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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저자 [팬심과 펜심]『0시의 인류학 탐험』 이경덕 작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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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5-10-15 16:37 조회 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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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한 인터뷰에서 “늘 신화를 보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것을 보게” 된다고 하신 바 있어요.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요즘은 신화에서 무엇이 새로이 보이시나요?

우리 사회가 2008년에 비해 많이 변했어요. AI의 성장만 봐도 그렇죠. 동시에 죽음에 대한 가치관도 많이 변했어요. 즉 지금은 사고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시점인데요. 이렇게 사회가 크게 바뀔 때마다 늘 소환되는 게 신화예요. 1999년도에서 2000년도로 넘어갈 때도 그랬고요. 왜냐하면 신화는 인류가 처음으로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를 고민해 만들어 낸 산물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같은 때에 신화가 또 새롭게 보이는 듯해요. 결국 점점 중요해지는 질문은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잖아요? 요즘 다들 AI에 일자리를 빼앗길 것인가, 혹은 AI와 어떻게 협력해 즐겁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신화는 이미 그런 문제를 많이 다뤄 놓았어요. 신화가 굉장히 낡고 오래되었다고 자칫 잘못 생각할 수 있는데, 오히려 지금 신화를 읽어 보면 더 지금 시대에 맞는 답이 나올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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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시의 인류학 탐험』은 주인공이 자정마다 유령들을 만나 세계의 무덤을 여행하는 이야기죠. 장례와 죽음이 주제인 청소년 지식 소설은 첫 책이신데, 집필 의도가 궁금합니다.

청소년들에게 “죽음이 말이야~” 하고 설명하려 하면 어렵게 받아들이 잖아요. 하지만 소설은 이야기의 형태로 보여 주는 거니까 제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더 통할 거라 생각했어요. (죽음·장례를 주제로 다룬 이유는) 개인적으로 죽음에 정말 관심이 많아요. 다음 책도 ‘죽음의 인류학(가제)’이라는 성인 대상 책을 준비 중인데요. 요즘 죽음이 예전의 죽음하고 인식이 많이 달라져서, 지금 시점에서 죽음의 여러 얼굴을 한번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지구 인구가 약 5억 명대였는데요. 지금은 80억 명이 넘어요. 사람이 많아진 만큼 이제는 죽음이 흔해진 거죠. 옛날엔 노인이 죽으면 도서관이 하나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고, 사람이 귀하니 애도의 정서도 각별해 제사를 곡진히 지냈지만 요즘은 아니잖아요. 죽음이 흔해졌다는 건 지금 게임이나 웹툰 같은 콘텐츠에도 고스란히 나타나요. 누구든 너무 쉽게 죽거든요. (기자: 환생이나 회귀도 많이 하고요.) 네. 이런 시점에서 죽음의 여러 모양을 다루는 책을 이야기로 한 번 전해 보면 좋겠다 싶었어요


죽음은 신화의 단골 소재죠. 이번 책에서도 10세기 바이킹 전사의 죽음 챕터에서 북유럽 신화 이야기가 그려지는데요. 어린이·청소년이 죽음을 탐구하기에 ‘신화’가 좋은 마중물일 수 있는 이유라면요?

신화에서 그려지는 죽음 이야기는 생각보다 음습하거나 어둡거나 우울하지 않아요. 밝은 세계에서 그려져요. 또 본질적으로 신화는 죽음이 아닌, 삶을 위한 이야기고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가 신화의 목적이죠. 좋은 삶을 고민하기 위해 죽음을 다루는 거예요. 죽음을 인식할 때 인간이 훨씬 삶을 잘 살 수 있으니까요. 자기가 곧 죽는 걸 알게 되면 보통 사사로운 탐욕을 버리고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잖아요? 버킷리스트 만들듯이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시한부 인생이에요. 언제 죽을지 모를 뿐 1년 남은 인생이나, 50년 남은 인생이나 구조적으로 큰 차이가 없어요. 이걸 기억하면 인간은 미래를 위해 자꾸 현재를 희생하지 않고 진짜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요. 그러니 결국 ‘잘 살기 위해 죽음을 공부하려 할 때’ 신화를 읽어도 좋겠죠. (죽음을 공부할 때) 철학과 종교도 많이 이야기해요. 철학, 특히 윤리학은 삶에서 죽음까지를 논리적으로 다뤄서 인식론, 존재론 등 멀리까지 논해요. 한편 종교는 죽음을 감성적으로, 심리적으로 다뤄서 지금 인류 안에서 죽음을 다루는 가장 큰 힘을 갖게 됐죠. 죽은 다음 좋은 세상에 가려면 이렇게 해야한다~ 하고 종교 윤리를 만들기도 했고요. (물론 이게 잘못되면 협박이 되지만요.) 그런데 이런 문화들이 사실 신화에서 갈라져 나온 거거든요. 신화가 ‘어떻게 좋은 삶을 살 것인가’ 고민하기 위해 죽음을 다룬 최초의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러니 어린이 청소년이 철학책이나 종교서도 좋지만 신화도 많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쓴 신화 책도 많아요. (웃음)


어린이를 위한 ‘만화 한국 신화’ 시리즈도 기획하셨죠. 어떻게 탄생한 시리즈인가요?

