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샘의 교단독서일기] 사랑의 이름표, 그리고 푸른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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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6-29 18:55 조회 5,495회 댓글 0건본문
1.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
나는 세 가지 문장을 칠판에 적으며 아이들에 게 마음속에 어떤 동요가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첫 문장은 “남자가 여자를 사랑 한다.”였다. 아이들은 가볍게 긴장이 풀린 눈빛 을 만들어냈다. 말없이 칠판을 응시하거나 최근 에 만난 남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흘렸다. 두 번 째 문장은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였다. 짓궂 은 농담을 들었다는 듯 피식 웃는 아이도 있었 고, 창피한 대답을 강요받은 듯 찡그리는 아이, 심지어 우울한 표정을 짓는 아이도 있었다. 세 번째 문장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한다”였 고, 몇몇 아이들은 징그러운 벌레를 발견했 을 때처럼 난처해 보였다.
“오늘 선생님이 소개할 책은 두 번째 문장 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 최근 수업 도 입부에 아이들에게 책을 소개해 주고 있다. 한동안 짧은 그림책을 들고 가서 책장을 넘 겨 가며 함께 읽었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만 화책을 챙겨갔다. 『파란색은 따뜻하다』의 제목엔 관심을 보이지 않더니, 상의를 탈의 한 채 가볍게 등 너머로 시선을 던지는 책표 지의 인물에게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리스 의 미소년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 엠마라 는 이름의 여성이라는 사실과 색연필과 수 채화 톤이 느껴지는 청록색의 머릿결이 묘 한 호기심을 끌어낸 모양이다.
교육적 목적이라 해도 동성애를 다룬 작 품을 소개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면이 많다. 자칫 감상적이거나 도덕적인 질문으로 인식 되면 아이들은 정해진 뻔한 답을 내놓기 일 쑤다. 화장실에 갈 때도 꼭 친구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 여학생들 특유의 동지애(?)나, 남학생처럼 머리를 짧게 깎고 그들의 걸음걸이 나 말투를 흉내 내는 씩씩한 여학생들을 많이 보아 왔지만, 내가 어떤 질문의 결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 나조차도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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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은 따뜻하다』
쥘리 마로 지음│정혜용 옮김│미메시스│2013
원제 Le Bleu Est Une Couleur Chaude( 2010)
2. 타인의 시선에 갇혀 버린 감정
클레망틴은(이후 클렘) 얼마 전 시골을 떠나 온 문학계열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이다. 아 주 강력하고 다정한 우정으로 맺어졌다고 믿는 엘리와 오디라는 여자친구들도 있고, 자신을 바라보며 마음을 전하려는 남학생 토마의 존재도 알게 된다. 별것도 아닌 일로 걱정을 하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엄마, 자신 을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아빠와 살지만 일상이 가져다주는 평온함에 큰 불 만 없이 지내고 있었다. 삶에 대한 불안정한 균형 감각은 엠마와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한순간에 균열을 일으킨다. 클렘은 파란 머 리칼과 깊고 푸른 눈동자를 지닌 엠마를 발 견한 순간, 그녀가 군중 속으로 사라질 때까 지 시선을 떼지 못한 다. 매일 밤 몽정 속에 서 그녀를 껴안는 꿈 을 꾸며, 알 수 없는 여 자에게 육체적으로 끌 리는 낯선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여자애에게 끌린다는 걸 알고 난 뒤, 그 비밀은 내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묻어 뒀지. 열네 살 무렵이 었어. 긴 금발머리였는데 싹둑 자르고는 고슴도치처 럼 삐죽거리는 스타일로 바꿔버렸어. 옷은 내 몸보다 세 배는 큰 걸 걸치고 늘 남자아이들하고만 다녔지. 싸 움도 잦았어. 내 자신과, 내 욕망과 맞붙어 어찌나 악 착같이 싸웠던지 내가 느끼던 공포, 분노를 더 이상 다 스리지 못하게 되었거든. 그래서 그렇게 거칠었던 거 고. 지금은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 야.” (76쪽)
이 부분을 읽으며 유별나게 서로를 아꼈던 두 명의 여학생이 떠올랐다. 주말마다 서로의 집에 놀러가고 등하교도 함께하며 하룻밤 서로의 집 에 자고 가는 일도 잦아져, 부모님들도 혀를 내 두를 정도로 친한 아이들이었다. 서로가 사귄다 고 말했을 때, 나는 평정심을 가장한 채 조금 긴 장했다. 논리적인 분석 없이 어떤 불편한 감정 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아는 카테고리에 어쩌면 그들의 감정을 사랑이 라고 불러도 좋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을 것이 다. 평소 아이들이 ‘사랑’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한때의 유치한 감정으로 몰아왔던 습관 같은 것 이 내게 있었을지 모른다. 둘 사이에 대해 아이 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두 아이 모두 힘들어 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는 자신 들을 둘러싼 타인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만화 속 엠마와 클렘은 자신들이 내린 사랑의 정의로 인해 일상적 인 삶에서 추방당하 게 된다. 우정은 가 능하나 사랑은 불가 능한 관계라고 말하는 엘리와 오디는 그녀에 게 절교를 선언하고, 딸의 감추어진 사랑을 발견한 부모님은 열일곱 살의 밤 그들을 문 간으로 몰아낸다. 분노와 혐오, 경멸로 점철 된 그들의 냉혹함 안에서 그들의 감정은 존 중받지 못한다. 다소 격앙된 감정으로 그려 지기는 했으나 나와 두 아이를 둘러싼 아이 들의 반응 또한 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 이 들었다.
