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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세월호, 회복의 항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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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4-04-01 11:16 조회 9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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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학생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으로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저자 Q&A 



유가영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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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저를 어떻게 표현할지 자주 고민을 해요. 취업 준비생 유가영일 수도 있고 작가 유가영, 비영리 단체이자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뜻을 지닌 ‘운디드 힐러’ 유가영일 수도 있고요. 혹은 모두가 아시다시피 세월호 사고 당시 단원고 생존자 학생 유가영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 지면에서는 작가 유가영으로 저를 소개하고자 해요. 



 Q1. 최근 KBS가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 불방 결정을 내렸습니다. 해당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이재연 방송작가는 작가님께서 쓰신 책을 읽고 “오늘을 살아내는 인간의 생명력”을 느꼈다고 한 바, 애초 주요 인물로 출연 예정이셨죠. 이번 사태를 어떻게 보고 계시나요? 


A. 사실 불방 결정이 저에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어요.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지나가던 초등학생도 알 거예요. 다큐를 함께 찍으면서 ‘어쩌면 (위에서) 방영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 생각은 2월이 되어 피디님이 뭔가 바빠 보이셨을 때, 그리고 저에게 힘들게 (불방) 이야기를 꺼내셨을 때 확신이 되었어요. 이게 부당한 일이라는 것, 화내야 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무력감이 먼저 찾아왔던 것 같아요. ‘위’에서 이미 결정한 거고 한낮 출연자인 제가 바꿀 수 있는 건 없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요. 무력감은 참 위험한 감정이에요. 어쩌면 해낼 수도 있는 일을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포기하게 하는 거니까요. 저는 그걸 잘 알고 있었고 다시 일어서서 작은 반항을 했어요. SNS에 글을 올리는 거였죠. SNS는 정말 파급력이 커요. 한 명이 하나의 글만 공유해도 그 사람을 아는 사람 모두가 볼 수 있게 되니까요. 세월호 생존자로서 온라인에 글을 게시하는 건 무모한 일이기도 했어요. 누군가는 저를 응원해 줬지만 누군가는 저를 비판했거든요. 근데 예전에 비해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조금 뻔뻔해지더라고요. 어차피 저를 싫어할 사람들은 제가 뭘 해도 싫어할 텐데 그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응원해 주는 분들이 더 많은걸요. 이런 제 작은 반항이 큰 변화는 일으키진 않더라도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지 못했다는 것보다 저와 몇 달 동안 함께해 주신 피디님, 감독님, 작가님, 그리고 많은 분의 노력을 세상에 보이지 못한다는 데 가장 화가 나요. 우리가 했던 노력이 결코 물거품이 된 게 아니라는 것, 제가 다큐를 찍으면서 정말 좋았다는 걸 알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Q2. 생존 학생에서 자립한 청년이 되기까지의 기록을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에 담으셨는데, 쓰고자 마음먹기까지 은근한 고민이 따르셨을 것 같아요. 출렁이며 쓰고, 고민하고 탈고하기까지 힘들었던 점과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요? 


A. 가끔 자신감이 커지고 용감해지는 순간이 있잖아요. 글을 쓰겠다고 결정했을 때가 바로 그때였어요. 고민은 많이 안 했던 것 같아요. 글은 저에게 정말 친숙한 존재였고, 나라면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컸거든요. 물론 그렇게 결정하고 나서 살짝 후회하긴 했지만요. 처음 출간 제안을 받고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출판사 분들은 제가 기억을 되살려서 글을 쓰면 감정적으로 힘들 거라고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사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글이 안 써진다는 점이었어요. 무엇이든 제출일이 정해지면 거듭 미루고 괴로워하다가 최종 마감일에 가서야 했던 편이에요. 파일에 제목을 쓰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어요. 겨우 ‘초고’라는 제목을 쓰고 원고의 첫 부분을 쓰기 시작했어요.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미루고 미루는 동안 어떤 순서로 써야 할진 대강 생각해 놓아서인지 그 후 원고 쓰기는 수월했던 것 같아요. 역시 시작이 반이라는 게 맞는 말 같죠? 그러다가 시련이 왔어요.

