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교육 김은하의 ‘현장에서 만난 질문들’ 5]고전을 어떻게 읽혀야 하나요? 고전 교육의 긍정적인 방향성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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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4-20 18:39 조회 8,686회 댓글 0건본문
“요즘 고전 읽기 열풍이 불고 있잖아요.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고전들이 뭐가 있을까요? 그리고 몇 학년 때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아이에게 고전 읽으라고 했더니 작품이 뭘 말하려는지 도통 모르겠답니다. 어른인 저도 읽다가 포기했던 책들인데, 억지로라도 읽혀야 할지 고민입니다.”
“고전이 저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요? 고전 지문이 입시나 논술에 도움이 되는 것 빼놓고, 선생님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진짜 제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요? 공부시키려고 뻥치는 것 같아요.”
최근 독서교육 강의에서 위와 같은 질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고전 읽기에 대한 관심과 실천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이, 즉 한편으로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반갑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염려스러움이 동시에 있습니다.
고전, ‘공부로서의 독서’ 교재와 시험 대비형 공부거리 사이
우선, 학교와 사회가 고전 텍스트의 교육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아이들의 교육 교재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이제까지 아이들은 교과서와 참고서에 요약된 ‘지식을 이해하고 암기’하는 방식으로 고전을 접해왔습니다. 사상가나 작가, 작품 이름만 알고, 때로는 의미도 모르는 채 작대기 그으면서 무턱대고 외우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플라톤-관념론, 동굴의 비유, 철인 정치, 『국가』’이런 식으로 방대한 양의 ‘퀴즈형 지식’이 쌓여 왔습니다. 퀴즈도 풀 수 있고 아는 척은 할 수 있는데, 설명하거나 응용할 수도 없고, 나의 생각과 실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말이지요.
또한 고전은 권위를 가진 누군가의 독점적인 해석으로만 안내되기도 했습니다. 교과서나 참고서는 특정한 고전을 선별하고, 저작 가운데 특정한 부분을 강조해서, 특정한 방식으로 요약하고 해석하며,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여야 맞출 수 있는 시험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아이들을 특정한 방식의 해석으로 이끌어왔습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고전이 거론된 ‘국민윤리’와 ‘국어’, ‘국사’ 과목의 교과서는 강력한 국가의 통제를 받아왔지요.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 유교의 ‘충’과 ‘효’ 등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힘을 가진 정치권력에 유리하게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온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학생들은 고전을 직접 읽어본 후 ‘감정을 느끼고, 판단하고, 생각하는 나’라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해석을 이해하고 흡수하는 나’로 자리 잡습니다.
고전을 직접 읽음으로써 아이들은 당대의 시대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오래된 문헌들을 직접 읽고 느끼고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객관식 문제를 맞추기 위해 ‘서산마애삼존불상–백제의 미소, 서민적, 소박함’을 외우다가, 자기 느낌대로 서산마애삼존불상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플라톤–동굴의 비유, 철인 정치’로 외웠던 지식을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직접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거지요. 최근에는 많은 고전이 현대적인 우리말로 번역 출판되어 있어서,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한자나 영어, 서양 고전어 등의 언어적 장애물 없이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려운 고전의 텍스트를 접근하기 쉽도록 안내한 해설서나, 온 오프라인의 대중 강의, TV와 라디오 매체도 많아졌습니다. 본격적인 ‘공부로서의 독서’ 교재인 고전을 독자로서 직접 접하게 되었으니, 적어도 ‘자료’의 측면에서는 퀴즈용 공부가 아닌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열린 겁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전열풍이 염려스러운 까닭은 고전 읽기가 자칫 ‘논술과 서술형 답안에 도움이 되며, 공부하지 않아도 국어 성적뿐 아니라 전 과목 점수를 떠받치는’ 또 하나의 시험 대비형 공부거리가 될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고전 공부의 목적이 ‘입시’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로, 고전의 리스트는 있되 읽도록 도와줄 방법은 없는 채로, 같은 고전이어도 공들인 번역본이나 핵심을 살린 판본을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을 교사와 사서가 갖지 못한 채로, 빡빡한 교육과정 속에서 실제로 아이들이 천천히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주지 못한 채로, 묻고 답하고 나누고 누릴 짬이 없이 무조건 많이 읽기만 하는 채로는 말이지요. 이런 고전 읽기는 아이들 발목에 모래주머니 하나 더 채워주는 격이 되기 십상입니다.
어떤 책들이 고전이 되는 걸까?
