언가 질문을 던지고, 해답 없이 생각하다가 각각의 에피소드가 지나가 버린다. 그리고 크게 다르지 않은 반복이 열 몇 권 이상 계속되는데도, 편안하게 계속 읽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세대의 숙명
좀 더 대중서사물의 재미를 본격적으로 살리면서 반복이라는 테마를 활용하는 것으로는 세대의 숙명을 그려내는 작품들이 있다. 흥미진진한 작품을 만들어내기에도 퍽 좋은 접근법인데, 지금 주인공들의 모습에 그들을 성장시키는 스승들 혹은 이전 세대 누군가의 모습을 같이 투영하고, 과연 그들과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며 긴장을 만드는 식이다.
『나루토』(키시모토 마사시, 대원씨아이) 같은 대형 히트 소년만화도 바로 그런 공식으로 가득하다. 주인공 나루토는 가상의 닌자 세계의 일원으로, 자신이 자라난 닌자 마을의 수장격인 ‘호카게’가 되기 위해 실력을 쌓고 여러 모험을 겪는다. 그 와중에서 친구와의 애증, 세계를 바꾸겠다며 나서는 여러 세력들의 대립 등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함께 노력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해당 작품이 연재되는 잡지에서 표어로 꼽는 미덕인 ‘우정, 노력, 성공’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른다). 그런데 나루토와 친구들이 맺는 관계와 싸움의 모습들은, 이전에 누군가가 겪은 일들 투성이다. 나루토와 3인조 팀을 이뤘던 이들의 관계는 그들의 스승격인 선대의 ‘나뭇잎마을 전설의 3닌자’와 똑같은데, 그들은 당시 파국을 맞이하여 흩어졌던 바 있다. 아픈 실제 세계보다 모두가 편안할 수 있는 최면술 속 가짜 세계에 세상을 가둬버린다는 욕망은 하도 작품 속 세계관에서 여러 세대의 이야기에 걸쳐 모티브가 반복되어서 거의 지겨울 정도다. 다만 그 많은 반복 속에서도, 지금의 주인공인 나루토만은 현실에 좌절하기보다 끝까지 동료를 믿고 노력하는 캐릭터로 설정되어 이전 다른 모든 이들의 경우와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전달한다. 이런 작품을 대결 액션의 오락성으로만, 또는 캐릭터 간 가상의 커플링을 상상하며 즐기는 것도 좋지만, 이런 반복되는 구도의 변주 등도 꽤 흥미롭다.
스승의 영향을 받고 비슷한 길을 걷되 다른 재능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그 스승이 과연 자신의 사례로부터 뭔가를 배워서 그 다음 세대에게 교훈을 넘길 수 있는가라는 사안이기도 하다. 『피아노의 숲』(이시키 마코토, 삼양출판사)은 가정환경이 불운하지만 사실은 피아노에 천부적 재능을 지닌 소년 카이가 은퇴한 명피아니스트 아지노를 스승으로 만나 점차 실력을 꽃피우는 과정을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아마미야와 경쟁하는데, 아지노와 아마미야의 아버지 역시 당대의 내로라하는 피아니스트 라이벌이었다. 둘의 스타일 역시 한쪽은 천재적 분방함, 다른 쪽은 가장 교과서적인 정확한 연주로 같은 모습을 보였다. 각각의 길로 걸어가다가 한쪽은 염좌로 은퇴하고 다른 쪽은 명사가 되었으나 늘 마음 한 편의 열등감을 지울 수 없었던 그들이었다. 같은 구도가 반복되어 나타날 때, 이번의 당사자들이 다른 선택을 내리는 것은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카이와 아마미야는 각자의 장단점을 흡수하며 동반자로서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 이런 류의 작품을 끌어나가는 원동력은 결국 반복에서 성장을 이루어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과거의 패턴을 그대로 반복하는 비극으로 끝날까 사이의 긴장감이다. 그리고 아마도 결국 우리가 실제 삶에서 겪는 것 역시 비슷한 방식일 것이다. 이전과 다시 비슷한 일이 반복될 것을 예측하고, 대비를 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마치 한 해 농사를 망친 농부가, 다시 돌아올 봄에는 땅을 좀 다른 방식으로 갈고 씨앗을 달리 심어 넣어 더 나은 방식의 반복을 준비하듯 말이다. 아주 작은 일상사의 반복부터 역사적 과오의 반복까지, 반복의 의미를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성장의 조건이다.
