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노동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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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8 21:39 조회 7,772회 댓글 0건본문
제도권교육 통해 노동지식 쌓는 것이 불가능한 한국사회
지하철 안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다. 그 뜻과 용기는 가상하지만 지하철 안의 승객들 중에서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표정은 별로 없어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별로 없는 상태라면,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조물주란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자신의 박약한 의지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전도하는 사람이 어떤 신을 믿으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종교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나 불교나 다른 어떤 종교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기업체 신입사원들에게 노동문제에 관한 교육을 하러 가면, 지하철 안에서 전도하는 사람과 비슷한 신세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내가 하는 강연은 노동조합의 요구로 회사 신입사원연수 프로그램에 강제로 끼워 넣다시피 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요즘처럼 취업하기 어려운 청년실업 시대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한 신입사원들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살아오는 30년가까운 세월 동안 노동노합이나 노동운동 등 노동문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일방적으로 주입받아온 사람들이어서, 강의에 임하는 표정들부터가 못마땅한 얼굴들이다. 대기업 노동자 임금을 동결하는 것이 마치 애국적 결단인 양 호도하는 새빨간 거짓말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길들여진 청년들, 노동조합이나 노동운동을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암적인 존재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신입사원들에게는 민주노총이든 한국노총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취업 경쟁률이 수백 대 일이나 되고, 초임 연봉이 4천만원에 육박하는 대기업 신입사원들의 표정은 자신만만한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다. 출퇴근용 자가용 정도는 취업하자마자 바로 할부로 구입할 수 있을 것이고, 몇 년 동안 부지런히 돈을 모으면 남들보다 일찍 아파트도 한 칸장만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아파트 평수를 조금씩 넓히면서, 자가용도 점점 큰 배기량의 차로 바꾸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직장인들이 인생의 가치를 그런 것들에만 두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들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돈을 버는 사람보다 결코 더 행복해질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남들보다 잘 먹고 잘사는 것 외에 다른 일에도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면, 직장인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딛는 사람들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야 할까?
신입사원들에게 노동조합에 관한 이야기를 보통 이런 내용의 말들로 시작한다. 노동조합을 통해서 그러한 고민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억지로 갖다 붙인다’는 느낌이 들겠지만,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직장인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단체교섭을 하고 파업도 벌이며 자신의 행복한 인생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권리를 신성한 노동기본권으로 보장한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동조합이야말로 헌법에 의해 보장된 직장인들의 구체적이고도 유일한 조직이다. 문제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 사회에서는 제도권 교육을 통해 그러한 지식을 쌓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노동문제를 보는 우리의 시각,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의 이해
우리나라 철도노조가 파업을 벌이고 있던 무렵, 대학생들에게 하는 강연을 끝내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털모자를 썩 어울리게 쓴 학생이 내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저는 네덜란드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하고 이번에 한국의 대학에 입학한 학생인데요. 며칠 전에 철도노조 파업할 때, 텔레비전 뉴스에서 시민들 인터뷰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모두들 한결같이 자기가 불편하다는 것만 이야기하는지…. 파업하는 노동자들 입장에서 말하는 사람이 왜 한 명도 없는지, 참 이상했습니다.”
그 학생이 살았던 곳에서는 파업을 두고 “노동조합의 이러저러한 요구 사항은 타당한 내용이니 정부와 기업은 빨리 받아들여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민들의 모습도 적지 않게 보았을 테니 깜짝 놀란 것도 당연하다.
굳이 ‘톨레랑스’를 들이대며 비교하지 않더라도 우리처럼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짙은 혐오감으로 무장한 사회는 별로 없다. 우리 사회는 노동자의 권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대중 정서가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자리 잡아본 경험이 없이 여기까지 왔다.