여러 부모님들과 선생님들도 느끼고 계실 이러한 명암은 결국 ‘아이들에게 고전을 어떤 방법으로 읽히면 좋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육에서 방법을 고민할 때, 되돌아가는 듯해도 오히려 쉬워지는 길은 ‘이것을 도대체 왜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목적을 잡고 나면, 지금 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서 넣을 것과 뺄 것, 방법을 달리할 것, 준비할 것 등 몇 가지 큰 줄기가 잡히지요. 그리고 나서 내가 몸담은 우리 학교에서, 우리 지역에서, 도움 받을 수 있는 손들과 쓸 수 있는 자원들, 나의 시간과 능력을 고려해서 실행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저는 목적과 방법에 대한 실마리를 고전 읽기에 대한 교육학적 논의가 이미 활발히 이루어졌던 교육철학과 교육사에서의 논의에서 찾아볼까 합니다.
고전은 무엇인가요? 좁은 의미의 고전, 영어로 Classics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인문학을 가리킵니다. 르네상스 시기 ‘고전으로 돌아가자’라는 모토에서 고전이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16세기 인문주의자들은 주석이 가득한 중세 스콜라학식 고전 해석을 거부하고 고전 작품을 직접 읽으려 했지요. 독자와 텍스트 사이에 끼어있는 일방적인 해석의 강을 건너뛰려는 시도였지요. 반면, 넓은 의미의 고전은, 두산 백과에 따르면, “(중략) 세계문학이나 각국 문학의 입장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온갖 비평을 이겨내고 남아서 널리 애독되는,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라고 정의됩니다. 독서교육에서 고전을 이야기할 때는 바로 이 광의의 정의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책들이 고전이 되는 걸까요? 유골을 분석해보면 키가 얼마나 컸을지, 어떤 질병을 가졌는지, 치아는 어떠했는지, 유전자의 성질까지 옛사람들의 신체적인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옛사람들의 생각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들은 자연과 세상사를 어떻게 설명하고, 어떤 불안과 두려움을 갖고, 무엇에 기뻐하며, 어떤 일을 보람 있게 여기고, 무엇에 끌려 사랑을 하고,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죽는다고 여겼을까요? 그들이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옛사람들의 글은 이를 가장 쉽게 드러냅니다. 대대로 전승해온 민담이나 우화 등의 옛이야기와 다음 세대에게 교육해온 경전 등은 과거의 인류가 어떤 인간을 추구하며 어떤 도덕적인 규범을 가지고 살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런 사고와 도덕, 미감은 현재를 이루는 바탕이 되기도 하고, 현재가 과거와 얼마나 다른지 낯설게도 만듭니다.
무엇이 고전인가는 변동적
재미있는 사실은 현재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고전이 어느 시대나 고전이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교육과 독서의 역사를 살펴보면, 무엇이 고전이 되는가는 언제나 ‘지은이의 시대’가 아닌 ‘읽는 이의 시대’에 달려있습니다. 많은 고전들은 지어질 당대에는 권위에 가장 도전적인 책이었으나, 다음 세대에는 시대정신의 밑바탕이 된 책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 가장 많이 읽히는 장르인 소설은 실은 18세기까지도 예술형식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독일에서는 ‘전염병’이라고 이름 붙일 정도로 소설 독서를 위험하게 생각했답니다. 도서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대여도서관이나 독서조합은 뒷골목 시설로 규정되어 관리감독을 받아야 했습니다. 1841년, 소설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밝힌 만 7세 소녀의 발언을 읽어보세요.
“나는 마약을 한 컵 마셨는데 그 바람에 몇 년 동안 머리가 휘청거렸다 (중략) 나는 그것이 유발한 지독한 흥분 때문에 마비상태에 빠졌다.”1)
영국인 목사의 딸인 이 소녀가 소설의 마약에서 자녀들을 조심시키라고 어른들에게 경고한 이 책은 무슨 책이었을까요? 현재는 고전으로 칭송받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입니다.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보지요. 1864년 프랑클린 협회는 도서 카탈로그에서 협회의 지원을 받는 도서관의 이용자들이 진지한 책보다 소설에 더 빠져 있음을 한탄합니다. 이때 거론되는 소설이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이나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입니다.2) 현재의 고전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지요. 소설이 문학의 한 장르로 인정받고 고전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은 인류의 읽기 역사를 볼 때, 매우 최근인 셈이죠. 저는 비슷한 이유로 만화나 그림책, 사진집 등의 장르가 고전이 될 시기도 머지않았다고 봅니다.