살아가는 과정은, 약간의 새로운 것과 많은 익숙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것이 늘 새로운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적응하기에 바빠서 사람도 사회도 금방 에너지를 소진하게 되기에, 그런 파국을 막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것이 넘칠수록 그 반작용으로 다른 부분에서 더욱 익숙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사회가 급변하는 시기일수록 문화적 향수가 한쪽으로 각광 받는다든지, 정치‧사회적 개혁이 강조되는 정국에서 오히려 보수표가 결집된다든지 이런 저런 관찰들을 흔히 할 수 있다. 게다가 사람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회는, 그렇게 모든 것이 쉽게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공통된 맥락이 있다면 비슷한 관계에서 어느 정도 익숙함을 선호하며 비슷한 판단들을 내리고, 결국 조금씩 양상은 달라도 유사한 일들이 반복된다.
즉 세상사의 상당 부분은 반복이다. 반복되는 부분들을 얼마나 권태 없이 잘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다른 부분들을 찾아내며 개선해 나아가는지가 그런 세상을 잘 견디며 발전시키기 위한 관건일 따름이다. 늘 그렇듯, 작품 속 가상의 세계와 이야기를 통해서 좀 더 안전하게 그런 것을 돌아볼 수 있다.
크고 작은 반복
인간사에서 반복이라는 테마를 가장 거대하게 다루는 방식이라면 역사적 과오와 교훈이다. 칼 맑스의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희극으로 그 다음은 비극으로”든, 조지 산타야나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는 그것을 반복하게 된다”든 역사의 중요성에 관한 유명한 격언들이 거의 항상 전제하는 것이 바로 반복이다. 의식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이야기다.
특히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우매한 폭력인 전쟁이라는 소재로 역사를 되짚는 것에서 이런 의식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김태권, 비아북)는 중세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현대 사회에서 반복되는 소수 지배층의 정치적 목적과 다수 군중의 암묵적 동의 속에 이뤄지는 파국의 모습들을 그려낸다. 원래 처음 연재되었을 당시에는 심지어 9/11 테러 직후 국가적 비극을 지렛대 삼은 미국 보수 정권의 대대적 이라크 침공이 이뤄졌고 그에 대해 한국에서 ‘참여정부’가 파병으로 지원했던 시기였고, 더욱 현실 맥락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 가득했다. 대대적 전쟁으로 이어지는 각자의 여러 동기와 과정들이, 지금에 와서는 우매한 광기로 널리 평가받는 십자군 전쟁이나 당시의 이라크 침공이나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풍자였다. 이를 위해 제후들의 이해득실, 군중의 지지 동원 등의 모습들이 신랄하게 묘사된 바 있다. 반면 일정 부분은 반복이라는 테마를 위해 묘사가 과장되어 이후 출간에서 점차 더 역사적으로 정확한 쪽으로 수정되어 나아간 바도 있지만 말이다.
반면 가장 작은 차원의 반복은 일상 그 자체다. 호기심 많은 동네 꼬마가 일상 속에서 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그리는 『요츠바랑!』(아즈마 키요히코, 대원씨아이) 같은 작품도 있지만, 대체로 일상은 익숙한 것의 반복이고 그 안에서 그간 무심결에 지나쳤던 어떤 매력을 난데없이 찾아내고 즐거워하는 쪽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작품이 바로 『보노보노』(이가라시 미키오, 서울문화사)인데, 이상한 숲 속에 사는 아기 수달과 다람쥐, 너구리 등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흔한 동물 유머 만화처럼 손쉬운 개그 상황만 터트리는 식이 아니라, 느릿하고 성찰적인 느낌이 물씬 난다. 대단한 모험 상황을 만들거나 과장된 위기가 등장하기보다는 일상의 반복적 상황에서 천천히, 엉뚱하게 무언가 질문을 던지고, 해답 없이 생각하다가 각각의 에피소드가 지나가 버린다. 그리고 크게 다르지 않은 반복이 열 몇 권 이상 계속되는데도, 편안하게 계속 읽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세대의 숙명
좀 더 대중서사물의 재미를 본격적으로 살리면서 반복이라는 테마를 활용하는 것으로는 세대의 숙명을 그려내는 작품들이 있다. 흥미진진한 작품을 만들어내기에도 퍽 좋은 접근법인데, 지금 주인공들의 모습에 그들을 성장시키는 스승들 혹은 이전 세대 누군가의 모습을 같이 투영하고, 과연 그들과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며 긴장을 만드는 식이다.
