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잡이 길잡이 [교사의 책] 우물 안 개구리, 외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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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1-31 05:44 조회 6,614회 댓글 0건본문
정재연 서울효제초 사서교사
“정말 이민 가야 하는 걸까?” 아름답다는 말이 가벼우리만큼 가을 하늘은 파랗고 높은데, 엉뚱스럽게 고민이 시작이다. 사실, 처음은 아니다. 4대강도, 원전도, 대선 때도 그랬다. 반작용인 양 이민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나에게 주어진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을 회피하고 싶었다. 아마도 이 고민은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커 가겠지. 자녀를 한국 공교육에 맡겨야 하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이들에게 교육 선진국으로의 이민은 꽤 매력적인 선택이니 말이다. 하지만 고향을 떠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더욱이 난 언어도 안 되고 낯선 환경에 적응도 느리다. 게다가 남편은 매일 자본 축적에 대한 반대 투쟁(?)을 실천하기에 우리 집 경제상황은 썩 좋지 않다. 종합해 보면 갈 수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도피의 느낌이 마음에 걸린다.
주어진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길을 찾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그러려면 먼저 발 딛고 서 있는 여기부터 찬찬히 둘러보아야겠지 싶다. 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라고, 이곳의 관점과 시선에만 익숙해진 탓에 잘 보이지 않는다. 불평은 쉽지만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나아갈 방향을 찾기가 꽤 막막하다. 이럴 땐 가끔 우물 밖으로 나가보는 게 기분 전환도 될 겸 눈도 떠질 겸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그래, 이번에는 외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자.
발육이 교육이념인 나라, 캐나다
일단 한 번 가보면 눌러 살고 싶다는 나라, 캐나다. 면적부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고, 신이 주신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무료 의료시스템에 빵빵한 연금제도 등 복지국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게다가 진짜 무상교육을 실시하니 저자 박진동, 김수정 부부가 “자랑이나 염장 지르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라고 책을 시작한 게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그들의 자랑 아닌 자랑은, 잠깐 외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풀어놓는 흔한 이야기와는 좀 다르다. 캐나다에 정착한 15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다고 말하기 어렵고, 그렇기에 책 구석구석 상당히 구체적이고 생생한 정보가 눈에 띈다. 자세한 대학 입학 과정과 학교 소개, 대입 특별 고교 프로그램인 AP 교과과정, 정부 지원 자녀 양육비 혜택 정도, 학과별 실제 등록금 등 그곳에서 자녀를 키워본 이들만이 알 수 있는 정보가 많아 유학과 이민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진짜 장점은 저자가 캐나다 교육 시스템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데 있다. 바로 ‘평가’의 문제를 꼬집어 말하는 것이다. 캐나다에 과열된 입시 경쟁이 없는 이유는 표준화된 입학 평가시험이 없기 때문이고, 학생의 개인 순위가 없으니 대학에도 서열이 없다는 지적은 정확하다. 또한 “한국에서 교권 하락이 문제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교사에게 평가를 온전히 맡기지 않기 때문”이란 말과 아래의 경쟁에 대한 생각은 명색이 교사라는 우리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든다.
“경쟁 교육은 아이들만 빼고 그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편리한 제도다. 학부모도 선생님도 아이의 등수만 보고 ‘더 올려라!’ 말하기 쉽다. 그 말을 안 들을 수 있는 아이는 전국에서 단 한 명뿐이다. 상위 교육 기관에서 우수 학생 뽑기도 쉽다. 지원자 중에서 점수가 좋은 학생을 고르면 된다. …… 효율성으로는 최고로 좋은 이 시스템의 문제는 교육의 주인공인 아이들이 불행하다는 것이다.”(309쪽)
이 정도의 안목을 가졌으니 저자가 특별한 학부모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한국의 교육 스트레스를 피해 온 도피 이민”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대단히 높은 교육열을 “표현할 방법이 없고”, “아이를 쥐 잡듯 잡으려 해도 제시할 목표가 마땅치 않다”고 고백한다. 무릎을 치게 되는 순간이다. 남들 다 하는 공부를 우리 아이라고 안 시킬 자신도 없는 팔랑귀를 가졌지만, 단지 피 튀기듯 치열한 한국의 입시 경쟁에서 부모와 아이 둘 다 지쳐가는 게 싫었을 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엄마, 아빠였다.
