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모퉁이 너머 가려진 세상에서 소통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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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5 11:29 조회 12,658회 댓글 0건본문
저자들과 기획자들의 서명이 책마다 빼곡하다. 돌아가면서 서명하는 일이 어지간히 복잡하다. 할 말 많은 사람들로 정체가 되면 불쑥, ‘소문 안낼 테니, 따로 만나든지, 원’ 눙치는 소리로 웃음바다가 된다.
집단지성의 품들로 만든 책 한 권 한권. 품앗이하듯 열일곱 명 저자와 대여섯 명기획・편집자들이 차려놓은 ‘상다리 휘어지는’ 밥상, 조촐한 출판기념회다.
한차례 눈 한차례 비, 계절은 봄빛으로 하루가 멀게 환해질 때, 세상은 ‘누구누구’의 출판기념회를 알리는 현수막과 신문광고로 떠들썩했다. 선거의 계절도 함께 찾아온 것이다. 그 출판기념회 요란한 ‘행사’가 가물어질 무렵, ‘소리 소문 없는’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농촌을 디자인하는 희망블로거』. 충남 예산에서 ‘블로그질’에 빠진 농민열일곱 명이 지은 책이다. 농촌, 디자인, 희망, 블로거. 서로 만나기 어려운 단어들이 만나 뿜어내는 묘한 기운과 책이름에서 갖가지 생각이 번지기 전에 이 책을 우리는 ‘블로그출판’이라 부르기로 하자.
출판기념회가 열린다는 예산군농업기술센터 어디에도 출판기념회를 알리는 표지가 없었다. 적막했다. 쿵더쿵 잔치마당을 생각하고 찾은 터라 그 적막은 불안한 느낌으로 번졌다. ‘혹시 시간과 장소를 잘못 안 건 아닌가?’라는 생각과 함께 걸음을 옮긴 2층강의실에서 비로소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2010년 e비즈니스 활성화프로그램’첫 강좌에 맞춰 출판기념회를 열기로 한 것이었다. 강의실에서는 수강생 열대여섯 명을 두고 젊은 강사 한 사람이 ‘소셜’이며 ‘웹그룹’, ‘네트워킹’, ‘트위터’ 같은 농업기술과 잘 어울리지 않는 용어들을 두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블로그 기반출판 2.0, 품앗이 출판의 실험
웹이라고는 이메일 주고받는 것이 고작인 사람들에게 강좌에서 오가는 말은 그저 입씨름일 텐데, 참가자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프로젝터로 투사하는 교육영상 또한 컴퓨터 기초반 수준이 아니다. 강사와 댓거리로 주고 받는 어휘들 또한 예사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참가자 모두 개별 블로그를 운영하는 농민들이다. 이름하여 ‘빌로거(빌리지 블로거의 약칭)’. 지난 가을부터 블로그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관계맺기를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도시는 이미 정보가 포화상태예요. 그 가득차고 꽉 막힌 것들에 활기를 불어넣고 숨통을 트이게 해야 했어요.”
말문을 연 이가 블로그출판을 기획한 강영미 씨다. 웹상에서 난무하는 이야깃거리들을 출판으로 연계하는 ‘블로고스(http://blog.blogos.kr)’가 이들의 시작이다. 그는 블로고스를 ‘블로그 기반 출판 2.0프로젝트’라고 설명한다. 풀어보자. 출판이되, 그 콘텐츠의 기반을 블로그로 한다. ‘2.0’은 웹2.0에서 왔을 터, 단방향이 아니라 서로 교섭하는 쌍방향이렷다. 그렇다면 블로그에 모인 사람과 정보가 어느 한 사람의 저자가 아닌 소통하는 여러 사람의 저자와 편집자를 통해 책으로 엮이는 것, 쯤이 된다.
블로고스는 그동안 네 권의 책을 펴냈다. 『2009년 블로그로 살아남다』, 『온라인 오프라인에 접속하다』, 『비즈니스2.0과 블로그』, 『맘블로거들의 아이 교육』이다. 특히 『2009년 블로그로 살아남다』 같은 책은 ‘블살다’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새로운 형태의 출판으로 회자되었다.
1 블로그 1 빌리지, 이야기를 유통하자
블로그 출판을 통해 초보 블로거들에 대한 안내서가 기획되자, ‘평평한 정보’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터질듯 넘쳐나는 도시의 정보소비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껴나 있는 지역으로 향했다. 높은 밀도에서 낮은 밀도로, 삼투압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그 출구를 농촌으로 잡는다. 그렇게 탄생한 기획아이디어가 ‘1블로그 1빌리지’운동이다. 한 농촌마을에 한사람의 블로거가 결연을 맺어 그들의 정보 생산과 집적, 유통을 돕는 방식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실질적으로 농촌살림에 기여하는 농산물의 유통이 있다. 이 이야기들이 블로고스, 브이코리아(http://vcorea.kr)와 링크나우(www.linknow.kr)에서 분분하자, 농촌블로거 한사람이 강좌를 제안하기 이른다. 그 강좌 제안은 예산농업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e비즈니스 과정’에 하나의 프로젝트로 닻을 올린다. 거기다 링크나우 블로그클럽 운영자와 회원들이 합류하여, 빌로거 양성강좌는 돛을 단다.
