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잡이 길잡이 [왕샘의 교단독서일기] 마음의 간격, 그리고 헌신-강풀의 '마녀'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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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5-31 18:42 조회 6,715회 댓글 0건본문
1.
‘도서관스러운’ 아이들이 있다. 책을 좋아한다거나 도서부 활동에 어울릴 것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급식소를 습격하러 간 사이, 조용히 도서관에 스며드는 아이들이다. ‘스며든다’는 표현은 아이들이 보여 주는 비사교성과 인색한 인사예절에 근거한다. 대출반납공간에 매번 버티고 있는 선생님을 보고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이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면 마지못해 고개만 까딱거릴 뿐이다. 도서관에 개근하면서 ‘혼자만의 방’을 가지려는 아이들. 몇 년 동안 도서관을 담당하다 보면 이런 수상한 단골들만의 특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혼자만의 시간,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은 대개 교실에서 차가운 눈총을 받을 때가 많다. 심지어 그 반 아이 하나가 내게 다가와 ‘그런’ 아이라는 눈치를 주거나 대단한 비밀을 알려 준다는 듯 손가락질할 때가 있다. 여러 해 동안 아이들을 지켜보아 온 내가 보기에도, 그 아이는 도서관에 숨으러 온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만히 혼자 있는 아이들에게 눈길이 가는 것도 일종의 직업병일지 모른다. 말하는 스스로도 뜨악하고 뜬금없을 정도로, 반갑게 인사하거나 아는 체를 해 본다. 발각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표정과 몸짓이 어색해지는 아이. 낭패감이 떠오르며 화끈거리는 건 오히려 인사를 건넨 나였다.
내일 다시 이곳을 찾아올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혹시 이 공간마저 불편해지게 하는 건 아닐까? 그냥 모른 체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골똘히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아이가 이미 도서관을 빠져나갔다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다. 그리고 점점 아이를 모른 체하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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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전4권) 강풀 지음|재미주의|2013
2.
강풀의 열한 번째 장편만화이자 순정만화 시즌 다섯 번째 작품 『마녀』를 읽었다. 차례를 늘어놓은 페이지에 회차와 각 화별 제목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고 하얀 눈금선은 이 만화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암시처럼 보인다. 『마녀』는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부
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여자 박미정과 그녀에게 다가서는 방법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남자 이동진의 계속되는 엇갈림에 대한 이야기다.
‘마녀’는 주문과 마술을 써서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유럽 민간전설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겐 고깔모자와 빗자루, 약물을 끓이는 커다란 솥단지를 소유한 노파의 모습으로 친숙하다. 미동고등학교 소문의 주인공인 박미정은 어떤가. 그녀는 남학생들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녀에게 매력을 느껴 다가간 남학생들은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게 된다. 아름다울 ‘미’에 바를 ‘정’. 그녀는 이름처럼 아름답고 올바른 마음을 지닌 소녀지만, 걷잡을 수 없는 소문 속에서 치명적이고 불길한 존재가 되어간다. 스스로 고립된 삶을 선택한 그녀는 학교를 그만 두고, 고향을 떠나 그녀에게 허락된 작은 옥탑방에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세상을 두려워한다. 그녀의 불길한 능력을 발견했다고 믿는 이들은 거침없이 가시 돋친 말들을 쏟아낸다.
“학교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소문은 죽지 않는다. 소문은 살아있다. 같은 단어에 조사가 바뀌어도 살아있다. 단어들에 형용사가 붙어도 소문은 살아있다. 모든 단어가 처음과 달라도 소문은 살아 움직인다. 모든 것이 달라도 소문은 살아있다.”
(1권, 140쪽)
‘쟤를 좋아한 애가 다쳤대’가 ‘주변 사람들은 다 죽는대’로 바뀌게 되고, 소문은 스스로의 관성에 밀려 예측하지 못한 형태로 왜곡된다. 학생들 사이에 조용히 내려앉는 눈발은 자신을 위한 변호를 하지 못하는 소녀에게 차갑게 쏟아진다. 여리고 소심하여 두려움이 많았던 소녀는 ‘마녀’라는 뜨거운 낙인을 부정하지 못하고, 딸의 오명을 씻어주려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임을 마음 아프게 받아들인다.
