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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책으로 말 걸기]세상은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어! ― 만화로 도망가 버린 지혁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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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1-06 18:27 조회 6,25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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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자꾸 놀려요!”
대안학교에서 첫 수업을 진행했다. 별 문제 없는 수업이었고, 아이들은 흥미로워했다. 지혁이 역시 수업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환하게 웃기까지 했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담임선생님께 찾아간 지혁이는 슬픈 표정이었다. 아이들이 지혁이를 놀릴 시간은 쉬는 시간 10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수업 시간에 만난 아이들은 지혁이를 놀리기보다는 아예 관심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17살이나 된 녀석이 놀린다고 선생님께 이르다니…

담임선생님께 물어보니 아이들이 이상하다고 놀린 것이 사실이고, 학교에서 상대방을 놀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혁이가 오래 가정폭력을 당한 아이라서 피해의식도 워낙 있다고 했다. 곰곰이 수업을 뒤돌아보니 지혁이에게 미안했다. 내가 아이들의 부족한 부분을 웃음거리 삼아 아이들과 수업 분위기를 이끌어갔던 것이다. 일반 중학교에서 무척 익숙한 방식이었고 이것이 폭력이라고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는데 왜 그 동안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을까?

쉬는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먼저 사과했다. 아이들은 이해를 못하는 얼굴이었다. 놀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 것은 분명 나였고, 언어폭력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고 앞으로 조심하자고 했다.

수업은 아이들이 평소 관심을 갖는 분야의 자료를 찾아 읽고 이해하고 이야기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일본만화’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모르는 분야여서 아이들에게 관심 있어 하는 만화책 제목과 내용을 물어보았다. 아이들은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중 지혁이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아이들에게 다음 시간까지 일본만화를 한 편씩읽어오고 가지고 올 수 있는 사람은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지혁이가 관심 있는 일본만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어보았더니 신이 나서 이야기해 주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 동안 만화 관련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책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혁이가 추천하는 만화와 웹툰은 무섭고 징그러워서 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늦지 않게 왔고 만화책을 가지고 온 학생은 지혁이뿐이었다. 수업을 시작하기 앞서 나는 준비해 온 책과 논문들을 늘어놓았다. 수업에서 일본에 대한 이해와 일본만화의 장단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냥 듣고 있었고, 지혁이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조리 있게 말을 하지 못하는 지혁이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지루해하여 쉬는 시간에 따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로 했다.

나 지혁아! 수업 시간에 네 이야기를 길게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다른 아이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자세히 모르는 부분들이 많아서 말이야.
지혁 네, 괜찮아요. 딴 이야기할 때 저도 그러는 걸요.
나 참, 네가 재미있게 본다는 좀비 만화는 찾았는데 무서워서 못 봤어.
지혁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전 괜찮았는데… 전 일본에 가고 싶어요. 가서 만화도 실컷 보고 한국에서 떨어져서 살고 싶어요.
나 그럼 좋겠다. 일본에 아는 사람 있으면 좋은데. 일본어는 할 줄 아니?
지혁 일본 가면 저 이상한 사람이 아닐 수 있을 것 같아요.
나 넌 지금도 이상한 사람이 아니야.
지혁 전 항상 이상하다는 소리 들어왔어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저 이상하지 않아요. 만화에서는 시대를 왔다 갔다 해도, 죽은 사람이 살아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잖아요.
나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이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만화가들은 여러 가지 장치들을 만들어 놓잖아. 책들을 읽어보니 왜 사람들이 일본만화를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겠던 걸.
지혁 오늘 수업을 들으면서 만화를 좋아하는 어른들이 저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제가 이야기할 때는 아이들이 들으려고 하지도 않더니 수업 시간에 하니 애들이 다 끄덕이더라고요.

지혁이는 그 뒤로 한참 일본만화의 장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실 수업 시간에 다 이야기한 이야기를 반복하며 이야기하는 식이라서 듣고 있는 동안 좀 지루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말을 하는 식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지혁이를 한 번 보고는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일단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참 신나서 이야기하던 지혁이가 갑자기 나를 보며 혼자 넋두리를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좀비가 무서우세요? 전 좀비보다 세상이 더 무서운 것 같아요. 좀비는 생각이 없는 거잖아요. 괴물이 되어도 내가 괴물이 된지 모르잖아요. 어차피 사는 게 뭐가 올지 모르는 건데… ”

지혁이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두려워서 더 끔찍한 이야기들을 보며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 내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만화책을 들고 내게 다가왔고, 내가 그 만화책에 관심을 보이면 언제든지 입을 열 준비도 되어있었다. 천천히 가보기로 했다. 당장 지혁이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지혁이가 갇혀 있는 세상이 궁금했고 그 세상은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빠져 있는 세상 같았다. 마냥 일본만화가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인상 쓸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왜 그 만화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더 시급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지혁이는 내가 가지고 온 책 중에서 『일본만화의 사회학』을 들춰보다가 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온 『신과 함께』도 앞부분을 보더니 재미있다고 했다. 다음 주에는 웹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좀비와 관련된 이야기인 것 같아서 다음 시간에 <당신의 모든 순간>이라는 웹툰을 보고 오라고 했다. 내가 무섭지 않게 본 유일한 좀비 웹툰이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나가던 지혁이가 다시 나를 보며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듣지 못했다. 다시 물으니 별 말 아니라고 했다. 얼핏 지혁이는 유치원생 같은 모습이었다. 평소처럼 주눅 들고 우울한 표정이 아닌 마냥 해맑은 표정이었던 것 같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는 아이들을 대하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그 아이가 정말로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고, 그 과정이 무척 지겨울 수도 있다. 그래도 한 번 시작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세상은 지혁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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