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읽기 +] 그림책 속 이야기와 시간의 흐름 읽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6-29 18:45 조회 7,776회 댓글 0건본문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지난 호에서는 그림책을 읽으면서 가졌던 몇 가지 오해를 풀 수 있는 제안을 했었는데요. 동의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걸로 봐서 그것이 저만의 오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그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보려고 합니다. 끊어진 책장을 연결 하거나 시간을 흐르게 만들어 주고 서사를 풍성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실은 그림책이 책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특징이 라는 것에 힘을 실어 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책장과 책장 사이
책을 구성하는 내지 한 장에는 앞면과 뒷면이 있습니다. 그 둘은 앞뒤로 분리되어 있어 연결될 수 없으니 불 연속적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연속성을 가진 이야기는 끊어진 채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연속적인 장면이 연결된 이야기로 바뀌는 원리는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읽는 책은 가로 쓰기 방향, 즉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시선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게 되지요. 끝까지 읽으면 독자의 손은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책 안에서 홀수 쪽이 되는 앞면을 넘기는 행위는 당연히 움직임을 동반하며 방향이 생깁니다. 책에도 방향이 생깁니다. 정지 상태인 것은 어떤 의미도 없지만 한순간 움직이기 시작하면 분명히 방향을 갖게 되고 그에 따라 의미가 생겨납니다. 책장을 넘기는 독자에게도 그 의미가 전달됩니다. 그렇게 앞 장면 과 뒷 장면의 간극이 채워지고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옆쪽에 두 장면은 『길 잃은 앵거스』의 도입부입니다. 그림1의 오른쪽 면을 넘기면 그림2가 나오는데,
책장을 넘기는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자연스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앵거tm가 집을 나와 골목길을 지나고 큰길로 나오기까지의 시공간은 생략되어 있지만 독자들은 이 간극을 충분히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섰을 때 연결되는 골목길은 당연히 큰길로 이어진다는 것쯤은 아이 들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두 그림 속에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시 공간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고른 까닭은 우 리 집 책장 맨 위 첫 번째 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는 수많은 책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림책 작가가 첫 장면을 그릴 때는 뒤따라오는 다음 장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오는 장면은 반드시 앞뒤의 연결성을 생각하며 그려야 합니다. 앞에서 하던 이야기가 끊어 지지 않도록 머리로 생각하면서 다음 장면을 구상 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작가의 머릿속에 연속적으로 이어지지만 그것을 책으로 옮길 때에는 낱낱이 끊어져 불연속인 상태가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낱장에 그려진 책을 읽는 독자들은 다시 연속된 이야기로 재구성한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연속된 이야기를 불연속인 그림으로 그려 책으로 묶습니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불연속인 그림을 보며 연속된 이야기로 받아들입니다.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같은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인간이 가진 특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정지된 장면을 그린 그림 한 장을 보더라도 앞에 일어난 상황과 그 뒤로 일어나게 될 상황을 알고 싶어 하는 서사지각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여러 장의 그림을 묶은 책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앞면과 뒷면의 그림이 표현하는 시공간의 차이는 앞뒤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찾으며 읽어낼 수 있을 만큼의 간극이어 야 합니다. 글로 많이 벌어진 간극을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간극은 생깁니다. 어쨌든 책장을 넘기게 되니까요. 이 간극을 채워 넣을 수 있는 능력은 경험과 연령대별로 다르겠지요. 작가들은 독자들의 그런 능력을 고려해야 하며 그 부분을 영리하게 계산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간혹 그런 방식을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것을 놓치고는 김빠진 서사가 되어버린다는 것, 문학으로서 그림책의 완성도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작가들은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책도 좀 볼까요? 글이 없는 그림책 『로켓 보이』는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므로 그런 면을 더 많이 고민하고 계산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책의 중, 후반쯤에 나오는 두 장면인데요. 첫 번째 그림은 로켓을 좋아하는 아이가 로켓을 직접 발사해 보려는 시도를 하는 장면입니다. 다음 장면은 날아가는 로켓에 놀라며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장면 사이에 생략된 것은 무엇일까요?
작가는 정작 로켓이 발사되는 결정적 장면은 보여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 장면의 구성은 독자에게 맡긴 셈이지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어 떤 식으로든 상상해 볼 것입니다.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면 생략한 시공간이 더 명확하게 사실적으로 그려질 것 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앞에는 이미 불꽃, 폭발 등과 관련 한 이미지들이 여러 장면 여기저기에 나와 있어 짐작으로 도 알 수 있게 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두 장면 역시 자연스레 연속된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하지만 폭죽, 로켓 발사 등에 대한 경험이 없거나 앞선 장 면에 숨은 장치들을 읽어내지 못할 정도의 연령이라면 그 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때 읽어 주는 사람의 역할 이 중요하게 작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읽어 주는 문학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다루겠습니다.)
