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책읽기, 인생의 모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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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4 16:43 조회 8,002회 댓글 0건본문
Ⅰ 나의 책 읽기의 시작
책 읽기는 우리들 삶의 모든 것,인생이 바라고 바라는 모든 것, 그래서도 어린 인생은 책 읽기로
시작된다.
‘내게 책 읽기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물음을 묻고 글을 이끌어갈까 한다. 그
것은 나의 독서 생활의 최초의 단서, 이를테면 나의 독서 생활의 ‘천지개벽’을 풀어 가
는 것으로 이 한 편의 글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본론에 들어가서,
‘독서 일반론’을 펼치게 될 실마리로 삼고자 한다.
유치원 다니던 시절 그리고 초등학교의 초학년을 치르고 있던 시절, 나는 ‘병골이’
였다. 사시사철 병치레하면서 잔병을 앓고 있었다. 파리하고 야윌 대로 야위어 있었
다. 병골이라서 당연히 ‘약골弱骨’이었다. 그게 내 별명이기도 했다. 어린 나 스스로 친
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들과 함께 활달하게 뛰노는 것은 언감생심, 턱도 없는 일
이었다. 그래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고는 매양 혼자였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택한 소외고 고독이었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에도 운동장
이나 밖에 잘 나가질 않았다. 제 책상, 제 자리에 웅크리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자니
우두커니 웅숭크리고 있는 것보다야 책이라도 읽는 게 백 배, 천 배 나았다. 책 읽기는
유일한 심심풀이였다. 단 한 가지의 시간 보내기였다.
그러나 그는 제 마음 속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마음은 원망과 동경으로 가득 하였다. 왜? 무엇 때
문에 내가 이런 데 와 있는 것이냐? 왜 제 방 창가에 앉아서 슈토롬의 『임멘제에』나 읽으면서 늙은
호두나무 가지들이 우울한 소리를 내는 저녁 어스름에 쌓인 정원이나 가끔 내다보지 않았더냐?
이것은 내가 지금도 이따금 버릇처럼 꺼내서는 읽곤 하는,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
뢰거』에서 뽑은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내 어린 철 자서전의 일부로 삼고 있을 정도다.
훗날 시인이 된 주인공, 토니오는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그래서 그는 위와 같은 독백
을 외게 된다. 학교에서는 마침 소년들을 위한 무도회가 벌어졌다. 수업을 겸한 그 자
리에서 토니오는 평소 사무치게 그리워하기만 하던 소녀, 잉게 홀름과 우연하게도 손
을 맞잡고 춤을 추게 되는 기막힌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흥분한 탓일까? 넋을 잃
은 탓일까? 토니오는 실수를 하고 만다. 그래서는 잉게를 비롯한 한 반 친구들의 웃음
거리가 되고 만다. 뉘우침에 빠져서 낙담한 소년은 위와 같이 혼잣말을 중얼대게 된
것이다. 왕따가 되어서는 혼자 책 읽기를 하고 있을 토니오의 모습에 내 어린 철의 몰
골을 겹쳐 보게 된다.
그러자니, 나는 별 수 없이, 절로 ‘책벌레’가 되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변
신』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서 주인공은 어느 순간 느닷없이 한 마리 벌레로 둔갑하고
만다. 그렇듯이 나라는 약골은 어느 새엔가 한 마리의 ‘책벌레’로 변신하고 있었다.
교실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더운 여름이면 운동장 한 구석, 나무 그늘에서 책
벌레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아니 벌레답게 글자를 하나, 하나 갉아먹고 있었다. 책벌레
로서 책 먹기는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눈으로 씹어서는 머리와 가슴으로 채워서
는 알뜰하게 새기고 있었다. 하니까, 책에서 ‘책 맛’을 누린 것은 당연하다. 달콤한 맛
에 시원한 맛, 향긋한 냄새 등등, 오관으로 두루 책 맛을 볼 수 있었다. 바른 손 무명지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서는 책 장 하나를 넘긴 뒤를 물고는 다음 페이지 넘기노라고
또 침을 손가락 끝에 묻히면, 솔솔 입안에 책 맛이 넘쳐 나곤 했다. 이래서 혀로도 입으
로도 책을 먹고 맛보고 한 것이다. 그와 같은 책벌레 짓은 나 혼자만의 공화국, 아니 천
국이었다.
동요나 동시는 따라 외우기를 했다. 읽던 책을 엎어놓고는 시 구절을 줄줄이 따라
외었다. 그 암송暗誦으로 나는 스스로 시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동화는 나의
혼자만의 모노드라마를 연출케 했다. 주인공이며 다른 인물들의 몸짓, 표정 등을 따
라서 일인 연극이 펼쳐지곤 했다. 바깥세상 모든 것, 교실 안팎의 모든 것들을 다 잊고
는 오직 나 혼자만의 세계가 일구어져 나갔다.
그러면서 묘한 책 읽기의 방법을 터득해 나갈 수 있었다. 그건 내가 스스로 ‘훔쳐
읽기’ 라고 또는 ‘숨어 읽기’라고 이름 붙인 나의 독서의 비방秘方이고 비책秘策이었다.
수업이 시작되면 나는 읽다 만 책을 편 채로 책상 안에 밀어 넣곤 했다. 가르치다가 선
생이 흑판으로 돌아서면 절호의 기회다. 책을 가만히 꺼내놓고는 읽어 나간다. 선생
이 우리 쪽으로 되돌아서는 기척이 나면, 재빨리 책을 밀어놓고는 시치미를 뗐다. 이
게 바로 훔쳐 읽기 또는 도둑 읽기다.
그와는 달리 숨어 읽기는 집에서 행해졌다. 필자가 어렸을 때, 부모들은 소설이나
동화 읽기는 질색했다. “공부는 않고 소설 따위만 읽냐?” 그렇게 야단치곤 했다. 그러
니 어쩌겠는가. 부모 몰래 내 방에 갇히다시피 하고는 숨어 읽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들 독서의 두 가지 범법犯法 행위는 나의 책 읽기를 한층 더 짙게 깊게 해주
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것 때문에 나의 어린 철 책 읽기는 닥치는 대로 읽기의 남독
濫讀, 넋을 팔고 읽어 내는 탐독耽讀그리고 그 둘이 어울려서 이루어지는 책 사랑의 애
독愛讀의 세계에 빠져 들 수 있었다.
한데 그러한 꼬맹이의 읽기에서는 듣기가 바탕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이전, 대여섯 살 먹을 때의 일이었다. ‘옛날, 옛날, 그 옛날에……’, ‘이바구
떼바구 강떼바구……’ 이것들은 할머니의 옛날 이바구(이야기)의 첫 마디다. 그것이
귀청에 울리곤 하던 달콤한 쾌감은 지금껏 나의 귓전에 메아리치고 있다. 그 듣기가
사실은 나의 읽기의 원초고 시작이었다. 듣기에 귀가 홀리고 마음이 따라서 홀리던
그 연장선상에 넋이 빠져들던 나의 읽기가 자리 잡고 있다. 나의 읽기의 기원紀元은 이
같이 비롯해서는 이어져 나갔다. 훗날, 철들고 또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나의 읽기의
바탕에는 그 듣기가 뿌리 잡고 있었다.
Ⅱ 책은 먹기도 하는 것이니
우리는 책을 읽고 자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니 우리는 책을 먹고도 자라는 것이니....
1 ) 침으로 삼 킨 책
태어난 지 겨우 여덟 달이 되었을 무렵, 내 아들은 정말이지 책으로 입가심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주는 책을 입으로 물었다. 접어진 책의 어느 페이지에는 그 녀석의 DNA가 배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3페이지와 8페이지 사이가 조금 찢어져 나간 걸 보면, 적어도 그 일부가 그의 뱃속에
챙겨져 있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었다.