“지난해 10월 첫 만남이 시작되었어요. 이 분들이 한참 추수할 때여서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고단할 때였지요. 밤 작업 마치고 강의가 다 끝나갈 때 부랴부랴 오시는 분도 있었으니까요. 열의는 대단했습니다.”
가을걷이로 분주할 때, 책만들기 작은 씨앗을 뿌렸다는 이가 바로 강좌 코치 박종범 씨다. 박 씨는 행정안전부에서 운영하는 정보화마을 운영팀에 속해 활동하고 있다. 덕분에 그는 스스로 ‘농촌기획자’라는 소개말을 달고 다녔는데, 그 말이 씨가 된 것이다.
“벌써 e비즈니스 과정 3년차에 속한 분들이었기 때문에 강좌 접근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대신 생산물만이 아니라, 생산과정을 소비자와 공유하는 블로그식 접근부터 시작했단다. 이야기를 유통하자는 것이다. 그 유통과정에 함께 한 사람들이 유영진 대표를 비롯해 박종범, 강영미, 강진영, 현웅재 코치이다.
블로그 글쓰기, 생활의 중계
출판기획자와 농촌기획자들에게서 강좌가 시작되었으나, 처음부터 책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처음 마주한 문제는 ‘소통의 도구’다.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가’였다. 그 도구를 찾기 위해 지난해 첫 강좌는 참가자들의 농장을 찾아가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주말마다 조별로 모여 코치들과 농가 방문에 나선 것이다. 그렇게 만나 속 깊은 ‘이야기’의 바탕을 넓힌다. 그리고 블로그 식글쓰기의 비법이 차근차근 전수되었다.
“우리가 처음 접근한 블로그의 기반은 농산물을 유통하는 채널, e비즈니스 차원이었어요.”
강영미 씨는 생산자가 유통까지 챙겨야 하는 구조에서 기획된 강좌라고 말을 보탠다. 농사짓기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일이다. 거기다 스스로 판로를 개척하는 일이 더해졌고, 그 기반이 블로그다. 어떤 효율을 찾고 싶었다. 홍보전문가가 아닌 보통 농민의 입장에서 생산물의 가치를 알려야 한다. 그렇다면 ‘생산 결과물 자체에 대한 소개보다 봄부터 추수까지 생산 과정을 이야기로 담아가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계속 했는데, 글 써야 하는 이들이 농사에는 천하 없는 전문가지만,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데는 ‘초짜’다!
“농촌에서 맞는 순간순간, 산과 들에서 일어나는 소리며 움직임, 계절의 변화와 그 안에서 영그는 다양한 작물의 모습, 도시에서는 ‘체험관광’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거든요. 새벽에 일어나는 일부터 비 오면 비 온다고, 비 안 오면 비 안 온다고 하늘 향해 고민하는 한마디, 그것들을 그대로 옮겨보자고 했죠.”
이야기 들려주듯이, 일기로 옮기듯이 블로그를 통해 ‘중계’해 보자는 것이다.
주경야 블로그, 낮엔 농사밤엔 블로그
복사과, 이라이스, 은솔매, 동글맘. 강좌 참가자들의 책상에는 작은 노트와 필기구 말고 다른한 가지가 놓여있다. 사진기다. 사진의 구도, 포커스, 줌인 줌아웃 같은 사진의 기본기는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면서 차차 터득했다. 다듬지 않은 글과 사진으로 전하는 날것인 이야기에 먼저 적응하도록 길을 열었다.
“글을 블로그에 써놓고 시간 날 때 열어 보면, 꼭 틀린 글자가 있네유. 보일 때마다 틀린 글자를 고치기는 고치는디, 내 글을 퍼다 나르는 몇 군데 블로그가 있어서 문제가 쉽지 않단 말유.”
주변 사람들이 먼저 오탈자 이야기며 더 좋은 제목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한다는 이능원 씨.
그렇게 퇴고까지 블로그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품앗이 편집이다.
블로그‘질’을 통해 귀농에 자리 잡은 초보농부도 있다. 귀농 초기, 자신감에 가득 차 귀촌했어도 농촌살이 현장은 쉽지 않았다. 기획도 잘했고 수확도 좋았던 작목이 홍수출하로 헐값이 되었을 때, 별별 생각을 하며 무기력에 빠지고 말았다. 그 힘든 과정을 고스란히 블로그에 옮겨 수많은 후원자를 얻고 농산물의 판로를 열어갔다. 소외에서 소통으로다. 17인의 블로그에는 각 농가마다 독특한 살림살이 이야기와 농업과 농촌에 대한 독특한 생각이 낱낱이 담겼다. 도시의 소비자는 그 살림살이와 생각이 담긴 농산물에 더 먼저 손을 내민다. 올해 교육과정은 그 구체적인 실현과정이다. 열일곱 명의 저자들은 몇 년째 이어오는 주경야블로그晝耕夜blog, 낮엔 농사 밤엔 블로그를 올해도 이어간다.
