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교사로 산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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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7-07 20:08 조회 6,153회 댓글 0건본문
가슴 먹먹함
학생인권조례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며 인권을 주제로 강연을 다닌 지가 벌써 4년째 접어든다. 강연을 시작할 때 나를 소개하며 ‘교사’로 살아가고 있노라는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함을 느낀다. 과연 교사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교사로 잘 살아가고 있는가? 자문을 하다보면 그러한 먹먹함으로 강단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불편해진다. 교사에게는 사회의 다른 일을 수행하는 직職에게 요구하는 책무와는 다른 성격의 책무가 주어지는 것 같다.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같이 소중한 아이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나의 준비됨에 비해 너무 크기에 늘 미안함과 답답함이 섞여 ‘교사’로 살아가는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 먹먹함이 교단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자꾸만 무기력해진다. 이 무기력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자 몸부림치지만 교사의 삶이 근본적으로 가식과 기만의 삶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지, 그러기에 삶의 진리를 알고 있는 것처럼 아이들을 대할 수 있는 뻔뻔함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기만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직職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어쩌면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통회痛悔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통회의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방글방글 웃으며 안기는 아이들에 마취痲醉되어 버티는지도 모르겠다.
이중생활
난 두 가지 삶을 살고 있다. 낮에는 교사로서 살아가고 밤에는 광주청소년노동인 권네트워크라는 시민사회연대단체의 집행위원장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삶의 토대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공업계고등학교 학생들은 인문계고등학교 학생에 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 많다. 그리고 3학년 때는 현장실습으로 회사에 간다. 이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다. 다른 친구들이 부모님께서 차려주신 밥과 간식을 먹으며 공부할 시간에 차가운 아스팔트에서 오토바이를 타며 치킨을 배달한다. 배달이 밀렸다며 독촉하는 사장님 때문에 같이 일하는 친구가 과속을 하다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 입원해 있는 동안 학교도 못 가지만 더 큰 걱정은 가족 생활비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학교에서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다.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선생님도 잘 모르신다고 한다. 그냥 주는 대로 월급받고 혹시라도 다치면 행정실에 물어 처리하라고 한다.
우리는 누구나 노동자나 사용자가 되지만 학교 교육에서는 국민들 모두 당연히 알아야 할 노동인권교육을 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일하는 청소년들은 당연히 받아야 할 임금을 받지 못해도 어디에 호소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으며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아도 그것이 침해인지조차 알지도 못한다. 설사 안다고 하여도 세상이 다 그런 것이라 여기고 가슴속 깊이 분노와 적개심만 쌓인 채 성장한다. 2006년도에 ‘임금 지급 4대 원칙’으로 공개수업을 했더니 참관한 장학사가 하는 말이 “이 교육은 편향된 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위험한 교육”이란다. 도대체 편향된 것이 무엇일까? 답답하다.
그래서 광주지역의 18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하여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그들이 기득권에 편향되었기에 그리고 우리 사회가 기득권에 편향되었기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다. 더 이상 그런 폭력적이고 일방적이며 무식한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이 필요했다.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노동인권교육과 캠페인, 사회조사분석, 상담 및 구제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휴식
이제 4년째 접어든 활동이다. 그런데 최근에 없던 마음이 생긴다. 학교가 끝나면 회의하고 상담하고 주말에는 길거리 캠페인도 하고 간혹 피켓 시위나 집회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면 가족들에게 너무도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밖에서 사회 변혁을 해보겠노라고 돌아다니는 모습에 허무함을 느낀다. 그래도 가족이 지지해줄 것이라는 나만의 기대로 버텨왔다.
그런데 요즘 주변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일할 때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방과 후에 배드민턴이나 경락, 도예 등 자기 개발을 하는 분들부터 교장선생님과 술자리를 가지며 학교에서의 정치적 외연을 확대하는 분, 가족과 함께 산책을 하는 분들까지 다양했다. 이런 것들이 보이면서 어렸을 때 배웠던 서예가 다시 하고 싶어진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사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는데 작년에 몸이 아파 병원에 몇 번 입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에게 휴식이 필요한 시기가 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휴식… 참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이다.