몇 년 전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이 와 굉장히 공들여 만든 시리즈예요. 과거에 만화로 보는 그리스 신화 책이 우리나라에서 엄청 판매된 것처럼 요새는 K-컬처에 해외 반응이 뜨겁잖아요? <케이팝 데몬 헌터스>도 그렇고요. 지금 한국 문화를 두고 세계에서 관심이 많은데 실상 우리가 몰라요, 우리 문화를. 단순히 굿즈만 팔면 K-컬처는 오래 못 가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신화부터 다시 읽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탄생한 기획이 ‘만화 한국 신화’예요. 앞서도 말했지만 인류의 가장 오래된 생각을 정리한 게 신화라고 했잖아요?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느끼고, 고민하고, 만들어 본 것들이 한식이고, 한옥이고, 한복인데요. 그래서 그 기원을, 그 과정을 한 번 더듬어 보되 글로만 쓰면 어린이들에게 어려울 수 있으니 만화로 그려 보자고 시작한 거예요. 원래 스무 권으로 기획했는데 사실 잘 안돼서 (웃음) 이번에 열두 권으로 마무리하려 해요. 어린이들이 우리 신화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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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을 집필하는 동안 절벽에 관을 매다는 현관장, 살아 있을 때 치르는 생전장 등 세계 여러 장례를 들여다보며 작가님 개인적으로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바뀌거나 확장된 순간이 있었을까요?

있었죠.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공식적으로 허용한 퇴비장(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30~45일 정도 풀과 나무, 미생물을 통해 자연적으로 분해해서 퇴비용 흙으로 만드는 장례 방법) 등 지식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알게 된 장례들도 있었고요. 죽음의 가치가 점점 변화함으로써 생긴 현대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해 새로운 생각들을 하게 됐어요. 우리가 죽음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접하는 일이 흔해졌고, 그래서 죽음이 가벼워졌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죽음을 마주해야 하지? 하는 고민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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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서 다룬 장례 중 티베트의 천장(天葬)1)이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하신 인터뷰를 봤어요. “겉보기엔 끔찍하지만 실제로는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움까지 느끼게 했다”고요.

여행차 티베트에 간 적 있어요. 그곳은 딱 내리면 화성 행성에 온 느낌이에요. 주변을 보면 황토색에 나무도 없고, 황량해요. 무엇보다 고도가 높아 건조하고요. 그때 제가 천장을 직접 본 건 아니고요. (여행지에서 천장 관련)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싶더라고요. 장례는 정확히는 ‘죽은 사람’을 삶에서 격리해 죽은 자가 자연스럽게 세상에서 사라지도록 하는 일이잖아요? 위생적인 문제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보통은 시체를 땅에 묻어요. 그럼 일단 눈에 안 보이니까요. 그럼 그 시체는 묻힌 채로 썩어 가다 어느 날 사라져요. 이게 가장 많이 행해졌던 장례고요. 아니면 화장을 해서 빠른 시간 내 사라지게 해요. 그런데 이 티베트란 지역에선 시체가 사라질 수가 없는 거예요. 기후대가 건조하니까 땅에 시체를 묻으면 시체가 안 썩어서 강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들은 그 나름대로 궁리해서 독수리한테 시체를 먹이는 천장을 만든 거예요. 독수리가 썩은 걸 먹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독수리가 어디 사는지는 모르는데 하늘(天)에서 날아오니까 시체도 하늘에 보낸다 생각하고 천장이라 이름 붙인 거죠.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 사람들, 굉장히 멋있다’ 싶더라고요. 천장이 ‘하늘에다 묻는다’는 뜻이잖아요? 보통은 죽은자를 어둡고 축축한 땅속에 묻는데 이들은 저 넓고 밝은 하늘에다 묻는다고 여겼다는 게, 경이롭게 느껴졌어요.