(세월호 참사 이후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았어요. 고1 때부터 대학교 3학년 때까지의 기억이 흐릿했어요. 참사 당시 상황은 기억이 잘 나서 술술 써 내려갔지만 그 후 학교에 돌아와서 내가 뭘 했는지, 기분이 어땠는지, 대학에서는 무엇을 했는지 떠올리기 정말 힘들었어요. 이유는 알고 있었어요. 사람의 뇌는 자신이 살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를 지우려고 한다는데, 그 시기가 저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아요. 글을 쓸 무렵 가장 도움이 됐던 건 사람도 무엇도 아닌 ‘사진이 백업되어 있던 드라이브’였어요. 언제, 어디서, 어떤 걸 했는지 그리고 그때 제가 무슨 감정을 갖고 있었는지 흐릿하게나마 기억할 수 있게 해 주었거든요. 가장 도움이 된 게 고작 드라이브라니, 정 없는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2014년 4월 16일, 제 과거의 기록들을 모조리 잃어버렸던 순간 이후로 가장 큰 일을 해 준 게 사진 기록이었어요. 그 외에도 마감일을 넘기지 않는 일, 저장 파일이 날아가 버리는 일 등 힘든 일은 많았지만 그럼에도 원고를 완성해서 책을 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Q3. 책 중반부, 사서를 꿈꿔 오다가 스쿨닥터 선생님과 상담을 거친 끝에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죠. 선생님으로부터 어떤 지지를 받았는지 궁금해요. 


A. 사서였던 꿈을 (심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바꾼 건 저를 담당하시던 스쿨닥터 선생님을 접하고 나서부터였어요. 제 힘든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 주시던 선생님이 신기했어요. 원래 호기심이 많았고 남들의 생각을 궁금해하던 편이라, 심리학에 더욱 깊이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을 선생님한테 말씀드렸더니 심리학과 가지 말라고 말리시다가 포기(?)하시더라고요. 사람들은 심리학과가 전망 좋은 학과라고는 하지만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으면 전공을 살리기 어려울뿐더러 선생님처럼 병원에서 일하는 임상심리사가 되려면 거의 10년을 매진해야 하거든요. 알면서도 당시에는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어요. 그 후 선생님이 저처럼 심리학에 관심 있는 친구들을 모아 방과후에 강의를 해 주셨어요. 심리학이란 무엇인지, 심리학과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알려 주셨어요. 덕분에 진로 방향을 정할 수 있었죠.



 Q4.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후군을 앓으며 대학 입학 이후에도 고통의 고비를 넘고자 견뎠던 시간을 반추해 주셨죠. 사회적 참사를 겪는 청소년 혹은 청년은 여전히 많습니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또래에게 당사자로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A. 힘든 시기를 겪어 오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건 인간의 목숨은 한낮 바람 같으면서도 무쇠와도 같다는 거였어요. 누구나 작은 사고에도 죽을 수 있지만 아무리 큰일을 겪더라도죽지 않을 수 있거든요. 지금도 제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어요. 하지만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않고 열심히 하지 않으려 했던 과거와 다르게, 내가 죽더라도 허무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고 해요. 그렇게 바뀌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평생 안 해 본 활동을 해 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나기도 하면서요. 그중에 가장 도움이 됐던 게 세 가지 정도예요. 