뻔뻔함
이런 생각도 잠시, 기어이 지난 겨울방학을 아스팔트에서 혹한의 추위와 싸우며 보낼 수밖에 없는 일이 발생했다. 지난해 12월 17일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서 현장실습생이 뇌출혈로 쓰러졌다. 특성화고(공업계) 3학년으로,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기아차에서 현장실습을 받던 학생이었다. 실습교육이지만 회사는 12시간 주야 맞교대로 일주일에 70시간 이상 일을 시켰고, 도장(페인트) 작업을 하는 학생에게 방진마스크도 지급하지 않았으며, 휴일특근 등 성인 노동자도 버티기 힘든 일을 하던 노동학생이었다. 그리고 회사가 이렇게 학생들을 저임금과 노동착취의 도구로 사용하는 데 학교가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제공했다.
결국 광주지방노동청에서 특별근로감독을 한 결과 81건의 근로기준법 위반과 20억원 가량의 임금체불이 드러났다(한 해에 전국 7만 명 정도의 현장실습생이 있으며 기아차 100여 명의 현장실습생에 대한 임금체불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면 기업들이 1,400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하는 셈이다). 산업안전의무사항 위반과 연소자 보호에 대한 특별조치도 위반했다. 더군다나 이 학생은 8월부터 졸업하는 2월까지 한시적으로 일을 하는 단기간 노동자였으며 시간당 최저임금 4,320원을 받고 일했다.
학교는 고용노동부에서 제시한 표준협약서에서 연소자 보호에 대한 특별조치 조항을 의도적으로 삭제함으로써 회사의 이와 같은 범죄가 가능하도록 협력했다. 결국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은 엄청난 액수의 과징금을 납부하게 되었으며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을 발표하였고 행정적 조치도 받았다. 그러나 학생이 다니던 학교나 전라남도 교육청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해당 학교장에 대한 징계나 인사 조치도 없었으며 교육청의 학교에 대한 감사 결과도 발표하지 않았다. 학교에 대한 관리·감독을 잘못한 장학진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학생은 80일이 넘도록 혼수상태에 있고 앞으로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교육계에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뻔뻔함을 보이고 있다. 사고 학생의 문병을 가지 않겠느냐고 묻자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문병을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던 교육감은 그 학생이 누워 있는 병원에서 택시로 10분 거리에 있는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 선거사무실 개소식에는 참석해 축사를 했다고 한다. 무섭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뻔뻔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사실 다른 학생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다. 햄버거가게, 치킨집, 사우나, 주점, 도축장 등지에서 현장실습이라는 명분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으며 이 반교육적 상황을 조장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학교폭력
학교폭력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TV를 틀면 각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학교폭력에 대한 대책을 내놓고 있고 경찰은 학교별로 담담경찰을 배치해 입학식에서 소개하도록 하고 사진을 찍어 보고해야 한다며 사진기를 들이민다. 정부에서도 없던 일이 갑자기 발생한 것처럼 생뚱맞게 신고전화를 개설했다고 홍보하며 처벌을 강화할 것이라고 한다.
