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열쇠, 어디서 찾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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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4 22:03 조회 7,099회 댓글 0건본문
어두컴컴한 밤, 좁은 골목길에 서 있는 희미한 가로등 밑에서 한 중년 신사가 쭈그려 앉아 심각하게 무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치려다 바닥을 샅샅이 뒤지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서 잠시 멈추고 물어봤죠.
“뭘 잃어버리셨군요. 찾으시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열쇠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으니 같이 찾아봅시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가로등 불빛을 따라 아무리 살펴보아도 열쇠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혹시나 하고 다시 물어봤죠.
“여기 떨어뜨린 것이 맞나요?”
“아닙니다. 제 열쇠가 떨어진 곳은 저쪽입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가로등에서 멀리 떨어져 불빛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이었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찾고 계십니까?”
“불빛이 여기에 있으니까요.”
“…….”
한국의 교육에 관한 작금의 논의를 바라보면서 저는 위의 우화를 떠올립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는 정치가들, 화려한 학력을 바탕으로 이론을 설파하는 교육전문가들, 그리고 국가를 위한 정책을 강조하는 교육행정가들 모두가 우리 교육에 관해 깊은 고민을 하면서 많은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안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혁신학교, 공교육의 위기, 무상급식, 국가 경쟁력, 교사 평가, 학교 선택권, 학부모의 이기심, 사교육, 학교는 사회계급의 재생산 기관, 자기주도학습, 창의력, 교육정책의 리더십 부재,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 사교육비절감, 공교육 정상화……. 현재 우리의 교육과 관련해 이들이 내놓는 주제나 대안 또는 비판의 주제들입니다. 우리 교육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의 핵심 단어들만 언뜻 떠오르는 대로 정리해도 정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카메라의 줌 아웃 기능을 이용해 어지러운 이들 논의에서 잠시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수는 없을까요? 우리의 교육을 둘러싼 수많은 대립과 갈등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이들 주장들이 과연 정말로 우리의 교육에 관한 이야기인지 의문점을 가지고 바라볼 수는 없을까요? 모두 거창한 거대 담론으로 멋진 주제들 같지만 교육에 몸담고 있는 제게는 그리 와 닿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을 배우고 가르칠 것인가?
교육이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게 정신적인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라 한다면, 교육이라는 행위는 우리의 식생활인 음식 섭취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의식주 중 중요한 하나인 ‘식생활’에 관해 논의한다면, 당연히 어떤 음식을 통해 필요한 영양 공급을 할 것인가가 문제의 초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음식을 먹는 식당은 어떻게 건축해야 하는지, 음식을 담을 그릇의 종류와 색깔은 그리고 자재는 어떤 것인지, 또는 누구와 함께 먹으며 그 비용은 누가 얼마를 담당해야 하는지, 하루에 먹는 양은 얼마이고 몇 차례 식사를 하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식생활 문제의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식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어떤 재료로 어떤 음식을 공급하느냐의 문제이고, 나머지는 이를 결정하고 나서 거론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에 관한 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의 본질은 식생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너무도 간과하고 있답니다. 우리 아이들의 정신적 영양인교육의 ‘내용’이 언급되는 것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하는 수학과 영어와 국어가 아이들이 지적 감수성을 기를 수 있도록 정말 수학의 본질과 언어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가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얼마나 있습니까. 아이들이 배우는 음악과 미술과 체육이 그들의 미적, 육체적 감수성을 함양할 수 있도록 그 본질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가 말입니다.
스타강사가 교육자라고?
특히 수능과 EBS의 연계 정책은 우리 사회의 소위 교육전문가들이 교육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교육과정평가원은 “내년에도 학교 수업을 충실히 받고 EBS 수능 교재와 강의로 보충하면 별도의 사교육 없이도 수능준비가 가능할 수 있도록 수능-EBS 연계 정책이 정착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앉아 소위 스타강사(저는 그들을 교육자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죠.)들의 현란한 말솜씨를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 적고 따라 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즉 교육을 잘 받은 것으로 여기겠다는 이야기죠.
과연 이것을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미래를 담당할 젊은 세대들에게 공급해주는 정신적인 영양분이 그것인가요? 그러나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더더욱 제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현상이 본질을 압도하는, 그래서 본말이 전도된 세계가 우리의 교육계이기에 ‘잃어버린 열쇠’라는 앞의 우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것입니다. 잃어버린 열쇠를 찾기 위해서는 비록 캄캄하고 어둡더라도 잃어버린 그곳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불빛이 있다고 환한 가로등 밑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찾겠다는 우를 언제까지 범하고 있을 것인가요?