첫 번째는 목표를 가지려고 노력했던 거예요. 옛날부터 한 가지 목표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런 열정을 가지고 살면 무슨 느낌일까, 저런 사람들도 죽고 싶다고 생각을 할까, 싶었죠. 그래서 대학교를 다니며 치료를 받고 정신이 차츰 들었던 4학년 무렵 ‘인생의 목표를 정해 보자’ 결정했어요.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의무적으로 학교나 다니고 그 외 진로활동은 거의 안 했거든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NGO 활동가를 알았고, 관심을 쏟다 보니 목표가 세워져 있더라고요. 물론 이 목표도 바뀔 수도 있지만 지금의 저는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의지를 느끼게 된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의문을 갖는 것이었어요. 책에도 언급했듯이 저는 꽤 고집이 세요. ‘중2병’이 살짝 남아서 ‘나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런 대단한 내가 이렇게 아픈 게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여느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주변 사람들이 죽고 다쳐도 결국엔 극복하잖아요. 힘들어서 울다가도 갑자기 멈춰서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스스로에게 태클(?)을 걸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제가 겪은) 정신질환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고, 심리학과까지 전공했죠. 상담도 자주 받았어요. 제가 왜 힘든지 알고 싶었거든요. 제가 겪는 질환들의 진단명, 다른 사람들의 경험담들을 알아보니 ‘이런 거였어?’ 납득이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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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상담을 받는 것이었어요. 참사 이전에도 국가에서 운영하는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었거든요. 그때 상담을 받으면서 많이 답답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선생님께 털어놓긴 했는데, 실질적인 해결책이 없으니 힘들었어요. 그 후 세월호 참사를 겪고 또 상담을 받았는데 저와 잘 맞는 선생님을 만나 마음의 응어리를 잘 풀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막상 상담을 하면 별로 좋지 않을 수도, 선생님과 잘 안 맞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자신이 힘든 걸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좋아질 수 있어요. 사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정도는 다를 거예요. 하지만 힘들게 생존하는 여러분 중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열 번의 봄을 살아낸

학교도서관 일기



박보라 안산중앙초 사서(전 단원고 사서)



학교 발령 발표가 나고 3일이던가. 단원고 마지막 근무 이틀 전, 출근길에 눈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여기가 제주도 천백고지인가 싶을 정도로 가지마다 예쁘게 내려앉은 눈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봄이면 개나리와 벚꽃으로 수놓아 설레게 하던 이 길이 이젠 눈이 부시게 하얀 설경으로 인사를 하는구나. 단원고 근무 10년의 마지막이 내게 이렇게 아름답게 기억되는구나 싶었다. 많은 학생들을 떠나보내기도 했고 또 새로이 만나기도 했던 이 길 위에서, 지면을 통해 안녕을 고해 보려 한다. 



2014년, 벚꽃이 피던 봄 

 
2013년 5월. 첫 출근. 야간 개방을 하는 초등학교 사서로 근무하다가 고등학생을 만날 생각을 하니 너무도 떨렸었다. 고등학생은 다 큰 어른 같고 왜인지 모르게 무서웠다. 우스운 걱정이 무색하게 나의 두려움을 눈 녹듯이 녹이는 아이들의 햇살 같은 인사가 유독 따스하게 남아 있다. 만나는 아이들마다 처음 본 내게 어찌나 인사를 잘하는지 4층에 있는 도서실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는 동안 아이들의 그 환한 인사 덕분에 ‘이 학교 학생들, 참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반겨 주고, 때때로 가르쳐 주기도 하는 아이들을 통해 그해 고등학교 신입 사서의 생활을 무사히 마쳤다. 
2014년. 나의 첫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던 1학년 학생이 이제는 2학년 학생이 되어 새로운 후배와 함께 도서부 생활을 할 생각에 많이도 신이 났었다. 두근두근 3월이 지나고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할 무렵 4월 수학여행을 앞둔 학생들의 열기로 학교는 들썩였다. 도서부원들도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에 찾아와 “선생님∼ 수학여행 가서 제가 좋아하는 트○○ 과자 사 올게요!”, “저 없는 동안 보고 싶어도 참으셔야 해요∼” 이야기하곤 했다. 별이 된 우리 아이들의 목소리와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해 다른 많은 학생들과 함께 다섯 명의 남학생과 두 명의 여학생 도서부원을 떠나 보냈다. 생존한 다른 도서부원들 또한 다른 졸업생들보다는 조금 더 특별하게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늘 응원하는 마음으로. 
당시의 기억은 우주가 무너진 기분이라면 표현이 되려나. 살아 있는 우리 또한 물속에 갇힌 것처럼 숨이 막혔다. 학생들의 장례를 다녀오고, 운구차를 마주하고, 매일 들리는 울음소리에 그해가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후에도 학교 밖 여전한 기자들의 관심과 불특정 시민의 전화들로 학교는 숨 쉴 틈이 없었다. 생존 학생들이 겨우 학교로 돌아오고, 다시금 시작된 도서부에는 뭐랄까. 생존 학생, 다른 학년의 학생, 너 나 할 거 없이 단원고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는 늘 같은 기류가 흘렀다. 폭풍 속의 눈처럼 평온함 속 불안함이랄까. 곧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 속에 그해를 보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 더 많이 슬픔을 꺼내 놓고 함께 나누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당시에는 너무나도 힘들어서, 또는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TV를 켜지 못했다. 참사에 관해 입에 올리지 못했고, 울지 못했다. 최대한 슬픈 생각을 안 하려 노력하고 일상을 유지하려 모두가 안간힘을 썼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도서부에 새로 들어온 학생 중에는 먼저 떠난 친구에 대한 미안함에 도서부를 지원한 학생A가 있었다. 2학년이 되고 함께 도서부를 하자던 친구의 부탁을 거절했었는데, 떠나고 없는 그 친구의 부탁을 잊을 수 없어서 이제라도 도서부에 오게 된 것이다. A는 도서부를 하는 동안 자신만의 방에 문을 꽁꽁 잠그고 들어가 있는 것 같아서 매번 마음이 쓰였다. 진중한 내면을 생각하면 이 또한 그의 모습이라 생각이 들어 이따금 문만 톡톡 두드려 보고 편안하게 두었다. 그 친구가 졸업 후 찾아와 이전에 내가 도서부를 떠나는 친구들에게 주었던 쪽지를 지갑에서 꺼내 놓았을 때 얼마나 뭉클했는지 모른다. A의 장점을 응원하는 문구를 써 줬던 것 같은데, 얼마나 다시 펴 보고 접어 넣고 했는지 아주 많이 꼬깃꼬깃해져 있었다. 나의 작은 관심도 아이들은 크게 받아 줬다. 이후 나는 지금 우리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었다.