고전 중 다수는 쓰인 당대에는 가장 위험했으나, 읽히는 현재에는 가장 안전한 책인 경우가 많습니다. 『에밀』은 파리에서 화형식을 당했고 루소는 이 때문에 망명자로 떠돌았습니다. 어떤 종파의 『성서』를 읽느냐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읽기에 목숨을 걸기도 했지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존 스타인 백의 『분노의 포도』, 제롬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한때 금서로 지정되었던 책들입니다. 정치적인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혹은 책의 내용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말이지요.3)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한 일간지의 고전 읽기 캠페인에서조차 칼 막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고전 목록으로 추천하고 있습니다.
위의 책들이 가장 위험했던 책이 되었던 까닭은 당대의 권위와 관습, 문화에 대해 가장 먼저 혹은 가장 예민하게, 가장 첨예하게 문제제기하고 씨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의 책들이 다음 세대에게 가장 안전하게 추천할 만한 책이 된 까닭은 바로 그 문제의식이 현재의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고와 도덕, 인간관계와 미감에 뿌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독서에 대한 규제는 금지 목록과 추천 목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즉 어떤 특정한 작품을 읽지 못하도록 하거나, 혹은 모범이 되는 작품이나 작가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텍스트에 대한 차별적인 권위를 부여해왔습니다. 반대로 주어진 정전을 거부하는 움직임도 역사적으로 또한 존재해왔습니다. 이와 같이 무엇이 고전인가는 변동적입니다.
지금의 시대가 부딪힌 문제에 대해 다른 출구를 찾고자 할 때, 그리고 그 시도가 다음 시대의 사고방식을 여는 발판이 될 때 현재의 책들이 혹은 과거에 주목받지 못했던 책들이 고전이 됩니다. 이런 시각에서 국어교사였던 이계삼은 현재 아이들이 국어 시간에 배우는 고전 교육의 작품들이 주로 지식인 문인들의 공적인 삶이 담긴 글 일변도임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님’은 ‘왕’이며, 모든 글귀는 정치적으로만 해석되는 작품들이요. 그는 지식인이 아니었던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일상을 담은 작품들을 국어 수업에서 고전으로 좀 더 다루기를 제안합니다. 오히려 그런 작품들에서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상상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4)
항존주의자들의 고전 교육
어떤 책을 고전의 목록에 넣을 것인가에 대해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모티머 애들러(Mortimer Adler)는 다음과 같은 기준을 선정했습니다. 첫째, 현재적인 중요성을 가진 책, 즉 현 시대의 문제에 적절한 책. 둘째, 되풀이해 읽어도 다시금 고갈되지 않는 함의를 찾아낼 수 있는 책. 셋째, 지난 25세기 동안 인간의 사고를 사로잡았던 아이디어와 주제와 관련성이 있는 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애들러는 1920년대에 로버트 허친스(Robert Hutchins)와 함께 시카고, 콜럼비아, 하버드 대학의 교양교육과정을 고전 교육 중심으로 바꾸어 놓은 중심인물입니다. 이들은 대학교육이 지나치게 전문화된 전공분야에 대한 협소한 공부에 치중하고 있다면서, 인류가 고민해오고 답을 찾아온 문제를 담아놓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간학문적인 고전 교육을 운영했습니다. 이들은 위대한 책들(Great Books)이라고 하는 50~100종의 서양 고전들을 정했고, 이들의 목록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들의 교육철학적인 입장을 항존주의(perennialism, 恒存主義)라고 부릅니다. 항존주의는 시대와 공간을 넘어 인간에게 보편적인 가치와 진실이 있다고 믿습니다. 단 하나의 최종적인 진리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 진리, 비교적 지속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고 이를 가르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둡니다. 고전은 인류가 품어온 이러한 ‘진리들’을 담고 있기에 항존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 교재입니다. 고전을 읽을 때 고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사실을 아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고전에 나온 사건을 반추해보면서 얼마나 더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지요. 예를 들어, 성경을 읽는 목적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먹였느냐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눔과 사랑과 구원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항존주의자들에 의하면, 고전은 현재에 당면한 공해나 교통, 마약 등 특정한 문제에 대해 사실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신문의 기사처럼 직접적인 해결점을 내놓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들을 이해하고 답을 찾기 위해 필요한 보다 근본적이고 종합적인 관점과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5) 실제로 현대의 환경문제에 대한 사실을 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요. 생명과 공존의 관점으로 환경을 바라보지 못한 탓이 더 크지 않습니까.
