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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책으로 말 걸기]모든 주변 사람들을 한심하다는 지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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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3-11 22:46 조회 6,60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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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는 나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20분이나 빨리 와 있었다. 핸드폰 오락을 하고 있다가 내가 인사를 하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지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지난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아니면 앞으로 우리가 만날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지 잠깐 고민을 하였다.

지난 주, 쉬는 시간에 지호가 자신을 놀리던 여자아이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교무실에서 커터 칼을 들고 나가는 것을 못하게 한 일이 있었다. 다행히 교무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회의를 통해 여자아이들과 지호에게 일주일 동안 교육이 이루어졌고 나름대로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일주일 동안 지호는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답답해하며 내게 지호를 만나줄 것을 부탁했고, 다행히 우리가 평소 지나가면서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라서 그랬는지 지호는 우리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았다. 우리가 따로 처음 만난 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나 — 길이 미끄러워서 어떻게 학교에 왔는지 모르겠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왔더니 온몸이 다 쑤시는 것 같아.
지호 — 저는 안 미끄러져요.

나 — 이런, 난 빙판길이 아니어도 잘 넘어지는데… 어떤 비법이 있는 거야?
지호 — 평소에 운동해서 그래요. 어려서부터 꾸준히 태권도를 했거든요.
나 — 멋지다. 지난번에 보니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 난 책 이야기 나누는 거 정말 좋아하거든. 너랑 책 이야기해보고 싶었어. 괜찮지?
지호 — 책 끊은 지 좀 됐어요.
나 — 나랑 이야기하는 게 불편하니?
지호 — 아니요. 선생님들이 자꾸 생각이나 기분 이야기하라는 것이 싫어요.
나 — 그럴 수 있겠다. 사실 나도 내 기분이나 생각을 잘 모를 때가 많은데 말이지.

갑자기 대화가 멈추었다. 교사와 마주하면 아이들은 언제나 그렇듯 혼이 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의자도 마주보고 앉아서 이야기하게 되어 있어서 “이렇게 앉으면 취조하는 것 같잖아.” 하면서 의자를 끌어 지호가 앉은 책상 옆으로 옮겼다. 그렇게 자리를 옮기는 동안에 지호가 머뭇거리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호 — … 제가 책을 끊은 건 일본어 공부를 시작해서예요.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5시이고, 태권도 도장 갔다가, 학습지 좀 하고, 일본어 공부하면 12시가 다 되거든요.
나 — 그럼 책 좋아했을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뭔데?

지호 — 『삼국지』요.
나 — 삼국지 책은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어떤 책인지 궁금한 걸. 초등학생들은 『만화 전략 삼국지』라고 만화책을 가장 많이 읽는 것 같고, 그 책 말고 이문열의 『삼국지』, 황석영의 『삼국지』, 김홍신의 『삼국지』 등이 있더라고.
지호 — 제가 처음 본 것은 그 만화책이었는데 엄마가 사준 이문열의 『삼국지』를 몇 번 읽었어요.
나 — 난 삼국지를 읽을 때마다 등장인물 이름 때문에 힘들었던 것 같아. 워낙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니 말이지.
지호 — 저는 한 번 읽으면 다 알아요.
나 — 머리가 좋구나. 부러운 걸.

지호 — 전 학교 애들이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전 공부를 하면 91점, 안하면 89점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은 어떻게 10점, 20점 이런 점수를 받을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나 — 설마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 앞에서 하는 건 아니지?
지호 — 네. 굳이 말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은 아는 것 같아요. 협상에 능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한다고 하던데… 전 안되는 것 같아요. 지략 같은 건 짤 수 있을 것 같은데…

나 — 그것도 사람들을 많이 접해보고 많은 실수도 하고 해서 길러지는 것 같아. 내 생각에도 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이들이 알 것 같아. 생각은 꼭 말로 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거든. 특히 자신을 싫어한다거나 무시한다거나 하는 나쁜 느낌들은 본인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반 아이들과 부딪히는 이유 중에 하나도 비슷한 것 같은데. 너는 그냥 아이들이 말한 것에 대답을 안 한 거라고 하지만 말하는데 대답하지 않고 있다면 그 아이들은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거야. 게다가 그 아이들이 너보다 자신들이 공부 못하는 것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면 더 그렇겠지.

지호는 항상 혼자 다녔다. 뚱뚱해서 조금은 둔해 보였지만 멍청해 보이지는 않아서 아이들이 쉽게 놀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매년 비행 집단 아이들과 문제가 있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지호는 비행 집단 아이들이 시비를 걸면 무서워하지도 않고 항상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더 화를 내고 지호를 괴롭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유단자라고 했는데 선생님들도 지호가 자신이 비행집단 아이들을 자극한 것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고 담임교사들이 제대로 아이들을 혼내지 않는다며 교무실에서 비난한 일이 있어서 정이 안 가는 아이라고 했다.