빌로거 출판2.0, 희망블로거들의 이야기
트위터와 블로그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고 소통의 새로운 방식에 자신이 붙은 예산농부들과 코치들에게 ‘증거’가 필요했다. 출판이었다. 벌써 일과 생활을 글과 사진으로 차곡차곡 쌓아온 내공이 있지 않은가. 그 블로그의 글을 바탕으로 블로그 교육과정과 블로그를 통해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 말 1차 편집을 끝냈다. 표지 또한 여러 가지 시안을 만들어, 블로거들을 상대로 맹렬한 온라인 투표까지 벌였다. 이렇게 ‘광고’해대니, 책이 나오기 전부터 사전 예약자가 확보되었다. 출판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관통하는 행위다. 화면 너머가 아니라 손에 쥐는 한 권의 사물이다. 빛의 문제가 아니고 실재하는 색의 문제다. 제작 막바지에 문제가 생겼다. 책의 뒷부분 일부가 컬러 면인데, 인쇄소에서 전체를 흑백으로 인쇄한 것이다. 제작 처와 진행자들이 조금씩 손해를 안고 되물려 다시 제작했다. 그렇게 나온 책이 바로 『농촌을 디자인하는 희망블로거』다. 이 과정 또한 강영미 씨의 블로그(ppappi.net)에 고스란하다. 강좌 끝나고 저녁식사까지 마치고서야 조촐하게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책이 나오기까지 겪은 우여곡절 이야기가 오갔다. 둥글게 모여 서서 ‘사인’ 남기기행사가 이어졌다. 저자 열일곱 명의 책에 모든 저자의 사인이 서로를 격려하는 작은 문구와 함께 가득 채워졌다.
저가 가운데 한사람 ‘동글맘’ 김경희 씨(54세)는 얼마 전 트위터를 통해 땅 2,500평을 도시블로거들에게 내놓았다.
매물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 ‘상상공간’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나는 몇 평에 어떤 농사를 어떻게 지어, 어떻게 유통시
키겠다’ 등의 제안이 딸려야 한다. 블로그의 관계망이 이렇게 진화하고 있다. 그 관계망의 끝은 농촌블로거가 생산한 농산물의 소비에만 있지 않다. 글과 사진, 생활과 이야기의 공유, 나아가 눈앞에 실재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번지는 것이다. 거기서 새로운 글쓰기의 결과물이 무럭무럭 자라고, 멋진 열매로 맺힐 것이다.
“우선 제가 한 분에게 책을 드리면 그 분이 (책을) 다 보시고 블로그에 포스팅하고, 그 포스팅을 보고 신청한 다음 사람에게 책을 보내드리고, 또 그분이 다 보신 후 블로그에 포스팅하고……. 이렇게 하다 보면 조금 더 많은 분들이 책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서로의 글에 트랙백도 걸고요.”
박종범 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책읽기 확산’ 제안이다. 책의 홍보까지 블로그출판답다. 단, 이 책은 500부 한정판에 무가(無價)이다.
공부하기 싫고 책읽기싫은 아이 어떻게 해야하나
학교도서관과 독서교육 운동에 몸담은 지 올해로 10년째가 된다. 1998년에 발령받아 갔던 학교의 아이들이 유난히 마음에 상처가 많고 학습력이 뒤떨어졌던 탓에, 그 해결 방안을 찾아 헤매다 나름대로 발견한 해답이 ‘독서’였기에 자연스럽게 학교도서관 살리기와 독서교육 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10년. 한 길을 이만큼 꾸준히 걸었으면 이제는 이 방면에 웬만큼 자신감이 생길법한데 어째서 아이들을 대할 때면 늘 새삼스럽고 막막한지 모르겠다. 특히 수업 시간에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나 책이라면 만화책조차 싫어하는 아이를 볼 때면 참으로 마음이 무겁고 갑갑해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다 해서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을 터, 지난해부터는 직접 아이들과 부딪히며 방법을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침 당시 우리 모임(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서울모임)에서도 독서치료와 학습부진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터라, 2009년에는 각자‘학습부진아 독서지도 프로그램’이나 ‘책으로 마음열기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실천해 보기로 했다.
봉원중학교 ‘책으로 마음열기 반’은 이런 배경에서 출발했다. 주로 내가 수업 들어가는 반 아이들 중에서 학습능력이 부족하거나 독서를 싫어하는 아이, 독서는 좋아하지만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친구가 없는 아이들 가운데 희망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물론 희망자를 모으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책 읽기 싫어하고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가 매주 방과 후에 따로 남아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리는 없을 터였다. 몇 번이고 아이들을 불러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한 달여 노력 끝에, ‘적어도 한 학기 동안은 열심히 해보겠다’라고 약속한 아이가 일곱 명이었다. 이 아이들을 데리고 5월에서 7월까지 매주 목요일(행사일은 제외) 방과 후에 모여 한두 시간씩 활동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2학기 때 또 했으면 좋겠다고 하여 2학기에는 여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활동을 계속했다.