하긴 책을 먹어댄 것은 내 아들만은 아닐 것이다. 필라델피아의 위대한 서적 상인인 A.S.
로젠바크는 ‘이상한 나라의 아리스’의 초판본의 수가 아주 적어진 것은 그 대부분이 애들에
의해서 먹어치워진 탓이라고 여기고 있을 정도다.
이것은 ‘어느 보통 독자의 고백’이란 부제가 붙은, 앤 패디먼(Ann Fadiman)의 저
서 『책에서부터(Ex Libris)』에서 따온 것이다. 나는 이 재미난 대목을 읽는 동안 내내,
내 어린 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정경을 오늘인 듯이 되살려 보자. 엄동설한의 한 겨울 밤, 제법 밤이 이슥하다. 여
덟 살도 미처 안 된 소년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 쓰고는 누운 채로 책을 들여다본다.
마음도 온통 활자들에 붙박인 채로다. 책은 베개 맡에 펴져 있다. 턱은 얕은 베개로 괴
고, 이불 바깥으로 겨우 머리끝만 내민 채로 책을 본다. 눈길은 가시처럼 활자들에 꽂혀
있다. 온 가슴에 희열이 고여 오른다. 한동안을 그런 자세로 책 읽기가 계속된다. 밤이
깊어간다. 꼬마는 이따금 눈이 깜박댄다. 고개가 갸우뚱거린다. 덩달아서 눈이 슬그머
니 감겨진다. 자기도 모르게 잠에 빠져든다.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책에 놓인 그대로다.
이런 정경을 거의 밤마다 나는 되풀이했다. 한데 이렇게만 말해 가지고는 패디먼
의 젖먹이와 어디가 어떻게 닮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아침잠이 깨고 난 뒤의 어
느 장면으로 알게 된다.
엎어져 잔 자세 그대로 잠이 깬다. 눈을 뜬다. 베개에 받쳐진 턱 밑에 펴진 책에 얼
룩이 져 있는 게 보인다. 누르죽죽한 자국이 책장 밑바닥에 끼쳐져 있다. 그건 딴 게 아
니다. 내가 자다가 나도 모르게 흘린 침 자국이다. 늘 버릇이 든 대로 그걸 만져 본다.
밤을 새고도 아직도 덜 말라서 제법 축축하다. 나의 눈보다는 입이 그리고 침이 책을
더 즐겨한 것이다. 그렇게 책 맛을 본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잠결에 책을 침으로 얼룩지게 한 나의 짓거리와 패디먼의 젖먹이
가 책으로 입가심한 것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성이 있다. 책으로 입가심 하나 침으로
책을 핥으나 그게 그것이다. 이처럼 나는 침으로 핥으면서 입으로도 책을 읽었다. 그
것은 어린 철의 나의 가장 소중한 자화상이다.
2 ) 제2의 지은이
한데 어린 꼬맹이의 독서는 이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책 읽다말고 깜박, 잠든 그 연후
에도 독서는 쉬지 않았다. 꿈에서 계속되었다. 그건 나의 ‘몽중夢中 독서’였다. 읽다가
만 그 책에서 이미 읽은 부분이 재탕 삼탕으로 꿈속에서 되풀이되었다. 한데 반복이
나 재현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나는 꿈에서 이미 읽은 것을 바탕으로 새 것을 꾸며내기도 했다. 각색하
고 윤색하기도 했다. 전처 자식에게 독하게 굴던 의붓어미가 보기 좋게 날벼락을 맞기도 했다. 여우에
쫓기던 꼬마 주인공이 문득 호랑이로 둔갑해서 으르렁대는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깨기도 했다.
이 몽중 독서의 버릇은 그 뒤의 나의 독서 습관으로 굳어져 갔다. 읽은 책의 내용이나 그 이야기의 줄
거리에다가 나의 생각을 보태고, 상상을 곁들여서윤색하면 나는 제 2의 지은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도 패디먼의 책 제목에서 얻어낼 것이 만만치 않다. ‘책에서부터’라는 번역이 옳다면, 그걸 두
고 두 가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책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말해서 ‘책에서
부터’ 나의 생각이며 사상 그리고 정서를 빚어낸다
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새삼 지은이가 된다. 이미 읽은 책을 바탕으로 삼아서 새
로이 뭔가 생각이며 정서를 꾸려내고 가다듬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창조적 읽기 아
니면 능동적 읽기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둘째는 이와는 좀 다르나 전적으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책에서부터’ 세계
를 보는 눈, 사물을 대하는 태도 등이 비롯한다는 점이다. 물론 인생살이를 꾸려가는
방법도 비롯할 것이다. 한데 그 정도가 아니다. 세계와 사물과 인생 그 자체가 아예 ‘책
에서부터’ 비롯하고 시작하고 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의 시작만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의
결말도, 그 유종의 미도 책으로 마무리된다고 덧붙여도 좋을 것 같다. 그러기에 이 책
의 제목의 여운은,‘인생은 책에서 시작해서 책으로 끝을 본다.’
라고 마무리되어도 좋을 것 같다.
책 읽기는 인생과 세계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먹듯이 삼킬
수 있어야 한다. 머리로 가슴으로 담뿍 받아들이고는 골고루 소화해내야 한다. 읽는
사람 자신의 것으로 삼킬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좀 강조해서 책은 머리와 가슴으로 먹
는 것이라고도 우기고 싶어진다. 그래서 맨 앞에서 인용된 글의 내용을 참조해서는
‘우리는 누구나 책을 먹는다.’
이 한마디를 강조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책과 인생을 두고서 우리들 누구나가
외치고 다질 으뜸가는 로고다. 구호다.
그렇다. 우리들 누구나 왼쪽 손의 검지 끝에 침을 묻혀서는 페이지를 넘길 적마다
슬쩍 슬쩍 책의 맛을 보게 된다. 다음번에 손가락 끝에 침을 바를 때, 먼젓번 바른 침을,
책 맛이 스민 그 침을 우리들은 들이키곤 한다. 책 읽기의 재미에 홀려서 입술을 꼼지
락댈 적마다 점점 더 깊게 우리는 책 맛을 삼키고는 거기 취하게 된다. 그럴수록 책의
주제며 내용 그리고 재미는 솔솔 배와 온 내장에 고여서는 차근차근 온 몸으로 번져
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입으로 그리고 몸으로도 책을 먹게 된다.
하지만 우리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식책食冊’, 곧 ‘책 먹기’를 하게 된다. 입 말고,
배 말고. 정작 가슴과 머리로도 책을 먹게 된다. 서정시들은 주로 가슴으로 삭이게 되
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책은 머리로 받아먹고는 곱새기게 된다. ‘가슴 고픔’이며 ‘머
리 고픔’은 배고픔만큼이나 간절하다. 배고픔을 채우지 않으면 생리적인 목숨을 잃는
다. 그렇듯이 머리 고픔을 채우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또 영적으로 굶어죽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정신과 영혼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도 책을 읽어야 한다. 책 읽
기는 생존수단이다. ‘생존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게 문제로다’라고 웅얼댄 햄릿의 독
백에 겸해서 우리는 ‘독서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게 문제로다’라고, 다들 제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누구든 그 물음에 오답誤答, 이를테면 일그러진 답이 나온다면
그는 그의 삶을 포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말고가 문제되지 않는다
면 삶을 살고 말고도 문제될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정서로 그는 더 이상 살
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 책읽기, 우리들 삶의 이정표
그러기에 책 읽기는 죽기 살기다. 그래서도 다음 시를 거듭거듭 되새기게 된다.