그림책의 책장과 책장 사이는 따로 떨어진 컷과 컷 사이 인 셈이 되므로 만화의 칸과 칸 사이가 하는 역할과도 유 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림책 한 장면과 같이 만화의 한 칸에도 시간과 공간이 공존합니다. 정지된 시간 같지만 짧거나 길게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 칸과 칸 사이 는 독자들이 짐작할 수 있을 법한 간극이어야 하겠지요. 어 쨌든 칸과 칸을 넘어가면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 이야기 를 따라 시간도 흘러가게 됩니다.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틀이 중요하듯이 만화 역시 눈에 보 이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틀, 테두리가 중요합니다. 『만화의 이해』(비즈앤비즈)를 쓴 스콧 맥클라우드는 한 칸의 그림 안에서도 상황이 묘사된 공간을 살 피는 동안 시간이 흐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그 림과 글을 담고 있는 틀, 즉 칸의 모양이나 크기 가 독자들이 감지하는 시간을 늘리기도 줄이기 도 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림책 의 판형이나 장면에 들어가는 컷의 형태가 시간 을 감지하는 느낌을 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최근까지 그림책에도 이런 만화 기법이 많이 사 용되고 있는데요. 그림책에서의 만화기법이란 한 면에 칸을 여럿 나누어 공간을 분할하고 시 간을 조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그림은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에서 골라 본 장면입니다. 만화의 컷 나누기 방식을 그림책에 적용해 시공간의 연결 을 더 조밀하게 만들고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예라 생각됩니다.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곰이 겨울잠을 자러 들어간 사이 숲은 사라지고 공장 이 들어섭니다. 봄이 오고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온 곰에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최근에는 이런 형식을 도입한 그림책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중 올해 나온 『빅 피쉬』, 지난 12 월에 나온 『해저 탐험』 등은 칸 나누기를 본격적으로 적용해 어린이용 그래픽 노블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하지 않을까 싶은 책들도 있습니다.
그림책의 시간
모든 이야기는 한 방향, 즉 시간이 흐르는 방향 으로 흘러갑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책은 책장을 넘기며 읽게 되니 책장이 넘어가는 방향 이 이야기가 흐르는 방향, 즉 시간이 흐르는 방 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야기를 전달하 는 방식 즉 서사담화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여 러 방향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독자는 다양하게 전개되는 서사담화를 통해 기본 이야 기를 시간이 흐르는 대로 재구성하게 됩니다.
그림책 한 권을 읽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책장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넘기며 읽는 물리적, 외적 시간은 10분, 20분이 될까요? 그림책은 무엇보다 읽어 주는 책이니 아이들이 물어 오는 이런저런 궁금증을 풀어주면서 읽는다고 해도 한 권 읽는데 30분을 넘기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그림책의 서사적 시간은 다를 수 있습니 다. 여러 겹의 서사 담화 속 시간을 읽어내자면 책 읽는 시간을 훨씬 뛰어넘어 수천수만 년 이상의 시간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모리스 센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이중의 플롯에 이중의 시간 개념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엄 마에게 혼이 나고 자기 방으로 올라간 주인공 맥스는 괴물 나라를 2년 동안 갔다가 다시 그날 밤으로 돌아옵니다. 오 랜 여행을 한 듯 보이지만 시간을 거슬러 엄마에게 혼이 났 던 그날 밤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창밖의 달의 모 양이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면 미궁에 빠집니다. 더러 그것 때문에 2년이 지난 게 맞다, 아니다 하며 다투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독자를 그렇게 몰두하게 하는 힘이 존경스러워 지는 대목입니다.
또 『작은 집 이야기』에는 시골 마을이 도시화하는 과정 을 사계절의 변화와 함께 긴 시간을 겪어내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작은 집 이야기』 버지니아 리 버튼 지음|홍연미 옮김|시공주니어|1993
앞서 소개한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의 두 장면만 보아도 잠들어 있던 곰이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굴 밖으로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두 장면의 글을 읽고 그림을 살펴 보는 시간보다 몇 배는 걸릴 것입니다.
서사적 시간을 경험하는 일은 물론 풍성한 서사를 구현 한 책일 경우 더 명확하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아직도 서사 성이 없는 시공간으로 구성한 장면들의 나열일 뿐인 그림 책들이 꽤 있습니다. 딱 책을 읽는 물리적 시간만큼의 이야 기에 그 시간 이상의 애정을 바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 런 책들은 결국 독자들을 실망시키게 됩니다. 몇몇 정보를 담은 그림책들은 낱장으로 뜯어 카드 형식으로 보아도 별 문제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책들은 정리가 쉽도록 묶어 놓았다는 것 외에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 보 그림책임에도 풍성한 서사를 담은 책들도 있습니다. 그 럴 경우 아이들과 나눌 이야기는 더 풍성해집니다.