화물연대 파업 첫날, 모두 여섯 개의 기사를 찾아 읽었지만 그 어떤 기사에서도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을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수십 년을 살았다.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이 왜곡된 제도권 교육과 언론으로부터 영향받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노동운동을 비정상적으로 혐오하는 정서와 언론 보도의 홍수 속에서 자라난 학생들이 나중에 기업 인사노무 관리자가 되면 아무 죄책감도 없이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언론인이 되면 파업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손실과 시민들의 불편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강의 시간에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 때 묻지 않은 얼굴로 교수(실제로는 ‘비정규직 시간강사’)와 눈길을 맞추며 강의를 열심히 들었던 학생이 답안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적었다. 자신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회복지론도 공부했고 장애인시설에 가서 봉사활동도 하지만 유일하게 동의할 수 없는 분야가 노동운동인데 그 이유는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이기적 투쟁처럼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의 노동운동에 대한 이해 정도가 딱 그렇다.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올바로 판단할 능력이 모자라 는 까닭
장기근속자 직원들의 자녀가 회사에 취업할 때 가산점을 달라는 대기업 노동조합의 단체협약 조항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실제로 노사간에 “동일한 조건일 경우 (일정한 요건을 갖춘) 직원의 피부양 가족을 우선 채용한다.”는 단체협약 규정을 체결한 기업들도 있고, 그러한 명문 규정이 없더라도 신입사원을 채용하면서 직원 자녀에게 유리한 조건을 적용하는 관행을 마치 미풍양속처럼 지키고 있는 기업들도 많다. 요즘처럼 청년실업이 심각한 시대에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노동자라면 당연히 자녀의 취업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자녀 우선 채용 요구’가 과연 올바른 것일까?
그 요구를 노동자에게 최대한 호의적으로 해석해보자. 정부가 국가유공자 자녀에게 일정한 혜택을 주는 것이나 산업재해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의 자녀에게 그 회사에 취업할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처럼 한 회사에서 오랜 세월 열심히 일하며 회사 발전에 기여한 직원의 자녀에게 그 정도의 혜택을 주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회사로서는 회사 직원들의 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것이 그 회사의 특징과 사정을 훤히 알고 취업하는 사람을 선별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으니 향후 인사노무 관리에 유리한 측면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대상의 권리를 보호할 때에는 항상 그 권리가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그것은 모든 ‘권리’에 따르는 바뀔 수 없는 명제다. 발명에 대한 특허권조차 그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다른 이들이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할 때에는 인정되지 않는다.
장기근속 조합원 자녀 우선 채용 규정이 다른 사람들의 직업 선택 권리를 박탈하는 대표적 상황은 직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져 있는 사업장에서 정규직만 노동조합원 자격을 갖는 경우이다. 정규직 사원이 정년퇴직하면서 자신의 자녀를 그 회사에 취업시킬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그 노동자 가정에 꽤 좋은 혜택이 되겠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규직의 부당한 ‘세습’이나 다름이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 자녀들이 그 회사에 취업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헌법상의 권리인 직업 선택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것이다.
강한 존재와 약한 존재가 대립하는 갈등 구조에서는 대개 약한 쪽의 권리가 강화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할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 구조에서는 비정규직의 권리가 보호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한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올바로 판단할 능력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할 능력을 우리나라 어느 제도권 교육과정에서도 제대로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내용들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운다. 제도권교육에서 노동교육이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사회구성원의 대부분이 노동자인 사회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 선진국들은 초등학교부터 철저하게 노동교육을 실시할까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정규수업 시간에서부터 철저하게 노동교육을 실시한다. 우리나라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학년에서부터 ‘모의노사교섭’이 일상화된 특별활동으로 자리 잡혀 있어,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 년 동안 여섯 차례의 모의노사교섭에 참여할 기회를 갖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경영자의 입장과 노동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경험을 쌓는 것이다. 기업 경영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주어지면 학생들이 스스로 경영자 대표들을 뽑고 노동조합 대표들을 뽑아 임금협상을 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해보기도 한다. 적정한 임금인상률에 대한 고민과 그 단체협약이 노동자의 삶과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판단을 초등학교에서부터 경험하는 것이다.
한 초등학교 사회과목 교과서는 모의노사교섭을 모두 6회에 걸쳐 진행하도록 편성하고 있다. 심지어 단체교섭 과정에서의 서명운동, 항의문건·펼침막·벽보 제작, 연설문 작성, 언론매체 인터뷰 방법까지 초등학교 교과서에 담겨 있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볼 때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데모하는 기술을 가르친다.”고 기절초풍할 일이다. 초등학생들이 모의노사교섭을 벌이고 있는 모습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등 사회과 교과서에서는 노사관계에 대하여 ‘가족관계를 제외하고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관계’이며 ‘민주주의와 공동결정’의 장이라고 정의한다. 그 말이 백번 맞는다.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생활 그 다음이 직장생활이다. 실제로 가정에서보다 회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실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장차 노동자가 되는 사회에서는 학교의 정규수업 과정에서부터 노사관계에 대해 중요한 비중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독일 중등학교 사회과목의 한 교과서는 모두 340쪽의 분량 중에 93쪽을 노동교육에 할애하고 있다. 청소년 실업에 관한 내용만 29쪽이나 되는 교과서도 있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내용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사실들’을 토론 주제로 다룬다. 독일 금속노조와 사용자단체가 체결한 임금협약, 금융노조와 사용자단체가 체결한 기본협약 등과 함께 노동조합이 발표한 성명서, 노동문제에 대한 신문기사 등이 교과서에 수록된다.