『나루토』(키시모토 마사시, 대원씨아이) 같은 대형 히트 소년만화도 바로 그런 공식으로 가득하다. 주인공 나루토는 가상의 닌자 세계의 일원으로, 자신이 자라난 닌자 마을의 수장격인 ‘호카게’가 되기 위해 실력을 쌓고 여러 모험을 겪는다. 그 와중에서 친구와의 애증, 세계를 바꾸겠다며 나서는 여러 세력들의 대립 등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함께 노력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해당 작품이 연재되는 잡지에서 표어로 꼽는 미덕인 ‘우정, 노력, 성공’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른다). 그런데 나루토와 친구들이 맺는 관계와 싸움의 모습들은, 이전에 누군가가 겪은 일들 투성이다. 나루토와 3인조 팀을 이뤘던 이들의 관계는 그들의 스승격인 선대의 ‘나뭇잎마을 전설의 3닌자’와 똑같은데, 그들은 당시 파국을 맞이하여 흩어졌던 바 있다. 아픈 실제 세계보다 모두가 편안할 수 있는 최면술 속 가짜 세계에 세상을 가둬버린다는 욕망은 하도 작품 속 세계관에서 여러 세대의 이야기에 걸쳐 모티브가 반복되어서 거의 지겨울 정도다. 다만 그 많은 반복 속에서도, 지금의 주인공인 나루토만은 현실에 좌절하기보다 끝까지 동료를 믿고 노력하는 캐릭터로 설정되어 이전 다른 모든 이들의 경우와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전달한다. 이런 작품을 대결 액션의 오락성으로만, 또는 캐릭터 간 가상의 커플링을 상상하며 즐기는 것도 좋지만, 이런 반복되는 구도의 변주 등도 꽤 흥미롭다.
스승의 영향을 받고 비슷한 길을 걷되 다른 재능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그 스승이 과연 자신의 사례로부터 뭔가를 배워서 그 다음 세대에게 교훈을 넘길 수 있는가라는 사안이기도 하다. 『피아노의 숲』(이시키 마코토, 삼양출판사)은 가정환경이 불운하지만 사실은 피아노에 천부적 재능을 지닌 소년 카이가 은퇴한 명피아니스트 아지노를 스승으로 만나 점차 실력을 꽃피우는 과정을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아마미야와 경쟁하는데, 아지노와 아마미야의 아버지 역시 당대의 내로라하는 피아니스트 라이벌이었다. 둘의 스타일 역시 한쪽은 천재적 분방함, 다른 쪽은 가장 교과서적인 정확한 연주로 같은 모습을 보였다. 각각의 길로 걸어가다가 한쪽은 염좌로 은퇴하고 다른 쪽은 명사가 되었으나 늘 마음 한 편의 열등감을 지울 수 없었던 그들이었다. 같은 구도가 반복되어 나타날 때, 이번의 당사자들이 다른 선택을 내리는 것은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카이와 아마미야는 각자의 장단점을 흡수하며 동반자로서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 이런 류의 작품을 끌어나가는 원동력은 결국 반복에서 성장을 이루어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과거의 패턴을 그대로 반복하는 비극으로 끝날까 사이의 긴장감이다. 그리고 아마도 결국 우리가 실제 삶에서 겪는 것 역시 비슷한 방식일 것이다. 이전과 다시 비슷한 일이 반복될 것을 예측하고, 대비를 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마치 한 해 농사를 망친 농부가, 다시 돌아올 봄에는 땅을 좀 다른 방식으로 갈고 씨앗을 달리 심어 넣어 더 나은 방식의 반복을 준비하듯 말이다. 아주 작은 일상사의 반복부터 역사적 과오의 반복까지, 반복의 의미를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성장의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