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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무엇을 읽느냐보다 어떻게 읽느냐를 고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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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4-07 23:19 조회 5,96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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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래 작가・대학강사, 『책의 정신』 저자


도서관은 꿈꾸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내가 책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바탕으로 강의를 시작한 것은 대략 2005년부터였다. 느티나무도서관에서 장서개발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고 답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고전이 ‘무조건 좋은 책’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었고, 어린이 책의 경우에는 권장도서목록이 도저히 좋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자신이 재미있게 읽은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먹는 것으로 치면 날마다 먹는 밥상이 보약이다. 어떤 책이 재미있다면 그 책의 주제가 현재 자신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이다. 그 관심이 책의 내용을 잘 소화하게 해 준다. 그러나 책 한 권 한 권은 모두가 하나의 편견이므로 자기에게 재미있는 책만 읽으면 편협해질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보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 훨씬 더 위험한 것이다. 이때 ‘한 권의 책’이란 물리적으로 딱 한 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권을 읽었다고 해도 늘 비슷비슷한 책만 읽는다면 한 권을 읽은 것이다. 그래서 독후감을 쓰는 일과 그 독후감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토론해 보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게 소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자신의 독후감에 공감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의 생각에 자신감이 생긴다.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이유를 자세히 들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이유에 공감이 가면 편협함이 조절될 가능성이 생긴다. 이렇게 보면 책 한 권을 다 읽는 시점은 자신의 독후감을 바탕으로 한 토론이 끝나는 때이다. 이런 방식이 더 좋은 이유는 독서가 자발적이고 즐거운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런 내 관점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2012년에 인천과 서울에서 ‘책을 보는 열 가지 관점’에 대한 12회 시리즈 강의를 시작하면서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2013년 12월, 그 내용을 담은 『책의 정신–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이 출간되자 거의 모든 언론에서 대서특필했다.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데 대략 8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내가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서도 내 생각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거나 도서관이 존재하는 이유가 이상(ideal) 때문이라고 본다.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서울모임에서 쓴 『북미 학교도서관을 가다』(우리교육)라는 책을 읽어 보면 매우 공감이 간다. 2012년에 출간된 이 책을 읽은 첫 느낌은 ‘꿈같은 세상의 이야기’였다. 다 읽고 행복했던 이유는 교사들이 북미의 학교도서관을 보면서 한국의 현실에서는 도무지 조금도 적용할 수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써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한 반의 아이들 숫자가 대략 16명, 사서교사 2명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독서교사 2명이 있는 초등학교가 나온다. 교과서가 따로 없고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교과교사와 사서교사가 함께 고민해서 커리큘럼을 만든다. 학교도서관의 존재 이유와 사서교사의 역할이 분명한, 이상적인 모습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학교도서관이 지향해야 하는 모습을 다 찾아볼 수 있다. 학교 교장은 “아이들로 하여금 시키는 대로, 배우는 대로가 아닌, 새로운 발견에 대한 두려움 없이,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그리고 읽어야 할 책을 정할 때 ‘설문조사에 기초한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 목록’도 참고한다. 그들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학교도서관 현실은 어떤가? 전국에 있는 학교도서관은 11,461개이지만 사서교사는 고작 724명에 불과하다(2011년 통계). 그렇다고 사서교사를 충원해서 도서관다운 도서관으로 만들 생각도 전혀 없어 보인다. 2011년 사서교사 임용 0명, 2012년 사서교사 임용 1명, 2013년 사서교사 임용 0명! 이런 현실을 볼 때 한국의 학교도서관은 겨우 연명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도 학교도서관 담당교사들은 왜 아주 딴 세상인 북미의 학교도서관으로 여행을 다녀왔으며, 그곳에서 본 학교도서관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
잘못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변혁의 꿈을 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가. 대략 10년 동안 도서관의 숫자나 장서 숫자는 두세 배로 늘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맨땅에 헤딩하며 열심히 일했던 이상주의자들이 없었다면 이런 결과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도서관 문제라면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도서관은 이상주의자들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의 장서 구성 역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상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 방향으로 조금씩이라도 나아가야 한다.
