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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가족과 함께 떠나는 문화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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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8 12:26 조회 12,30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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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기적의도서관
1992년 영국에서 북스타트 운동이 시작됐다. 생후 1년 미만의 아기들이 유아 때부터 책을 장난감 삼아 놀면서 책 읽기를 좋아하게 만들자는 시민운동. 우리도 해야죠.

‘기적의도서관’은 2003년 MBC 프로그램 ‘!느낌표’의 한 코너인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가 기획한 프로젝트. 40여 개 지자체가 경쟁한 가운데 27만 인구 중 10만 명의 서명을 모으며 가장 열의를 보인 전남 순천시가 1호로 선정되고.
제 4호관인 ‘서귀포기적의도서관’은 독서환경이 열악한 우리나라에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드나들 수 있는 어린이 전용 도서관을 만들자는 취지로 제작진과 시청자, 시민단체가 손을 잡고 11개월의 대장정 끝에 이뤄낸 기적의 결과물.
건축가는 정기용. 정기용은 중학교 때 공짜로 켄트지를 준다기에 미술부에 들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시립도서관에서 검정고시 공부. 이때의 독서량으로 지금의 정기용이 있는 거죠.

제법 잘 그린다는 얘기를 믿고 서울대 미대 입학. 건축가 김수근에게 1년 간 강의를 들었다. 책을 뒤졌다. 건축이 뭐지. 인문학이군. 대학원에서 도예 전공. 역시 건축을 전공하지 않아 생각이 자유로우신 분.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 실내건축과, 6대학 건축과, 8대학 도시계획과 졸업. 인문학도는 최소한 3개 이상은 전공해야죠.
정기용의 화두는 ‘감응’이다. 세상에 군림하는 건축이 아닌, 세상에서 불려 나오는 건축. 사람들을 모으고, 위로하고 독려해 삶이 어울려 자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만 1세 안팎의 어린 독자를 환영한다는 게 기적의도서관의 가장 큰 특징. 특히 도서관에서 떠들어도 된다.

빌 게이츠 왈.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동네의 공공도서관이었다.”
정기용이 무료로 설계한 기적의도서관은 총 10개 중 순천과 제주 등 6개. 이런 헌신으로 2007년 여성가족부가 주는 국민훈장을 받았다.

정기용의 도서관은 모양이 볼품없죠. 정기용 왈.
“상상력을 발휘해서 보기만 좋게 지은 건물의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다. 건축물은 주어진 터와 거기서 살아갈 사람의 ‘관계맺음’을 위해 만들어지는 공간 인프라다. 외형은 중요하지 않다.”
항상 안마당을 만들고 건축이 어린이의 인문학에 도움이 되는 신나는 건축을 지향할 뿐. 사진발은 노 생큐. 2011년 정기용 선생 소천. 선생은 평생 월세 집에 사셨죠.

선생의 유언은 이렇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기적의 삶’을 사신 선생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장생포 고래박물관
1971년 반구대암각화 발견. 거북이 한 마리가 넙죽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반구대라고 하는 거죠. 선사시대의 유적. 높이 3m, 너비 10m 규모의 암각화에는 절벽 암반에 육지, 바다 동물 등 총 75종, 2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반구대암각화가 세계적인 유적이 된 건 58마리의 고래 중 작살을 맞고 있는 고래 그림 때문이죠. 국보 제285호.
자고로 우리 동해는 물 반, 고래 반. 중국인들은 심지어 동해를 경해로 불렀다. 고래의 바다라는 거죠. 1898년 장생포 등 동해안 3개 항구에 대한 조차권을 러시아 정부에 내줬다. 이를 본 일본도 1900년 포경 특허를 얻었고.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맨 먼저 러시아의 동해 포경 금지시키고. 장생포항을 중심으로 고래잡이 독점.

장생포에 가면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소문도 돌고. 당시 일본은 일제강점기 동안 6천 5백여 마리 포획. 반세기 동안 고래잡이로 포식을 해오던 일본인들은 해방이 되자 포경선 몰고 본국으로 도망. 하루아침에 생업을 잃은 선원들은 일본 포경회사에 보상금 청구 대표단 파견.
50톤급 목선 두 척 몰고 귀국. 장생포에 조선포경주식회사 설립. 1946년 4월 16일 우리 손, 우리 기술로 범고래 한 마리를 처음 잡았고 이 날이 한국포경기념일.