항존주의자들이 선호하는 교육방법은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입니다. 교사의 역할이 산모를 돕는 산파와 같다 하여 ‘산파법’이라고 불립니다. 산파가 아이를 대신 낳아줄 수 없듯이, 교사는 어떤 문제에 대해 지식이나 정보를 직접 주지 않고 학생들이 스스로 묻고 깨쳐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항존주의자들의 고전 교육 방식은 세미나 형식으로 경험 많은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대화와 토론이 주를 이룹니다.
위의 두 항존주의자들은 엘리트를 양성하는 명문 대학에서 고전 교육을 실시했지만, 이들이 세운 시카고 대학에서 고전 교육을 받은 얼 쇼리스(Earl Shorris)는 노숙자와 빈민을 대상으로 ‘클레멘트 코스’라는 고전 교육을 실시합니다. 그는 고전 교육의 대상자를 엘리트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모든’ 자유인,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를 가진 경제적 약자에까지 확대했지요. 고전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노숙자들은 가난과 마약, 편견과 차별 등의 무력에 포위되어 무기력하게 ‘반응’하는 삶을 ‘반성’하는 삶으로 바꾸는 데에 성공합니다.6)
우리나라에서도 노숙자를 위한 희망의 인문학 코스가 개설되어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7) 입시에 구애받지 않고 학교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몇몇 청소년 인문학 모임도 그 진화과정이 주목할 만합니다.
더 나은 고전 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들 그렇다면, 위의 논의들은 아이들의 고전 교육에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는 걸가요?
첫째, 고전의 콘텍스트(context)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동시대에 쓰인 책은 저자나 독자나 같은 콘텍스트에 있기 때문에, 저자의 생각이 얼마나 시대의 사고와 닮아 있는지, 어떤 부분을 뛰어넘는지 알아채기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고전은 다른 콘텍스트에 쓰였기에 이를 알아내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고전을 읽으면서 ‘당연한 얘기인데, 뭐가 새롭냐’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까닭은 위에서 논의한 대로 고전이 다루고 있는 주장이 당대에는 가장 혁명적이었지만 현재 사고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대의 콘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면 고전이 전달하는 핵심적인 사고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사고를 이용하여 지금의 맥락에서 그 고전이 제기하는 바를 끌어내기는 더 힘들지요. 모든 인간은 천부적인 권리를 가지며 어린이도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존재라는 당연한 이야기가 혁명적일 수 있었던 맥락이 함께 안내될 때 그 사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를 확장하여 지금 이 시대에 어린이에 대한 인격적인 존중이 과연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성찰해볼 수 있습니다.
텍스트(text)가 콘텍스트(context)와 함께 제시될 수 있으려면 숙제로만 혹은 국어 시간에만 ‘고전’이 다루어질 게 아닙니다. 콘텍스트를 다루는 과목들, 즉 역사와 사회, 도덕 수업 시간에 고전이 함께 다루어져야지요. 도서관 사서교사와의 협력으로 각 과목에서 언급되는 고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거나 읽어주거나 전시할 수 있겠지요.
둘째, 천천히 곱씹어 읽을 시간, 사고할 시간, 모르는 걸 묻고 답할 수 있는 시간, 사고를 나눌 대화의 시간, 자신의 논의를 주장할 토론 시간, 사고를 정리할 글 쓸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실과 정보 습득으로서의 고전 교육이 아니라 사고하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라면요. 현재의 교육과정은 정보량은 방대한데 비해 사고할 넉넉한 시간을 내기 어렵기 때문에 진도를 빼고 고전 공부를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초등학교에서 고전 읽기를 시도한 동산초등학교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적은 수의 책을 조금씩 읽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고, 아이들이 고전 읽기와 나누기의 동무가 될 수 있도록 전 학년에 걸쳐 읽기 공동체를 형성한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습니다. 특히 독자로서 고전 읽기의 자기 체험이 있는 교사에 의해서 전 학교의 공식적인 교육과정으로 진행되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8)
동산초의 사례가 우리에게는 특이하지만, 교과서가 없는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고전이 수업에서 자주 쓰입니다. 셰익스피어나 디킨스의 소설을 한 달 혹은 한 학기에 걸쳐 읽고 수업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학교의 공식적인 교육과정에서 고전 교육이 이루어지려면 교장 선생님의 리더십과 교사들의 고전 교육에 대한 이해, 자발적인 참여가 모두 필요하겠지요.
셋째, 좋은 번역본과 판본을 선별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독서교육을 따로 받지 못한 우리 교사 세대들은 스스로 독자로서 고전 읽기 경험이 부족합니다. 부산에 있는 어떤 청소년들과의 만남에서,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학교에서 나눠준 목록 다 읽어야 되나요? 어려운 옛날 책들 되게 많아요.”