‘책으로 마음 열 기반’ 운영 목표와 원칙
‘책으로 마음열기 반’ 운영 계획을 세울 때,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현실적이고 실천 가능한 선에서 목표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구성원을 모으고 프로그램을 운영할 사람은 교사인 나지만 실제로 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고 완성시킬 주인공은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세운 ‘책으로 마음열기 반’의 운영 목표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이처럼, ‘책으로 마음열기 반’ 활동에서 주력한 것은 직접적인 성적 향상보다는 정서 함양과 독서에 대한 관심과 흥미 키우기였다. 본래 이 반을 운영하고자 했던 목적이 친구가 없거나 마음에 상처가 많은 아이들을 독서를 통해 위로해 주고, 독서를 좋아하게 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읽기 능력과 학습 의욕을 향상시키는 데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리되었다. 그리고 특별히 신경을 썼던 것은 매번 간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는데, 어른들도 그렇지만 십대 아이들은 더욱 더 ‘먹는 일’을 통해 화기애애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간식은 주로 과자와 빵, 음료수, 가끔은 피자를 제공했는데 간식비는 우리 학교 복지실에서 지원받았다).
또 아이들과 활동을 하며 스스로 주의했던 것은,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아이들 속도에 맞춰 걷자는 것이었다. 욕심은 화를 부르기 마련, 더구나 마음에 상처가 많고 공부하기 힘들어하는 아이일수록 급하게 열매를 따려 하지 말고 더욱 천천히,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렇기에 운영 계획을 세울 때 기획 단계에서부터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들을 목표로 세웠을 뿐 아니라 프로그램도 단순화하여 책만 바꿔가며 같은 활동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도록 하였다.
‘책으로 마음 열 기반’ 프로그램진행 과정
아이들은 학교에 행사가 있거나 시험 보는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20분부터 4시 30분까지 도서관의 마루방에 모여 활동했다. 이 마루방은 온돌방은 아니지만 마루로 된 방인데다 좌식 탁자가 놓여 있어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오붓하게 둘러앉아 공부하기에 아주 좋은 공간이다. 더구나 이 방을 두르고 있는 서가에는 그림책과 만화책이 빼곡히 꽂혀 있어 책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북돋우기에 딱 좋다.
아이들은 나보다 먼저 와 만화책을 읽고 있는 일이 많았다. 또 주어진 활동을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만 먼저 끝내면 잽싸게 만화책을 꺼내 읽곤 했다. 활동 중에는 그러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흐뭇했다. 무엇이든 저렇게 열심히 읽으려 들다보면 읽기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질 테고 그러다 보면 만화책뿐 아니라 다른 책들에 대해서도 흥미를 갖게 될 테니 말이다.
프로그램은 아주 단순했다. 1학기에는 매번 2~3권의 그림책(『돼지책』, 『틀려도 괜찮아』, 『내 귀는 짝짝이』, 『지각대장 존』, 『점』, 『느끼는 대로』, 『영이의 비닐우산』, 『빈 화분』,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안경』,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무를 심은 사람』 등)을 먼저 돌아가며 한쪽씩 소리 내어 읽은 후 읽은 내용에 대해 발표하고, 다음에는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 책의 줄거리를 5줄~10줄 정도로 써서, 다시 돌아가며 쓴 내용을 발표하게 하였다. 2학기에는 자유 독서와 이야기책(『어린이 삼국유사』와 「보리 옛이야기 보따리」 시리즈 등) 읽기가 중심을 이루었는데 읽고 난 후의 활동은 대체로 1학기와 같았다.
이러한 활동이 집중력 있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누군가 글을 읽고 나면 꼭 딴죽을 걸었다. “왜 발음이 그렇게 이상하냐.”, “어째서 그렇게 천천히 읽느냐.”, “누구는 잘 읽고 누구는 웃긴다.”라며 끊임없이 웃고 떠들었다. 줄거리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아 진짜 못 쓰겠네. 선생님 미워요. 왜 나를 이렇게 고문하는 거야.”라는 말부터 “한 줄만 쓰면 안 돼요?”, “줄거리를 어떻게 써요?”, “잠깐 나갔다 오면 안 돼요?”, “야, 우리 조금 있다 PC방 갈래?” 등등 매번 같은 걸묻는가 하면 산만한 얘기들이 오가곤 했다. 처음 한두 달 동안은 아주 심한 경우가 아니면 아이들이 웃고 떠들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렇게 웃고 떠들면서 아이들이 억눌렸던 마음을 풀어내고 서로에게 정이 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서로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부터는 점차 잡담을 줄이고 본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아이들에게 일어난 변화
아이들에게 어떤 변화가 얼마큼 일어났는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 모임활동을 좋아했고, 친구와 전혀 어울림이 없던 아이마저도 이 모임에 와서는 잘 어울리고 이아이들과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하곤 했다. 또 이 모임을 시작하기 전에는 만화책조차 읽지 않던 아이가 종종 스스로 서가에서 책을 꺼내 읽는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처음시작할 때는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해 절절매던 아이가 이제 대여섯 문장 정도는 어렵지 않게 쓰게 되었다. 또한 1학기 때까지만 해도 매사에 냉소적이던 아이가 2학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오히려 아이들을 잘 챙겨주고 말도 부드러워졌는가 하면, 국어 서술형 문제는 아예 포기하던 아이 역시 이제는 답을 쓰려는 의욕을 보인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1년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아이들이 하나같이 “3학년 때도 또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는 것.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올해 다시 모여 활동할 것이고, 더욱 다양한 책을 함께 읽으며 마음을 나누고 지식을 넓혀갈 것이다.