프랑스에서는 중학교 과정 이전에 노동문제를 거의 완벽하게 학습하고 고등학교 1학년 과정에서는 시민사회과목에서 거의 3분의 1 정도 비중으로 ‘단체교섭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 학습하고 토론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조합 간부로 평생 활동해도 배우지 못할 만큼을 이미 제도권 교육 속에서 깨친다. 우리로서는 도대체 학교에서 왜 그런 것까지 가르쳐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사회구성원들이 그런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사회에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라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2006년 프랑스에서 26살 미만의 청년들을 2년 동안 해고 가능한 비정규직으로 고용할 수 있다는 ‘최초고용 계약제(CPE)’가 발표되자 150만 명의 젊은이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항의했다. 단순히 개인적 이익을 침해받았다는 이유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사회문제를 기업의 이익에 바탕을 두고 해소하려는 우파 정부의 정책이 프랑스의 미래에 끼칠 영향을 젊은이들이 예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독일과 프랑스만 예로 들었을 뿐이지,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마찬가지이다. 궁금한 분들은 한국노동교육원이 발행한 400쪽이 넘는 보고서 <선진 5개국 학교노동교육실태>를 참고하기를 권한다.
제도권 교육에서 그런 내용의 노동교육이 시행되는 사회에서는 단체협약에 장기근속 직원들의 자녀를 우선 채용하도록 규정하는 것이 노동조합 조직 보호와 노동자의 구매력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직업 선택 자유를 박탈하거나 평등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판단을 제도권 교육 과정 속에서 이미 경험한 뒤에 노동자가 된다. 아이들이 그런 과정을 거치며 사회에 배출되는 사회와 노동에 대한 아무런 개념 정립도 없이 사회에 내던져지는 사회의 노동문제에 대한 인식은 같을 수가 없다. 이제부터라도 노동문제에 대해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지하철 안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다. 그 뜻과 용기는 가상하지만 지하철 안의 승객들 중에서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표정은 별로 없어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별로 없는 상태라면,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조물주란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자신의 박약한 의지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전도하는 사람이 어떤 신을 믿으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종교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나 불교나 다른 어떤 종교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기업체 신입사원들에게 노동문제에 관한 교육을 하러 가면, 지하철 안에서 전도하는 사람과 비슷한 신세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내가 하는 강연은 노동조합의 요구로 회사 신입사원연수 프로그램에 강제로 끼워 넣다시피 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요즘처럼 취업하기 어려운 청년실업 시대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한 신입사원들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살아오는 30년가까운 세월 동안 노동노합이나 노동운동 등 노동문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일방적으로 주입받아온 사람들이어서, 강의에 임하는 표정들부터가 못마땅한 얼굴들이다. 대기업 노동자 임금을 동결하는 것이 마치 애국적 결단인 양 호도하는 새빨간 거짓말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길들여진 청년들, 노동조합이나 노동운동을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암적인 존재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신입사원들에게는 민주노총이든 한국노총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취업 경쟁률이 수백 대 일이나 되고, 초임 연봉이 4천만원에 육박하는 대기업 신입사원들의 표정은 자신만만한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다. 출퇴근용 자가용 정도는 취업하자마자 바로 할부로 구입할 수 있을 것이고, 몇 년 동안 부지런히 돈을 모으면 남들보다 일찍 아파트도 한 칸장만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아파트 평수를 조금씩 넓히면서, 자가용도 점점 큰 배기량의 차로 바꾸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직장인들이 인생의 가치를 그런 것들에만 두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들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돈을 버는 사람보다 결코 더 행복해질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남들보다 잘 먹고 잘사는 것 외에 다른 일에도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면, 직장인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딛는 사람들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야 할까?