제가 어른들을 대표해서 솔직하게 대답해주었습니다.
“내가 확신하건데, 학생의 학교 선생님들 중에도 읽으신 분 손가락에 꼽을 걸요. 괜찮아요.”
“으하하하.”
아이들이 시원하게 웃었습니다.
읽어보지 못한 책은 아이들에게 제목과 저자밖에 얘기해줄 게 없습니다. 각각의 고전에서 어떤 핵심적인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아이들을 안내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번역본이나 어린이용 축약본을 안내할 때는 화소가 아닌 주제 의식을 잘 담은 책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판되고 있는 어린이용 옛이야기 책을 분석한 김환희는 우리의 고전문학이 가진 주제의식과 세계관을 잘 드러낸 어린이책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토로합니다. 아이들의 기지와 용기가 핵심적인 메시지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무기력하게 하늘의 운에만 기대는 이야기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고, 오랜 염원이었던 자기희생으로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눈 먼 자를 구원한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심청전』의 심청이 아버지를 고려하지 않고 뱃사람들을 따라간 철부지로 그려지기도 한답니다.9)
사서교사들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책에 대한 직접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렵지만, 전공자들의 평가에 귀를 항상 열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백설공주여도, 같은 삼국유사여도, 같은 이솝 우화여도 어떤 책을 수서하고 추천하고 읽어줄 것인가는 사서교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교사들과 사서들이 어린이와 청소년의 삶과 고전을 어떻게 연결 지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갖고, 좋은 사례와 교육안을 좀 더 개발하고 나누기를 바랍니다.
고전은 어떤 시대와 공간에 살던 인간이 갖는 경험의 원형을 다룹니다. 그래서 삶의 길목마다 찾아오는 욕망과 갈등, 선택, 좌절, 타인의 시선과 시대의 관습과의 갈등, 용서와 화해를 심도 깊게 그리고 있지요. 그래서 어렸을 때는 독후감을 쓰려고 억지로 읽던 책인데, 사십이 넘어서야 문장마다 가슴이 시린 재미를 맛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삶의 경험이라는 콘텍스트가 텍스트의 이해를 돕는 거지요. 그래서 굴곡이 많았던 삶을 산 클레멘트 코스의 학생들이 때로는 고전을 직관적으로 더 깊게 이해하더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우리는 삶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의 고전 읽기가 어른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경험과 연결 지을 수 있는 고전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영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이루어진 고전 수업을 하나 소개하고 마무리하려 합니다. 교사는 아이들을 강당의 아무 데나 서게 하고 아무 말도 없이 한 쪽 방향으로 앞 사람을 뒤쫓아서 빨리 걷도록 했습니다. 각자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데 그 초조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주인공입니다. 아이들의 걸음은 점점 빨라져 앞 사람이 거의 닿을 듯 말 듯 하고 잡히지 않으려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에는 거센 숨소리만 가득합니다. 교사가 “멈춰.”라고 말하고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멈추었습니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느낌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생이 얼마 남지 않음을 자각하며 시간에 쫓기는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읽어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생활세계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임박한 죽음’에 공감을 끌어내는 고전 수업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고전 수업, 우리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함께 만들고 공유해야 할 숙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1) Cavallo, G, & Chartier, R. (Eds.). (2006). 『읽는다는 것의 역사』, 이종삼 역.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519쪽
2) 위의 책. 542쪽.
3) 서양과 우리나라의 금서의 역사에 대한 안내서로는 Karolides, N.J. (2006). 『100권의 금서』. 손희승 역. 예담과 장동석(2012).『금서의 재탄생: 시대와 불화한 24권의 책』. 북바이북 참조.
4) 이계삼 (2010).『삶을 위한 국어교육』, 나라말, 35쪽.
5) Ozmon, H.A. (2012). Philosophical Foundations of Education. Pearson. 20-21쪽, 54-55쪽.
6) Shorris, E. (2006). 『희망의 인문학』. 고병헌, 이병곤, 임정아 역. 이매진.
7) 우기동 외 (2008) 『행복한 인문학: 세상과 소통하는 희망의 인문학 수업』, 이매진.』
8) 송재환 (2011). 『초등 고전 읽기 혁명』. 글담, 송재환 (2012) 『초등 고전 읽기 혁명: 실천편』. 글담 참조.
9) 김환희 (2009). 『옛이야기와 어린이책』.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