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만화 [읽어볼 만화면]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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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4-16 02:09 조회 7,061회 댓글 0건본문
김낙호 만화연구가
첫사랑이라는 테마가 대중문화 속에서 즐겨 활용되는 이유는 아련한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아련함이 생길 수 있는 가장 큰 조건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설프지만 진심이 담긴 감정이 있었기에 좌충우돌에 손발이 오그라들면서도 나름대로 아름답고,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되돌아보면 안타깝다. 그 경험을 극복하고 다음 사랑으로 제대로 결실을 맺는다면 성장의 스토리까지 완성된다. 완성된 줄 알았는데 다시금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이 떠오르면 그것도 또한 다양한 회고적 감성의 판을 벌여 준다. 그에 비해서, 첫사랑이 이루어지면 그냥 사랑이고 평탄한 이야기로 끝나 버리기 쉽다.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의 아련함은, 만족스럽지 않았던 사건을 그려내기에 독자들에게 만족을 준다. 독자 자신의 아련한 지난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할 수도 있고, 혹은 그런 감정적 시련의 과정 속에서 성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의 즐거움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눈 내리는 겨울, 달콤쌉싸름한 첫사랑 소재 작품들을 한번 들춰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기에 소개되었다는 것은 결국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인 만큼, 나름대로 결말에 대한 내용 누설이 된다.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의 아련함은, 만족스럽지 않았던 사건을 그려내기에 독자들에게 만족을 준다. 독자 자신의 아련한 지난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할 수도 있고, 혹은 그런 감정적 시련의 과정 속에서 성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의 즐거움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눈 내리는 겨울, 달콤쌉싸름한 첫사랑 소재 작품들을 한번 들춰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기에 소개되었다는 것은 결국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인 만큼, 나름대로 결말에 대한 내용 누설이 된다.
첫사랑의 과정
첫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편리한 코드는, 어설픔이다. 그 정도의 강한 감정적 소요를 겪어본 적 없는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꽂히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나름대로 자신의 호감을 최선을 다해 표현하지만 미숙해서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는 일화들이 이어진다. 오글거리는 솔직한 마음과 우습도록 수줍은 행동들의 괴리가 경쾌한 대비를 이루며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재미만큼, 작품 속 인물들의 그런 어설픔을 우리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보게 만들면 더욱 좋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수년간의 작품 가운데 첫사랑의 미숙함과 그 끝에 있는 쌉쌀한 현실을 절묘한 디테일로 그려내는 작품이 바로 『수업시간 그녀』(박수봉, 애니북스)다. 이야기는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한 대학생 남자 주인공이, 자신이 듣는 수업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마찬가지로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한 여학생에게 반해서 여러 시도 끝에 구애하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그 기본 틀 위에, 남자에게는 친구처럼 털털하게 지내는 다른 여학우가 있고 그녀는 그 남학생에게 호감을 지녀 구애를 시도한다. 짝사랑의 삼각관계라는 흔한 패턴이기는 하지만, 주요 인물들의 성격, 그들이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묘사되는 탁월한 감정선의 흐름이 작품에 주목하게 만든다. 감정적 설렘은 오늘날 한국 현실에서 젊은 대학생으로 살아가는 생활에 대한 풍부한 디테일로 가득하고, 사람들의 관계는 오롯이 그 안에서 펼쳐진다. 조별과제는 학점 경쟁과 무임승차의 산실이며, 가족이 내는 대학 등록금이 마음에 걸리면서도 동시에 데이트 비용에 드는 돈을 위해 알바를 뛰는 모습도 현존하며, 결국 남주인공은 휴학하고 군대를 간다는 실로 한국적인 모습도 역력하다. 순수하기에 어설픈, 그리고 일방적으로 어설프게 달려가기에 각자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남기는 모습이야말로 어떤 적당히 포장된 아름다운 이별의 풍경보다도 아련함의 농도가 높다.
현실적 씁쓸함으로 맛을 내는 것의 반대편에는, 가장 장르적인 오락물에서 나름의 반전을 꾀하는 경우도 있다. 『딸기 100%』(카와시타 미즈키, 학산문화사)는 소위 ‘하렘물’이라고 칭해지곤 하는, 평범하지만 착한 남자 주인공 주위로 다양한 개성의 미소녀들이 구애를 하며 흥미로운 상황들을 만들어 내는 에피소드식 코미디 드라마의 전형적인 사례다. 주인공인 중학교 3년생 마나카는 어느 날 학교 옥상에서 우연히 한 미소녀의 딸기 무늬 팬티를 마주치고, 이후 그 여학생이 누구인지 찾아다닌다. 팬티 주인의 정체를 착각하여 고백한 학교의 아이돌격인 미소녀, 원래의 팬티 주인인 수줍지만 속 깊은 문학계 미소녀, 나중에는 운동계 미소녀, 귀여운 소꿉친구 미소녀 등이 모두 호감으로 엮인다. 그런데 보통 이런 작품들은 진짜 여주인공, 즉 가장 속 깊게 남자주인공을 챙겨 주고 가장 설레는 상호 관계 속에서 서서히 드라마를 쌓아가는 사람과 맺어지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이 작품은 결말에서 아이돌 미소녀의 손을 들어준다. 어느 쪽이든 오락적 판타지인 것이야 마찬가지지만, 하렘물에서 전형적인 여주인공을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으로 돌려버리는 결말은 뻔한 스토리와 감성들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신선한 자극을 준다. 9할의 뻔함이 1할의 의외성에 뒤집히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 현실의 모습과도 닮아있지 않은가.
