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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책으로 말걸기]약하게 보일까봐 걱정인 진영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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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12-09 17:28 조회 5,85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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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바빴는지 모르겠다. 엉거주춤 서서 계속 내 눈을 마주치려고 했던 진영이. 그것을 모르고 있지 않았기에 계속 마음이 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마주쳤는데 마치 내게 보여주려고 들고 있었던 것 같은 책을 슬쩍 내게 밀어주었다. 자신도 다 읽지 않았지만 무척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전화가 오고 또 급히 전화를 받으며 다 읽으면 빌려달라고 건성으로 이야기했다. 전화를 하는 도중 표지를 보니 흔한 판타지 소설 같다. 그다지 내키지 않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진영이가 얼른 겉표지를 벗겨서 보여주었다. 『헝거게임』, ‘헝거’도 ‘게임’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이다. 전화를 끊고 대충 어떤 이야기인지를 물었더니 미래의 강력한 독재사회에 대한 이야기! 수도와 12개 구역으로 나뉜 사회에서, 12개 구역의 통제 수단으로 청소년들이 목숨을 거는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하여 한 사람의 우승자를 가린다는 내용이란다. 내게는 내용도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다. 게다가 진영이가 계속 눈에 띄기는 했는데, 진영이는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니까 하며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며 당장 문제가 생긴 아이들을 만나러 다니기 바빴다. 그렇게 이 책을 읽은 것은 한 달도 지난 뒤였다.

진영이가 시작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교육복지실에서 아이들이 이 책을 돌려 읽기 시작했다. 그날도 누군가 이 책이 무척 재미있다고 내게 읽었냐고 물어보았는데, 갑자기 진영이 생각이 나서 집에 가는 길에 책을 사서 잠들기 전에 조금 읽어보려고 책을 들었는데 밤을 새워 읽고 말았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창밖이 환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빨리 진영이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설레기까지 했다. 다행히 진영이는 오늘도 빨리 왔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적는 것도, 교육복지실 청소하는 것도 다 미뤄두고 이 책 다 읽었다며 자랑하듯 큰 소리로 진영이를 맞이했다.

책도 공부로 읽는 아이
진영 — 정말 재미있죠? 저 2, 3권도 샀어요. 그런데 곧 중간고사라서 읽기 시작하면 안 될 것 같아 미루고 있어요.
나 — 나도 2, 3권 당장 주문했어. 이번에는 내가 먼저 읽어보고 알려주지. 설마 재미없지는 않겠지? 이 책 읽으면서 네가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지 몰랐어. 항상 추천도서 같은 것을 읽는 것 같았는데…

진영 — 이거 판타지 소설이에요? 판타지 소설 읽는 거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판타지 소설 같지 않은데… 그냥 미래를 상상하면서 쓴 것 같아요. 그리고 혜인이 있잖아요. 우리 학교 전교 5등 안에 항상 드는 애. 그 애가 읽고 있는 것을 봤어요. 다른 애들도 재미있다고 하고요. 읽어보니 재미있더라고요. 가끔 신문에서 보면 조지 오웰의 『1984』 이야기 나오잖아요. 엄마가 상식으로 읽으라고 했는데, 읽다가 어려워서 못 읽었거든요.

나 — 그럼 책을 재미로 읽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네. 난 네가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것 같아서 좋아하며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진영 — 저, 공부하듯이 읽어요. 그래도 읽다보면 대부분 재미있어요. 상식도 넓히고, 공부도 되고, 취미생활도 되면 좋잖아요. ‘서울대추천도서’ 같은 건 어렵긴 하지만 읽고 나면 뿌듯하기도 해요.
나 — 넌 공부가 좋니?

진영 — 모르겠어요. 그렇게 싫은 건 아닌데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고등학교도 외고나 과고에 갈 실력도 안 되고 준비도 안 했는데, 그냥 인문계 가기도 불안하고, 그리고 이렇게 공부해서 서울대는 못 갈 것 같은데 서울대 나온 사람들도 취직 안 된다고 하고…
나 — 이 책에는 임업, 광업 등 12개의 구역과 수도 ‘캐피톨’에 사는 사람들로 나뉘어 있잖아. 그럼 차라리 이렇게 태어나면서 정해져 있는 것은 어떨까?

진영 — 판엠의 대통령인가가 그러잖아요. 가장 강력한 통제가 약간의 희망을 갖게 하는 거라고요. 결국 24명이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1명만 살아남는 ‘헝거게임’처럼 우리도 그런 것 같아요. 알고 보면 다 정해져 있는 것인데, 공부라는 것을 통해 약간의 희망을 갖게 하는 거죠.

