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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배움은 소비여서는 안됩니다-교사의 공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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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3-16 02:11 조회 6,32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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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연 서울효제초 사서교사
 
나를 외부에서 찾다
우리에게 ‘공부’란 어떤 의미일까.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기? 교과서 외우기? 시험 준비? 좋은 대학 진학? 승진? 적어 놓고 보니 좀 씁쓸하다. 당연하게도 생각의 기준은 경험의 폭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니,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공부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우리에게 공부란 늘 ‘타자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나역시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늘 머리 위엔 작은 먹구름이 떠다니는 기분이었으니, 그런 상태에서 학교를 통해 접했던 공부라는 게 즐거웠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였나, 작은 나무 책상 위에 이 한 마디를 참 지겹도록 적어댔었다. “괜찮아.”
그리고 그렇게 간신히 하루하루를 다독이며 대학에 갔건만, 왜 세상엔 꽃이 피지 않았을까? 다시 한 번, 대학이라는 곳에는 적어도 자신의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이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속았네, 속았어.’ 하면서 그제야 어렴풋이 알았다. ‘나 잘못 살았구나.’ 그때부터 여기저기 기웃거렸던 것 같다. 인생을 가로지를 만한 그 무언가를 찾아서.
수업, 스터디, 자원봉사, 박물관, 서당, 시민단체, 기업체 연수과정 등등 지금 생각해 보면 꽤나 일관성 없이 돌아쳤다. 그리고 남들은 이런 것 역시 ‘공부’라고 불렀던 것 같다. ‘취업과 관련 없는’ 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건 그 와중에 나름 성과도 있어서, 배운다는 게 제법 재미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졸업 후 진로도 정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과정의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외부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게 결국 문제가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당신은 연수 중독자야
우여곡절 끝에 졸업 후 현장에 투입되고 보니, 허허…. 사회는 좌충우돌이 아니라 고군분투해야 되는 상황. 거기다 세상의 利에 늦게 눈이 뜨인 탓에, 하필 고른 직업이 사서교사다. 거참, 같은 교사라도 좀 주류를 고르지 어찌 고생을 자처했는고. 아무튼 빼도 박도 못한 상황에 처한 새내기 교사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 또 한번 지겹게 돌아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연수’라는 이름으로.
햇수로 따져 보니 한 4년 정도를 방학 없이 보냈던 듯싶다. 우리교육, 전교조 도서관모임, 박물관, 몇몇 시민단체, 수업으로놀자, 수유너머, 아트앤스터디 등등. 참 다양한 곳에 자비를 들여 주말에도 열심히 쫓아다닌 기억이 어렴풋하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다. “걔가 집에 있나? 없지.” 어쨌건 이것도 주위 분들은 넒은 의미에서 ‘공부’라는 범주에 넣어주셨던 것 같고, 본인도 어느 정도 그리 생각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 이후 남은 것은? 정말 말도 안 되게 이 모든 게 공부가 아니었다는 인정하기 싫은 인정이었다. 남에게는 의아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휑함만이 남더라. 때론 내 주장만 세우는 고집불통이 되어 버린 듯싶고, 학교도서관의 중요성을 모르는 타인에게 적대감만 남은 듯싶은 그런 휑함 말이다. 결과가 상당히 안 좋았다. 뭔가 이건 아니다 싶을 때 즈음, 지금은 신랑이 된 동료 교사는 아주 시니컬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툭 쏘아댔다. “당신은 연수 중독자야.”
그 말을 듣고 앉아 있는데 꽤나 아팠다. 자존심도 구겨지고, 솔직히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말하다니! 사람의 세상살이라는 게 관성이 있는데, 그 한마디에 정신이 들었을 리 만무하다. 좀 더 깨인 인간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텐데, 그렇지는 못한 채로 만 5년이 지나고 이제야 조금 감을 잡는다. 그게 왜 진짜 공부가 아니었는지를.