우리도 안다.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날씨이니 지금부터는 숙제를 내주지 않겠다는 교장의 편지가, 훈련으로 꾸며지지 않은 학예회의 허접함이, 입학보다 졸업이 몇 배 어려운 대학 공부가 맞다는 것을 안다. 한국이라는 우물 안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도 알고 있다. 양심과 실천의 문제인 것이다.
교사 개인의 자질을 뛰어넘는 교육시스템, 핀란드
훌륭한 교육의 조건은 무엇일까. ‘훌륭한’의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개인별 해석이 달라지겠지만 무난하게 교과서적인 대답을 하자면, 뛰어난 교사, 안정된 교육 환경, 교육공동체의 소통 등이 있을 듯싶다. 그중에서 딱 한 가지만을 꼽으라면 무엇을 골라야 할까. 고백컨대 예전에 나는 언제나 ‘교사’의 전문성에 무게중심을 두고, 교육은 교사의 질을 결코 넘지 못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훌륭한 교육의 성패는 ‘시스템’에 달려있다고.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는 핀란드 교육현장에서 십여 년 간 몸담은 교사가 직접 글을 썼다. 서양에 대한 사대주의일까. 좀 우습게도 책을 읽기 전 저자가 이반 일리치나 프레이리에 버금가는 명확한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고, 사람과 인생에 대해 깊은 통찰력 및 자기 성찰적 태도를 지녔을 것이라 부푼 꿈을 꾸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니었다. 그녀도 그냥 평범한 교사일 뿐,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애쓰고, 말 안 듣는 아이들로 골머리 앓으며, 풍족지 못한 예산에 허덕이지만 별 불만 없이 그 안에서 지지고 볶으며 어떻게든 해내는, 그냥 평범한 옆 반 선생님 말이다. 더욱이 저자가 소개하는 과목별 교수방법과 바람직한 교사상 역시 우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모두가 알다시피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색은 매우 다르다. 학교와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은 물론, 공부에 대한 흥미도 역시 두 나라가 정반대이다. 의아한 것들은 더 많다. PISA 결과에 열광하는 우리와는 달리, 이에 대한 핀란드 사람들의 반응은 “정말 잘했네.” 딱 여기까지만이고, 정작 현장 교사들도 별 관심이 없다고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우리 문화와 달리, 결과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그네들의 모습은 특별하다 못해 특이해 보이기까지 한다.
가장 이상한(?) 것은 핀란드 교육 개혁에 대한 부분이다. “지금 같은 경제 불황에서 제한된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면, 어린이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라는 헤이노넨 교육부 장관의 주장에 국회의원들이 전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다. 1994년 그 당시 핀란드는 실업자가 20%를 넘는 경기 침체기 아니었던가.
결국 교육 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며, 교사 자격이 석사학위 취득자로 높아졌고, 교사의 재량권이 대폭 늘어났다. 정부가 정한 교육 가이드라인이 있지만 이는 대강의 방향과 기준을 알려주는 데 그치고, 실질적인 교육과정 편성과 평가의 권한을 교사 개인에게 넘긴 것이다. 수업 시간을 얼마로 할지, 무얼 가르칠지, 어떤 교재로 어떻게 가르칠지, 평가는 언제 어떻게 할지 모든 결정권을 평교사에게 넘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은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를 얻고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아, 핀란드라는 작은 나라는 어찌 그리 ‘교육 시스템’이 튼튼한지! 한국과 핀란드 교육이 다른 근본 원인은 교사의 전문성과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한다. 확고한 교육철학이 없어도, 심지어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마음이 다소 부족해도, 시스템이 철학을 바탕으로 탄탄히 세워졌다면 그 교실은 훌륭히 굴러갈 수 있다는 사실에 작은 한숨이 다 나온다.
우리의 자화상, 불편한 진실 들여다보기, 일본 이야기
두 나라의 교육 이야기를 통해, 추구해야 할 교육에 대한 대강의 방향성은 어느 정도 감이 오는 듯싶다. 적어도 교육에 경쟁은 아니라는 재확인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를 위해 슬픈 역사 탓에 한국과 참 닮은 나라, 일본을 찾아가 보려 한다. 사실 현재 일본 교육 상황은 우리에게 그리 끌리는 소재가 아니다. 한국인이 열광하는 PIAS 성적이 최상위권도 아니고, 자살률 또한 높다. 더욱이 우리와 비슷한 입시 경쟁교육이 일제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상식. 드라마만 해도 재벌집 아들과 어여쁘고 성격 좋은 처자가 나와야 시간 지켜가며 본방을 사수하고 싶지, 무릎 나온 추리닝 입고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동여맨 내 모습을 담은 캐릭터는 시청률을 떨어뜨리기 충분하다. 하지만 불편함을 안고 더 똑바로 냉정히 바라보자. 일본은 한국의 자화상 아닌가.