2017년, 시(詩)로 마음을 달래던 봄 


당시 아이들이 졸업하고 일 년 뒤에도 학교는 여전히 세월호라는 이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혹여나 희생자 학생들의 형제, 자매에게 아픔을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 그리고 여전한 사회의 관심으로 조심스러웠다. 오히려 다른 학교들은 4월이 되면 4·16 세월호 참사에 대해 자유로이 토론을 하는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단원고 교사와 학생)는 여전히 아파서 꺼내 놓지를 못했고, 어렵게 당일 행사만을 치러 냈다. 도서관 행사를 할 때에도 ‘4·16’ 또는 ‘세월호’라는 이름은 저만치 밀어 두었다. 이 시기에는 ‘위로’에 초점을 맞추고 시 행사를 몇 년간 꾸준히 했다. 시를 통해 아이들의 마음 한 귀퉁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랐다. 세부 활동으로는 시 낭송, 필사, 시 짓기, 전시를 동시에 진행했다. 매년 주제를 바꿔가며 마이크를 사서 낭송도 하고, 캘리그래피 도구를 준비해 필사도 했다. 함께했던 전시로는 ‘우생시(우리 선생님이 좋아하는 시 전시)’, 드라마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 나온 시 전시, 늦은 나이에 한글을 배워서 처음으로 시를 쓴 할머니들의 시화 전시, 시가 된 노래(시인들이 뽑은 노랫말이 아름다운 노래 7곡 전시 및 재생) 등이 있다. 그림, 드라마 장면, 음악과 함께 시를 구성하면 전시가 훨씬 풍성해진다. 시 행사는 매번 감동과 즐거움이 있다. 쑥스러움 속에서 시를 소리 내어 읽어 본다는 경험, 친구의 시 읽는 모습에 손발이 오그라든다며 킥킥대는 학생들 목소리, 생전 처음 시를 따라 써 봤는데 너무 좋았다는 학생, 평소에 조금씩 시를 쓰고 있었다면서 노트를 꺼내 보여 주는 아이들까지 어색함 속에서 큰 울림이 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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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애도와 용기를 넓히는 봄 