 
소비문화, 연수조차 소비하는 우리의 모습
결혼과 동시에 터전을 옮기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수를 끊게 되었다. 하지만 연수를 끊는다고 연수 중독자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었다. 용수철처럼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 실마리가 안 풀린다 싶었다. 아니면 신랑의 생각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둘 중 하나는 맞지 않겠는가 하면서 답을 찾아내려고 했다. 정말 엉뚱하게도 실타래는 ‘소비문화’에 대한 생각이 자라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소비문화’라는 용어는 교과서에서 배웠지만, 서울이 고향인지라 뼛속까지 소비에 길들여 살아와 말뜻은 모르는 채 30여 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정말 산골에서 평생 한자리를 지켜 온 시댁을 가게 되었는데, 문화 충격의 연속이었다. 요즘 세상에 살쾡이와 매 때문에 닭을 풀어놓지 못하고 지붕 있는 철장 안에 가두어 키우는 그런 산골에 위치한 시골집. 상상이 되시려나?
이 시댁을 주말마다 가는데, 삶의 양식 자체가 다르다. 소비가 아니라 ‘생산’이 주생활이다. 쌀, 배추, 파, 무, 감자, 고구마, 가지, 들깨, 참깨, 보리, 콩, 호박, 오이, 복숭아, 앵두, 도라지, 더덕, 땅콩, 잣, 대추, 밤, 떡, 심지어 닭고기까지! 집에 다 있다. 그리고 몸이 아프면 호들갑 부리며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는 게 아니라 몸이 스스로 치유되기를 충분히 기다린 후 병원을 찾는다. 아픔을 아프다 표현하지 않고 ‘아프구나…….’ 하고 저 멀리서 아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고 해야 하나? 모든 게 달랐다. 한마디로 돈을 쓰고 싶어도 쓸데가 없다고 표현하면 이해하실까?
그제야 알았다. 내가 ‘도시 촌놈’이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몸으로 부딪혀 가며, 모내기하고 도리깨질하고 나물 뜯으러 다니며 진짜 공부를 했다. 아니 하고 있다. 도시는 ‘소비’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쌀도 당연히 사 먹어야 하고, 심지어 친구와 수다를 떨려면 커피라도 사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보이더라. 내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연수가 얼마나 ‘소비적’이었는지를 말이다. 좋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쪼르르 달려가고, 또 달려가곤 했었지. 그런들 내 것이 생기나? 아니지. 남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 생기게 하려면, 남이 만든 것을 돈 주고 살게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들어야지. 곶감을 장에 가서 사오는 게 아니라, 감나무 심어서 키우고, 감을 따서 깎고, 실로 꿰어 매달고, 바람 통하게 비 안 맞게 잘 익나 매일 살펴봐야지. 색깔 좀 거멓고 파는 것처럼 모양은 안 나와도, 내 손으로 만들어 내가 먹어야 진짜 내 것 아닌가.
남의 것을 아무리 가져다 쓴들 내 것이 되던가? 흔히 우리들끼리 ‘연수 약발이 떨어졌다.’는 농담을 하곤 한다. 연수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수’조차 외부에 의해 처방받는 것이고, 그 약은 유효기간이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복용해야 된다는 것. 그것도 ‘돈’을 내고 말이다. 배움을 가르치는 선생이 배움을 돈을 주고 남에게 사야 한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배움과 강의식 연수의 본질, 이 둘은 크게 다르다.
극단적인 예로 돈을 주고 듣는 연수를 설명했지만, 사실 ‘소비’라는 활동의 기준이 돈을 지불함에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가 없어지는 행위 자체를 소비라고 보면 될 듯싶다. 그래서 재미있는 TV프로그램을 찾아보고, 감동적인 설교를 찾아가듣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수업을 찾아 수강하는 그 모든 행동 역시 소비에 해당한다. 남이 만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는 이런 받아들임은 언뜻 주체가 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가 아니라 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저 프로 재미있네. 저 목사님 오늘 설교 좋았어.” 그리고 끝. 더 이상의 고민도 성찰도, 그 어떤 생각도 뒤따르지 못한다. 그리고 일반인의 선택을 많이 받아야만 결과적으로 살아남기에, 수많은 프로그램과 영화와 설교와 강의들은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하는데, 그 방향은 슬프게도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시각과 청각과 감성을 지독하게 자극하는 지점을 향해 내달린다. 말초적이라는 단어를 써도 될까. 인간의 말초적 감각과 본능을 자극하는 수많은 소비거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게 포르노와 본질이 뭐가 다른가 싶기도 하다. 포장만 교양 있고 성스럽게 싸여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소비’라는 중독뿐. 그리고 배움을 실천해야 하는 교사 역시 ‘공부’라는 이름으로 연수라는 소비문화에 젖어들고 있다. 