사람이나 고래나 수컷은 어리바리. 참고래 암수 두 마리가 함께 있을 때 수컷을 먼저 잡으면 암컷은 그대로 달아난다. 그런데 암컷을 먼저 잡으면 수컷은 도망치지 않고 주변 배회. 남자라는 거죠. 수놈은 자동 포획.
이런 걸 일거양득이라고 하죠. 태어날 때 잘 태어나야죠. 인간이나 고래나. 어, 어 하다 가나니.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는 상업 포경 금지 선언. 이후 국내에서 공식 유통되는 고래 고기는 대부분 조업 중에 그물에 걸리거나 자연사한 고래만 식용으로 허용.
2005년 63억 투입해 고래 모양의 장생포 고래박물관 개관.



의재미술관
1999년 의재미술관 현상설계 시행. 아이엠에프의 어려운 시절이라 10여 개 팀이 경쟁. 당선작 조성룡. 의재 허백련은 화선지에, 조성룡은 유리창에 그림을 그린다. 자연의 뜻을 따른다. 자연에게 맡긴다. 그냥 유리병풍만 세워둔다. 그럼 자연이 알아서 그린다. 지원동과 전시동 사이공간을 쓸어내니 태극기무늬가 되고. 두 개가 하나처럼 보인다. 공간이 겹치고. 한국화와 건축화로 나눈다.

몇 계단 올라가면 제 1전시실. 몇 계단 또 올라가면 제 2전시실이. 그냥 등산로다. 증심사 가는 등산로와 의재 만나러 가는 등산로가 서로 소통한다. 제 2전시실 지나면 의재 상설전시실로 가는 램프. 전면 반투명 유리창. 여기서 자기를 버려야 된다. 마음을 비워야 된다. 그래 일부러 산이 보이지 않게 유리를 반투명으로 한 거고.

마음으로 산을 바라봐라. 왜 꼭 눈으로만 보려고 하냐. 마음은 뒀다 뭐하냐. 구름이 떠다니고 나무가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안 느껴져. 그럼 현관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자. 느껴질 때까지 반복. 건축가도 이거 만드는데 4년 걸렸다. 그게 단박에 느껴지겠나. 의재 만나러 가는 등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다시 제자리다. 거기가 거기고. 의재는 마음속에 있는 거라 그렇다.

건축이 이미 한 폭의 한국화다. 좋은 건축은 향기가 없는 법. 그래 조성룡은 목청을 높이지 않는다.
나무상자와 콘크리트상자, 티타늄상자가 조화를 이룬다. 다 있지만 다 없다. 조성룡은 현장을 140번 방문한다. 설계비는 출장비로 다 나갔고. 왜 꼭 아트를 만들면 적자 나는지 아시겠죠. 작가의 의지는 치열하지만 건축은 편하다. 단아하다. 우리 시대에 아직도 조성룡 같은 장인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마산 양덕성당
1976년 마산 상남성당 신자가 넘친다. 그럼 분가다. 신자수가 4천명이 넘어서면 무조건 집 나가야죠. 그래 잘린 650명은 눈물을 머금고 양덕동 황무지로 쫓겨났다. 1977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요셉 플래처가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 성당이 천막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건축가가 누구냐?”
“김수근.”
그래 플래처신부는 서울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김수근 선생님 성당 하나 만들어 주세요.”
“요구조건은.”

“전 고딕형태는 싫걸랑요. 왜 꼭 성당이 하늘을 찌릅니까. 대한민국에 없는 형태로 해주세요.”
현장 도착하니 바글바글. 어지러운 동네.
“애들아. 너네 통도사 가봤지. 일주문까지 가는 길이 냇가를 따라 휘어지는 거 봤지.”
“예.”
“그거부터 만들어라. 글구 대지가 너무 좁으니까 제단 좀 들고.”
간단하죠.

대문을 들어선 신자들은 우선 우측의 램프를 통해 25미터 걸어 올라가야 된다. 주님에 대한 예를 갖춰라. 여기는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길. 도대체 삶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지 반성해라. 뭐 이런 거다. 램프가 급격하게 꺾어지면서 전면에 나무십자가다. 반성 다했냐! 그럼 거대한 성채 사이로 찢어진 문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깜깜한 성당이다. 이곳은 땅속에서 솟아 오른 수정. 반짝이는.
건축가가 뭘 창조한 게 아니다. 자연 속에 있던 걸 발견한 것일 뿐. 모양 갖고 장난치는 건 건축이 아니다. 그냥 건물일 뿐.

