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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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7-21 11:45 조회 11,594회 댓글 0건본문
[한기호의 다독다독]
손톱 밑의 가시 ‘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
유명한 외국계 은행에서 나름 승승장구하던 장정윤씨는 외환 관련 업무를 하느라 시차 때문에 밤낮 없이 일하다가 여섯 살의 둘째 아들이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좌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가니 아이는 거실 한구석에서 이불을 둘둘 말고 혼자 자고 있었습니다. TV를 보며 서서 오줌을 싸고, 발음도 불명확했습니다. 소아정신과에서 진단을 받아보니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초기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의사는 회사와 아이 중에서 양자택일하라고 경고했습니다. 몇 달의 방황 끝에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을 시작하면서 친구의 소개로 독서지도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림책을 공부하면서 집에서 둘째 아이와 실습에 들어갔습니다. 저녁부터 밤까지 매일 아이와 살을 맞대어 안고서 그림책을 읽어주었습니다. 아이가 특히 사랑한 책은 <프레드릭>(레오 리오니, 시공주니어)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감성을 그림책을 통해 키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천석은 <그림책으로 읽는 아이들 마음>(창비)에서 <프레드릭>이 이솝 우화에 나오는 <개미와 베짱이>가 갖고 있는 이 시대 부모의 보편적 신념을 건드리고 있다며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들쥐 프레드릭은 베짱이와 판박이다. 다른 들쥐들이 겨울을 대비해 먹을 것을 모으려 밤낮 없이 일할 때 프레드릭은 햇살을 모으고, 색깔을 모으고, 이야기를 모은다. 겨울에 부족한 것이 식량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따뜻한 햇살도 없다. 자연은 무채색의 모습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웅크리고 틀어박혀 있어야 하니 재미난 이야기도 금세 바닥이 나고 만다.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자 들쥐들은 돌담 속 틈새에 숨어 들어가 여름철 내내 모았던 옥수수와 짚을 먹으며 따뜻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곡식은 떨어져가고 들쥐들은 힘을 잃고 우울해한다. 역시 겨울에 부족한 것이 식량만은 아니다. 프레드릭은 다른 들쥐들에게 자신이 여름에 모았던 햇살과 색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저 이야기일 뿐이지만 모두들 살아 있다는 활기와 따뜻함을 느낀다. 프레드릭이 낭송하는 시를 들으며 들쥐들은 겨울의 추위와 외로움을 이겨낸다.”
장씨와 아이는 <프레드릭>으로 연극도 해보고, 새로운 시도 만들어보면서 수백번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니 아이는 일곱 살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책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학생들과 책을 읽고 토론하기를 즐기는 초등학교 교사 정소연씨는 아이들에게 <프레드릭>과 <개미와 베짱이>를 비교하며 읽으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독후 활동시간에 프레드릭을 성토하거나 옹호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베짱이는 놀기만 했지만, 프레드릭은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해서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었어요.” “어쩌면 베짱이는 가수가 되려고 노래연습을 한 건데, 우리가 노는 걸로 오해한 걸지도 몰라.” 아이들은 이렇게 빵빵 터졌습니다.
두 사람의 경험은 <책으로 다시 살다>(북바이북)에 나옵니다. 서 전문의는 부모가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를 권합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자연을 보는 경험,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같이 이야기를 만들며 상상을 펼쳐 나가는 놀이, 불을 어둑하게 해놓고 들려주는 옛이야기, 이런 시간이 존재”한다면 꼭 그림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의 부모가 그런 시간을 갖기는 쉽지 않겠지요. 그러니 “그림책이 그나마 부모가 접근하기 편한 도구”인 셈이지요.
서 전문의는 “아이들의 손이란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마이너스의 손’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좋아하는 것일수록 입으로 가져간다. 그러니 아이가 어리다면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고, 물고 빨아도 망가지지 않는 재료로 된 그림책이 좋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정부가 ‘어린이제품안전특별법’을 제정해 지난 6월4일부터 시행하면서 13세 미만 아이들이 보는 책 모두에 대해 안전 검사를 하고 반드시 KC마크(안전마크)를 발급받아 부착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출판사가 책 용지에 납이나 카드뮴 함유량과 프탈레이트계 가소제의 함유량이 적절한지를 판단하고 날카로운 모서리 등을 자율적으로 없앤 다음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 같은 위임기관에 KC마크 부착권을 신청해 확보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어길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현장(서점)에서 판매한 자에게도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린다고 하니 책을 만들고 판매하는 사람 모두가 범죄자로 전락할 판입니다. 비록 1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다지만 권당 60만원의 발급비용이 들고 발급받는 데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지체되는 이런 제도를 도입하는 취지를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동일한 제품이라도 만 13세를 초과하는 소비자가 사용할 가능성이 큰 제품은 비대상”이라고 하니 그림책이 어른용이라고 우겨서 법망을 피해가야 할까요? 아이들이 어린이책만을 물고 빠는 것은 아닐 것이니 제지업체에 용지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두면 그만일 것을 백해무익한 이런 법을 만들어 강제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어려움에 처한 출판사들을 완전히 궁지로 몰아넣어 국민을 우민화하기 위한 심사가 아닐까요?
정부가 하루빨리 이에 대한 시원한 대답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경향신문’ 2015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