19세기에 처음 서양 사람들이 티베트에 와서 천장을 사진 찍어 신문에다 실은 적 있어요. 그때는 잘 몰랐던 때니 ‘너무 야만스럽다.’ 했었다지만 지금 다시 보면 천장은 괜찮은 장례인 거죠. 문화는 이렇듯 그 속을 알면 이해하게 돼요. 낯선 문화는 원래 이해가 선행돼야 해요. ‘틀렸다’ 하고 가치 판단부터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럴까?’ 하고 질문해야 해요.


 1) 티베트의 전통 장례. 시체를 토막 내어 높은 들이나 언덕에 내놓고, 독수리가 시체를 쪼아 먹게 한다.


샛길 질문을 드려 봐요. 사실상 80억 인구가 지구상에 있을 때, 80억의 문화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텐데요. 그런 생각을 하면 ‘어떻게 이 모든 사람이 서로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너무 아득해지기도 해요. 이럴 땐 어떡할까요?

문화란 무엇인가 하고 백 명에게 물어보면 백 개의 답이 나와요.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어요. 그래서 ‘공감대’를 만들어 다양한 그룹으로 묶여 살아가는 거예요. 공감대라기보단 사실상 강요지만요. 국가로 묶이고, 성씨로 묶이고, 종교로 묶이는 거죠. 이를 기반으로 여럿이 모이면 ‘집단’이 생기고, 그럼 개인별로 80억 개던 문화가 그룹화되는 거예요. (그러면 서로를 이해하는 품이 넓어지겠죠.) 이때 공감 말고 문화를 이루는 또 하나가 ‘유혹’이에요. 거칠게 말하면, 곰과 호랑이가 지나가다 ‘와 저희도 여기 시민이 되면 안 될까요?’ 한 게 단군신화잖아요. 자기들은 떠돌며 살았는데 다른 존재가 모여 사는 걸 보니까 너무 좋아 보이는 거죠. 유혹당한 거예요. 야만이 문화가 되는 과정. 이게 단군신화의 핵심이거든요. 문화는 강압적으로 사람들을 묶는 방식이 아니라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겨야 해요. 그런 방식으로 좋은 문화를 만들어 가야죠.



가까운 존재를 갑작스레 죽음으로 잃은 한 청소년이 난서처럼 유령클럽 초대 문자를 받고, 작가님이 그 청소년의 윌마2)가 된다면, 그 청소년을 제일 먼저 어느 장례식으로 안내하시겠어요?

그러게요…. (기자: 저는 요르단의 이슬람 장례식에 데려갈 것 같아요. 당일에 유족들이 손님맞이 상차림을 하지 않고, 이웃들이 음식을 만들어 오잖아요. 그 음식을 가난한 이에게도 나누고요. 상차림을 하지 않음으로써 유족이 죽은 자를 배웅할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 다정하다고 느껴져서요.) 사실 중·근대 시대에는 대체로 그렇게 했어요. 그리스도 그렇고, 우리나라도요. 소설가 이청준이 쓴 『축제』는 그 배경이 축제가 아니라 장례식이에요. 우리가 죽은 다음의 세상이 있다고 믿고, 죽은 뒤 거기서 다시 만나자 약속하고 죽는다면 죽음이 그렇게 슬픈 일은 아닐 거고요. 게다가 고인이 먼저 간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거니까 한편으론 축하도 하는 거죠. 그러면서 장례식이 일종의 축제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지금은 전보다 죽음을 과학적으로 받아들이죠. 현대철학과 과학에서는 죽은 사람을 전자레인지 정도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전기가 뽑히면 기능하지 않는 물체로. 이렇게 과거와 달라진 죽음에 대한 인식 때문에 오히려 정서적 측면에서 본다면 좀더 즐거운, 뉴욕의 할로윈 축제나 멕시코의 죽은 자의 날 축제로 안내해도 좋겠다 싶네요.


2)『 0시의 인류학 탐험』에서 주인공 난서를 다른 유령들과 연결 지어 주는 유령 안내자.


책에서 매장이나 납골당보다 자연장을 하자고 제안하셨어요. 환경 문제로 자연친화적 장례가 시급해졌기 때문일 텐데요. 건강하게 바뀌었으면 하는 우리나라 장례 문화가 더 있다면요?