참고하려는 책의 원본은 『일본의 교육격차(岩波書店, 2010)』로 한국어로는 올해 번역되었다. 저자 다치바나키 토시아키는 일본인 경제학자로, 일본이 겪고 있는 “입시위주의 교육, 서열화된 대학, 대중화된 대학교육, 학력과 임금격차, 대학 등록금 문제, 가정환경이 학업성적에 주는 영향력” 등의 교육문제를 경제학자답게 구체적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찬찬히 확인해 나간다. 교육은 이래야 한다는 섣부른 제안을 하기보다, 정확하고 다양한 자료를 보여주며 일관되게 일본 교육의 현실을 알리는 데 애쓰는데, 그 과정이 너무도 성실하다 보니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교육현황을 하나씩 하나씩 차근히 짚어나가며 저자가 도달한 결론은 현재 일본은 교육 양극화가 아니라 “3극화” 되고 있다는 것. 명문대를 졸업한 이들과 그러지 못한 이들의 소득 차이보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이들이 심각한 저소득층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라는 말이다. 인정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이다. 그뿐인가. 일본의 현실은 어쩜 그리 우리와 닮았는지 참 싫다. 일본의 “지정학교제도”에서는 한국의 특목고와 자율형사립고 문제가 읽히고, 도쿄와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에 빈곤 가정이 절대적으로 많음을 알려주는 지역 간 성적차 통계자료에서는 내가 근무하는 학교 아이들 얼굴이 떠오른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물 안은 많이 슬프다. 나는 대학도 나왔고 비정규직이 아니고 집도 단란한 가정도 있기에, 어떤 아이들에게는 가진 자의 모습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을 거란 사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이 짐은 돈 몇 푼 입금하는 기부나 후원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면서, 삶으로 살아내야 함을 알면서, 내 맘 하나 편하고자 우물 속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기 바쁘다. 이러다간 아이에게 부끄러운 엄마로 남을까 두렵다. 용기 내어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문을 읽어본다. “주여,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와,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과, 그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정말 이민 가야 하는 걸까?” 아름답다는 말이 가벼우리만큼 가을 하늘은 파랗고 높은데, 엉뚱스럽게 고민이 시작이다. 사실, 처음은 아니다. 4대강도, 원전도, 대선 때도 그랬다. 반작용인 양 이민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나에게 주어진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을 회피하고 싶었다. 아마도 이 고민은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커 가겠지. 자녀를 한국 공교육에 맡겨야 하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이들에게 교육 선진국으로의 이민은 꽤 매력적인 선택이니 말이다. 하지만 고향을 떠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더욱이 난 언어도 안 되고 낯선 환경에 적응도 느리다. 게다가 남편은 매일 자본 축적에 대한 반대 투쟁(?)을 실천하기에 우리 집 경제상황은 썩 좋지 않다. 종합해 보면 갈 수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도피의 느낌이 마음에 걸린다.
주어진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길을 찾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그러려면 먼저 발 딛고 서 있는 여기부터 찬찬히 둘러보아야겠지 싶다. 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라고, 이곳의 관점과 시선에만 익숙해진 탓에 잘 보이지 않는다. 불평은 쉽지만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나아갈 방향을 찾기가 꽤 막막하다. 이럴 땐 가끔 우물 밖으로 나가보는 게 기분 전환도 될 겸 눈도 떠질 겸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그래, 이번에는 외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자.