이 세상의 어떤 책도 그대에게 직접 행운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은근하게 그대 자신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놓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게 있다.
태양도 별도 달도. 왜냐 하면 그대가 거기서 찾은 빛은 이제 그대 자신 속에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줄곧 찾아서 헤맨 지혜는 갖가지 책 속에서, 어느 페이지에서나 빛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 지혜는 그대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 헤르만 헤세 , 「책」
이 시는 인생의 수요를 채워줄 모든 것이 책 속에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자니,
우리들 내면의 태양이고 별이고 한 것이 책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책은 각
자 우리들의 미래가 되고 희망이 된다. 책의 힘은, 그 전능한 권능은 여기서 비롯한다.
그래서 책은 희망의 길을 향해서 우리 앞에서 길라잡이 노릇을 맡아 하게 된다. 그런
중에도 각별히 마음 쓸 대목이 헤세의 시에 담겨 있다. 그것은 ‘책은 그대 자신으로 돌
아갈 길을 열어 놓을 것이다’라는 바로 그 구절이다.
한데, 우리들 각자가 우리들 자신으로 돌아갈 길, 그것은 뭘까?, 뭘 뜻하고 있는 것
일가? 자성自省 또는 자기 회귀回歸의 길이라고 해도 좋을, 그 길은 어떤 것일까?
‘내가 누구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자아를 위한 양대 물음이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
에게 던질 처음이자, 마지막 물음이다. 우리들 개개인의 삶은, 그 정신적, 정서적인 삶은 이 자아를 위한 양
대 물음을 묻는 일이고 답을 캐는 일이다. 인생은 이들 양대 물음, 시작이자 마지막이 될, 이 종국적인 물
음에 대한 시험지고 또 답안지다. 거기 객관식 선다형의 답이 나올 턱이 없다. 나왔다 쳐도 헛짚은 것이 될
것이다. 각자의 주관식 답이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찾음의 길도 지극히 주관적이고, 각자
자기 나름일 것이다.
그렇게 양대 물음을 따지고 드는 방황, 그 물음을 짚고 드는 준순浚巡이라는 이름의 헤맴, 그것이 곧 우
리들 삶의 걸음걸이다. 정답에 대한 근사치는 더러 나올지 모르지만, 막판의 절대적인 정답은 우리의 찾음
의 길에서 빗겨나 있을지도 모른다. 하다 보면 헤맴이며 방황 그 자체가 정답이 될 수
도 있게 된다. 마지막 정답은 없고 오직 찾음과 구함만이 정답 자리에 들어설 것, 그게
양대 물음을 두고 우리가 얻어낼 수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찾음의 길은 있되, 마지막 종착지도 결승점도 없을 찾음, 그게 양대 물음을 두고 얻
어낼 정답일지도 모른다. 그런 찾음의 길의 가장 보람된 길라잡이로 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다름 아닌. 독서가 예비 되어 있다. 책은 그 양대 물음을 찾아가는 우리들
의 지적인, 정서적인 나그네 길의 이정표다.
먼 길 가다보면, 어느 호젓한 길머리에 선 이정표 하나. 그것을 에워서 요행으로 고
목나무 우거진 서늘한 그늘. 거기 퍼질러 앉아서는 지나온 행적을 되살피고 앞으로 겪
을 노정路程을 미리 내다본다. 그리고는 그 두 가닥 길과 그것을 에워싼 정경을 그려본
다. 한참을 그렇게 쉬다가는 다시 일어선다. 이정표 쓰다듬으면서 길 갈 차비를 차린다.
책 읽기도 그와 같은 것. 인생이란 멀고 험한 길, 앞이 미처 내다보이지도 않는 길을
책을 이정표 삼아서 나아가는 것이다. 책은 이래서 다름 아니고 인생이란 나그네 길
의 길라잡이가 된다.
4 ) 동화가 일러준 것
그걸 우리들은 누구나 어릴 적에 동화책에서 익히고 배우면서 자랐다. 동화 속의 어린
주인공은 미처 철도 들기 전에 나그네 길에 나선다. 어느 날 문득, 소년은 길손이 된다.
자기가 스스로 일구어 낼 새로운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 미지인 세계를 더듬어서 홀연
히 길을 나선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험난한 길을 혼자 가서는 난관을 이기거나 무서운
악마에 이겨서는 남들이 감히 꿈도 못 꿀 보람을 얻어 내는 것이 바로 동화 주인공이다.
우리는 그런 동화책 읽으면서 삶의 동력을 기르고 희망을 가꾸어 왔다. 고난이 희
망을 여는 원동력이란 것을 동화책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져온 것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동화 읽기로 세상이며 인생에 눈뜨고, 그 만큼 철이 들어갔다. 그것은 육
체만이 아니라 지적인, 정신적인 성장을 의미할 것이다.
주인공 꼬마는 그의 길 가기에서 방황과 고독 그리고 고난이나 고통, 이들 세 가지
의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생전 처음 가보는 길을 헤매면서 혼자
서 간다. 그러면서 그 도중에서 고통을 겪고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 때로는 죽음의
위협이 따르기도 하다. 마귀할멈이 생명을 노리는가 하면, 늑대 같은 맹수도 목숨을
탐낸다. 여우같은 요상한 짐승의 꾐에 속절없이 빠질 법도 한다. 그걸 기지로 이거거
나 운명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극복하고는 살아남는다. 승리의 월계관을 쓰기도 한
다. 뿐만 아니라, 이미 위기에 빠져 있던 다른 사람의 구원자가 되기도 한다.
5 ) 저 위대한 읽기를 위한 열정
그런 동화책의 보람은 다자라고 어른이 되어서도여전히 다른 책들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든다.
그 힘은 우리들이 바야흐로 좌절하고 무너져 내리고 할그 위기의 순간에 더 커진다. 가령 까뮈의
『페스트』를 보자. 온 도시가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음의 지옥으로 바뀌어 가는, 그 최후의 순간
에 다들 피신해서 도망을 가는데 주인공인 의사는 결연히 남아서 소임을 다하기를 다
짐한다. 그럴 때 옆에서 다그치듯 말을 건넨다. “이제 남아 봐야, 희망이 없습니다.” 한
데 이에 대해서 의사는 단호하게 응한다. “나는 희망이 없으니까 남겠습니다.” 바로 이
것이다. 희망이 있으면 누구나 남을 것이다. 희망이 없는 속에 남는 일은 누구나 할 짓
은 못된다. 그러기에 남는 일은 참다운 용기가 되고 힘이 된다. 희망이 되살아날 실마
리가 될 것이다. 깜깜한 칠흑의 어둠속에 비치는 빛살이야말로 광명의 참 기틀이 될 것
이다. 그것은 역전逆轉의 희망이다. 거기서 참다운 용기가 샘솟는다.
이래서 우리는 어릴 때나 성인이 되어서나, 고난에 부딪칠 적마다 책에서 희망을
묻고 미래를 내다보는 힘을 얻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
인』을 거듭 생각하게 된다. 꼬박 사흘 밤낮을 혼자 바다를 헤맨 끝에 간신히 잡아 챈,
물고기를 상어들에게 다 물어뜯기고 빈손으로 돌아 온 그 밤 노인은 어떤 꿈을 꾸었
던가?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 잡이 하던 바로 그 정경이다. 목숨의 동력이 펄펄 뛰어
날뛰는 그 밤 그의 꿈! 그것은 우리가 책에서 얻어낼, 역전의 희망이고 꿈이다. 새로운
미래가 열릴 인생길이다.
아우구스틴(Augustine)이 그의 저 유명한 『고백록』에서 특종의 책이 그에게 준 감
회로 그의 인생의 고비들을 회고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심연에서 나는 보았나니, 사랑이 한 권 속에 영글어 있다는 것을.