우리는 남들이 규정해 온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욕망으로 바꿀 것을 강요받을 때가 많다. 자신다운 것이 무엇인지, 자신만의 색 깔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세상과 삐걱거 리는 순간 스스로를 책망한다. 처음엔 클렘 도 그랬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사적 감정에 타인의 시선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그들을 통해 우리가 겪고 있는 감정들을 인정받으 려 한다. 당당하고 활기찬 엠마지만, 그녀 또 한 삼각관계에서 보 여 준 우유부단함으 로 인해 연인에게 상 처를 준다. 엠마와 클 렘, 그들은 남다른 성 적 취향을 가진 특별 하고 완벽한 동성애자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신 을 불안해하며 남녀의 평범한 사랑을 밟아가는 청춘들이다.
인용문은 엠마가 클렘에게 들려준 고백이지 만, 클렘이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 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클렘은 자신을 발견하고 누군가를 만나며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 하던 갈증을 엠마를 통해 비로소 해소할 수 있었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간절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확신했고, 비밀스런 사랑을 이어간다. 우리가 살 고 있는 사회에서 그들의 사랑은 보편적인 것으 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친구인 발랑탱은 “사랑이란 건 자신이 배운 윤리와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니며 그것은 협소 하고 폐쇄적인 사랑관”이라며 클렘을 위로한다. 자신의 딸이 그저 행복하기를, 스스로 자신의 모습 자체를 받아들이기를 바랐던 엠마의 어머 니는 사랑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일 수 있다는 걸 서서히 이해시켜 준 존재다. 우리는 사랑을 하나의 파일명으로 여기지만, 간혹 사랑은 헤아 릴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의 파일을 담고 있는 폴 더명일 수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만 사랑 이 아니라, 슬픔과 분노, 동정과 연민, 기쁨과 쾌 락, 절망과 그리움이 모 두 사랑이라는 이름으 로 묶을 수 있는 감정들 이다. 엠마와 클렘의 사랑에는 그 모든 섬세한 감정의 결이 담겨 있 다. 육체적 사랑에 대한 그들의 갈망이 불편 해 보일 때, 우리는 그들의 정신적 사랑이 이 성애자들의 사랑과 다를 바 없다는 것도 함 께 살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이해와 존중이 필요한 사랑
“하지만, 내 사랑, 넌 날 이미 살렸어. 넌 편견과 부 조리한 윤리 위에 세워진 세상으로부터 날 살려 내어 내 자신을 완전하게 이루도록 도왔어. 그 누 구도 지금 내게 벌어진 일에 대해 잘못한 게 없어.” (153쪽)
사랑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힌 건 아이들 이 아니라 바로 내가 아니었나 싶다. 죽어가 며 엠마를 껴안은 일이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고백하는 클렘을 보며 내 자 신이 위로받는 느낌을 받았다. 차가운 색채 의 대명사인 ‘파란색’이 어째서 ‘따뜻하다’ 로 이어지느냐를 이해할 수 있다면, 세상과 사랑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더욱 부드러워질 수 있을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감정의 색채, 블루
2010년 출간된 여성만화가 쥘리 마로의 데뷔 작 『파란색은 따뜻하다』(미메시스)는 클렘과 엠 마의 섬세한 감정 변화를 가장 차가운 파란색 을 통해 보여 준다. 눈물과 고민의 흔적이 가득 한 일기장 속에서 엠마의 파아란 머리칼은 물고기의 푸른 등처럼 싱싱한 생명력을 보여주었고, 밤마다 클렘에게 찾아왔던 엠마의 푸른 머리카락은 관능과 유혹의 의미를 부여했다. 연인들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색채들이 배제되었음에도 격정적이 면서도 뜨거운 체온이 전해진다. 일기장 밖에서 노란색 금발 머리로 돌아온 엠마의 머리칼은 클 렘과 멀어지는 순간 생기를 잃고 창백하게 바래 진다. 마지막 장면에 그려진 바닷가의 파도는 모 든 것이 덧없다는 듯이 부서지고 있지만, 세상 에서 가장 뜨거운 파란색의 근원지인 넘실거리는 파도가 두 사람의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를 적실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