나는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독서운동열풍에 대해 비판적이다. 꿈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과도 좋지 않다. 그 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지금 20대들은 책을 즐겨 읽는가? 그렇지 않다. 책을 즐겨 읽는 아이들은 더욱더 ‘희귀동물’이 되었다. 2009년부터 나타난 통계를 보면 50대, 60대의 독서율이 대단히 높아졌지만 20대의 독서율은 10% 정도나 떨어졌다. 성인의 일반도서 독서량은 또 어떤가? 50대, 60대의 독서율이 그렇게나 높아졌는데도 불구하고 이 수치는 1980년대, 그러니까 독서운동열풍이 불기 시작했을 때보다 더 낮은 수치로 떨어졌다. 그리고 2012년의 출판통계를 보면 전년보다 총 발행부수가 20%, 발행종수가 10%가 줄었다. 역사 이래 최초로 그렇게나 많은 어른들이 참여하고 엄청난 재원을 쏟아 부었음에도 결과는 이렇게나 참담하다.


그래서 책보다 더 소중한 것을 먼저 챙기자고 제안한다
독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나는 도서관운동을 하면서 부모들이 가진 사명감이 결과적으로 아이들을 괴롭히게 되고, 관계마저 해치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그것은 앞뒤가 바뀐 일이다. 독서는 행복하게 잘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독서 때문에 ‘잘 못 살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또 그런다고 아이가 독서를 계속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 자발적으로 독서에 빠져들기 시작한 아이가 아닌 경우, 그 아이들은 선택의 자유를 가지는 순간 독서를 버린다. 그것은 통계에서도 증명이 된다. 독서량을 보면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어쨌거나 한두 권이라도 책을 읽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는 순간 독서량은 거의 제로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책을 읽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는데도 책을 읽는 아이들은 희귀동물이거나 멸종예상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독서를 통해 얻는 세 가지 즐거움을 생각해 볼 때 권장도서목록으로 상징되는 강압적인 독서의 효과에 대해서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독서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이 이야기는 처음 선생님이 된 아들에게 해주었던 것이다.
아들은 뮤지컬 배우이며 연기선생을 한다. 그가 처음 연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던 어느 날 가르치는 학생에 대해 말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시범을 보여줘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학생이 있다며 난감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무엇인가를 가르쳐 보면 그런 학생이 꼭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는 쉽지 않다. 좀 드문 경우일지 모르지만 학생이 선생의 어법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러기도 한다. 그러니 학생이 바보라서 그렇다고 생각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부드럽고 따뜻한 말로 여러 번 설명해 봐라. 그런 다음 싫은 내색을 조금도 보이지 말고 열 번이라도 시범을 보여라. 그래도 안 되겠다 싶으면 포기하더라도 마지막으로 절대로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바로 선생이라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어떤 인간관계에서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거기까지 한다면 너는 좋은 선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모든 선생님들이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서선생님이라면 다 그랬으면 좋겠다 싶다. 현재의 교육 환경에서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은 책 자체보다 사서선생님을 좋아하면서 시작될 확률이 높다.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열정적으로 하게 되는 이유는 둘 가운데 하나다. 스스로 재미를 발견하고 빠져들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즐겨 읽지 않는 아이가 스스로 책을 즐기게 될 확률은 매우 낮다. 책을 즐기기 위해서는 다른 수동적인 미디어와 달리 지식과 경험 그리고 사회적인 기호에 대해서도 좀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책 읽기를 통해 얻는 즐거움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좋아하는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두 번째는 책을 읽고 받은 감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그 감동의 실체를 생각해 보는 즐거움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아이들에게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런 선택권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런 현실 속에서도 학교도서관이 제 역할을 해 주길 바라기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재미있는 책 읽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은 이유
책 읽기를 통해 얻는 즐거움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좋아하는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두 번째는 책을 읽고 받은 감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무언가에 감동했을 때 그 감동을 표현하는 일은 감동 그 자체만큼이나 즐거운 일이다. 즐거움을 나누면 두 배로 커지고, 그러지 못하면 반으로 줄어든다. 세 번째는 그 감동의 실체를 생각해 보는 즐거움이다. 세 번째 즐거움은 책을 읽은 뒤에 쓴 독후감에 대한 토론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책 읽기 역시 놀이의 한 종류이다. 놀이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활동이며 즐거움과 재미의 원천이어야 한다. 그런 놀이라야 아직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 대한 간접경험이 된다. 놀이는 그 과정을 통해서 장애를 극복하거나 어려움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준다. 