덧붙여, 이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하려 했을 때, 아이들의 정서가 이러한 활동을 한 후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하여 나름대로 ‘정서진단 설문지’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하는 날과 활동을 마치는 날 검사하여 비교한 설문 자료를 소개한다. 자료를 꼼꼼히 챙겨두지 못한 탓에 여섯 명의 아이들 중 세 명밖에 소개할 수 없어 자료로서의 가치는 부족하지만, 혹 이러한 자료나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 소개하는 것이니 가볍게 훑어보기 바란다. 아이들 이름은 밝힐 수 없어 A, B, C로 구분하였고, 표 안의 숫자들은 각각의 문항에 ‘매우 그렇다’로 대답한 것은 4, ‘ 그렇다’는 3, ‘조금 그렇다’는 2, ‘그렇지 않다’는 1로 표시한 것이다. 여기 소개하는 아이들 셋은 모두 활동 전에 비해 활동 후 점수가 높게 나타났다. 나머지 세 아이들의 결과를 확인해 줄 수 없어 안타깝지만 아이들의 활동 과정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 아이들 역시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확신한다. 나는 이런 믿음으로 올해 또다시 아이들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1 . 상식적인 결말, ‘만남’의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괜찮아 』
장애인이 등장하는 동화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가는 단연 고정욱이다. 한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체장애 1급 장애인이 된 고정욱은 1999년 『절름발이 소년과 악동 삼총사』 발표 이후 현재까지 10여 년 동안 꾸준히 장애인이 등장하는 동화를 발표하고 있다. 그의 화는 실존인물의 성공 이야기나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모델로 한 것이 많다.
『아주 특별한 우리 형』에 등장하는 종식이는 자유키 프로그램을 개발한 안종혁과 프로그래머 최지영, 컴퓨터를 조립해 파는 사업을 한 김범준 등 뇌성마비 장애인이지만 컴퓨터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세 사람을 모델로 했고, 39박 40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국토 대장정을 하여 성공한 소아마비 아버지 김승중 씨와 그의 아들 선영이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약속』으로, 네 손가락으로 피아니스트가 된 이희야 이야기는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로 태어났다. ‘개그맨 윤정수의 감동 다큐 동화’라는 부제가 붙은 『그래, 이제 웃는 거야』는 청각장애를 가진 어머니를 위해 꿈을 이룬 개그맨 윤정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장애인의 날에 맞춰 기획한 동화이고, 『괜찮아』, 『큰일났다 똥이 마려워』, 『자전거 태워주는 형』, 『경찰 오토바이가 오지 않던 날』은 작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다.
고정욱 동화는 한결같이 장애인 스스로가 고난을 극복하여 ‘성공’하거나 장애인을 돕기위한 인물이 등장해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가 10여 년 동안 발표한 수십 편의 동화들은 인물도 다르고 줄거리도 다르지만 마치 한 편의 작품을 읽는 것 같다.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 예견된 성공, 장애인을 돕기 위해 등장하는 준비된 도우미, 장애인과 함께 더불어 사는 행복한 결말, 고정욱 동화는 이 고정된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정욱 동화 『괜찮아』에 나오는 동구는 소아마비다. 엄마가 날마다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데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도 엄마가 오지 않는다. 그런데 늦게까지 축구를 한 영석이가 갑자기 나타나 동구를 업어서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신촌역 시장에서 나물 장사를 하는 할머니와 사는 영석이는 친구들이 멀리하는 아이다. 영석이는 동구와 같은 반도 아니고 한동네 살지도 않는다. 그냥 이웃동네에 사는데 만나면 아는 체를 하는 정도였다. 그런 영석이가 동구를 업어주었다. 엄마가 없는 영석이는 쓸쓸한 게 뭔지 알기 때문에 동구가 걷지 못해 집에도 못가고 혼자 쓸쓸하게 남아 있는 걸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래서 영석이는 땀 흘리며 언덕길을 올라 동구를 집까지 데려다 준다. 동구는 걷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다. 엄마 없는 영석이는 소아마비인 동구가 날마다 엄마 등에 업히는 것조차 부러울 만큼 외롭다.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럽고 외로운 두 아이가 이렇게 만났다. 그런데 동화는 영석이가 동구를 업어서 집에 데려다 주고 동구네 집에서 저녁을 먹고 씩씩하게 자기 집으로 달려가는 것으로 끝난다.