누가 누구를 처벌하나?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디서 폭력을 배웠나? 무책임한 어른들이 우리 사회를 더 지능적이고 은밀하게 그리고 지속가능한 구조를 만들어 폭력의 역사를 이어가려고 하는 야만스러운 폭력사회를 만들어 놓고 아이들을 처벌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체벌하고 학생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평가라는 이름으로 경쟁의 사막에 밀어 넣어버린 어른들이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간의 만남이 폭력적이고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과의 만남이 폭력적이다. 학교폭력의 주범은 아이들이 아니라 선생이고 부모이고 이 사회의 어른들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처벌하나? 현재 학교폭력의 상황은 지금까지 무책임하고 비겁했던 어른들의 역사에 대한 대가를 아이들이 대신 치르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학생인권조례와 관련된 여러 가지의 논의가 나온다. 사실 이것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요구하고 장애인이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요구하며 노인이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학생이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매를 맞지 않고 머리카락을 함부로 잘리지 않으며 학교의 주인으로서 참여의 기회를 제공받고 차별과 침해를 받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이 요구를 허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도 이 땅에 없다. 당연히 학생들에게 보장된 것이며 누리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허가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가지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선생들과 부모들이 개입하려고 한다. 이것은 부당한 것이며 일방적인 것이고 폭력적인 것이다. 이러한 부당함과 일방적인 폭력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기에 학교폭력은 당연한 것이다. 학교폭력에 대한 진정성을 가진 자라면 우리 사회를 인권친화적인 사회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20년이 지나도 이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먹먹하고 먹먹하다
휴식은 내게 가능한 일일까? 다들 그렇게 저렇게 살아가는데 혼자 유난 떠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어쨌든 난 지금 힘들다.
학생부장을 하며 인권친화적인 생활교육을 해보겠노라고 학생부 선생님들과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여전히 동료들은 ‘어디 한번 해봐라. 잘 안 될걸. 아니, 잘 안 돼야 돼!’라며 방관하는 것 같다. 현장실습 제도를 인건비 절감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기업들에게 최소한의 기업윤리마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정부도 학교 교육의 정상화보다는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학교가 역할을 해줄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데 더 힘쓰는 것 같다. 주변 환경은 그렇다 치고 나는 교사로서 어떠한가? 저들을 원망하고 분노했지만 난 내 자신에게 원망과 분노가 없는가? 다시 먹먹해진다. 교육할 수 있는 용기는 준비됨에서 오는데 교사로 15년을 살았으면서 그 준비됨을 되돌아보면 나의 기만적인 모습에 원망과 분노가 치민다. 교사로서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의 부족은 나를 병들게 했고 결국 그 병은 나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저 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소중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맑은 눈빛을 담아내기에는 나의 준비된 그릇이 너무 작음을 안다. 더욱 먹먹해진다. 교사로 산다는 것은….
임동헌 광주전자공고 통신교사
학생인권조례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며 인권을 주제로 강연을 다닌 지가 벌써 4년째 접어든다. 강연을 시작할 때 나를 소개하며 ‘교사’로 살아가고 있노라는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함을 느낀다. 과연 교사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교사로 잘 살아가고 있는가? 자문을 하다보면 그러한 먹먹함으로 강단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불편해진다. 교사에게는 사회의 다른 일을 수행하는 직職에게 요구하는 책무와는 다른 성격의 책무가 주어지는 것 같다.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같이 소중한 아이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나의 준비됨에 비해 너무 크기에 늘 미안함과 답답함이 섞여 ‘교사’로 살아가는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 먹먹함이 교단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자꾸만 무기력해진다. 이 무기력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자 몸부림치지만 교사의 삶이 근본적으로 가식과 기만의 삶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지, 그러기에 삶의 진리를 알고 있는 것처럼 아이들을 대할 수 있는 뻔뻔함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기만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직職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어쩌면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통회痛悔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통회의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방글방글 웃으며 안기는 아이들에 마취痲醉되어 버티는지도 모르겠다.
이중생활
난 두 가지 삶을 살고 있다. 낮에는 교사로서 살아가고 밤에는 광주청소년노동인 권네트워크라는 시민사회연대단체의 집행위원장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삶의 토대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공업계고등학교 학생들은 인문계고등학교 학생에 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 많다. 그리고 3학년 때는 현장실습으로 회사에 간다. 이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다. 다른 친구들이 부모님께서 차려주신 밥과 간식을 먹으며 공부할 시간에 차가운 아스팔트에서 오토바이를 타며 치킨을 배달한다. 배달이 밀렸다며 독촉하는 사장님 때문에 같이 일하는 친구가 과속을 하다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 입원해 있는 동안 학교도 못 가지만 더 큰 걱정은 가족 생활비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학교에서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다.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선생님도 잘 모르신다고 한다. 그냥 주는 대로 월급받고 혹시라도 다치면 행정실에 물어 처리하라고 한다.