억지로 해야 한다면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은 구속이 될 것이다. 책 읽기가 놀이가 되려면 책을 읽는 사람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선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강의할 때 내가 이렇게 말하면 난감한 표정으로 바뀌는 사람들이 있다. 비디오나 게임 등 다른 재미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책을 읽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오해가 있다. 첫 번째는 책이 다른 놀이보다 재미없는 것이어서 어떻게든 습관을 들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아이들이 텍스트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 오해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자. 만일 무인도에 아주 재미있고 두꺼운 책 한 권과 비디오 한 편, 게임 하나가 있다고 하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마도 책을 보고 있지 않을까? 책을 다 외웠다 해도 그 즐거움은 다하지 않을 것이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체스 이야기』에서 어느 정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설의 등장인물 B박사는 나치에 의해 아무것도 없는 호텔방에 갇힌 채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아무런 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볼 것도 없는 완전한 무(無)의 상황에서 지내는 일은 끔찍한 정신적 고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문을 받으러 나갔다가 책 한 권을 훔친다. 그 책은 비록 체스 기보에 지나지 않는 건조한 책이었지만 그가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책이 재미있다는 증거는 현실에서도 발견된다. 2012년에 한국에서는 뮤지컬 공연과 영화로 제작된 <레 미제라블>이 대단히 큰 성공을 거뒀다. 그 공연과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소설 『레 미제라블』을 읽었다. 2013년 5월에도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가 영화로 상영된 뒤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이런 종류의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만일 영화나 공연이 책보다 훨씬 더 재미있어 그것으로 충분했다면, 그들은 굳이 책을 읽으려 하지 않았을 텐데, 왜 다시 책을 읽고 싶었을까? 단순히 책이 더 재미있어서라고 말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분명 다른 종류의 재미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텍스트를 좋아하게 되는 것일까? 아이들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대개 엄마의 달콤한 목소리를 들으며 시작한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엄마의 목소리가 좋은 것이다. 사실 아이들은 대략 열 살이 되기까지 어른들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삶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모자랄 뿐 아니라 아직 어휘력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아이들 눈높이로 대화를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무엇보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정확한 눈높이를 알 수가 없다. 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2011년 10월 24일에 EBS에서 방영된 <언어발달의 수수께끼–1부 아이는 어떻게 말을 배울까>를 보면 24개월 된 아이의 어휘력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볼 수 있다. 더 많은 어휘를 듣고 생활한 아이일수록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많은 어휘를 알고 있었다. 엄마가 아이와 대화할 때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가 곧 아이의 어휘력 차이였던 것이다. 엄마가 두 배나 다양한 어휘를 사용한 경우, 아이가 알고 있는 어휘 수는 또래 아이들 평균보다 세 배쯤 많았고 어휘를 인식하는 속도도 매우 빨랐다. 그러면 두 엄마 가운데 누가 적절한 눈높이였을까. 그것을 알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아이의 반응만으로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24개월 된 아이가 얼마나 많은 어휘를 아는지, 얼마나 빨리 어휘를 인식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전문가가 필요한 장비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언어와 관련된 아이의 학습 잠재력을 도대체 누가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 다큐는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외국어인 영어를 배울 때 생기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설득력 있게 다루고 있는데, 그것 역시 호기심과 즐거움이 깊은 관계가 있다. 아이는 보통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 언어를 배워나가는데, 억지스러운 영어 ‘공부’는 아이의 지적인 발달까지 방해한다.
아이들이 텍스트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도 비슷하게 이해해야 한다. 텍스트는 말과 달리 학습하지 않고는 즐길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아이가 텍스트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책 읽어 주기에서 비롯된다. 아주 어린 아기일 때 아이는 책을 읽어 주는 것인지 그냥 엄마의 이야기인지도 모를 것이다. ‘좋아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흠뻑 젖어들 뿐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엄마가 책을 읽어 주는 것을 보고 자라는 동안 아이는 엄마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책에서 나오는 것인 줄 알게 된다. 그렇게 자라다 보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것이다. 엄마가 책을 펼쳐 읽기만 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시작되니 얼마나 신기하겠는가.
