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상품 검색

장바구니0

특집 생각하는 노동은 어떻게 가능한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3-16 01:31 조회 6,440회 댓글 0건

본문

정희진 여성학・평화학 연구자,『정희진처럼 읽기』 저자
 
공부는 생각하는 노동
평생학습, 정보 획득, 취미, 직업, 입시, 득도, 마음가짐, 경험 등 공부의 용례는 다양하다. 운동선수나 예술 분야 전공자들의 연습도 고된 공부지만 이를 다 다루려면 글의 범위가 넓어지므로, 여기에서는 책 읽기나 쓰기와 관련한, 소위 ‘인문학’ 공부에 한정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공부에 대한 한·중·일 3국의 한자는 각기 다르다. ‘工夫’(한국),‘勉强’(일본), ‘学习’(중국).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한자가 공부의 본질적인 의미에 가장 가깝다. ‘工’은 ‘노동’이고, ‘工夫’는 ‘노동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노동의 달인이다. ‘工夫’는 미국의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즈의 유명한 정의, “지식인은 장인(匠人, craftsman)”과도 조응한다.
공부는 몸의 행위, 노동이다. 그 기본은 흔히 ‘엉덩이 싸움’으로 불리는 ‘몸의 훈육(訓育, discipline)’이다. 공부에 있어서 열매를 맺으려면 성실성과 어느 정도의 절대적 시간이 요구된다. 그리고 공부는 확실한 동기, 집중력, 지루함과 외로움을 견디는 능력, 자기관리, 섬세함 등을 필요로 한다.
공부의 근본적인 정의는 생각하는 노동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몸으로 하는 것이다. 선생님, 연구자, 학자라는 표현을 넘어 사상가(think/er)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공부를 한다. 사상가라는 말이 스피노자, 푸코, 니체 등을 떠올리게 해서 거창해 보이지만, 사상가는 단어 그대로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다. 즉, 자기만의 사유 방식, 체계, 입장을 추구하고, 자신만의 렌즈로 현실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다. 전례가 없는 노동을 혼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어떻게 가능한가.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생각하지 않음이 폭력이다”는 맞는 말이다. 동시에 생각하는 행위는 폭력적인(violent) 과정이다. 왜냐하면, 생각은 대상과의 갈등(against) 상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자극적이고 격렬하고 불편하고 신경증적이고 괴롭고 긴장되는 마음의 분란을 동반한다. ‘마음의 평화’는 공부와 가장 거리가 멀다.
생각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생각은 그 자체로 새롭고, 사유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하고 공부할수록 무지에 대한 공포는 상승한다. 스스로가 작아지고 우울해진다.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해서 계속 자기의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물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면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공부에 대한 오해와 문제
우리 사회에서 공부는 입시, 엘리트주의 등으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교육의 문제는 다양한 척도의 부재(입시 ‘제도’) 때문이지,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입시 위주의 공부는 말 그대로 시험을 위한 것이지 공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입시 성적이 좋다고 해서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시간 강사 노릇을 십여 년 하다 보니 중・고교 교육의 문제가 보인다. 요즘 학생들은 대개 학점이나 스펙은 좋은데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또한 공부에 대한 의지와 노력은 대단한데, 공부를 좋아하거나 잘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자본 중심의 여론은 “대학에서 뭘 가르치냐? 현장에 바로 투입할 인력이 없다, 기본기가 안 되어 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시비를 떠나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학교와 군대가 노동자를 양성하여 자본에 인력을 공급한다는 근대 초기의 발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현행 제도 교육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양성하지 못하고, 기업이 원하는 인간형도 공급하지 못하는 ‘독특한’ 시스템이다.
입시 공부로 대표되는 공부의 목적은 지식과 정보의 습득(習得)이다. 이런 인식이 가장 일반적인데, 이는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다. 대학 입시나 입사 시험 공부의 경우 합격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위한 습득에만 치중할 뿐 공부의 대상인 지식의 성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공부가 성적으로 수량화될 때 “공부를 잘한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 사회 문제의 근원이자 공부에 대한 개념 중 가장 오해된 이런 공부는 실력이나 공부(工夫)를 의미하지 않는다. 제도적 절차, 그것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입시 제도는 평생을 좌우하는 신분으로 작용한다. 학생들은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부정의를 체득하기 시작한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한 인간의 총체적 능력으로 인식되고, 학연을 통해 사실처럼 ‘증명’된다. 계급의 학벌화, 학벌의 계급화, 학벌 계급의 인종주의화가 되는 것이다.
통념과 달리, 공부 잘하는 사람이 좋은 직장과 배우자를 얻는 것은 아니다(기업의 인사 담당자나 커플 매니저에게 물어보라). 쉽게 말해, 누구나 알다시피 ‘좋은’ 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직장 생활의 성취나 인생의 행복은 공부보다는 자기 재현, 즉 개인의 노동의 질에 달려 있다. 공부를 못하면 취직이 안 된다고? 어느 곳에서라도 인정을 받아보라. 금세 스카우트된다. 물론, 학력과 학벌에 대한 차별은 심각하다. 그러나 당신이 고용주라면 학력이 좋은 사람을 원하겠는가, 일 잘하는 사람을 원하겠는가. 자본주의, 더구나 ‘신자유주의의 합리성’은 ‘실력자는 누구나 알아본다’는 점이다. ‘공부해서 남 주자.’라는 말도 틀렸다. 사회에 기여하는 공부는 목적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다.
 