동구도 사실 엄마가 올 때까지 말동무 해주며 함께 기다려줄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아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외로움보다 동구가 소아마비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 외로움을 함께 나눌 친구가 아니라 동구를 도와줄 친구가 필요했다. 영석이는 동구를 업어주기 위해 등장했을 뿐이고 맡은바 임무를 다했다. 동구와 영석이는 자기 최면이라도 걸듯 힘들 때 ‘괜찮아, 괜찮아’라고 하지만 소아마비로 사는 것도, 엄마 없이 아이들에게 놀림 받으며 사는 것도 결코 괜찮은 일이 아니다. 『괜찮아』는 이렇게 ‘괜찮지 않은’ 두 아이의 마음을 풀지 못했다. 엄마도 없고 가난하고 친구도 없는 영석이는 존재감이 없다. 외로운 두 아이가 만났지만 만남은 큰 의미가 없다. 영석이는 소아마비인 동구를 업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2 . 『용 구 삼 촌 』, 『내 동 생 아 영 이 』, 『찐 찐 군 과 두 빵 두 』에 서 나 타 난 만 남 의 양 상용구 삼촌(『용구 삼촌』, 권정생), 아영이(『내 동생 아영이』, 김중미), 두빵두(『찐찐군과 두빵두』, 김양미)는 외롭다. 용구 삼촌은 지적장애, 아영이는 다운증후군, 스스로 ‘두빵두’라고 자신의 별명을 지은 찬울이는 뇌성마비다. 용구 삼촌과 아영이와 두빵두는 장애 때문에 외롭고 친구도 없이 혼자다. 그런데 이들만 외롭고 혼자인 것은 아니다. 아영이 곁에 있는 희수도, 두빵두 동네에 사는 기영이도 혼자다. 희수와 기영이는 장애는 없지만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논다. 그럴 때 아영이가 희수를 만나 새끼손가락 걸고 친구가 되었고 찬울이는 기영이를 만나 ‘찐찐군’이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친구가 되었다. 또래 동무가 없는 용구 삼촌은 누렁이 암소를 만났다.
2-1. 용구 삼촌과 누렁이의 만남 - 『용구 삼촌』
용구 삼촌은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모든 게 서툴다. 구멍가게에서 백 원짜리 동전으로 얼음과자도 사 먹을 줄 모르고, 겨우 밥 먹고 똥누고 입언저리 씻는 일밖에 할 줄 모른다. 용구 삼촌은 언제나 야단만 맞고 자라서인지 벙어리 가깝게 말도 없이 산다.
그런 삼촌이 누렁이 암소를 만났다. 삼촌은 암소를 만나고 나서 산으로 풀을 먹이러 다닌다. 삼촌이 소를 데리고 간다기보다 누렁이가 삼촌을 데리고 간다고 해야 맞을 정도로, 삼촌은 누렁이 고삐만 잡고 있으면 누렁이가 앞장서서 가고 삼촌은 그 뒤를 따른다. 둘은 날마다 함께 산을 올랐다. 산에 올라 누렁이가 풀을 뜯는 동안 삼촌은 무얼 했을까. 아무도 삼촌에게 묻지 않았고 궁금해 하지 않았지만 삼촌은 말없이 한 여름동안 탈 없이 누렁이를 잘 따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지고 어두워져도 삼촌이 돌아오질 않는다. 식구들이 깜깜해진 못골 골짜기와 조용하기만 한 낙엽송 솔숲에서만은 아니었다. 갑자기 삼촌을 잃을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깜깜한 골짜기 못물보다 삼촌이 없다는 사실이 더 무섭다.
아아! 삼촌은 죽지 않았습니다. (중략) 가엾은 삼촌, 그러나 누구보다 착하고 고운 삼촌은 이렇게 우리들이 애쓰는 줄도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잠을 자다니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삼촌은 이렇게 사랑스럽게 우리들 눈앞에서 평화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35~36쪽)
다복솔 나무 밑에 웅크리고 고이 잠들어 있는 용구 삼촌을 발견했을 때 ‘아아! 삼촌은 죽지 않았습니다’라는 말보다 더 감동적인 말이 또 있을까. 제발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보다 더 절실할 수 있을까. 삼촌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사람들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평화를 즐기고 있다. 자신을 찾는다고 한밤중에 마을사람들이 한바탕 난리를 치든 말든 꿈나라로 가있다. 그런데 그런 삼촌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평화롭다. 바보삼촌만이 가질 수 있는 가엾고 착하고 곱고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놀림을 당하며 야단을 맞고 자란 삼촌이 집에서나 마을에서는 누려보지 못한 평화다. 누렁이를 만나기 전에는 맛보지 못한 행복이다. 용구 삼촌은 누렁이를 만나고 나서 산을 만났고 거기서 더 많은 산동무들을 만났다. 새와 나무와 꽃과 풀과 바람과 따스한 햇살까지. 용구 삼촌은 날마다 산에 올라 날마다 자신을 반겨주는 동무들을 만난 것이다.