지호 — 이상한 애들은 안 보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 애들은 나중에 범죄자가 될 거에요. 지금부터 그렇게 아이들 돈 뺏고, 때리고, 욕하고 살면 커서 뭐가 되겠어요? 사실 그렇게 사는 것보다는 없어지는 게 나아요.
나 — 네가 좋아하는 『삼국지』에서 보면 사람들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만 부품처럼 쓰이잖아. 전략을 잘 못 짜서 수천 명이 죽기도 하고,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도 하지.

지호 — 지금 사회도 그렇잖아요. 전 『삼국지』를 보면서 현대 사회랑 같다고 생각했어요. 전 수천 명의 병사 중의 하나가 되기 싫어요. 지금 자기 힘만 믿고 까부는 아이들은 금방 적에게 노출되어 죽음을 당할 거라고요. 전 열심히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되는 건 싫어요.
나 — 혹시 수천 명의 병사 중에 유비, 관우, 장비보다 훌륭한 사람이 있지는 않았을까? 네가 싫다고 하는 노는 아이들 중에서는 공부도 잘하고 착한 아이들도 있을 텐데. 그리고 누군가가 너를 보았을 때 다른 것은 전혀 모르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한 아이라고 판단 내릴 수도 있잖아.

지호 — 전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게 아니에요. 관계가 없을 뿐이죠. 제 삼촌 중에 한 분은 일류대를 나오셔서 대인기피증으로 지금 아무도 안 만나고 지내요. 저도 얼굴도 못 봤어요. 저 어렸을 때 명절에 만난 적이 있긴 해요. 이런 경우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이잖아요. 하지만 그 아이들은 피해를 준다고요.
나 — 앞으로 점점 사람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 같은데? 그래서 더 다름을 인정하고 사람과의 관계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 넌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어?

항상 표정이 없던 지호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쉽지 않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집안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호는 어려서부터 국어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외삼촌도, 엄마도, 이모도 모두 교사자격증이 있었다. 하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모두 교사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지호에게 교사가 되라고 했고, 자신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까지 9년 동안 학교에 다니는 동안 마음에 드는 교사를 만난 적도, 마음에 드는 학생을 만난 적도 없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만 막연하게 했다. 그러다가 삼국지를 만났고 그 안에서 만나는 폭력이 좋았다. 특히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보면 상상 속에서 삼국지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 그 아이들을 죽여 버리는 상상을 하곤 했다. 유치원 때부터 친구는 한 번도 없었던 것 같고, 그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매년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부모님께 이야기하지 않았고, 태권도, 합기도를 배워서 이제는 꽤 잘한다. 엄마에게 왜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다시 한 번 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호 — 어머니… 우울증이에요. 할머니가 결혼하면 좋아질 거라고 아버지랑 결혼시킨 거래요. 전 할머니가 잘못 판단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게 분명해요. 어머니도 의지가 없는 것 같아요.
나 — 우울증은 엄마가 노력한다고 좋아지는 건 아닌 것 같아. 우울 증세라고 한다면 본인이 노력해서 바뀔 수 있는 수준이겠지만 ‘우울증’은 이미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병이 된 거잖아. 우울증 엄마를 가진 아이들을 몇 번 만나 봤는데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무척 예민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주 무디거나 하더라고. 물론 모든 아이들이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말이지.
지호 — 저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나 — 그리고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무관심하게 지낼 생각인 거야?
지호 — 모르겠어요. 어른이 되면 굳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들이 없어지는 건 아닐까요? 살아가는 것이 바쁘고 힘드니 감정 따위에 신경 쓸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나 — 지금 시대는 전쟁 상황과 비슷하기는 할 거야. 하지만 전쟁에서도 심리전을 쓰잖아. 우리 집에 삼국지가 종류별로 있어. 다음 시간에 한 번 비교해보는 건 어때? 방학이 되기 전에 앞으로 세 번만 더 만나자. 어때?

수업 시간이 되어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쳤다. 앞으로 좀 더 만나보자는 내 질문에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호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항상 같은 자세로 그림처럼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였다. 지호도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혼자 있는 것이 편하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인 줄 알았다. 점심시간에 문제를 풀고 있는 지호에게 공부가 재미있는지를 물어보았더니 “재미있겠어요?” 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살짝 미소를 띠었던 것도 같다.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엄마의 아들로 태어나서 겪은 어려움이 무엇이었을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아이를 키워 온 엄마로서 상상은 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힘을 키우고 싶은 아이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 간다. 짧은 만남이 되겠지만 지호에게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경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 여러 삼국지를 펼쳐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인적으로 삼국지를 왜 청소년에게 읽혀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호는 삼국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거워보였고 누군가 함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나쁜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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