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학교도서관 리모델링 분투기] 설계도면에 '도서관의 철학'을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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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도면에
'도서관의 철학'을 새기다
첫가구 협의부터 가구 시안 수정까지
예산이 확정되고 설계사와 마주앉은 날,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도서관을 만드는 일에서 가장 험난한 전쟁터는 공사 현장이 아니라‘ 협의 테이블’이라는 것을. 설계사, 관리자, 업체, 그리고 사서교사. 각자의 논리와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을 두고 밀고 당기는 그 과정은,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외로웠다. 하지만 그 모든 마찰이 결국 우리 도서관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사서교사의 자리를 지키면서, 한정된 예산 안에서 최선을 선택해 나간 협의의 기록을 남긴다.
최예윤 서울 사대부고 사서교사
첫 가구 협의의 당혹감, 그 후
설계사와의 첫 가구 협의에서 제시된 시안을 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화면에 펼쳐진 것은 2000년대 초반 과학실에서나 볼 법한 투박한 가구들이었다. 학교 납품 가구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 역시 아직 잘 몰랐던 것이다. 그 순간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내가 더 많이 알아야 한다.’ 이후 몇 주간 도서관 가구 업체의 카탈로그와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지고, 사서교사 커뮤니티에서 다른 학교 리모델링 사례들을 찾아 읽으며, 전국 사서교사 단체 채팅방에 조심스럽게 질문을 올렸다. 그러자 전국 곳곳의 선생님들이 자신의 학교 사진과 함께 상세한 답변을 쏟아냈다. 어떤 소재가 관리하기 좋은지, 어느 업체가 학교 납품 경험이 풍부한지, 실제 운영해 보니 어떤 점이 후회됐는지까지. 혼자였다면 몇 달이 걸렸을 공부를 단 며칠 만에 할 수 있었던 것은, 기꺼이 경험을 나눠 준 동료들 덕분이었다.
어느 공간에 예산을 집중시킬 것인가
리서치를 마친 후 맞닥뜨린 현실은 냉정했다. 원하는 것은 많았고, 예산은 정해져 있었다. 고민 끝에 기준을 하나 세웠다. 수업 공간의 책상과 의자는 기존 것을 유지하되, 학생들이 자유롭게 머무는 공간에 예산을 집중하자.그 예산 배분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을 불러온 것은 소파였다. 나는 처음부터 고급 소파를 고집했다.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가 아니라, 어른들이 카페에서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을 아이들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계사는 “관리가 어렵다”고 했고, TF팀 회의에서는 “학생들이 비싼 소파에 앉아서 뭘 하겠냐”는 말도 나왔다. 잠시 흔들렸다. 그때 교감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학생들도 좋은 의자에 앉을 권리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 한마디가 결론을 냈다.
설계도면과 가구, 끝없는 수정
설계도면과 가구 시안을 두고 수정 요청이 반복되었다. 검색대만 해도 다섯 번을 넘기고 나서야 겨우 방향이 잡혔다. 공사가 시작된 2023년 1월 초, 나는 더 심플한 형태를 요청하며 참고 이미지들을 카카오톡으로 보냈다. “검색대가 좀 심플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전선만 가려지면 될 것 같습니다.” 업체 대리님과 시안을 주고받으며 본체 없이 일체형 PC를 수납하는 방식, 하단 전선 처리 방식, 측면 루버 패턴까지 하나하나 조율했다. 문제는 이런 수정 요청들이 설계사와 나 사이에서만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도면 하나를 바꿀 때마다 관리자에게 변경 사유를 설명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설계사는 나중에 조용히 말했다. “더 수정을 원하시면 솔직히 힘들겠습니다.” 그 말이 무겁게 들렸다. 지치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도서관을 위해 힘쓰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했다.

서가 '높이' 논쟁! 현장의 목소리로 전문가의 기준 지키다
관리자는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처럼 천장까지 닿는 벽면 서가를 원했다. 나는 분명하게 말씀드렸다. “별마당 도서관은 도서관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공간입니다.” 냉정한 말이었지만 전문가로서 해야 하는 말이었다. 손이 닿지 않는 책은 없는 책과 마찬가지고, 높은 서가에서의 낙상은 학생 안전과 직결된 문제였다. 중앙 양면서가 역시 시야를 막는다는 이유로 높이기를 반대하셨지만, 늘어나는 장서를 감당하려면 높이를 올려야 했다. 이 논쟁에서 단체 채팅방 동료 사서교사들의 답변이 빛을 발했다. 경남의 한 선생님은 별마당을 모티브로 한 지역 도서관 사례를 전하며 “5단인가 6단 이상은 이용 안 하도록 해놨어요. 낙상은 다쳤다 하면 크게 다치기 때문에…”라고 했다. 초등학교임에도 높은 서가를 짠 선생님은 “3, 4, 5단 위주로만 이용하고 그 이상은 복본을 꽂을 계획”이라고 했다. 공공도서관의 높은 서가가 실은 가짜 책으로 채워져 있다는 현장 증언도 이어졌다. 전문가 한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전국 현장에서 검증된 데이터였다. 거듭된 설명 끝에 합의된 것이 벽면 8단, 중


앙 양면 5단이었다. 완벽한 타협은 아니었지만, 학생들이 안전하게 이용하면서 장서도 충분히 수납할 수 있는 현실적인 최선책이었다.
협의의 끝에서 되새긴, 학교도서관 공간 기준
도서관과 맞닿은 외부 솔밭정원을 잇는 연결부 벽을 폴딩도어 대신 통창으로 선택한 것도 이 시기의 결정이었다. 솔밭을 물리적으로 도서관과 이어 붙이지는 못했지만, 도서관 내부에서 통창 너머로 사계절 솔밭이 눈에 들어오는 그 풍경을 설계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음은 나중에 충분히 확인하게 된다. 돌아보면 이 과정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어떤 특정한 결정이 아니었다. 사서교사인 나와 설계사, 관리자, 업체가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하면서도 매번 결정마다 처음부터 다시 설득해야 하는 구조 자체였다. 코로나 확진 중에도 문자로 의견을 주고받고, 밤늦게 학교에 남아 업체와 통화했다. 예산은 늘 빠듯했고,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한 가지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이 공간의 주인은 학생들이며, 그 주인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기준을 지켜나가는 데 있어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교감선생님의 한마디, 단톡방을 가득 채우며 답변해 준 전국의 동료들, 끝까지 함께 조율해 준 설계사님이 있었다. 기준이 흔들릴 때마다 이들 모두가 나를 다시 협의 테이블 앞에 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