나 — 그게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더군. 결국 성공이라고 하는 건 24명 중 한 명이 살아남는 것보다 훨씬 적은 확률일 수 있으니 말이지. 넌 이 책을 보면서 12개 구역의 사람들에 감정이입을 했니? 오히려 우리는 수도 ‘캐피톨’에 사는 사람들처럼 헝거게임에 나온 아이들을 지켜보는 입장이 아니었을까?
진영 — 그런 것도 같네요. 사실 제가 그 게임 안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은 안한 걸 보니… 긴장하며 빨리 읽은 책이긴 했는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인 것 같네요.

아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는 희경이가 『헝거게임』을 읽지는 않았는데, 영화로 봤다고 했다. 그다지 재미없어서 중간에 졸기도 했다며 책은 재미있었냐며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의상과 미래사회의 모습이 궁금했기 때문에 희경이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하지만 진영이는 궁금하지 않다고 했다. 영화는 책과 다른 느낌이고 책으로 읽는 게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어서 영화는 안 본다고 했다. 진영이의 이야기에 머쓱해진 희경이를 보며 내가 영화를 볼 테니 진영이도 희경이도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했다.

약하다는 것을 들키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영화는 나름대로 흥미로웠고, 책을 읽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제법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경이도 진영이도 서로 그다지 편하게 대하는 것 같지 않아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하기로 했다. 진영이는 어제보다 더 일찍 학교에 왔다.

나 — 나중에 시간 날 때 영화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영화와 소설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거든. 네 상상력과 감독의 상상력을 비교해 볼 수도 있잖아. 그리고 두 가지 매체에 대해 비교하는 논술도 유행이잖아.
진영 — 그렇군요. 3학년 기말고사 끝나면 여유 있으니 한 번 봐야겠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 날이 올까 싶어요. 엄마, 아빠는 고등학교에 대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어제는 갑자기 서울여상을 가라는 거예요. 거기는 공부 잘하는 애들이 오니 공부 분위기 잡히지 않겠냐며. 그랬다가 갑자기 하나고에 원서라도 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고. 제가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지는 생각 안 하시는 것 같아요.

나 — 혹시 부모님께 네가 스트레스 받았다고 표현을 했니? 넌 항상 표정이 비슷해서 나도 잘 모르겠던 걸. 특별히 크게 웃거나 화내는 건 못 봤는데…
진영 — 제가 좀 그렇죠. 그냥 아이들에게 까칠하게 보이는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럴 거예요. 초등학교 때 누구에게나 잘해 주니 애들이 만만하게 보더라고요. 그리고 남자아이들도 함부로 대하고. 그래서 그 뒤로부터 그냥 잘 안 웃고, 아이들이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하고 지냈더니 지낼 만해 졌어요.

나 — 『헝거게임』에서처럼 관객을 의식한 거구나.
진영 — 네, 맞아요. 그러다가 제 꿈까지 그런 척하고 지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사실 전 제 꿈이 뭔지 모르겠어요. 사실 부모님이 서울여상 이야기를 했을 때는 충격이었어요. 선생님 보시기에는 어때요? 제가 은행원 같은 건 안 맞을 것 같지 않으세요? 엄마는 좋은 대학 나오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얕잡아 볼 거라고 하는데…

진영이를 만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처음으로 진영이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공부 잘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였다.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별문제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많이 읽어서 이야기하는 것도 강단 있어 보였다.
그런데 진영이와 이야기하면서, 이 책을 읽으며 영화를 보면서도 이런 진영이도 미래를 걱정하는 것을 보면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중학교 3학년! 공부 잘하는 아이는 잘하는 아이대로, 못하는 아이는 못하는 아이대로 걱정이다. 어른들은 ‘인생’을 운운하며 아이들에게 고등학교 입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정작 제대로 알고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어른들이 있기나 할까? 그러면서 ‘서울대 나와도 취직하기 힘들다’는 식의 우울한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다. 아이들은 무언지 정확하게 모르는 거대한 게임판 안에 들어와 있고 그 게임판의 룰은 어른들이 계속 바꾸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룰에 적응하지 못해 무시당하거나 공격당해도 보호 받을 방법이 극히 드물다. 이 아이들이 살아갈 가까운 미래, 아니 현실도 여전히 우울할 것만 같다. 그래서 아이들을 만날수록, 아이들과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들에게 미안해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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