노출콘크리트의 차가움. 여긴 카타콤이다. 좌우로 거대한 발코니가 4개 매달리며 주님을 노래한다. 그래도 까불래. 6각형의 수정체들이 겹쳐지면서 사이사이 스테인드글라스를 두어 찬란한 빛을 끌어들이고.
“선생님 외벽에는 뭘 붙일까요.”
“적벽돌. 아 참 반으로 잘라 붙여라. 투박하고 인간적인 재료.”
수 만장의 벽돌을 일일이 쪼개던 벽돌공은 돌아 버리고.

1979년 축성일. 신자들도 다 돌아버렸다. 아니 이런 성당도 있나. 만날 고딕성당만 보다가. 전권을 맡겨준 오스트리아 신부님의 안목이 장난이 아니다. 김수근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래 양덕동은 건축인들의 성지가 되고. 연이어 경동교회, 불광동성당을 완공하면서 김수근은 신화가 된다.
“선생님 양덕성당에서 전화 왔습니다. 미사를 볼 수가 없다는데요.”
“왜.”
“워낙 관람객이 몰려들어서.” “좀 참으라 그래.”
입장료 받으라 그럴까. 그럼 대박인데.



만해마을
2001년 오현스님은 건축가 김개천을 찾는다. 백담사 진입로 부근의 3군데 후보지를 둘러본다. 너무 삭막하다. 물도 없고. 십이선녀탕 입구 3천 평이 맘에 든다. 내린천을 사이에 두고 국도와 마주하고. 인제군이 관광단지를 조성하려던 땅인데 나서는 사람이 없어 버려둔 땅. 관광객 끌어들이기에 혈안이 돼 있던 인제군수는 백담사 입구의 백담사 땅과 이 땅을 흔쾌히 맞바꾼다.

인문학 건축은 터 잡기에서 시작되고 끝나죠.
성격 급한 큰스님은 설계기간으로 일주일 준다. 날밤 새운다. 프로그램도 없고. 내린천 변의 기다란 대지에 5동을 툭툭 던진다. 도면을 받아 본 큰스님은 두 달 동안 연락이 없다. 잘렸나.
한참 후에 다시 연락이 왔다. “어이 김 소장 이 도면 어때.” 다른 건축가의 도면이다. 卍자 평면에 12층 기와지붕 건물.
“할 말 없습니다.”

“그 친구가 말야 이 건물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한옥이라고 자랑하더구먼. 이게 어디 모텔이지 기념관이라고 할 수 있겠어. 이제 자네 맘대로 해보게. 근데 명심하게 클라이언트는 내가 아니고 만해선생님이네.”
만해기념관은 동서남북이 다 열려 있다. 내설악의 단풍이 공간을 휘감고 돈다. 내린천의 물소리가 울려 퍼진다.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다. 노출콘크리트 여기저기 쓸어낸다. 하도 많이 쓸어내서 어디에 서도 만해마을이 보이고. 어디에 서도 빛이 든다.

어디에 서도 시원하고. 이런 게 인문학적인 건축이죠.
반대편이 보이는 철골계단을 따라 올라 2층 내린 천변 중정에 섰다. 계단이 떠 있다. 흔들린다. 내 마음도 흔들리고. 내린 천변의 소나무 한 그루가 압권이다. 거의 분재 수준인 이 소나무를 기념관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중정이 만들어진다.
김개천에게 물었다.
“어떤 의도로 이런 디자인을 하게 됐는지?”
“자연이 시킨 대로 했는데요.”



해인사 경판각
해인사 경판각의 자연통풍 시스템은 여러 차례 이론으로 해명이 시도되었지만 아직까지 어떤 하이테크로도 재현될 수 없는 지혜가 숨어있다. 건물의 통풍이 잘 이루어지도록 건물 외벽의 붙박이 살창은 아래위 크기가 다르고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도 크기와 높이를 달리함으로써 공기가 실내에 들어가서 아래위로 돌아 나가도록 만들었다.

건물 뒤쪽에서 내려오는 습기를 억제하고 건물 안의 환기를 원활히 하려는 의도로 건물의 뒷면에도 마른 흙을 깔았고, 건물 내부 바닥도 맨흙바닥으로 둔 채 천장에도 반자가 없이 지붕 구조가 보이는 연등천장을 하고 있어 습기가 바닥과 지붕 밑에서 조정이 되도록 했다.

왜놈들이 뇌물을 들고 왔다. 야, 팔만대장경 인쇄 한번만 해주라. 부탁이다. 우리도 만들어야 되걸랑. 됐네. 삼고초려. 좋다. 한번만 해 줄게. 그것 참 오묘하네. 대한민국이 세긴 세군.
추사가 해인사를 찾았다. 뭐야, 이거. 이건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마치 신선이 내려와 쓴 것 같군. 주지스님이 추사를 붙잡았다.