스스로 배우지 못하고 스스로 공부하지 못하니, 우리의 수업이 주입식 교과서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일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서근원 선생님의 ‘놀자모임’에서 그렇게 깨졌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유독 세미나식으로 진행되던 그 모임에 나는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다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나만 꿀 먹은 벙어리였으니 당사자도 보는 사람도 참 답답했겠다 싶다. 되돌아보면 유년시절에 나는, 꽤나 순종적이고 ‘내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답답함의 극치를 달리던 모범적인 자녀요, 학생이었다. 사춘기조차 제대로 겪지 못하고, 연신 ‘네, 네’라고 말하며 의자에 앉아 다음 시험을 준비하던 삶을 살았으니,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길조차 타인에게서 찾아왔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면 나 연수 중독자 맞구나 싶어 머쓱한 웃음만 나온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나님
그렇게 삼십이 넘어서 비로소 남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닌, 내 발로 직접 여행길을 찾아 나서 본다. 굳이 따지자면 이걸 ‘진짜 공부’라고 이름 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서는 자격증 따고 철학책 읽고 세계여행하고 박사 학위 따는 걸 소위 공부라고 말하지만, 내게 있어 공부는 모르는 세상을 만나는 일, 나를 버리고 내려놓고 낯선 사고방식과 생활과 문화에 조금씩 젖어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없어지지 않는 진짜 행복을 찾는 것이 작은 꿈이다.
이 길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신랑과 아이를 만났고, 동네 이웃을, 동료 선생님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 따뜻해지는 고마운 이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중 한 분이 바로 권정생 선생님이다. 비록 책으로나마 뵈었지만 그냥 그 순간 알았다. 마음에 오래도록 지녀야 할 분이라는 걸. 어찌 한평생을 그리 사셨는지. 어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냈는지. 그냥 생각만 해도 마음이 먹먹하다.
그를 정말 제대로 만나게 된 건 『강아지똥』도 『몽실 언니』도, 안동 답사에서도 아니었다. 산문집 『우리들의 하나님』을 통해서였다. 작가라는 이름보다는 그냥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이리저리 풀어낸 글을 만나며, 그가 왜 『강아지똥』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 아주 조금씩 깨달아 간다.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중략)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 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우리들의 하느님』 20쪽)
 
이렇게 모든 생명에 대한 한없는 가여움이 있었기에, 저자는 늘 괴로워했던 듯싶다. 한살림에서 무공해 식품을 사 들고, 가까운 이웃끼리 서로 사고팔고 주고받으며 살아야 하는데 그리 하지 않았음에 마음 갑갑해 하기도 하고, 눈물로 얼룩진 새벽기도가 사라진 교회와 생식의 절차조차 인간에게 빼앗겨 버린 태기 암소의 눈물, 이웃 농사꾼의 자살 소식에 마음 치며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 삶이었기에 책 곳곳의 말들은 울림 속에 살아남는다.
 
“모든 물질은 이 세상 모든 생명들이 각자의 몫이 골고루 나뉘어졌을 때 진정한 축복이되는 것이다.”(34쪽)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대학입시에 수석합격 했다고 감사하고(중략) 이런 감사는 모두가 이기적인 감사다. (중략)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못되는 것을 생각하면 어찌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런 감사를 하느님은 절대 기뻐하지도 바라지도 않으신다.”(51쪽)
“평화는 고요히 소리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나누고 힘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괴로운 세상이다.”(64쪽)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내가 쓰고 있는 작은 물건이라도 혹시나 남의 몫을 내가 쓰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내가 두 그릇의 물을 차지했을 땐 누군가가 나 때문에 목이 말라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76쪽)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자는 묻는다. “인간이 과연 가장 진화한 동물일까?” 아.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모든 생각을 가지고서 지금과 똑같은 내일을 보낸다면 이건 정말 대단한 자기모순이요, 자신을 하느님을 배반하는 삶이 아닐까 두렵다. 적어도 나를 엄마라 부르는 아이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과는 ‘남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 뭔지 고민해 봐야겠고, 적어도 공부를 ‘소비’하지 않도록 도와야 할 텐데, 머리가 복잡하다. 삶으로 살아내는 진짜 공부는 이제 시작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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