신입사원들에게 노동조합에 관한 이야기를 보통 이런 내용의 말들로 시작한다. 노동조합을 통해서 그러한 고민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억지로 갖다 붙인다’는 느낌이 들겠지만,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직장인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단체교섭을 하고 파업도 벌이며 자신의 행복한 인생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권리를 신성한 노동기본권으로 보장한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동조합이야말로 헌법에 의해 보장된 직장인들의 구체적이고도 유일한 조직이다. 문제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 사회에서는 제도권 교육을 통해 그러한 지식을 쌓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노동문제를 보는 우리의 시각,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의 이해
우리나라 철도노조가 파업을 벌이고 있던 무렵, 대학생들에게 하는 강연을 끝내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털모자를 썩 어울리게 쓴 학생이 내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저는 네덜란드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하고 이번에 한국의 대학에 입학한 학생인데요. 며칠 전에 철도노조 파업할 때, 텔레비전 뉴스에서 시민들 인터뷰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모두들 한결같이 자기가 불편하다는 것만 이야기하는지…. 파업하는 노동자들 입장에서 말하는 사람이 왜 한 명도 없는지, 참 이상했습니다.”
그 학생이 살았던 곳에서는 파업을 두고 “노동조합의 이러저러한 요구 사항은 타당한 내용이니 정부와 기업은 빨리 받아들여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민들의 모습도 적지 않게 보았을 테니 깜짝 놀란 것도 당연하다.
굳이 ‘톨레랑스’를 들이대며 비교하지 않더라도 우리처럼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짙은 혐오감으로 무장한 사회는 별로 없다. 우리 사회는 노동자의 권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대중 정서가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자리 잡아본 경험이 없이 여기까지 왔다.
화물연대 파업 첫날, 모두 여섯 개의 기사를 찾아 읽었지만 그 어떤 기사에서도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을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수십 년을 살았다. 노동문제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이 왜곡된 제도권 교육과 언론으로부터 영향받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노동운동을 비정상적으로 혐오하는 정서와 언론 보도의 홍수 속에서 자라난 학생들이 나중에 기업 인사노무 관리자가 되면 아무 죄책감도 없이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언론인이 되면 파업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손실과 시민들의 불편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강의 시간에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 때 묻지 않은 얼굴로 교수(실제로는 ‘비정규직 시간강사’)와 눈길을 맞추며 강의를 열심히 들었던 학생이 답안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적었다. 자신은 평등이라는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회복지론도 공부했고 장애인시설에 가서 봉사활동도 하지만 유일하게 동의할 수 없는 분야가 노동운동인데 그 이유는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이기적 투쟁처럼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의 노동운동에 대한 이해 정도가 딱 그렇다.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올바로 판단할 능력이 모자라 는 까닭
장기근속자 직원들의 자녀가 회사에 취업할 때 가산점을 달라는 대기업 노동조합의 단체협약 조항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실제로 노사간에 “동일한 조건일 경우 (일정한 요건을 갖춘) 직원의 피부양 가족을 우선 채용한다.”는 단체협약 규정을 체결한 기업들도 있고, 그러한 명문 규정이 없더라도 신입사원을 채용하면서 직원 자녀에게 유리한 조건을 적용하는 관행을 마치 미풍양속처럼 지키고 있는 기업들도 많다. 요즘처럼 청년실업이 심각한 시대에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노동자라면 당연히 자녀의 취업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자녀 우선 채용 요구’가 과연 올바른 것일까?
그 요구를 노동자에게 최대한 호의적으로 해석해보자. 정부가 국가유공자 자녀에게 일정한 혜택을 주는 것이나 산업재해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의 자녀에게 그 회사에 취업할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처럼 한 회사에서 오랜 세월 열심히 일하며 회사 발전에 기여한 직원의 자녀에게 그 정도의 혜택을 주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회사로서는 회사 직원들의 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것이 그 회사의 특징과 사정을 훤히 알고 취업하는 사람을 선별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으니 향후 인사노무 관리에 유리한 측면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대상의 권리를 보호할 때에는 항상 그 권리가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그것은 모든 ‘권리’에 따르는 바뀔 수 없는 명제다. 발명에 대한 특허권조차 그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다른 이들이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할 때에는 인정되지 않는다.
장기근속 조합원 자녀 우선 채용 규정이 다른 사람들의 직업 선택 권리를 박탈하는 대표적 상황은 직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져 있는 사업장에서 정규직만 노동조합원 자격을 갖는 경우이다. 정규직 사원이 정년퇴직하면서 자신의 자녀를 그 회사에 취업시킬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그 노동자 가정에 꽤 좋은 혜택이 되겠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규직의 부당한 ‘세습’이나 다름이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 자녀들이 그 회사에 취업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헌법상의 권리인 직업 선택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것이다.