그 책장마다 온 우주를 에워서 펄럭대고 있었다.
단테가 그의 『신곡』에서 이렇게 노래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읽기를 위한 열정이다. 그것은 값을 물 턱이 없다.
그것은 위안이다. 그것은 기분풀이다. 그것은 흥분이다. 그것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줄 것이고
별의별 허다한 경험을 줄 것이다.
이것은 L. H. 바스코브(Bascove)라는 우리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는 사람이
‘책이 떨어져 펼쳐진 곳(Where Books Fallen Open)’에서 인용하고 있는 E. 하드윅
(Hardwick)의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 각자가 우리들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 신이 주었건, 하늘이 주었건
아니면 팔자가 주었건 간에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품성, 성질, 지능 등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것을 ‘독서의 열정’이라고 했던 이 한 마디를 위대한 그리고 간곡한 경구로 삼
고 싶다.
Ⅲ 다섯 가지 읽기
바스코브는 인생에서 우리가 겪게 되고 갖게 되는 온갖 것이 독서를 패러다임 삼아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한 셈이다. 요컨대 책이 인생과 세계의 스펙트럼이고 만화경萬華
鏡이라고 말한 셈이다. 이것만 해도 독서며 책의 엄청난, 대단한 경지인데도 바스코프
는 또 다른 중요한 발언을 하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온갖 것 가운데서 가장 위
대한 것은 ‘읽기를 위한 열정’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보통 또 흔하게 열정이라면 뭘까? 매겨진 일을 위한 것, 주어진 과업을 위한 것으
로 열정을 말하기가 보통이다. 그것들이 그 사람의 생존이며 삶의 보람과 맺어져 있
을 때, 열정은 뜨거울 게 틀림없다. 그런가 하면 사랑을 위한 열정을 사람들은 가장 크
게 내세울 것 같다. 굳이 따지고 들 것도 없이 열정이란 것은 그런 테두리 속에서 타오
를 것 같다.
한데 바스코프는 그가 스스로 타오르게 하는 열정, 그나마 위대한 열정은 독서를
위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책이야 말로 인간 열정의 지표라고 말하고 있
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열독熱讀이란 말을 쓰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있는 눈결
이 달아오르고 덩달아서 책을 잡은 손길이 뜨거워지고 그러다가 마침내는 머리와 가
슴이 열에 저리게 되는 경지, 그게 정열의 읽기인 열독이다.
한데 열독은 남독濫讀과 탐독耽讀을 꺼려하지 않는다. 남독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
듯이, 이 책 저 책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또 함부로 읽는 것이다. 그러기에 남독은 난
독亂讀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읽기가 이 지경이 되면 백 권, 천 권의 책이라도 전
혀 버거울 것 없다. 광야를 헤집듯이 책의 숲을 헤쳐 나갈 것이다.
탐독은 탐닉耽溺해서 책 읽기를 하는 것이다. 술에 취하듯이, 심지어 미친 듯이 책
에 취해서 읽는 게 탐독이다. 읽기에 깊이 빠져들고도 전혀 그걸 느끼지 못하는 경지
에서 탐독은 이루어진다. 애간장이 다 타고 녹도록 읽음에 빠져 있는 게 바로 탐독이
다. 탐락耽樂이라면 즐거움에 흠뻑 빠져든다는 뜻이다. 그럴 때 누가 부르고 집적댄다
해도 전혀 알바 없는 경지에 빠지게도 된다. 세상도 옆도 모두 깜빡 잊고 만다.
한데 이 탐독을 두고는 따로 강조할 게 있다. 무아지경無我之境으로 이를테면 본인
이 자신을 감각하지 못할 지경으로 탐독을 하게 되는데, 그러고도 정신이 더 없이 맑
고 맑다는 것이 강조될 수 있다. 술이건 사랑이건 일단 탐닉하게 되면 자아를 잃고 만
다. 정신을 잃다시피 한다. 한데 책에 탐닉하게 되면 더 한층 살아나게 된다. 읽는 사람
머리와 가슴은 깊은 산골 옹달샘 같을 것이다.
그런데 탐독을 하고 남독을 하다 보면, 모르는 결에도 정독精讀을 하게 된다. 정신
집중해서, 정성을 바쳐서, 정세精細하게 또 정밀하게 읽어나가는 것이 곧 정독이다. 꼼
꼼히 캐어서 읽고, 한 자 한 자, 한 줄 한 줄 따로 짚어가다시피 하면서 따져서 읽는 것
이 다름 아닌, 정독이다. 정독이라면 글의 요긴한 대목마다 줄을 치면서도 읽게 된다.
또 중요한 대목 읽을 적마다, 그 여백에다가 읽는 사람 자신의 생각을 적어 나가는 것
도 정독의 크나큰 보람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란 말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철인 파스칼은 무
서운 정독의 보기를 남기고 있다. 그는 책을 읽을 적에 잡념에 사로잡히거나 엉뚱한 생각에
젖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비상한 수단을 강구했다. 가시가 수없이 돋아 있는 얇은 철판을
배의 맨살에 띠로 매어서 붙이고 있었다. 책 읽는 마음이 흩뜨려질 적에는 사정없이
그 철판을 억눌렀다. 그 아픔으로다가 잡념을 내몬 것이다. 어쩌면 섬쩍지근한 얘기
이기도 하지만, 이에서 우리는 정독의 본보기 같은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중세기의 일본의 한 학자는 그 나름으로 정독을 위한 별난 비상수단
을 짜내었다. 천장에서 시퍼런 칼의 날이 그의 서안書案 앞에 그것도 바로 코앞에 달랑
대도록 매달았다. 그가 책 읽다말고 순간 졸기만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의 책 읽는
눈알도 칼날 마냥 날카롭게 빛났을 것이다. 이들 두 가지 보기는 책읽기의 정독이 얼
마나 무섭게 정신집중을 요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따갑게, 예리하게 일러주고 있다.
집중! 인간이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극치에 다다르려면, 집중은 필수적이다. 렌즈
를 통해서 햇살이나 광선이 하나의 초점에 모여드는 것을 우리는 보아서 알고 있다.
무슨 일, 어떤 일에서나 극에 오르자면 인간의 정신은 그 일을 위한 렌즈가 되어야 한
다. 인간이 이룩해낸 문화도 과학도 예술도 모두 집중이 만들어 낸 것이다. 집중은 인
간 역사의 창조자다. 책 읽기라는 정신노동에서는 그것이 더 한층 강하게 요구된다.
이렇게 열독과 남독과 탐독과 정독, 이 네 가지 읽기의 끝에 우리는 마침내, 애독愛
讀이라는 읽기의 정상에 오르게 된다. 책을 사랑해서 읽게 되고, 책 읽기가 그예 사랑
이 되는, 그 높으나 높은 경지에 승화하게 된다.
사랑! 그것은 열정의 별명이다. 우리는 독서에 열정을 바침으로써, 정열을 다함으
로써 애독자가 될 수 있다.
사랑! 그것은 헌신의 별명이다.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치는 일이다. 우리는 독서에
나를 바침으로써 애독자가 될 수 있다.
사랑 ! 그것은 그리움이다. 동경憧憬이다. 아스라한 수평선 바라듯이, 높으나 높은
하늘 우러르듯이 바라고 소망하고 하는 것이 곧 동경이다. 우리는 독서에 사무친 그
리움을 바침으로써 애독자가 될 수 있다.
열독, 남독, 탐독, 정독 그리고 애독! 이 ‘오독五讀’, 이를테면 다섯 가지 읽기를 다할
때, 우리들 누구나 책의 정복자가 되고 나아가서는 마침내 인생과 세계의 정복자가
될 것이다.