발육이 교육이념인 나라, 캐나다
일단 한 번 가보면 눌러 살고 싶다는 나라, 캐나다. 면적부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고, 신이 주신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무료 의료시스템에 빵빵한 연금제도 등 복지국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게다가 진짜 무상교육을 실시하니 저자 박진동, 김수정 부부가 “자랑이나 염장 지르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라고 책을 시작한 게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그들의 자랑 아닌 자랑은, 잠깐 외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풀어놓는 흔한 이야기와는 좀 다르다. 캐나다에 정착한 15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다고 말하기 어렵고, 그렇기에 책 구석구석 상당히 구체적이고 생생한 정보가 눈에 띈다. 자세한 대학 입학 과정과 학교 소개, 대입 특별 고교 프로그램인 AP 교과과정, 정부 지원 자녀 양육비 혜택 정도, 학과별 실제 등록금 등 그곳에서 자녀를 키워본 이들만이 알 수 있는 정보가 많아 유학과 이민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진짜 장점은 저자가 캐나다 교육 시스템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데 있다. 바로 ‘평가’의 문제를 꼬집어 말하는 것이다. 캐나다에 과열된 입시 경쟁이 없는 이유는 표준화된 입학 평가시험이 없기 때문이고, 학생의 개인 순위가 없으니 대학에도 서열이 없다는 지적은 정확하다. 또한 “한국에서 교권 하락이 문제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교사에게 평가를 온전히 맡기지 않기 때문”이란 말과 아래의 경쟁에 대한 생각은 명색이 교사라는 우리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든다.
“경쟁 교육은 아이들만 빼고 그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편리한 제도다. 학부모도 선생님도 아이의 등수만 보고 ‘더 올려라!’ 말하기 쉽다. 그 말을 안 들을 수 있는 아이는 전국에서 단 한 명뿐이다. 상위 교육 기관에서 우수 학생 뽑기도 쉽다. 지원자 중에서 점수가 좋은 학생을 고르면 된다. …… 효율성으로는 최고로 좋은 이 시스템의 문제는 교육의 주인공인 아이들이 불행하다는 것이다.”(309쪽)
이 정도의 안목을 가졌으니 저자가 특별한 학부모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한국의 교육 스트레스를 피해 온 도피 이민”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대단히 높은 교육열을 “표현할 방법이 없고”, “아이를 쥐 잡듯 잡으려 해도 제시할 목표가 마땅치 않다”고 고백한다. 무릎을 치게 되는 순간이다. 남들 다 하는 공부를 우리 아이라고 안 시킬 자신도 없는 팔랑귀를 가졌지만, 단지 피 튀기듯 치열한 한국의 입시 경쟁에서 부모와 아이 둘 다 지쳐가는 게 싫었을 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엄마, 아빠였다.
우리도 안다.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날씨이니 지금부터는 숙제를 내주지 않겠다는 교장의 편지가, 훈련으로 꾸며지지 않은 학예회의 허접함이, 입학보다 졸업이 몇 배 어려운 대학 공부가 맞다는 것을 안다. 한국이라는 우물 안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도 알고 있다. 양심과 실천의 문제인 것이다.
교사 개인의 자질을 뛰어넘는 교육시스템, 핀란드
훌륭한 교육의 조건은 무엇일까. ‘훌륭한’의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개인별 해석이 달라지겠지만 무난하게 교과서적인 대답을 하자면, 뛰어난 교사, 안정된 교육 환경, 교육공동체의 소통 등이 있을 듯싶다. 그중에서 딱 한 가지만을 꼽으라면 무엇을 골라야 할까. 고백컨대 예전에 나는 언제나 ‘교사’의 전문성에 무게중심을 두고, 교육은 교사의 질을 결코 넘지 못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훌륭한 교육의 성패는 ‘시스템’에 달려있다고.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는 핀란드 교육현장에서 십여 년 간 몸담은 교사가 직접 글을 썼다. 서양에 대한 사대주의일까. 좀 우습게도 책을 읽기 전 저자가 이반 일리치나 프레이리에 버금가는 명확한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고, 사람과 인생에 대해 깊은 통찰력 및 자기 성찰적 태도를 지녔을 것이라 부푼 꿈을 꾸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니었다. 그녀도 그냥 평범한 교사일 뿐,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애쓰고, 말 안 듣는 아이들로 골머리 앓으며, 풍족지 못한 예산에 허덕이지만 별 불만 없이 그 안에서 지지고 볶으며 어떻게든 해내는, 그냥 평범한 옆 반 선생님 말이다. 더욱이 저자가 소개하는 과목별 교수방법과 바람직한 교사상 역시 우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모두가 알다시피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색은 매우 다르다. 학교와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은 물론, 공부에 대한 흥미도 역시 두 나라가 정반대이다. 의아한 것들은 더 많다. PISA 결과에 열광하는 우리와는 달리, 이에 대한 핀란드 사람들의 반응은 “정말 잘했네.” 딱 여기까지만이고, 정작 현장 교사들도 별 관심이 없다고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우리 문화와 달리, 결과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그네들의 모습은 특별하다 못해 특이해 보이기까지 한다.