우리는 누구나 노동자나 사용자가 되지만 학교 교육에서는 국민들 모두 당연히 알아야 할 노동인권교육을 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일하는 청소년들은 당연히 받아야 할 임금을 받지 못해도 어디에 호소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으며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아도 그것이 침해인지조차 알지도 못한다. 설사 안다고 하여도 세상이 다 그런 것이라 여기고 가슴속 깊이 분노와 적개심만 쌓인 채 성장한다. 2006년도에 ‘임금 지급 4대 원칙’으로 공개수업을 했더니 참관한 장학사가 하는 말이 “이 교육은 편향된 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위험한 교육”이란다. 도대체 편향된 것이 무엇일까? 답답하다.
그래서 광주지역의 18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하여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그들이 기득권에 편향되었기에 그리고 우리 사회가 기득권에 편향되었기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다. 더 이상 그런 폭력적이고 일방적이며 무식한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이 필요했다.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노동인권교육과 캠페인, 사회조사분석, 상담 및 구제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휴식
이제 4년째 접어든 활동이다. 그런데 최근에 없던 마음이 생긴다. 학교가 끝나면 회의하고 상담하고 주말에는 길거리 캠페인도 하고 간혹 피켓 시위나 집회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면 가족들에게 너무도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밖에서 사회 변혁을 해보겠노라고 돌아다니는 모습에 허무함을 느낀다. 그래도 가족이 지지해줄 것이라는 나만의 기대로 버텨왔다.
그런데 요즘 주변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일할 때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방과 후에 배드민턴이나 경락, 도예 등 자기 개발을 하는 분들부터 교장선생님과 술자리를 가지며 학교에서의 정치적 외연을 확대하는 분, 가족과 함께 산책을 하는 분들까지 다양했다. 이런 것들이 보이면서 어렸을 때 배웠던 서예가 다시 하고 싶어진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사실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는데 작년에 몸이 아파 병원에 몇 번 입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에게 휴식이 필요한 시기가 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휴식… 참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이다.
뻔뻔함
이런 생각도 잠시, 기어이 지난 겨울방학을 아스팔트에서 혹한의 추위와 싸우며 보낼 수밖에 없는 일이 발생했다. 지난해 12월 17일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서 현장실습생이 뇌출혈로 쓰러졌다. 특성화고(공업계) 3학년으로,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기아차에서 현장실습을 받던 학생이었다. 실습교육이지만 회사는 12시간 주야 맞교대로 일주일에 70시간 이상 일을 시켰고, 도장(페인트) 작업을 하는 학생에게 방진마스크도 지급하지 않았으며, 휴일특근 등 성인 노동자도 버티기 힘든 일을 하던 노동학생이었다. 그리고 회사가 이렇게 학생들을 저임금과 노동착취의 도구로 사용하는 데 학교가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제공했다.
결국 광주지방노동청에서 특별근로감독을 한 결과 81건의 근로기준법 위반과 20억원 가량의 임금체불이 드러났다(한 해에 전국 7만 명 정도의 현장실습생이 있으며 기아차 100여 명의 현장실습생에 대한 임금체불과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면 기업들이 1,400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하는 셈이다). 산업안전의무사항 위반과 연소자 보호에 대한 특별조치도 위반했다. 더군다나 이 학생은 8월부터 졸업하는 2월까지 한시적으로 일을 하는 단기간 노동자였으며 시간당 최저임금 4,320원을 받고 일했다.