어떤 공부가 필요한가
요즘 대학에서 인문학은 망해 가는데, 재벌들의 조찬 모임이나 지역 도서관의 인문학 강좌는 성황이다. ‘대중 인문학’은 인문학이다/아니다, 순기능이 있다/없다 차원의 이슈가 아니다. ‘대중 인문학’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현상은 인문학의 부흥을 가져온다는 착각을 일으킬 뿐, 공부와 앎을 생산하는 체제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반(反)공부’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
며칠 전 나는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지역 도서관에서 ‘인문학의 개념’을 주제로 강의하다가 소설 『토지』를 만화책으로 읽는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많은 청중들이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만화로라도 읽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반론을 폈다. 이는 남이 소화해 줘서 먹기 좋게 다시 시장에 내놓는 지식, 미국 잡지 제호이기도 한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다. 소화와 소개의 어중간한 인문학 기능 비판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론은, “공부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을 높이는 순기능을 한다.” 라는 것이다.
‘대중 인문학’의 문제는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 일반인이냐 대학원생이냐, 공부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학교냐 길거리냐의 문제가 아니다. 공부라기보다는 ‘힐링’으로 변신한 인문학이 ‘마음의 평화’를 유동식으로 입에 넣어 주는 데에 있다. 인문학은 유동식이 될 수 없는 ‘괴팍한 기본적인 먹을거리’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현재의 세태는 혹세무민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공부하기 싫을 때, 생각하기 싫을 때 하는 말이 무엇이던가. “모든 것을 잊고 마시자”, “일단, 생각은 끄고!”
새롭지 않은 공부, 생각하지 않는 공부라면 왜 해야 할까. 공부가 어렵다? 이는 생각이 불편함(문제의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상과 기존의 언어가 일치할 때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기 경험과 규범(이데올로기)이 불일치할 때는, 자신과 세상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든 타인을 설득하든 새로운 생각을 찾아야 한다. 갈등은 현실과의 불화에서 시작된 문제의식이다. 만족과 평화, 안락은 무지의 첫 단계이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인생의 상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탐구와 그로 인한 차별의 고통이나 상처에서 사유가 시작된다. 건물은 안이 아니라 밖에서만 보인다. 자신, 사회, 타인의 생각을 분리할 줄 아는 능력은 자신만의 사회적 위치에서 사물을 볼 때 가능하다. 이때 고통과 상처는 약자의 상징이 아니라 타자가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자원이 된다. 흔히, 예술가들이 창작열이 고갈될 때 연애를 하는 것은 사랑만한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지식의 습득으로서 공부’와 ‘생각으로서 공부’의 결정적 차이는 정치적 입장(stand point)의 유무다. 결과론으로 볼 때, 가장 큰 차이는 생산성이다. 전자는 생산력뿐만 아니라 효율성도 없다. 기존의 것을 반복할 뿐이다. 자본이 창의력 있는 인재를 진보 진영이나 예술가, 작가, 학자보다 더 선호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독특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 가장 환영받아야 할 사회운동이나 학계에서 오히려 왕따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공부와 도서관–어떻게 그리고 어디서의 문제
미셸 푸코가 미국에 초청 강연을 갔을 때, 미국 도서관의 장서에 압도되어 공식 일정을 미루고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이 몰랐던 책을 찾기 시작했다는 일화는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 책과 도서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책이 있는지 깨닫는 방법은 인터넷 검색이나 추천, 소개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내게 필요한 책이 있고 그것을 찾고자 한다면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상관없다. 그런데 어떤 책이 자신에게 필요한지 모를 경우,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거대하게’ 진열된 서고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도서관은 내가 책을 선택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책이 나를 선택할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개가식 운영과 책의 가시성이 중요하다.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과 도서관의 가장 큰 차이가 이것이다. 온라인 서점은 책을 사는 곳이지 읽는 곳이 아니다. 장서(藏書)나 장서가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서관의 기능은 공간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공부는 철저히 사회적, 커뮤니티의 산물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다. 공부하는 몸은 타인에게 이전, 양도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간단한 사실을 잊는다. 개인적 훈육으로서 공부는 도서관 문화에 익숙할 때 훈련된다. 공부의 조건은 물론 사회적(계급적)이다. “개천에서 용이 난”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개천에서’ 공부하기를 권한다. 그나마 공부가 가장 평등하다. 다른 일에 비해서는 비교적 적은 비용이 들고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라면 자원이 없는 모든 ‘을’도 공부(工夫)가 될 수 있다. 도서관이 공공 서비스의 기본인 이유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개인 서재보다 도서관이 더 경쟁력 있다.
목록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물 검색

회사소개 개인정보 이용약관 광고 및 제휴문의 instagram
Copyright © 2021 (주)학교도서관저널.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