 
단원고 근무 마지막 해에는 학교의 가장 인기 공간으로 전시 공간을 넓힐 수 있었다. 전시와 함께 도서관 내에서는 4·16 세월호 참사 또는 기억 공원 조성 논의, 안전과 관련한 도서 북큐레이션을 진행했다. 체험활동으로는 압화 작품 만들기와 가족을 향한 마음을 다시금 생각해 보는 짧은 글쓰기, 안전 글귀 캘리그라피 부채 만들기 등을 꾸려 나갔다.
각자의 상황과 입장이 다르기에 긴 실타래를 지면에 모두 풀어 쓸 수는 없겠다. 그럼에도 학교는 유가족인 부모님께 늘 죄스러웠고,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제는 그때의 구성원도 대부분 남아 있지 않고, 서너 명 남짓 남아 계신 분들은 유가족과 학교가 함께하길 원하는 분들이라 나 또한 용기를 가지고 전시 요청을 할 수 있었다. 관계자에게 전해 듣기로는 학교에서 유가족의 작품을 전시한다고 하니 어머님들께서도 반기셨다고 하여 늦었지만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고, 다행이다 싶었다. 마지막 전시에는 직접 만들어 주신 예쁜 압화 책갈피도 수북이 전해 주셔서 교내 교직원, 학생들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매년 4월 16일의 행사를 꾸릴 때는 도서관뿐 아니라 교내에서도 고르게 기억할 수 있도록 일상적이고 넓게 구성하고자 했다. 드러내 놓고 기억하니 내 안에서도 드러내고 우리 아이들을 기릴 수 있어서 좋았다. 시간이 가도 슬픔이 무디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슬픔도 함께, 그러나 우리 행복했던 추억은 더욱 진하게 피어올라 마음이 따뜻해졌다. 4·16을 기리는 시간이 다른 이들에게도 그러한 시간이 되길 바라며, 또 다음을 준비해 본다.

 

단원고, 비상하는 봄의 한가운데로 

 
단원고는 교장선생님과 모든 구성원의 노력으로 정상화되었다. 대학을 목표로 하는 일반고의 모습을 되찾았으며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단원고’라는 이름이 꺼려지는 분위기가 있다. 발령 오시는 분들에게도, 외부에서 나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도. 참사를 겪고도, 학교에 그날을 기리는 조형물이 크게 자리했고, 세월을 견디어 내어 다시금 보통 학교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픔과 함께 역사가 계속되는 대단한 곳임에도 여전히 우리는 안쓰러운 시선을 받는다. ‘아픔에 공감하고자 하는 사람의 본성이겠지’라고 여기고 싶지만, 우리를 안쓰럽게 보는 시선은 여전히 불편하다. 우리만 아픈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안산 지역 내에서는 한두 사람만 거치면 모두 아는 사람이었고, 세월호는 세계 이슈로 연일 보도되며 전 지구가 함께 아팠던 사건이었다. 지금은 그저 응원의 눈빛만으로도 우리 모두에게 충분하다. 감격의 순간들을 기억해야 삶이 더욱 단단해져 가는 것처럼 아픔의 순간도 기억해야 우리는 덜 아플 수 있다. 당장의 아픔에 각자가 마주하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함께 같은 방향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테니까. 마침내 사람을 향하는 온기는 다 알아볼 수 있다.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버텨 왔던 시간들. 그 속에서도 회복과 기억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적어 준 단원고 사서로서의 시간에 감사한다. 비어 있거나 가라앉지 않고 꽉 채워진 마음으로 헤어질 수 있어서 떠나는 발걸음이 그리 어렵지 않다. 단원고가 더 유연하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날개를 펼치길 늘 응원한다. 그리고 그날을 겪은 우리 모두가 꼭 기억하고 더 나아지길 소망해 본다. 모두 안녕하기를.