책 읽기는 우리들 삶의 모든 것,인생이 바라고 바라는 모든 것, 그래서도 어린 인생은 책 읽기로
시작된다.
‘내게 책 읽기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물음을 묻고 글을 이끌어갈까 한다. 그
것은 나의 독서 생활의 최초의 단서, 이를테면 나의 독서 생활의 ‘천지개벽’을 풀어 가
는 것으로 이 한 편의 글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본론에 들어가서,
‘독서 일반론’을 펼치게 될 실마리로 삼고자 한다.
유치원 다니던 시절 그리고 초등학교의 초학년을 치르고 있던 시절, 나는 ‘병골이’
였다. 사시사철 병치레하면서 잔병을 앓고 있었다. 파리하고 야윌 대로 야위어 있었
다. 병골이라서 당연히 ‘약골弱骨’이었다. 그게 내 별명이기도 했다. 어린 나 스스로 친
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들과 함께 활달하게 뛰노는 것은 언감생심, 턱도 없는 일
이었다. 그래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고는 매양 혼자였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택한 소외고 고독이었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에도 운동장
이나 밖에 잘 나가질 않았다. 제 책상, 제 자리에 웅크리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자니
우두커니 웅숭크리고 있는 것보다야 책이라도 읽는 게 백 배, 천 배 나았다. 책 읽기는
유일한 심심풀이였다. 단 한 가지의 시간 보내기였다.
그러나 그는 제 마음 속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마음은 원망과 동경으로 가득 하였다. 왜? 무엇 때
문에 내가 이런 데 와 있는 것이냐? 왜 제 방 창가에 앉아서 슈토롬의 『임멘제에』나 읽으면서 늙은
호두나무 가지들이 우울한 소리를 내는 저녁 어스름에 쌓인 정원이나 가끔 내다보지 않았더냐?
이것은 내가 지금도 이따금 버릇처럼 꺼내서는 읽곤 하는,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
뢰거』에서 뽑은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내 어린 철 자서전의 일부로 삼고 있을 정도다.
훗날 시인이 된 주인공, 토니오는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그래서 그는 위와 같은 독백
을 외게 된다. 학교에서는 마침 소년들을 위한 무도회가 벌어졌다. 수업을 겸한 그 자
리에서 토니오는 평소 사무치게 그리워하기만 하던 소녀, 잉게 홀름과 우연하게도 손
을 맞잡고 춤을 추게 되는 기막힌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흥분한 탓일까? 넋을 잃
은 탓일까? 토니오는 실수를 하고 만다. 그래서는 잉게를 비롯한 한 반 친구들의 웃음
거리가 되고 만다. 뉘우침에 빠져서 낙담한 소년은 위와 같이 혼잣말을 중얼대게 된
것이다. 왕따가 되어서는 혼자 책 읽기를 하고 있을 토니오의 모습에 내 어린 철의 몰
골을 겹쳐 보게 된다.
그러자니, 나는 별 수 없이, 절로 ‘책벌레’가 되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변
신』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서 주인공은 어느 순간 느닷없이 한 마리 벌레로 둔갑하고
만다. 그렇듯이 나라는 약골은 어느 새엔가 한 마리의 ‘책벌레’로 변신하고 있었다.
교실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더운 여름이면 운동장 한 구석, 나무 그늘에서 책
벌레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아니 벌레답게 글자를 하나, 하나 갉아먹고 있었다. 책벌레
로서 책 먹기는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눈으로 씹어서는 머리와 가슴으로 채워서
는 알뜰하게 새기고 있었다. 하니까, 책에서 ‘책 맛’을 누린 것은 당연하다. 달콤한 맛
에 시원한 맛, 향긋한 냄새 등등, 오관으로 두루 책 맛을 볼 수 있었다. 바른 손 무명지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서는 책 장 하나를 넘긴 뒤를 물고는 다음 페이지 넘기노라고
또 침을 손가락 끝에 묻히면, 솔솔 입안에 책 맛이 넘쳐 나곤 했다. 이래서 혀로도 입으
로도 책을 먹고 맛보고 한 것이다. 그와 같은 책벌레 짓은 나 혼자만의 공화국, 아니 천
국이었다.
동요나 동시는 따라 외우기를 했다. 읽던 책을 엎어놓고는 시 구절을 줄줄이 따라
외었다. 그 암송暗誦으로 나는 스스로 시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동화는 나의
혼자만의 모노드라마를 연출케 했다. 주인공이며 다른 인물들의 몸짓, 표정 등을 따
라서 일인 연극이 펼쳐지곤 했다. 바깥세상 모든 것, 교실 안팎의 모든 것들을 다 잊고
는 오직 나 혼자만의 세계가 일구어져 나갔다.
그러면서 묘한 책 읽기의 방법을 터득해 나갈 수 있었다. 그건 내가 스스로 ‘훔쳐
읽기’ 라고 또는 ‘숨어 읽기’라고 이름 붙인 나의 독서의 비방秘方이고 비책秘策이었다.
수업이 시작되면 나는 읽다 만 책을 편 채로 책상 안에 밀어 넣곤 했다. 가르치다가 선
생이 흑판으로 돌아서면 절호의 기회다. 책을 가만히 꺼내놓고는 읽어 나간다. 선생
이 우리 쪽으로 되돌아서는 기척이 나면, 재빨리 책을 밀어놓고는 시치미를 뗐다. 이
게 바로 훔쳐 읽기 또는 도둑 읽기다.
그와는 달리 숨어 읽기는 집에서 행해졌다. 필자가 어렸을 때, 부모들은 소설이나
동화 읽기는 질색했다. “공부는 않고 소설 따위만 읽냐?” 그렇게 야단치곤 했다. 그러
니 어쩌겠는가. 부모 몰래 내 방에 갇히다시피 하고는 숨어 읽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들 독서의 두 가지 범법犯法 행위는 나의 책 읽기를 한층 더 짙게 깊게 해주
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것 때문에 나의 어린 철 책 읽기는 닥치는 대로 읽기의 남독
濫讀, 넋을 팔고 읽어 내는 탐독耽讀그리고 그 둘이 어울려서 이루어지는 책 사랑의 애
독愛讀의 세계에 빠져 들 수 있었다.
한데 그러한 꼬맹이의 읽기에서는 듣기가 바탕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이전, 대여섯 살 먹을 때의 일이었다. ‘옛날, 옛날, 그 옛날에……’, ‘이바구
떼바구 강떼바구……’ 이것들은 할머니의 옛날 이바구(이야기)의 첫 마디다. 그것이
귀청에 울리곤 하던 달콤한 쾌감은 지금껏 나의 귓전에 메아리치고 있다. 그 듣기가
사실은 나의 읽기의 원초고 시작이었다. 듣기에 귀가 홀리고 마음이 따라서 홀리던
그 연장선상에 넋이 빠져들던 나의 읽기가 자리 잡고 있다. 나의 읽기의 기원紀元은 이
같이 비롯해서는 이어져 나갔다. 훗날, 철들고 또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나의 읽기의
바탕에는 그 듣기가 뿌리 잡고 있었다.
Ⅱ 책은 먹기도 하는 것이니
우리는 책을 읽고 자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니 우리는 책을 먹고도 자라는 것이니....
1 ) 침으로 삼 킨 책
태어난 지 겨우 여덟 달이 되었을 무렵, 내 아들은 정말이지 책으로 입가심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주는 책을 입으로 물었다. 접어진 책의 어느 페이지에는 그 녀석의 DNA가 배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3페이지와 8페이지 사이가 조금 찢어져 나간 걸 보면, 적어도 그 일부가 그의 뱃속에
챙겨져 있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었다.