만화의 전반부가 풀릴 것 같지 않은 자물쇠로 갇힌 미정의 이야기라면, 만화의 후반부는 더 이상 가까이 갈 방법이 없는 한계를 풀려는 동진이 열쇠를 얻는 과정이다. 죽은 친구를 떠나보내는 교정에서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는 미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 역시 다른 남자들과 동일한 매혹을 느낀다. 연민 어린 호기심은 점차 집착으로 변해가고, 그녀의 흔적을 쫓던 그는 자괴감과 모멸감에 괴로워한다.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 미정의 방문 앞에서 동진의 노력은 번번이 좌절된다. 미정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길한 일들이 우연의 일치임을 증명하려던 리포트는 오류투성이였고, 일관성이 없어 보이던 사건들을 법칙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위협받게 된다.
그러나 무모해 보이는 그의 저돌적인 헌신이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를 설득하는 순간이 있다. 그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토해지는 일방적인 고백이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증명하고 인정받으려는 이기적인 욕심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가장 가까워진 순간에 그것이 자신이 상처 입는 거리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가슴 아파하는 거리임을 생각했다. 제목인 마녀는 어두운 주술로 사람들을 저주하는 음험한 존재라기보다,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불편한 존재, 그래서 깊은 숲속에 숨어 지내는 도망자였다. 동진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녀가 이 모든 문제의 열쇠임을 알게 해 주었다. 여기서 나는 불현듯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를 떠올린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동진은 고백하지 않았으나 마음을 전했고, 기다린다는 말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
3.
“나는 왜 그녀의 삶에 개입하려는 거지? 내가 무슨 권리로. 지난 시간 동안 그녀를 지켜봤을 때 그녀가 구원을 요청하던가. 그녀가 자신의 삶을 괴로워하던가. 그녀는 나름 잘 적응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가 내게 구원을 요청한 것도 아니었는데 난 뭘 어쩌려는 거지. 내가 뭔데? 내가 뭔데 ……” (4권,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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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라는 말을 ‘아이’라는 말로 바꾸고 읽어 보니, 나의 도움을 고집스럽게 거절하던 아이들의 표정이 아른거린다. 나는 아이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충분히 배려한다고 여겼으나, 결국 내 마음이 편해지는 방식을 강요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관계는 끊임없이 변해간다. 마음의 거리도 늘 달라진다.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져서도 안 되는 적당한 거리를 가늠하는 일. 그것은 한순간에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있으며 끊임없이 조절해야 할 마음의 간격이다. 서가 배열은 조금 흐트러질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공간에 슬쩍 이 책을 눕혀 놓아야겠다.
타인의 시선에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누군가와 인사 나눌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도록.
강풀 만화의 미스터리와 순정,모호해진 경계
강풀 만화에서 죽음과 관련한 어두운 암시는 대개 미스터리 썰렁 심리물에 가까웠다.
달도 보이지 않는 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던 여자의 고개 숙인 모습을 목격하는 『조명가게』나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한 딸이 저녁마다 젖은 몸으로 귀가하는 『이웃 사람』의 질문방식처럼. 『26년』을 논외로 하자면, 어느 순간부터 미스터리 썰렁 심리물과 강풀표 순정만화의 경계는 모호해진 점이 없지 않다. 고요한 달밤에 아파트 앞 공터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들의 모습이 나오는 『당신의 모든 순간』은 마지막 장면에서 좀비로 변해버린 사람들이 가득해지고, 『마녀』 역시 늦은 밤 강동경찰서 사이버수사대에서 근무하는 중혁에게 친구 동진의 불길한 메시지가 전해지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러한 극적인 호기심 유발은 미스터리에 가깝다. 『당신이 모든 순간』과 『마녀』 두 작품을 순정만화로 묶어주는 것은 ‘헌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