애도라는 삶의 기술을

길러 주는 어린이·청소년 문학 10선

 

김재복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



죽음은 회복 불가능한 사건이다. 우리가 겪는 가장 큰 슬픔은 죽음에서 온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1915∼1980)는 어머니가 사망한 다음 날부터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기록했다. 이 애도 일기는 1년간 계속되었다. 시간은 슬픔 자체를 사라지게 하지는 못하지만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은 차츰 사라지게 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슬픔이 자기 시간을 잘 보내게 돕는, 애도라는 이름의 ‘삶의 기술’이다. 사라진 존재가 남긴 것을 잘 수습하는 일은 그래서 죽음 이후의 일이다. 슬픔이 너무 많은 4월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마주하되 슬픔이 삶을 먹어 버리지 않게 마음의 힘을 길러 주는 아동청소년문학 작품 10권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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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백온유 지음│창비│2020


아파트 화재라는 재난적 사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이야기다. 유원은 자기를 구하고 죽은 언니와 자기를 구하고 장애인이 된 남자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오랫동안 자기 삶을 살지 못했다. 10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자기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지만 쉽지 않다. 언니가 자기를 구하고 죽었다는 것도 사실이고 아저씨 역시 자기를 구하느라 다리뼈가 부러져 영영 운전을 못 하게 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유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살고 싶은 인물이다. 유원 스스로 풀 수 없는 매듭인데, 그런 유원 앞에 유원을 구해 준 아저씨의 딸 수현과 아들 정현 남매가 나타났다. 남매는 구조의 대가를 부당하게 요구하는 아버지로부터 유원을 떼어 준다. 또 죽은 언니의 삶에 속해 사느라 정작 자신의 삶은 흐릿하게 보냈던 유원의 시간을 유원에게로 되찾아 준다. 죽은 자와 구조자, 생존자의 관계에 주목한 드물고 소중한 이야기다. 생존자가 겪는 심리적 고통의 무게가 무겁게 다가온다. 죽음에서 살아남은 자를 제대로 구조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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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늬』 

김해원 지음│낮은산│2021 


청소년 배달 아르바이트생 이진형의 죽음이 타살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진형과 또래인 문희, 윤지윤, 오사강 세 친구가 연대하여 마침내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이야기다. 다 읽고 나면 누군가에 의해 한 사람이 죽임당한 인위적 사고사를 비로소 온전한 죽음으로 돌려놓는 일이 곧 애도의 과정임을 알게 된다. ‘한 청소년 배달 아르바이트생의 불행한 사고사’라는 말에는 없지만 “낯선 동네에서 외롭게 죽은 죽음”이란 말에는 강력한 진상 규명 의지와 위로의 마음이 들어 있다. 원인이 밝혀져야 하는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들이 정교하게 연대하는 과정이 이 작품을 끌고 가는 힘이다. 이진형의 죽음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과정은 사실 주인공 문희를 살리는 일이었다. 문희는 일곱 살 때 엄마를 잃고 텅 빈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문희가 이진형의 죽음에 마음을 쓰고 그의 죽음을 제대로 규명하는 사이, 문희는 비로소 자기 ‘무늬’를 되찾는다.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장면 등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와 같은 사회적 타살이 배경에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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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애도를 다뤄야 하는 이유 

 
4월은 사회적으로 슬픔과 울음이 많은 달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누군가는 죽은 이의 이름을 새로 쓰고, 누군가는 죽음과 삶을 이야기로 만든다. 『선생님을 위한 애도 수업』의 공저자 위지영은 「왜 교실에서 애도를 다루어야 할까?」에서 아이들이 사회적 참사가 주는 공포와 두려움을 어른보다 크게 느낀다고 말한다. 이는 어린이·청소년 독자를 향한 동화와 소설이 사회적 참사 혹은 죽음을 더 힘껏 다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죽음은 절대 되돌릴 수 없고 체험할 수 없는 인간사적 사건이다. 죽음에 관한 문학적 애도와 추모는 어느 누구에게나 죽음이 물음표가 아닌 마침표가 될 수 있도록, 죽음이 그 자체로 온전할 수 있도록 아직 여기에 살아 있는 자가 보내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살아남은 자를 구하는 일이기도 하기에 죽음이 우리와 함께 있는 한 언제든 유효할 것이다.
 

맛보기로 소개한 특집 외 다양한 이야기는 2024 <학교도서관저널> 4월호에 수록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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