하긴 책을 먹어댄 것은 내 아들만은 아닐 것이다. 필라델피아의 위대한 서적 상인인 A.S.
로젠바크는 ‘이상한 나라의 아리스’의 초판본의 수가 아주 적어진 것은 그 대부분이 애들에
의해서 먹어치워진 탓이라고 여기고 있을 정도다.
이것은 ‘어느 보통 독자의 고백’이란 부제가 붙은, 앤 패디먼(Ann Fadiman)의 저
서 『책에서부터(Ex Libris)』에서 따온 것이다. 나는 이 재미난 대목을 읽는 동안 내내,
내 어린 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정경을 오늘인 듯이 되살려 보자. 엄동설한의 한 겨울 밤, 제법 밤이 이슥하다. 여
덟 살도 미처 안 된 소년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 쓰고는 누운 채로 책을 들여다본다.
마음도 온통 활자들에 붙박인 채로다. 책은 베개 맡에 펴져 있다. 턱은 얕은 베개로 괴
고, 이불 바깥으로 겨우 머리끝만 내민 채로 책을 본다. 눈길은 가시처럼 활자들에 꽂혀
있다. 온 가슴에 희열이 고여 오른다. 한동안을 그런 자세로 책 읽기가 계속된다. 밤이
깊어간다. 꼬마는 이따금 눈이 깜박댄다. 고개가 갸우뚱거린다. 덩달아서 눈이 슬그머
니 감겨진다. 자기도 모르게 잠에 빠져든다.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책에 놓인 그대로다.
이런 정경을 거의 밤마다 나는 되풀이했다. 한데 이렇게만 말해 가지고는 패디먼
의 젖먹이와 어디가 어떻게 닮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아침잠이 깨고 난 뒤의 어
느 장면으로 알게 된다.
엎어져 잔 자세 그대로 잠이 깬다. 눈을 뜬다. 베개에 받쳐진 턱 밑에 펴진 책에 얼
룩이 져 있는 게 보인다. 누르죽죽한 자국이 책장 밑바닥에 끼쳐져 있다. 그건 딴 게 아
니다. 내가 자다가 나도 모르게 흘린 침 자국이다. 늘 버릇이 든 대로 그걸 만져 본다.
밤을 새고도 아직도 덜 말라서 제법 축축하다. 나의 눈보다는 입이 그리고 침이 책을
더 즐겨한 것이다. 그렇게 책 맛을 본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잠결에 책을 침으로 얼룩지게 한 나의 짓거리와 패디먼의 젖먹이
가 책으로 입가심한 것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성이 있다. 책으로 입가심 하나 침으로
책을 핥으나 그게 그것이다. 이처럼 나는 침으로 핥으면서 입으로도 책을 읽었다. 그
것은 어린 철의 나의 가장 소중한 자화상이다.
2 ) 제2의 지은이
한데 어린 꼬맹이의 독서는 이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책 읽다말고 깜박, 잠든 그 연후
에도 독서는 쉬지 않았다. 꿈에서 계속되었다. 그건 나의 ‘몽중夢中 독서’였다. 읽다가
만 그 책에서 이미 읽은 부분이 재탕 삼탕으로 꿈속에서 되풀이되었다. 한데 반복이
나 재현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나는 꿈에서 이미 읽은 것을 바탕으로 새 것을 꾸며내기도 했다. 각색하
고 윤색하기도 했다. 전처 자식에게 독하게 굴던 의붓어미가 보기 좋게 날벼락을 맞기도 했다. 여우에
쫓기던 꼬마 주인공이 문득 호랑이로 둔갑해서 으르렁대는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깨기도 했다.
이 몽중 독서의 버릇은 그 뒤의 나의 독서 습관으로 굳어져 갔다. 읽은 책의 내용이나 그 이야기의 줄
거리에다가 나의 생각을 보태고, 상상을 곁들여서윤색하면 나는 제 2의 지은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도 패디먼의 책 제목에서 얻어낼 것이 만만치 않다. ‘책에서부터’라는 번역이 옳다면, 그걸 두
고 두 가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책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말해서 ‘책에서
부터’ 나의 생각이며 사상 그리고 정서를 빚어낸다
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새삼 지은이가 된다. 이미 읽은 책을 바탕으로 삼아서 새
로이 뭔가 생각이며 정서를 꾸려내고 가다듬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창조적 읽기 아
니면 능동적 읽기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둘째는 이와는 좀 다르나 전적으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책에서부터’ 세계
를 보는 눈, 사물을 대하는 태도 등이 비롯한다는 점이다. 물론 인생살이를 꾸려가는
방법도 비롯할 것이다. 한데 그 정도가 아니다. 세계와 사물과 인생 그 자체가 아예 ‘책
에서부터’ 비롯하고 시작하고 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의 시작만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의
결말도, 그 유종의 미도 책으로 마무리된다고 덧붙여도 좋을 것 같다. 그러기에 이 책
의 제목의 여운은,‘인생은 책에서 시작해서 책으로 끝을 본다.’
라고 마무리되어도 좋을 것 같다.
책 읽기는 인생과 세계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먹듯이 삼킬
수 있어야 한다. 머리로 가슴으로 담뿍 받아들이고는 골고루 소화해내야 한다. 읽는
사람 자신의 것으로 삼킬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좀 강조해서 책은 머리와 가슴으로 먹
는 것이라고도 우기고 싶어진다. 그래서 맨 앞에서 인용된 글의 내용을 참조해서는
‘우리는 누구나 책을 먹는다.’
이 한마디를 강조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책과 인생을 두고서 우리들 누구나가
외치고 다질 으뜸가는 로고다. 구호다.
그렇다. 우리들 누구나 왼쪽 손의 검지 끝에 침을 묻혀서는 페이지를 넘길 적마다
슬쩍 슬쩍 책의 맛을 보게 된다. 다음번에 손가락 끝에 침을 바를 때, 먼젓번 바른 침을,
책 맛이 스민 그 침을 우리들은 들이키곤 한다. 책 읽기의 재미에 홀려서 입술을 꼼지
락댈 적마다 점점 더 깊게 우리는 책 맛을 삼키고는 거기 취하게 된다. 그럴수록 책의
주제며 내용 그리고 재미는 솔솔 배와 온 내장에 고여서는 차근차근 온 몸으로 번져
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입으로 그리고 몸으로도 책을 먹게 된다.
하지만 우리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식책食冊’, 곧 ‘책 먹기’를 하게 된다. 입 말고,
배 말고. 정작 가슴과 머리로도 책을 먹게 된다. 서정시들은 주로 가슴으로 삭이게 되
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책은 머리로 받아먹고는 곱새기게 된다. ‘가슴 고픔’이며 ‘머
리 고픔’은 배고픔만큼이나 간절하다. 배고픔을 채우지 않으면 생리적인 목숨을 잃는
다. 그렇듯이 머리 고픔을 채우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또 영적으로 굶어죽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정신과 영혼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도 책을 읽어야 한다. 책 읽
기는 생존수단이다. ‘생존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게 문제로다’라고 웅얼댄 햄릿의 독
백에 겸해서 우리는 ‘독서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게 문제로다’라고, 다들 제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누구든 그 물음에 오답誤答, 이를테면 일그러진 답이 나온다면
그는 그의 삶을 포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말고가 문제되지 않는다
면 삶을 살고 말고도 문제될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정서로 그는 더 이상 살
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 책읽기, 우리들 삶의 이정표
그러기에 책 읽기는 죽기 살기다. 그래서도 다음 시를 거듭거듭 되새기게 된다.
이 세상의 어떤 책도 그대에게 직접 행운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은근하게 그대 자신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놓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게 있다.