세월이 더 지나면 아이는 엄마가 읽는 재미있는 책을 직접 읽고 싶을 때가 온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글자를 가르쳐 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엄마는 아이에게, 네게 책을 읽어 주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에 천천히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아이의 호기심이 강렬해지기를 기다리며 조금씩 가르쳐 주면 아이의 배우는 속도가 빨라지고, 글자를 배우는 일을 재미있어 하게 된다. 그렇게 텍스트의 세계로 발을 내디디기 시작한 아이는 책을 읽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즐거움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다른 어떤 매체에서도 얻을 수 없는 아주 다른 종류의 것이며 중독성까지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책을 읽어 주는 부모’를 가지지 못했던 아이들이 ‘책 읽어 주는 목소리’를 통해 책을 읽게 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 경우도 역시 남이 들려주는 목소리의 달콤함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책 읽는 방법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 아이에게 책을 읽어 줄 때는 그저 따뜻하고 부드럽게, 평상시의 말투로 읽어 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 아이는 텍스트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연동화 식으로 읽어 주면 텍스트에 집중하기보다는 ‘소리와 연기’라는 다른 구경거리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면 텍스트를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상상하기 어렵다. 아이들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면 도서관의 모든 행사가 텍스트에서 시작해서 텍스트로 돌아가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도서관에서의 즐거움은 책 읽기여야 하고 책 읽기의 즐거움은 텍스트를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상상하여 구체화하는 데서 얻어야 한다.


책을 읽은 뒤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책을 즐겨 읽는 아이에게도 독후감에 대한 부담은 꽤 클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독후감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즐겁거나 슬플 때, 또는 싫을 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책을 읽고 느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부담스러운 이유는 감동이 없는 책에 대해서도 억지로 독후감을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혼자 보게 되었다고 하자. 그 경치를 음미하며 감탄한 다음에 무얼 하는가? 대개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그것을 누구에겐가 보여주면서 자기의 느낌을 말한다. 그런 것이 바로 독후감이다. 저절로 넘쳐 나온 감동을 표현한 것이다. 특별한 형식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고 해도 억지로 끌려간 곳이라면 감동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심한 경우에는 다시 가보고 싶지 않은 곳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말도 하기 싫을지 모른다.
책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자발적으로 그 텍스트에 빠져들어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권장도서목록과 같은 것은 독서를 괴로운 경험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좋은 경치라고 해도 끌려가서 감동하기는 어렵듯이 아무리 좋은 책도 억지로 읽고 감동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 세상 모든 책은 하나하나가 다 하나의 편견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고, 쓰고 싶은 것만 쓴다. 사실은 없다. 해석만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해석조차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는다.
과학조차 그렇다.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증명한 내용이 바로 그것 아닌가. 실험을 통해 과학 이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 이론이 실험을 만든다. 그런 과학적인 실험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더 합리적이며 새롭고 혁명적인 발견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나마 가장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구조를 가졌다는 과학이 그런데 다른 분야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편견에서 벗어나는 길은 수많은 편견을 접함으로써 해소된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면 주변 사람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 친구를 만나 말로 길게 설명해도 좋다. 페이스북에 올리거나 카카오스토리 같은 곳에 글을 올려서 친구들의 반응을 볼 수도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내 생각과 비슷한 경우를 확인할 수도 있고, 내 생각과 다른 경우와 맞닥뜨릴 수도 있다.
이 세 번째 단계의 즐거움이 매우 중요하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내가 가진 편견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까지 배울 수 있다. 만일 그 사람이 내가 닮고 싶은 형이나 누나, 선생님이라면 내 생각도 변하고 독서의 방향도 조정될 것이다. 이렇게 독서의 세 가지 기쁨을 생각해 보면 한 권의 책을 제대로 다 읽는 시점은 내 주변 사람들과 소통이 끝나는 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회를 조직하고 잘 운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조심할 것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독서회가 아니라 친목회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정하고 좋으나 싫으나 모두가 다 함께 읽고 토론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발표자는 책의 내용에 대해서나 독후감을 자세히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그 외 참석자가 그 내용에 대해 토론하는 방식이 훨씬 더 좋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직접 자신의 책을 골라야 하고,
즐거운 책 읽기와 자발적인 독후감과
토론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듯이
독서의 방향도 잡아나가야 한다."