학교는 고용노동부에서 제시한 표준협약서에서 연소자 보호에 대한 특별조치 조항을 의도적으로 삭제함으로써 회사의 이와 같은 범죄가 가능하도록 협력했다. 결국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은 엄청난 액수의 과징금을 납부하게 되었으며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을 발표하였고 행정적 조치도 받았다. 그러나 학생이 다니던 학교나 전라남도 교육청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해당 학교장에 대한 징계나 인사 조치도 없었으며 교육청의 학교에 대한 감사 결과도 발표하지 않았다. 학교에 대한 관리·감독을 잘못한 장학진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학생은 80일이 넘도록 혼수상태에 있고 앞으로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교육계에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뻔뻔함을 보이고 있다. 사고 학생의 문병을 가지 않겠느냐고 묻자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문병을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던 교육감은 그 학생이 누워 있는 병원에서 택시로 10분 거리에 있는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 선거사무실 개소식에는 참석해 축사를 했다고 한다. 무섭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뻔뻔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사실 다른 학생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다. 햄버거가게, 치킨집, 사우나, 주점, 도축장 등지에서 현장실습이라는 명분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으며 이 반교육적 상황을 조장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학교폭력
학교폭력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TV를 틀면 각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학교폭력에 대한 대책을 내놓고 있고 경찰은 학교별로 담담경찰을 배치해 입학식에서 소개하도록 하고 사진을 찍어 보고해야 한다며 사진기를 들이민다. 정부에서도 없던 일이 갑자기 발생한 것처럼 생뚱맞게 신고전화를 개설했다고 홍보하며 처벌을 강화할 것이라고 한다.
누가 누구를 처벌하나?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디서 폭력을 배웠나? 무책임한 어른들이 우리 사회를 더 지능적이고 은밀하게 그리고 지속가능한 구조를 만들어 폭력의 역사를 이어가려고 하는 야만스러운 폭력사회를 만들어 놓고 아이들을 처벌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체벌하고 학생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평가라는 이름으로 경쟁의 사막에 밀어 넣어버린 어른들이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간의 만남이 폭력적이고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과의 만남이 폭력적이다. 학교폭력의 주범은 아이들이 아니라 선생이고 부모이고 이 사회의 어른들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처벌하나? 현재 학교폭력의 상황은 지금까지 무책임하고 비겁했던 어른들의 역사에 대한 대가를 아이들이 대신 치르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학생인권조례와 관련된 여러 가지의 논의가 나온다. 사실 이것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요구하고 장애인이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요구하며 노인이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학생이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매를 맞지 않고 머리카락을 함부로 잘리지 않으며 학교의 주인으로서 참여의 기회를 제공받고 차별과 침해를 받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이 요구를 허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도 이 땅에 없다. 당연히 학생들에게 보장된 것이며 누리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허가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가지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선생들과 부모들이 개입하려고 한다. 이것은 부당한 것이며 일방적인 것이고 폭력적인 것이다. 이러한 부당함과 일방적인 폭력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기에 학교폭력은 당연한 것이다. 학교폭력에 대한 진정성을 가진 자라면 우리 사회를 인권친화적인 사회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20년이 지나도 이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먹먹하고 먹먹하다
휴식은 내게 가능한 일일까? 다들 그렇게 저렇게 살아가는데 혼자 유난 떠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어쨌든 난 지금 힘들다.
학생부장을 하며 인권친화적인 생활교육을 해보겠노라고 학생부 선생님들과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여전히 동료들은 ‘어디 한번 해봐라. 잘 안 될걸. 아니, 잘 안 돼야 돼!’라며 방관하는 것 같다. 현장실습 제도를 인건비 절감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기업들에게 최소한의 기업윤리마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정부도 학교 교육의 정상화보다는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학교가 역할을 해줄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데 더 힘쓰는 것 같다. 주변 환경은 그렇다 치고 나는 교사로서 어떠한가? 저들을 원망하고 분노했지만 난 내 자신에게 원망과 분노가 없는가? 다시 먹먹해진다. 교육할 수 있는 용기는 준비됨에서 오는데 교사로 15년을 살았으면서 그 준비됨을 되돌아보면 나의 기만적인 모습에 원망과 분노가 치민다. 교사로서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의 부족은 나를 병들게 했고 결국 그 병은 나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저 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소중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맑은 눈빛을 담아내기에는 나의 준비된 그릇이 너무 작음을 안다. 더욱 먹먹해진다. 교사로 산다는 것은….
임동헌 광주전자공고 통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