태양도 별도 달도. 왜냐 하면 그대가 거기서 찾은 빛은 이제 그대 자신 속에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줄곧 찾아서 헤맨 지혜는 갖가지 책 속에서, 어느 페이지에서나 빛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 지혜는 그대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 헤르만 헤세 , 「책」
이 시는 인생의 수요를 채워줄 모든 것이 책 속에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자니,
우리들 내면의 태양이고 별이고 한 것이 책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책은 각
자 우리들의 미래가 되고 희망이 된다. 책의 힘은, 그 전능한 권능은 여기서 비롯한다.
그래서 책은 희망의 길을 향해서 우리 앞에서 길라잡이 노릇을 맡아 하게 된다. 그런
중에도 각별히 마음 쓸 대목이 헤세의 시에 담겨 있다. 그것은 ‘책은 그대 자신으로 돌
아갈 길을 열어 놓을 것이다’라는 바로 그 구절이다.
한데, 우리들 각자가 우리들 자신으로 돌아갈 길, 그것은 뭘까?, 뭘 뜻하고 있는 것
일가? 자성自省 또는 자기 회귀回歸의 길이라고 해도 좋을, 그 길은 어떤 것일까?
‘내가 누구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자아를 위한 양대 물음이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
에게 던질 처음이자, 마지막 물음이다. 우리들 개개인의 삶은, 그 정신적, 정서적인 삶은 이 자아를 위한 양
대 물음을 묻는 일이고 답을 캐는 일이다. 인생은 이들 양대 물음, 시작이자 마지막이 될, 이 종국적인 물
음에 대한 시험지고 또 답안지다. 거기 객관식 선다형의 답이 나올 턱이 없다. 나왔다 쳐도 헛짚은 것이 될
것이다. 각자의 주관식 답이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찾음의 길도 지극히 주관적이고, 각자
자기 나름일 것이다.
그렇게 양대 물음을 따지고 드는 방황, 그 물음을 짚고 드는 준순浚巡이라는 이름의 헤맴, 그것이 곧 우
리들 삶의 걸음걸이다. 정답에 대한 근사치는 더러 나올지 모르지만, 막판의 절대적인 정답은 우리의 찾음
의 길에서 빗겨나 있을지도 모른다. 하다 보면 헤맴이며 방황 그 자체가 정답이 될 수
도 있게 된다. 마지막 정답은 없고 오직 찾음과 구함만이 정답 자리에 들어설 것, 그게
양대 물음을 두고 우리가 얻어낼 수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찾음의 길은 있되, 마지막 종착지도 결승점도 없을 찾음, 그게 양대 물음을 두고 얻
어낼 정답일지도 모른다. 그런 찾음의 길의 가장 보람된 길라잡이로 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다름 아닌. 독서가 예비 되어 있다. 책은 그 양대 물음을 찾아가는 우리들
의 지적인, 정서적인 나그네 길의 이정표다.
먼 길 가다보면, 어느 호젓한 길머리에 선 이정표 하나. 그것을 에워서 요행으로 고
목나무 우거진 서늘한 그늘. 거기 퍼질러 앉아서는 지나온 행적을 되살피고 앞으로 겪
을 노정路程을 미리 내다본다. 그리고는 그 두 가닥 길과 그것을 에워싼 정경을 그려본
다. 한참을 그렇게 쉬다가는 다시 일어선다. 이정표 쓰다듬으면서 길 갈 차비를 차린다.
책 읽기도 그와 같은 것. 인생이란 멀고 험한 길, 앞이 미처 내다보이지도 않는 길을
책을 이정표 삼아서 나아가는 것이다. 책은 이래서 다름 아니고 인생이란 나그네 길
의 길라잡이가 된다.
4 ) 동화가 일러준 것
그걸 우리들은 누구나 어릴 적에 동화책에서 익히고 배우면서 자랐다. 동화 속의 어린
주인공은 미처 철도 들기 전에 나그네 길에 나선다. 어느 날 문득, 소년은 길손이 된다.
자기가 스스로 일구어 낼 새로운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 미지인 세계를 더듬어서 홀연
히 길을 나선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험난한 길을 혼자 가서는 난관을 이기거나 무서운
악마에 이겨서는 남들이 감히 꿈도 못 꿀 보람을 얻어 내는 것이 바로 동화 주인공이다.
우리는 그런 동화책 읽으면서 삶의 동력을 기르고 희망을 가꾸어 왔다. 고난이 희
망을 여는 원동력이란 것을 동화책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져온 것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동화 읽기로 세상이며 인생에 눈뜨고, 그 만큼 철이 들어갔다. 그것은 육
체만이 아니라 지적인, 정신적인 성장을 의미할 것이다.
주인공 꼬마는 그의 길 가기에서 방황과 고독 그리고 고난이나 고통, 이들 세 가지
의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생전 처음 가보는 길을 헤매면서 혼자
서 간다. 그러면서 그 도중에서 고통을 겪고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 때로는 죽음의
위협이 따르기도 하다. 마귀할멈이 생명을 노리는가 하면, 늑대 같은 맹수도 목숨을
탐낸다. 여우같은 요상한 짐승의 꾐에 속절없이 빠질 법도 한다. 그걸 기지로 이거거
나 운명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극복하고는 살아남는다. 승리의 월계관을 쓰기도 한
다. 뿐만 아니라, 이미 위기에 빠져 있던 다른 사람의 구원자가 되기도 한다.
5 ) 저 위대한 읽기를 위한 열정
그런 동화책의 보람은 다자라고 어른이 되어서도여전히 다른 책들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든다.
그 힘은 우리들이 바야흐로 좌절하고 무너져 내리고 할그 위기의 순간에 더 커진다. 가령 까뮈의
『페스트』를 보자. 온 도시가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음의 지옥으로 바뀌어 가는, 그 최후의 순간
에 다들 피신해서 도망을 가는데 주인공인 의사는 결연히 남아서 소임을 다하기를 다
짐한다. 그럴 때 옆에서 다그치듯 말을 건넨다. “이제 남아 봐야, 희망이 없습니다.” 한
데 이에 대해서 의사는 단호하게 응한다. “나는 희망이 없으니까 남겠습니다.” 바로 이
것이다. 희망이 있으면 누구나 남을 것이다. 희망이 없는 속에 남는 일은 누구나 할 짓
은 못된다. 그러기에 남는 일은 참다운 용기가 되고 힘이 된다. 희망이 되살아날 실마
리가 될 것이다. 깜깜한 칠흑의 어둠속에 비치는 빛살이야말로 광명의 참 기틀이 될 것
이다. 그것은 역전逆轉의 희망이다. 거기서 참다운 용기가 샘솟는다.
이래서 우리는 어릴 때나 성인이 되어서나, 고난에 부딪칠 적마다 책에서 희망을
묻고 미래를 내다보는 힘을 얻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
인』을 거듭 생각하게 된다. 꼬박 사흘 밤낮을 혼자 바다를 헤맨 끝에 간신히 잡아 챈,
물고기를 상어들에게 다 물어뜯기고 빈손으로 돌아 온 그 밤 노인은 어떤 꿈을 꾸었
던가?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 잡이 하던 바로 그 정경이다. 목숨의 동력이 펄펄 뛰어
날뛰는 그 밤 그의 꿈! 그것은 우리가 책에서 얻어낼, 역전의 희망이고 꿈이다. 새로운
미래가 열릴 인생길이다.
아우구스틴(Augustine)이 그의 저 유명한 『고백록』에서 특종의 책이 그에게 준 감
회로 그의 인생의 고비들을 회고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심연에서 나는 보았나니, 사랑이 한 권 속에 영글어 있다는 것을.