만약 그랬더라면
아련함에는,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종종 따른다. 그렇게 상황을 되새김질하고 다른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는 것은 직접 경험한 바 이상으로 많은 것을 학습해 나가면서 좀 더 확실하게 성장해 나아갈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하다.
『초속 5000 킬로미터』(마누엘레 피오르, 미메시스)는 이태리의 전원적 소도시에서 성장한 두 친구 피에로와 니콜라 그리고 이사를 온 소녀 루치아의 이야기다. 시간은 흘러 피에로와 루치아는 서로 사귀었으나 지금 피에로는 이집트에서 고고학자로 일하고, 루치아는 노르웨이에 있다. 루치아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피에로도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니콜라는 여전히 이태리에 남아 일을 한다. 시간은 흐르고 그들은 늘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 첫사랑이 다른 방식으로 이뤄졌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곱씹으며 각자의 공간적 거리에서 서로를 생각해 본다. 각자 살아가는 모습은 서로 상상하는 것과 크게 다르며, 감정은 그 자체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대한 기억으로 남는다. 경계선을 긋지 않은 흐린 윤곽선의 네모 칸은 옛 환등기 슬라이드를 연상시키며, 마치 낯선 여행에 대한 회상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기록이 아니라, 조금씩 윤색하고 다른 상황을 상상해 가는 뒤섞인 회상이다.
‘만약’이라는 질문을 좀 더 발랄한 상상력으로 풀다보면 <파올라–4>(불레, 미출간) 같은 시간여행 코미디가 완성되기도 한다. 24시간 동안 24페이지짜리 만화 한 편을 완성한다는 ‘24시간 만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작품인데, 뛰어난 유머감각과 절묘하게 중첩되는 상황들이 일품이다. 아저씨인 남주인공 토마는 옛 사진첩을 뒤척거리며 그때가 좋았다고 생각하다가, 난데없이 정말로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절의 자신은 현재의 자신으로 바꿔치기 당한 것이다. 즉 30대 아저씨의 정신이 과거로 돌아가서 10살 꼬마 시절의 자신의 몸에 들어가고, 그 꼬마는 30대 아저씨인 자신의 생활로 들어와 버린다. 문제는 한층 더 꼬여서 사춘기 시절의 자신, 20대 대학생 시절의 자신까지 도합 4명이 서로의 시간에 끼어들며 각자의 혼란을 겪는다. 그 와중에서 과거 어떤 시점을 그리워하는 것 자체보다는 지금의 시간에서 잘 살아가는 것이 최고라는 낙천적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속에서 자신이 첫사랑이라 생각했던 인연, 그리고 사실은 그 전부터 인연이 있었고 결국 지금 함께 있는 소중한 사람과의 만남들이 여러 시간대에 걸쳐서 합쳐진다. 그때 다르게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 이렇게 선택했기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결국 바로 지금의 사랑으로 귀결되었다는 절묘한 긍정이 있다.
나중에 깨닫기
그런데 첫사랑의 아련함 가운데 최고봉은 역시, 나중에야 첫사랑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유명한 야구청춘만화 『H2』(아다치 미츠루, 대원씨아이)가 바로 그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촉망 받는 고교야구 투수 히로, 히로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명타자 히데오, 히로의 소꿉친구이자 히데오의 여자친구 히카리, 히로를 좋아하는 야구부 매니저 하루카 등 네 명이 주연인데, 히로와 히카리의 관계가 바로 그런 식의 첫사랑이다. 히로는 히카리와 오랫동안 소꿉친구로 함께 자라왔고, 사랑에 대한 감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친구인 히데오에게 히카리를 소개시켜 주어 둘은 사귀게 된다. 하지만 히로와 히카리는 점차 서로에 대한 감정이 소꿉친구를 넘어 첫사랑이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면서 각자의 미묘한 감정적 친밀함과 거리감 사이에서 고민한다. 나중에야 깨달았기에 지금의 관계와 아슬아슬한 균형을 찾아가며 더욱 조심스레, 하지만 한층 간절하게 발전한다.
결국 히로와 히데오는 야구를 통해서 최선을 다해 정면 승부를 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 위에서 그들의 청춘은 아련하게 완성되고, 성장하여 이후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면서 끝난다. 현실에서는 누구나 그런 깔끔한 결말을 맞이하지는 못하겠지만, 이야기를 통해서 감성의 울림을 받는 것이라면 이보다 더 좋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