토론까지를 책 읽기라고 생각하면 장서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의 독서는 ‘재미있는 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로맨스 소설은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데 아주 특별한 효과가 있다. 로맨스 소설에는 무조건 사랑받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면 자신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된다. SF소설은 현실의 부조리를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그리고 그 재미있는 책이 어떤 것이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마음껏 표현할 수 있고, 토론(소통)이 가능하다면 누구든 스스로 옳은 길을 찾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피그말리온 효과에 대한 믿음은 이럴 때 필요하다. 아이들이 스스로 옳은 길을 찾아갈 것이라고 믿어라. 아이들은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된다면 학교도서관 장서 역시 아이들이 재미있어 할 만한 책으로 채우는 일이 매우 중요해진다. 내가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현재의 권장도서목록의 책 가운데 ‘재미있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책에 흥미를 잃은 아이들은 비디오나 게임에 빠진다. 재미없는 책보다 재미있는 미디어를 즐기는 것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을 아는 아이들은 ‘일본만화나 일본 작가의 학원물’에 빠져든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이 직접 창작한 이야기를 즐긴다. 나는 사서선생님이 아이들과 거리낌 없는 소통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런 다음 서로가 재미있는 책에 대해서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이런 효과를 노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김애란의 소설을 좋아한다. 그래서 한 제자에게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어보라고 권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제자는 정유정의 『7년의 밤』이나 『28』과 같이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 뒤에 경험해 본 바에 따르면 정유정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김애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나는 제자와 토론하기 위해 정유정의 소설을 읽었고, 제자 역시 김애란의 소설을 읽었다.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각자가 디디고 있던 다른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에 동의한다면 만화 역시 매우 좋은 독서 대상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2012년에 학교도서관저널에서 출간한 『만화책 365』는 학교도서관을 위한 아주 좋은 안내서이다. 말이 나온 김에 구체적인 분야에 대해서 몇 가지만 짚어 보자면 이렇다.
학습만화는 과학 분야의 것만 실제 학습에 도움이 된다. 과학은 그림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그 원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텍스트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추상적인 과목들은 그림으로 잘 설명될 수가 없다. 그림은 오히려 내용을 오도할 위험이 커서,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된다.
어린이를 위한 인문학 책이라는 것들은 믿지 말라. 대개의 경우 비판적인 내용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말을 하는 방식으로 쓰여 있다.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가가 필요하다면 역사책으로 채워라. 역사책은 독자로 하여금 인문학적인 판단을 하게 해주는 생각의 재료들이다.


어린이 책을 고를 때 다섯 가지를 잊지 말자
우리는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의 모습을 모른다. 미래학자들도 미래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기 어렵다고 발뺌할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떤 사회에서 살아갈지 모르는데 아이들에게 어떤 책이 좋을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결국 아이들이 직접 자신의 책을 골라야 하고, 즐거운 책 읽기와 자발적인 독후감과 토론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듯이 독서의 방향도 잡아나가야 한다.
두 번째, 우리는 이미 어린이가 아니다. 세 번째, 우리는 어린이의 마음을 잊었다. 네 번째, 우리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모른다. 어른들은 어린이의 행복을 위해서 좋은 책을 골라줘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
다섯 번째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지금 어른들은 어린 시절에 지금 나와 있는 어린이 책이나 청소년 책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옛날에 없던 책들이라고 봐야 할 정도로 형식과 내용의 질이 달라졌다. 지금 어른들은 경험해 보지도 않은 책을 자신들의 안목대로 고르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어른들이 책을 고르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해 보면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이 이야기를 하자면 또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이 최근에 출간된 졸저 『책의 정신–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을 권하면서 끝낼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서교사들이 책과 독서에 대해 공부할 때 꼭 읽기를 권하는 책이 더 있다. 페리 노들먼이 쓴 『어린이 문학의 즐거움』(2권, 시공주니어)과 『그림책론』(보림), 그리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예경)이다. 모두 깊이 이해하며 읽어야 할 책들이다.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면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문예출판사)도 읽기를 권한다. 그러나 이 책은 내용도, 번역도 난해한 편이다. 그 점이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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