2-2. 아영이와 희수의 만남 - 『내 동생 아영이』
‘다운 증후군’인 아영이가 태어나자 친척들은 모두 복지시설로 보내라고 하지만 엄마 아빠는 그 말을 듣지 않는다. 게다가 심장에 이상이 있어 수술을 받은 아영이는 다행히 힘든 고비를 잘 넘기지만 엄마 아빠는 수술비 때문에 친척들과도 멀어지고 쉴 새 없이 일을 해야 한다. 배를 사느라 빚을 진 엄마는 아영이를 데리고 뱃일을 나간다. 아영이는 바닷바람이 센 날은 혼자 기관실에 남아 멀미 때문에 토하다가 울다 지쳐 잠든다. 그런 아영이를 보면 엄마 가슴은 미어지지만 그래도 엄마는 아영이가 있어서 행복하다. 아영이는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란다.
희수는 아영이의 오빠 영욱이와 같은 반이다. 한 달 전에 아영이네 동네에 ‘실내 포장마차’라는 술집을 차리고 이사 온 집 아이다. 희수는 5학년이 되도록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고 책도 떠듬떠듬 읽어서 전학 온 첫날부터 놀림을 받는다. 아빠도 없이 혼자 희수를 낳아 키운 희수 엄마는 희수에게 원망만 가득하고 폭력만 휘두를 뿐 사랑을 주지 못한다. 희수는 가겟방 구석에서 자다가 엄마에게 매를 맞았다. 새벽에야 가게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온 엄마는 희수가 자는 모습이 궁상맞다며 화를 냈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희수에게 매를 댔다.
(110~111쪽)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엄마가 속상할 때마다 맞고 자란 희수는 사랑이 그립고 친구도 그립다.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아영이는 장애 때문에 학교에도 못 가고 친구도 없다. 아영이도 희수도 친구가 그립다. 아영이는 모든 사람이 엄마 아빠랑 똑같은 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낮선 사람들의 눈빛이 가족과 다르다는 걸 알았고, 그때 희수를 만났다. 희수는 좀 달랐다. 희수는 아영이를 보고 진심으로 웃어주었다. 아영이는 좋아서 희수를 와락 껴안았다. 아영이와 희수는 진심으로 웃어주고 안아주면서 친구가 되었다. 희수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친구가 되기로 약속한 아영이는 좋아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희수는 아영이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해도 아영이랑 있는 게 좋다. 희수가 그동안 엄마에게 섭섭했던 마음과 속상했던 일들을 아영이에게 다 털어놓으면 아영이는 희수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희수의 슬픈 마음을 알아준다. 엄마놀이 때 엄마를 하고 싶어 하는 아영이는 엄마가 그런 것처럼 사랑과 정성을 다해 희수에게 밥을 먹여주고, 아기가 된 희수는 아영이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게 행복하다.
아영이가 엄마에게 받은 사랑은 그대로 희수에게로 간다. 희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희수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며 아영이는 자신의 외로움과 아픔을 치유한다. 아영이는 학교에 다니고 싶지만 오빠 영욱이는 자신이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번거롭고 아이들의 놀림이 두려워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아영이와 희수를 보면서 마음이 움직인다. 아영이와 희수의 만남은 그들자신뿐만 아니라 영욱이의 마음까지 움직인 것이다.
2-3. 찐찐군과 두빵두의 만남 - 『찐찐군과 두빵두』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찬울이는, 호주로 공부를 하러 갔다는 아빠를 아직 얼굴 한번 못 봤고 엄마는 일하러 나가서 하루 종일 혼자 있다. 현관문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혼자 설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다. 그런 찬울이의 소원은 별명을 나누어 가질 친구를 만나는 것이다.
‘찐만두, 찐빵, 군만두’를 세로로 쓰고 가로로 읽으면 ‘찐찐군, 만만, 두빵두’가 된다. 찬울이는 동네에 있는 ‘옛날만두’집 간판 유리창에 세로로 써 있는 메뉴를 가로로 읽는 순간 ‘두빵두’가 마음에 들었다. 통통한 볼에 작은 키를 가진 자기에게 딱 맞는 별명이라 생각했다. 그날부터 찬울이는 ‘두빵두’가 되었다. 그리고 ‘두빵두’와 어울리는 ‘찐찐군’과 ‘만만’이란 별명을 나누어 가질 친구를 만나길 빌었다. 그런데 정말 별똥별을 보고 빈 소원이 이루어졌다. 두빵두가 찐찐군을 만난 것이다.
두빵두와 기영이는 책 때문에 만났다. 두빵두는 책을 좋아하고 기영이는 책을 좋아하진 않지만 책이 많이 있는 도서관에서 노는 걸 좋아한다. 혼자 다닐 수 없는 두빵두는 외할아버지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준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두빵두 책을 빌리러 갔다가 급한 일이 생겨 도서관에서 놀고 있는 기영이에게 책 심부름을 부탁하여 기영이는 빌린 책을 들고 두빵두 집으로 간다. 이렇게 두빵두는 찐찐군을 처음 만난다.