2010년에 나온 『창릉천에서 물총새를 만났어요』는 엄 청난 정보량은 물론 물총새 가족을 지켜보는 작가의 진심 어린 마음이 담뿍 담긴 책입니다. 대단지 건설로 훼손되는 창릉천에서 살아가는 새들의 이야기는 어떤 문학 그림책 보다 울림이 큽니다. 2년의 취재 기간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기간까지 작가의 서사가 이어집니다. 물총 새 가족의 서사는 즐거운 덤입니다. 정성들인 장면에 깃든 서사를 발견하는 기쁨이 책장을 덮을 때까지 이어지는 책입니다.
자, 이제 가장 가까이 있는 그림책 한 권을 꺼 내 읽으면서 간극이 잘 메워지는지, 시간은 얼마나 어떻게 흐르는지 적용해보기 바랍니다.
모든 움직이는 것은 느리건 빠르건 제 속도를 갖게 마련입니다. 그림책 속 시간은 빨리 흐르기도 하고 천천히 가기도 합니다. 정지한 화면에 속도를 부여하고 심지어 그 속도를 조절하는 것 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림 한 장에 그려진 여러 가지 요소들입니다. 어떤 요소가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따라 속도가 생기기도 하고 생기지 않기 도 합니다. 이 부분은 화면 구성 방식에 관한 것으로 따로 다룰 것입니다.
있으면서 없는 것
모든 책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림책에서는 없 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제본선 (gutter)입니다. 책을 묶음으로써 꼭 생겨나는 제 본선은 펼쳤을 때 정중앙에 있어 그림을 그리 는 입장에선 참 처치 곤란일 때가 많습니다. 중 요한 인물이나 사물이 그 선에 걸리지 않도록 신 경을 쓰다 보면 구도에 제약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떤 작가들은 분명히 있지만 없다고 간주하고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데 간혹 이 제본선을 적극 활용한 책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괜히 신이 나기도 하지요. 주로 대치하는 상황이 나 거리를 두어야 할 때 제본선의 역할이 극명 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때 제본선은 무의식적으로 책이 가진 틀을 기억하고 있던 독 자들에게 작가의 의도를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제본선을 충분히 활용하여 서사에 활 력을 더한 몇 장면을 소개합니다.
『벤의 트럼펫』에는 한 아이와 그 아이를 놀리는 무리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제본선의 역할이 두드러집니다. 도로 가 그려지지 않았어도 상황을 읽어내기에 충분한 장면입니다.
『벤의 트럼펫』
레이첼 이사도라 지음|이다희 옮김|비룡소|2006
『내가 나눠줄게 함께 하자』
일리아 그린 지음|임제다 옮김|책속물고기|2013
다음은 제본선을 편 가르기에 적극 활용한 두 장면입니 다. 어떤가요? 첫 번째 장면은 또래 무리에 끼어들지 못하 는 아이와 또래 집단끼리 모여 있는 그림이 제본선을 가운 데 두고 나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혼자 놀던 아이 가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반대편의 아이들이 하나둘 제본선을 건너와 첫 장면과는 반대 상황이 됩니다. 서사에 제본선을 적극 활용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장면 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 사이에 있는 여러 장면들에서 하나둘 제본선을 넘어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재 미있습니다. 다른 장면들도 찾아보시기 바랍니 다. 이것은 프랑스 작가 일리아 그린의 책 『내가 나눠줄게 함께 하자』의 두 장면입니다. 작가는 그런 것을 계산했던 걸까요? 아니면 우연히 발견한 걸까요?
이렇듯 제본선은 책이라면 분명히 있는 것입 니다. 많은 작가들이 이것을 그저 무시해 버릴 것인지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리라 짐작됩니 다. 모리스 센닥은 맥스의 공간을 확장하거나 축 소할 때 이 제본선을 잘 활용했습니다. 점진적으 로 한쪽 면에서 다른 쪽으로 공간을 넘기면서 펼친 면 전체로 확장했다가 확장된 장면을 줄이 면서 제본선을 넘어 제자리로 돌아오는 식이었 습니다. 이런 사례들 역시 무수히 많습니다. 다 만 적극 활용했는가 아니면 책 속 한두 장면에 적용했거나 하는 차이일 것입니다. 다시 주변 그 림책들을 꼼꼼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따지고 보면 책이란 틀은 분명히 있으되 의식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과 글을 담고 있 는 책을 의식하고 그림책을 읽게 되면 이제껏 보 이지 않았던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 음에는 장면 안으로 들어가서 움직임과 속도를 만들어내는 요소들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겠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