가장 이상한(?) 것은 핀란드 교육 개혁에 대한 부분이다. “지금 같은 경제 불황에서 제한된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면, 어린이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라는 헤이노넨 교육부 장관의 주장에 국회의원들이 전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다. 1994년 그 당시 핀란드는 실업자가 20%를 넘는 경기 침체기 아니었던가.
결국 교육 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며, 교사 자격이 석사학위 취득자로 높아졌고, 교사의 재량권이 대폭 늘어났다. 정부가 정한 교육 가이드라인이 있지만 이는 대강의 방향과 기준을 알려주는 데 그치고, 실질적인 교육과정 편성과 평가의 권한을 교사 개인에게 넘긴 것이다. 수업 시간을 얼마로 할지, 무얼 가르칠지, 어떤 교재로 어떻게 가르칠지, 평가는 언제 어떻게 할지 모든 결정권을 평교사에게 넘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은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를 얻고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아, 핀란드라는 작은 나라는 어찌 그리 ‘교육 시스템’이 튼튼한지! 한국과 핀란드 교육이 다른 근본 원인은 교사의 전문성과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한다. 확고한 교육철학이 없어도, 심지어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마음이 다소 부족해도, 시스템이 철학을 바탕으로 탄탄히 세워졌다면 그 교실은 훌륭히 굴러갈 수 있다는 사실에 작은 한숨이 다 나온다.
우리의 자화상, 불편한 진실 들여다보기, 일본 이야기
두 나라의 교육 이야기를 통해, 추구해야 할 교육에 대한 대강의 방향성은 어느 정도 감이 오는 듯싶다. 적어도 교육에 경쟁은 아니라는 재확인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를 위해 슬픈 역사 탓에 한국과 참 닮은 나라, 일본을 찾아가 보려 한다. 사실 현재 일본 교육 상황은 우리에게 그리 끌리는 소재가 아니다. 한국인이 열광하는 PIAS 성적이 최상위권도 아니고, 자살률 또한 높다. 더욱이 우리와 비슷한 입시 경쟁교육이 일제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상식. 드라마만 해도 재벌집 아들과 어여쁘고 성격 좋은 처자가 나와야 시간 지켜가며 본방을 사수하고 싶지, 무릎 나온 추리닝 입고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동여맨 내 모습을 담은 캐릭터는 시청률을 떨어뜨리기 충분하다. 하지만 불편함을 안고 더 똑바로 냉정히 바라보자. 일본은 한국의 자화상 아닌가.
참고하려는 책의 원본은 『일본의 교육격차(岩波書店, 2010)』로 한국어로는 올해 번역되었다. 저자 다치바나키 토시아키는 일본인 경제학자로, 일본이 겪고 있는 “입시위주의 교육, 서열화된 대학, 대중화된 대학교육, 학력과 임금격차, 대학 등록금 문제, 가정환경이 학업성적에 주는 영향력” 등의 교육문제를 경제학자답게 구체적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찬찬히 확인해 나간다. 교육은 이래야 한다는 섣부른 제안을 하기보다, 정확하고 다양한 자료를 보여주며 일관되게 일본 교육의 현실을 알리는 데 애쓰는데, 그 과정이 너무도 성실하다 보니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교육현황을 하나씩 하나씩 차근히 짚어나가며 저자가 도달한 결론은 현재 일본은 교육 양극화가 아니라 “3극화” 되고 있다는 것. 명문대를 졸업한 이들과 그러지 못한 이들의 소득 차이보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이들이 심각한 저소득층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라는 말이다. 인정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이다. 그뿐인가. 일본의 현실은 어쩜 그리 우리와 닮았는지 참 싫다. 일본의 “지정학교제도”에서는 한국의 특목고와 자율형사립고 문제가 읽히고, 도쿄와 오사카와 같은 대도시에 빈곤 가정이 절대적으로 많음을 알려주는 지역 간 성적차 통계자료에서는 내가 근무하는 학교 아이들 얼굴이 떠오른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물 안은 많이 슬프다. 나는 대학도 나왔고 비정규직이 아니고 집도 단란한 가정도 있기에, 어떤 아이들에게는 가진 자의 모습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을 거란 사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이 짐은 돈 몇 푼 입금하는 기부나 후원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면서, 삶으로 살아내야 함을 알면서, 내 맘 하나 편하고자 우물 속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기 바쁘다. 이러다간 아이에게 부끄러운 엄마로 남을까 두렵다. 용기 내어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문을 읽어본다. “주여,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와,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과, 그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