기영이는 얼결에 찐찐군이란 별명을 얻었지만 나쁘지 않다. 미용사인 엄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서 손님들의 머리를 만지고 여행가인 아빠는 여행 중이다. 기영이는 엄마와 아빠를 보면 ‘개미와 베짱이’ 같다. 아빠가 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아빠를 멋있다고 하고 부러워하지만 아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기영이는 외롭다. 친구도 없다. 그럴 때 두빵두를 만난 것이다.
찐찐군과 두빵두가 만난 다음부터 할아버지가 도서관에 갈 일은 없다. 찐찐군도 도서관에서 혼자 놀지 않는다. 두빵두 집은 둘의 아지트가 되었고 두빵두 책 심부름은 찐찐군 몫이다. 둘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혼자 노는 것과 둘이 함께 노는 것은 다르다. 전화를 걸 수도 있고 얘기를 할 수도 있고 책을 대신 빌려다 줄 수도 있다. 그리고 함께 두빵두의 아빠를 찾아 나설 수도 있다.
어느 날 찐찐군의 실수로 잘못 가져온 김유원 아저씨의 도서대출증을 본 두빵두는 혹시 김유원 아저씨가 자신의 아빠가 아닐까 기대한다. 그리고 두빵두의 아빠 찾기 모험은 시작된다. 아빠를 찾기 위한 것이었지만 집을 벗어나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서, 그리고 도서관에서 찐찐군과 두빵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넓은 세상을 만난다. 두빵두는 아빠를 찾는 일보다 도서관에서 얘기를 하고 돈가스를 사먹고 책을 읽는 걸 더 즐긴다. 결국 아빠를 만나는 일은 실패하지만 찐찐군과 두빵두는 ‘만만’이라는 별명을 나누어 줄 형을 만난다. 그림을 그리는 만만이 형은 두빵두 아빠를 함께 찾으며 친구가 된다.
도서관에서 혼자 숨어서 놀던 찐찐군과, 집에서 여러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며 혼자 놀던 두빵두는 이제 혼자 놀던 도서관과 집에서 벗어났다. 찐찐군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타고 도서관을 처음 가본 두빵두는 혼자 휠체어 타기를 겁내지 않고 찐찐군은 마음대로 떠났다 마음대로 돌아오는 아빠에게 맺힌 마음을 처음으로 두빵두에게 꺼낸다. 둘은 스스로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풀기 시작한 것이다. 찐찐군과 두빵두가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난을 이겨내느냐 이겨내지 못하느냐, 성공을 하느냐 못하느냐, 도움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오히려 사람들을 외롭고 공허하게 한다.
용구 삼촌과 누렁이, 아영이와 희수, 찐찐군과 두빵두에게 만남은 세상을 여는 출발선이다. 집을 나와 용구 삼촌은 산으로, 아영이는 놀이터로, 두빵두는 도서관으로 갔다. 이제 이들은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준비를 한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는 장애인 이야기도 아니고 불쌍한 이야기도 슬픈 이야기도 아니며 주인공의 주변인들이 주인공에게 봉사하고 희생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친구를 만나서 행복한 ‘사랑 이야기’다.
3 . 장애가 아닌 만남에 초점을 맞출때 열리는 새로운 세계
동구는 영석이를 만났고(『괜찮아』) 용구 삼촌은 누렁이를(『용구 삼촌』), 아영이는 희수를 (『내 동생 아영이』), 찐찐군은 두빵두(『찐찐군과 두빵두』)를 만났다. 장애를 가진 네 사람이 장애가 없는 친구를 만난 것이다. 동구와 영석이의 만남은 목적의식이 분명하다. 소아마비 동구를 업어주기 위한 만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영석이의 선행으로 동구는 혼자 겪을 어려움을 벗어났지만 그들의 만남에는 감동이 없고 여운도 남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고정욱의 동화는 일관되게 고난 극복, 성공, 봉사, 희생 등을 강조한다. 장애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고난을 이겨내느냐 이겨내지 못하느냐, 성공을 하느냐 못하느냐, 도움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오히려 사람들을 외롭고 공허하게 한다.
만남이라고 모두 같은 만남이 아니다. 행복한 만남은 더 많은 행복을 낳는다. 용구 삼촌은 누렁이를 만나서 산을 만났고 산에서 더 많은 산동무를 만났다. 아영이는 희수를 만나 서로의 외로움과 아픔을 달랬고 영욱이의 마음까지 움직였으니 학교에 가서 더 많은 친구를 만나게 될 것이다. 찐찐군과 두빵두는 만나서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냈고 ‘만만’이 형도 만났다. 이들에게 만남은 사랑이었다.
용구 삼촌과 누렁이, 아영이와 희수, 찐찐군과 두빵두에게 만남은 세상을 여는 출발선이다. 집을 나와 용구 삼촌은 산으로, 아영이는 놀이터로, 두빵두는 도서관으로 갔다. 이제 이들은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준비를 한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는 장애인 이야기도 아니고 불쌍한 이야기도 슬픈 이야기도 아니며 주인공의 주변인들이 주인공에게 봉사하고 희생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친구를 만나서 행복한 ‘사랑 이야기’다. 작가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만남의 의미는 이렇게 달라진다. 작은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동화와의 만남도 바로 그 자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