우선 죽음을 좀더 편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무겁지 않게요. 또 하나는 화장장을 대하는 인식이 바뀌면 좋겠어요. 거듭 말씀드렸듯 지금은 죽음이 흔해지면서 장례가 3일장에서 4일장으로 많이 늘었어요. 화장터가 부족하니까 화장을 빨리 못 해서요. (고인이) 죽어서도 못 죽는 거예요.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지역에 화장장 짓기를 기피해요. 그러나 많이 생겨야 돼요. 초고령사회로 가면서 앞으로 죽음은 점점 늘 수밖에 없을 거고,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질 텐데 우리 사회가 장례 인프라는 안 갖춰져 있고, 죽음은 너무 크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엄숙해야 한다거나 큰 비용이 나가도록요. 수목장도 마찬가지로 너무 비싸고요. 나무 한 그루에 여덟 명쯤 묻히는데, 책에도 썼지만 이건 사실상 죽은 자들의 아파트예요. 한국인 60%가 이미 아파트에 사는데 죽어서도 아파트에 묻혀요. 그것도 잘 모르는 사람들하고요. 납골당도 똑같죠. 결국 이런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까 오히려 유골을 몰래 갖다 버리는 문제도 발생해요. 그러니 죽음을 좀 가볍고 편하게 받아들여서 장례 비용도 줄이고, 미국의 퇴비장처럼 자연친화적인 장례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 거예요. 이미 제사를 안 지내는 집이 많아진 것처럼 사회는 변할거예요. 그런데 당장에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가 있으니 지금은 이런 변화를 우리가 빠르게 받아들이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최근 AI 기술로 고인의 생전 모습을 부활시켜 대화까지 나누게 하는 데드봇(Deadbot)들이 규제 없이 나오고 있어요. 일각에선 ‘디지털 인간 불멸’의 시대 속 고인의 잊힐 권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주장도 계속되고요. 앞으로의 장례 문화를 어떻게 보고 계시나요?

디지털 장례가 애도의 방법으로 좋은지는 아직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았어요. 그나마 퇴비장이 나름의 공감을 얻어 낸 반면 디지털 장례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진 않죠. 지금까지 죽음은 자연스럽게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였어요. 그런데 디지털 장례는 그에 역행하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언제까지 죽은 사람을 껴안고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던져요. 기억해야 할 죽음도 있겠지만 저는 (죽은 자가) 자연스럽게 잊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어느 현대 철학자가 한 이야기인데요. 애도라는 건 길을 걷다 문득 떠올라 그 사람을 생각하고 추모하면서 ‘나 자신’이 바뀌는 일의 일종이라는 거예요. 죽은 자를 계속 어딘가 붙잡아 두고 그 앞에서 잠자던 기억을 부러 꺼내는 게 애도가 아니라는 거죠. 고인에겐 당연히 잊힐 권리가 있어요. 사는 것 자체가 실상 죽음으로 가는 일이기도 하고, 죽음은 기본적으로 사라지는 거니까요. 인류는 오랫동안 죽음이 삶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았어요. 내세에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요. 백 년 남짓 살면서 하지 말라는 것 안 하면서 현재를 희생해 왔죠. 그러다 현대에 이르러 내세보다 현재

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었는데요. 이렇게 디지털 장례가 활성화되면 또 다시 죽음이 삶을 지배하는 역행이 일어날 수 있어요. 애도 그 자체는 좋지만 이것이 상업화되면 비용이 들겠죠. 상업화된다는 건 표준화된다는 측면도 있어요. 우리 감정까지도요. 가족 중 누군가 돌아가셨는데 ‘나는 디지털 애도 안 할 거다’ 하면 마치 인간의 도리를 못 하고 있다는 쪽으로 몰아가는 거죠. 지금 상조 회사에서 하는 것처럼요. 그러면 이제 바가지 쓰며 비싼 장례를 치르는 거죠. 결혼식도 그렇고요. 그렇게 가면 안 되는데 그럴 가능성들이 생겨요.



마지막으로, 책의 한 구절을 빌려 여쭈어요. 작가님께서는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나요?

그냥 바라보고 삽니다. 은유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매일 저녁에 죽었다 아침에 다시 태어나요. 그렇다면 죽음은또 다른 시작을 위한 계기예요. 초등학교를 졸업해야 중학교 생활이 시작되듯 모든 게 끝을 맺어야 그다음 시작이 와요. 아일랜드 신화에선 매일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고 해요. 아침이 오면 어제의 세계는 죽고, 오늘의 새로운 세계가 탄생한다는 거죠. 죽음도 그렇게 바라보면 좋지 않을까요? 로마 시대에선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뒤따르는 군사들에게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외치게 해요. 오늘은 이겼지만 우쭐대지 말고 늘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는 ‘카르페 디엠’이란 메시지가 나오죠. 언젠가 죽음이 오겠지만 늘 현재를 살라는 의미로요. 이런 걸 생각하면 죽음은 무서운 게 아니라, 내가 탐욕스러워지지 않게 도와주는 거울이에요. 그래서 자본주의가 죽음을 싫어하고요. ‘어차피 죽을 텐데’ 생각하면 사람들은 물건을 안 사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죽음은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자 동시에 살아가면서 늘 곁에 두는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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