“현판 하나만 써 주시면.”
“창피해서 안 씀. 경판이랑 비교되잖아.”
그래 해인사에는 추사 현판이 없죠.
1950년 지리산의 빨치산들이 해인사로 숨어들었다. 부처님 세상에는 이념이 없는 법. 스님들은 정성껏 밥을 해 먹였다. 나무아미타불. 미군 사령관 열 받았다. 야, 해인사 폭격해라. 내 이놈들을. 김영환은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김해공항 이륙.

이거 어쩌지. 폭탄 안 떨어뜨리면 항명죄고. 떨어뜨리면 역사의 죄인. 염주를 계속 돌린다. 부처님 살려 주십시오. 그냥 복귀.
“야, 해인사 폭격했냐?”
“안개가 자욱해 실패. 아리아리한 게 눈에 뵈는 게 없네요.”
“뭐라!”

“공비들이 해인사를 점령한 건 단순히 식량 땜이다. 며칠만 지나면 공비들은 해인사 떠날 꺼다. 글구 해인사에는 몇 백 명의 공비들과는 바꿀 수 없는 팔만대장경이라는 한민족의 정신적인 지주가 있다. 나는 반만 년의 역사를 지닌 대만민국의 공군 장교로 우리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해인사에 폭탄을 투하할 수 없다. 차라리 죽여라.”
이를 보고 받은 이승만 대통령 노발대발. 김영환 사형.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간신히 말렸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성주 백세각
수원 화성에서 특강.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달랑 세 가지다.
1. 선비로 살아간다.
2. 선비로 살기 싫으면 선비를 민다.
3. 그것도 싫으면 애를 낳아 선비로 키운다.

“근데 선비가 뭔지요?” “바른 길을 가는 사람.” “그건 조선시대 때 얘기 아닌 지요?” “선비는 영원한 것임.”
썰렁. 관심도 없는 듯. 너나 떠들라는 거죠.
“그럼 내가 묻겠다. 수원 화성의 설계자는 누구인지?” 조용.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화가나 목수가 아닌 선비다. 조선시대에는 선비가 건축가였다. 건축가는 그 어떤 학문보다 위대하다. 그래 우린 인문학의 정수로 건축을 공부해야 된다.”
반응은 없고. 뭐야 이거. 한 초등학생에게 물었다. “너는 꿈이 뭐니?” “요리사요.” “그럼 학교 그만 두고 요리학원 다녀. 왜 스트레스 받으면서 학교 다니니.”

학생 엄마 왈.
“생각이 수학자로 바뀌면?” “그럼 검정고시 보면 되고.” “그럼 선생님 성공하려면 어찌해야 되는지?” “독서.” “독서만 하면 되는지?” “여행도 병행.”
1552년 건립된 백세각은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엮은 집. 빗자루 만들 때 쓰는 싸리 아시죠. 대패질을 하지 않고 자귀만으로 깎고 다듬어 만든 건축. 건축은 정성이죠. 손재주의 산물이 아니고.
백세각을 찾았다. 마침 종손이 반갑게 맞아 준다. 이제 가르침을 얻어야죠.

“왜 여긴 솟을대문이 아니고 평문인지요?” “솟을대문은 정승만 하는 것임.” “그럼!”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만.” “대부분 삼문이던데.” “건축법 위반.” “백세각을 건립한 송희규 선생의 호 야계가 뭔 뜻인지?” “가야산의 시냇물.”
“왜 유배를 가시는지? 혹 대윤과 친했는지.” “아님. 사헌부 집의로써 간한 것임. 업무상. 첨에는 집의에서 파직당해 대구부사로 갔으나 정권을 잡은 소윤이 엮었음.” “왜 여기서 안 사는지?” “1950년 피난 간 후 비워두고 있음. 대구 나가 먹고 사느라 바빠. 부친도 요절하셨고.”

“남인이시죠?” “당근.” “그럼 우암 송시열 싫어하겠네요?” “안동에서는 똥개 이름이 전부 시열이임.” “유배가 풀린 후 벼슬 안하셨죠?” “당근. 노론이 지겨워서. 남인은 대대로 벼슬안함.” “퇴계나 서애는!” “서애가 거의 마지막이었음.” “그럼 지금은 여기 상주하시는지?” “텃밭 가꾸며 소일.” “혼자.” “당근.”
사모님들은 한옥 싫어하시죠. 서글픈 선비들의 노후. 선비 지망생은 요리학원 다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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