그 책장마다 온 우주를 에워서 펄럭대고 있었다.
단테가 그의 『신곡』에서 이렇게 노래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읽기를 위한 열정이다. 그것은 값을 물 턱이 없다.
그것은 위안이다. 그것은 기분풀이다. 그것은 흥분이다. 그것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줄 것이고
별의별 허다한 경험을 줄 것이다.
이것은 L. H. 바스코브(Bascove)라는 우리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는 사람이
‘책이 떨어져 펼쳐진 곳(Where Books Fallen Open)’에서 인용하고 있는 E. 하드윅
(Hardwick)의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 각자가 우리들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 신이 주었건, 하늘이 주었건
아니면 팔자가 주었건 간에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품성, 성질, 지능 등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것을 ‘독서의 열정’이라고 했던 이 한 마디를 위대한 그리고 간곡한 경구로 삼
고 싶다.
Ⅲ 다섯 가지 읽기
바스코브는 인생에서 우리가 겪게 되고 갖게 되는 온갖 것이 독서를 패러다임 삼아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한 셈이다. 요컨대 책이 인생과 세계의 스펙트럼이고 만화경萬華
鏡이라고 말한 셈이다. 이것만 해도 독서며 책의 엄청난, 대단한 경지인데도 바스코프
는 또 다른 중요한 발언을 하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온갖 것 가운데서 가장 위
대한 것은 ‘읽기를 위한 열정’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보통 또 흔하게 열정이라면 뭘까? 매겨진 일을 위한 것, 주어진 과업을 위한 것으
로 열정을 말하기가 보통이다. 그것들이 그 사람의 생존이며 삶의 보람과 맺어져 있
을 때, 열정은 뜨거울 게 틀림없다. 그런가 하면 사랑을 위한 열정을 사람들은 가장 크
게 내세울 것 같다. 굳이 따지고 들 것도 없이 열정이란 것은 그런 테두리 속에서 타오
를 것 같다.
한데 바스코프는 그가 스스로 타오르게 하는 열정, 그나마 위대한 열정은 독서를
위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책이야 말로 인간 열정의 지표라고 말하고 있
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열독熱讀이란 말을 쓰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있는 눈결
이 달아오르고 덩달아서 책을 잡은 손길이 뜨거워지고 그러다가 마침내는 머리와 가
슴이 열에 저리게 되는 경지, 그게 정열의 읽기인 열독이다.
한데 열독은 남독濫讀과 탐독耽讀을 꺼려하지 않는다. 남독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
듯이, 이 책 저 책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또 함부로 읽는 것이다. 그러기에 남독은 난
독亂讀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읽기가 이 지경이 되면 백 권, 천 권의 책이라도 전
혀 버거울 것 없다. 광야를 헤집듯이 책의 숲을 헤쳐 나갈 것이다.
탐독은 탐닉耽溺해서 책 읽기를 하는 것이다. 술에 취하듯이, 심지어 미친 듯이 책
에 취해서 읽는 게 탐독이다. 읽기에 깊이 빠져들고도 전혀 그걸 느끼지 못하는 경지
에서 탐독은 이루어진다. 애간장이 다 타고 녹도록 읽음에 빠져 있는 게 바로 탐독이
다. 탐락耽樂이라면 즐거움에 흠뻑 빠져든다는 뜻이다. 그럴 때 누가 부르고 집적댄다
해도 전혀 알바 없는 경지에 빠지게도 된다. 세상도 옆도 모두 깜빡 잊고 만다.
한데 이 탐독을 두고는 따로 강조할 게 있다. 무아지경無我之境으로 이를테면 본인
이 자신을 감각하지 못할 지경으로 탐독을 하게 되는데, 그러고도 정신이 더 없이 맑
고 맑다는 것이 강조될 수 있다. 술이건 사랑이건 일단 탐닉하게 되면 자아를 잃고 만
다. 정신을 잃다시피 한다. 한데 책에 탐닉하게 되면 더 한층 살아나게 된다. 읽는 사람
머리와 가슴은 깊은 산골 옹달샘 같을 것이다.
그런데 탐독을 하고 남독을 하다 보면, 모르는 결에도 정독精讀을 하게 된다. 정신
집중해서, 정성을 바쳐서, 정세精細하게 또 정밀하게 읽어나가는 것이 곧 정독이다. 꼼
꼼히 캐어서 읽고, 한 자 한 자, 한 줄 한 줄 따로 짚어가다시피 하면서 따져서 읽는 것
이 다름 아닌, 정독이다. 정독이라면 글의 요긴한 대목마다 줄을 치면서도 읽게 된다.
또 중요한 대목 읽을 적마다, 그 여백에다가 읽는 사람 자신의 생각을 적어 나가는 것
도 정독의 크나큰 보람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란 말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철인 파스칼은 무
서운 정독의 보기를 남기고 있다. 그는 책을 읽을 적에 잡념에 사로잡히거나 엉뚱한 생각에
젖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비상한 수단을 강구했다. 가시가 수없이 돋아 있는 얇은 철판을
배의 맨살에 띠로 매어서 붙이고 있었다. 책 읽는 마음이 흩뜨려질 적에는 사정없이
그 철판을 억눌렀다. 그 아픔으로다가 잡념을 내몬 것이다. 어쩌면 섬쩍지근한 얘기
이기도 하지만, 이에서 우리는 정독의 본보기 같은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중세기의 일본의 한 학자는 그 나름으로 정독을 위한 별난 비상수단
을 짜내었다. 천장에서 시퍼런 칼의 날이 그의 서안書案 앞에 그것도 바로 코앞에 달랑
대도록 매달았다. 그가 책 읽다말고 순간 졸기만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의 책 읽는
눈알도 칼날 마냥 날카롭게 빛났을 것이다. 이들 두 가지 보기는 책읽기의 정독이 얼
마나 무섭게 정신집중을 요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따갑게, 예리하게 일러주고 있다.
집중! 인간이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극치에 다다르려면, 집중은 필수적이다. 렌즈
를 통해서 햇살이나 광선이 하나의 초점에 모여드는 것을 우리는 보아서 알고 있다.
무슨 일, 어떤 일에서나 극에 오르자면 인간의 정신은 그 일을 위한 렌즈가 되어야 한
다. 인간이 이룩해낸 문화도 과학도 예술도 모두 집중이 만들어 낸 것이다. 집중은 인
간 역사의 창조자다. 책 읽기라는 정신노동에서는 그것이 더 한층 강하게 요구된다.
이렇게 열독과 남독과 탐독과 정독, 이 네 가지 읽기의 끝에 우리는 마침내, 애독愛
讀이라는 읽기의 정상에 오르게 된다. 책을 사랑해서 읽게 되고, 책 읽기가 그예 사랑
이 되는, 그 높으나 높은 경지에 승화하게 된다.
사랑! 그것은 열정의 별명이다. 우리는 독서에 열정을 바침으로써, 정열을 다함으
로써 애독자가 될 수 있다.
사랑! 그것은 헌신의 별명이다.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치는 일이다. 우리는 독서에
나를 바침으로써 애독자가 될 수 있다.
사랑 ! 그것은 그리움이다. 동경憧憬이다. 아스라한 수평선 바라듯이, 높으나 높은
하늘 우러르듯이 바라고 소망하고 하는 것이 곧 동경이다. 우리는 독서에 사무친 그
리움을 바침으로써 애독자가 될 수 있다.
열독, 남독, 탐독, 정독 그리고 애독! 이 ‘오독五讀’, 이를테면 다섯 가지 읽기를 다할
때, 우리들 누구나 책의 정복자가 되고 나아가서는 마침내 인생과 세계의 정복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