강한 존재와 약한 존재가 대립하는 갈등 구조에서는 대개 약한 쪽의 권리가 강화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할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 구조에서는 비정규직의 권리가 보호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한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올바로 판단할 능력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할 능력을 우리나라 어느 제도권 교육과정에서도 제대로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내용들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운다. 제도권교육에서 노동교육이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사회구성원의 대부분이 노동자인 사회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 선진국들은 초등학교부터 철저하게 노동교육을 실시할까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정규수업 시간에서부터 철저하게 노동교육을 실시한다. 우리나라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학년에서부터 ‘모의노사교섭’이 일상화된 특별활동으로 자리 잡혀 있어,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 년 동안 여섯 차례의 모의노사교섭에 참여할 기회를 갖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경영자의 입장과 노동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경험을 쌓는 것이다. 기업 경영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주어지면 학생들이 스스로 경영자 대표들을 뽑고 노동조합 대표들을 뽑아 임금협상을 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해보기도 한다. 적정한 임금인상률에 대한 고민과 그 단체협약이 노동자의 삶과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판단을 초등학교에서부터 경험하는 것이다.
한 초등학교 사회과목 교과서는 모의노사교섭을 모두 6회에 걸쳐 진행하도록 편성하고 있다. 심지어 단체교섭 과정에서의 서명운동, 항의문건·펼침막·벽보 제작, 연설문 작성, 언론매체 인터뷰 방법까지 초등학교 교과서에 담겨 있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볼 때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데모하는 기술을 가르친다.”고 기절초풍할 일이다. 초등학생들이 모의노사교섭을 벌이고 있는 모습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등 사회과 교과서에서는 노사관계에 대하여 ‘가족관계를 제외하고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관계’이며 ‘민주주의와 공동결정’의 장이라고 정의한다. 그 말이 백번 맞는다.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생활 그 다음이 직장생활이다. 실제로 가정에서보다 회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실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장차 노동자가 되는 사회에서는 학교의 정규수업 과정에서부터 노사관계에 대해 중요한 비중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독일 중등학교 사회과목의 한 교과서는 모두 340쪽의 분량 중에 93쪽을 노동교육에 할애하고 있다. 청소년 실업에 관한 내용만 29쪽이나 되는 교과서도 있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내용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사실들’을 토론 주제로 다룬다. 독일 금속노조와 사용자단체가 체결한 임금협약, 금융노조와 사용자단체가 체결한 기본협약 등과 함께 노동조합이 발표한 성명서, 노동문제에 대한 신문기사 등이 교과서에 수록된다.
프랑스에서는 중학교 과정 이전에 노동문제를 거의 완벽하게 학습하고 고등학교 1학년 과정에서는 시민사회과목에서 거의 3분의 1 정도 비중으로 ‘단체교섭의 전략과 전술’에 대해 학습하고 토론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조합 간부로 평생 활동해도 배우지 못할 만큼을 이미 제도권 교육 속에서 깨친다. 우리로서는 도대체 학교에서 왜 그런 것까지 가르쳐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사회구성원들이 그런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사회에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라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2006년 프랑스에서 26살 미만의 청년들을 2년 동안 해고 가능한 비정규직으로 고용할 수 있다는 ‘최초고용 계약제(CPE)’가 발표되자 150만 명의 젊은이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항의했다. 단순히 개인적 이익을 침해받았다는 이유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사회문제를 기업의 이익에 바탕을 두고 해소하려는 우파 정부의 정책이 프랑스의 미래에 끼칠 영향을 젊은이들이 예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독일과 프랑스만 예로 들었을 뿐이지,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마찬가지이다. 궁금한 분들은 한국노동교육원이 발행한 400쪽이 넘는 보고서 <선진 5개국 학교노동교육실태>를 참고하기를 권한다.
제도권 교육에서 그런 내용의 노동교육이 시행되는 사회에서는 단체협약에 장기근속 직원들의 자녀를 우선 채용하도록 규정하는 것이 노동조합 조직 보호와 노동자의 구매력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직업 선택 자유를 박탈하거나 평등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판단을 제도권 교육 과정 속에서 이미 경험한 뒤에 노동자가 된다. 아이들이 그런 과정을 거치며 사회에 배출되는 사회와 노동에 대한 아무런 개념 정립도 없이 사회에 내던져지는 사회의 노동문제에 대한 인식은 같을 수가 없다. 이제부터라도 노동문제에 대해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