“뭘 잃어버리셨군요. 찾으시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열쇠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으니 같이 찾아봅시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가로등 불빛을 따라 아무리 살펴보아도 열쇠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혹시나 하고 다시 물어봤죠.
“여기 떨어뜨린 것이 맞나요?”
“아닙니다. 제 열쇠가 떨어진 곳은 저쪽입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가로등에서 멀리 떨어져 불빛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이었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찾고 계십니까?”
“불빛이 여기에 있으니까요.”
“…….”
한국의 교육에 관한 작금의 논의를 바라보면서 저는 위의 우화를 떠올립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는 정치가들, 화려한 학력을 바탕으로 이론을 설파하는 교육전문가들, 그리고 국가를 위한 정책을 강조하는 교육행정가들 모두가 우리 교육에 관해 깊은 고민을 하면서 많은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안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혁신학교, 공교육의 위기, 무상급식, 국가 경쟁력, 교사 평가, 학교 선택권, 학부모의 이기심, 사교육, 학교는 사회계급의 재생산 기관, 자기주도학습, 창의력, 교육정책의 리더십 부재,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 사교육비절감, 공교육 정상화……. 현재 우리의 교육과 관련해 이들이 내놓는 주제나 대안 또는 비판의 주제들입니다. 우리 교육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의 핵심 단어들만 언뜻 떠오르는 대로 정리해도 정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카메라의 줌 아웃 기능을 이용해 어지러운 이들 논의에서 잠시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수는 없을까요? 우리의 교육을 둘러싼 수많은 대립과 갈등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이들 주장들이 과연 정말로 우리의 교육에 관한 이야기인지 의문점을 가지고 바라볼 수는 없을까요? 모두 거창한 거대 담론으로 멋진 주제들 같지만 교육에 몸담고 있는 제게는 그리 와 닿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을 배우고 가르칠 것인가?
교육이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게 정신적인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라 한다면, 교육이라는 행위는 우리의 식생활인 음식 섭취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의식주 중 중요한 하나인 ‘식생활’에 관해 논의한다면, 당연히 어떤 음식을 통해 필요한 영양 공급을 할 것인가가 문제의 초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음식을 먹는 식당은 어떻게 건축해야 하는지, 음식을 담을 그릇의 종류와 색깔은 그리고 자재는 어떤 것인지, 또는 누구와 함께 먹으며 그 비용은 누가 얼마를 담당해야 하는지, 하루에 먹는 양은 얼마이고 몇 차례 식사를 하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식생활 문제의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식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어떤 재료로 어떤 음식을 공급하느냐의 문제이고, 나머지는 이를 결정하고 나서 거론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에 관한 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의 본질은 식생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너무도 간과하고 있답니다. 우리 아이들의 정신적 영양인교육의 ‘내용’이 언급되는 것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하는 수학과 영어와 국어가 아이들이 지적 감수성을 기를 수 있도록 정말 수학의 본질과 언어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가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얼마나 있습니까. 아이들이 배우는 음악과 미술과 체육이 그들의 미적, 육체적 감수성을 함양할 수 있도록 그 본질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가 말입니다.
스타강사가 교육자라고?
특히 수능과 EBS의 연계 정책은 우리 사회의 소위 교육전문가들이 교육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교육과정평가원은 “내년에도 학교 수업을 충실히 받고 EBS 수능 교재와 강의로 보충하면 별도의 사교육 없이도 수능준비가 가능할 수 있도록 수능-EBS 연계 정책이 정착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앉아 소위 스타강사(저는 그들을 교육자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죠.)들의 현란한 말솜씨를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 적고 따라 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즉 교육을 잘 받은 것으로 여기겠다는 이야기죠.
과연 이것을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미래를 담당할 젊은 세대들에게 공급해주는 정신적인 영양분이 그것인가요? 그러나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더더욱 제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현상이 본질을 압도하는, 그래서 본말이 전도된 세계가 우리의 교육계이기에 ‘잃어버린 열쇠’라는 앞의 우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것입니다. 잃어버린 열쇠를 찾기 위해서는 비록 캄캄하고 어둡더라도 잃어버린 그곳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불빛이 있다고 환한 가로등 밑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찾겠다는 우를 언제까지 범하고 있을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