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두 질문을 지혜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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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7-20 10:44 조회 20,670회 댓글 0건본문
과학과 철학, 가장 어려운 두 질문을 지혜롭게
김경집 인문학자 paulkim59@catholic.ac.kr
『과학으로 풀어낸 철학입문』 도다야마 가즈히사 지음, 박철은 옮김, 학교도서관저널, 2015
최근에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이 대니얼 데닛의 『직관 펌프, 생각을 열다』였다. 사실 난해하게 여기기 일쑤인 책인데, 대학원 시절 원서를 읽던 생각이 떠올라 개인적으로 더욱 흥미로웠다. 그 데닛을 다시 만나는 즐거운 책이 있다. 바로 가즈히사의 『과학으로 풀어낸 철학입문』이다. 물론 데닛은 그 일부다. 데닛이 그 일부라면 도대체 이 책은 무엇을 다루고 있으며 범위는 얼마나 넓을까.
흔히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분야가 바로 과학과 철학이다. 특히 문과 출신들은 과학을 꺼리고 어려워할 뿐 아니라 불편하게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철학은 각 철학자들의 복잡하고 난해한 이론을 현실에서 이용할 것이 별로 없는, 그야말로 사변적 담론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서 선뜻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바로 그 두 분야를 다 루고 있으니 어렵기 그지없고 친근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으렷다.
이 책은 과학철학이라고 범주를 정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철학의 과학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 양극의 서술방식과 탐구의 대상이 놀랍게도 일치함을,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그 점이다. 무엇보다 흔히 철학책들에서 만나게 되는 철학사나 난해한 철학자들의 이론 요약이나 나열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설프게 과학이라는 갑옷으로 철학을 무장시키는 것도 아니다. 분명 쉽게 손이 갈 책은 아니지만, 일단 문을 열면 끝없이 던지는 물음과 그 추적을 통해 철학의 문제가 결국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읽어내느냐를 기본 전제로 하고, 철학적 질문으로 내 삶을 주체적으로 열어나가는 것임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현존하는 철학자들을 대거 소환하여 그들이 현재를, 세상을 어떻게 읽어내는지 듣게 함으로써 현대성의 근간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것을 “과학의 성과를 정면으로 받아들여 과학적 세계상의 한가운데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철학”(16쪽)이라고 풀어낸다. 따라서 이 책은 과학이나 철학의 독립적 학문 혹은 그 둘의 결합이 아니라 인문학적 성찰로 이어주게 한다. 그의 말마따나 ‘현재진행중인 작업’으로서의 철학을 탐구하는 것은 현대인으로서 필수적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읽는 철학은 대개 과거를 살아오고 설명한 철학자들의 저술들이다. 그래서 이 책이 조금은 낯설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만큼 다양한 현대성을 이해하도록 이끄는, 그러면서도 철학적 난해함보다는 과학적 명증성으로 서술하는 철학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사실 현대 과학에서 가장 논란되는 문제는 과학이 흔히 빚기 쉬운 환원주의 딜레마다. 저자 스스로의 고백대로 그는 과학자적(과학의 진영에서는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본다고는 하지만)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답게 유물론자인데, 유물론에서 환원주의 문제는 인식하면서도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벗어나는지 살펴보면 그 또한 흥미로울 뿐 아니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과학을 탐구하는 사람답게 “최종적으로 결말을 짓는 것은 과학이다”(35쪽)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이것은 그가 어설프게 철학적 문제를 얼버무리지는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 책은 크게 의미, 기능, 정보, 표상, 목적, 자유, 도덕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앞부분은 주로 과학의 영역이고, 뒷부분은 철학의 영역에서 다루는 것들이다. 물론 엄밀히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그게 과학이나 철학의 고유한 분야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를 크게 두 영역으로 나누어 접근하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학적 엄밀성을 가장 기본적 토대로 해야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도 생산적 논의를 할 수 있다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제목은 ‘철학입문’이지만 결코 입문서가 아니다. 흔히 철학 하면 떠오르는 플라톤이나 데카르트도 없다. 그런데 엉뚱하게 데닛이나 페레붐 등이 나온다. 솔직히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던 나도 데닛을 공부할 때 최신 철학을 접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페레붐의 책은 읽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이런 현대철학자들이 즐비하다. 의미를 다루면서 튜링을 언급하는 건 당연하지만 대개의 철학서에서는 아예 다루지도 않는다. 제1장 ‘의미’는 과학과 철학이 팽팽하게 맞서기도 하고 의기투합하기도 하는, 어찌 보면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한 부분이다. 인지과학이나 로봇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과학이지만 ‘중국어 방’은 존 설이 의미론에 충격을 던졌던 화두였는데, 이런 문제들이 즐비한 점에서는 철학이다. 그러면서 로드니 브룩스의 로봇공학을 끌어 들여 “생존의 목적을 갖는 로봇만이 의미를 이해한다”(65쪽)는, 인지과학의 대담한 시도까지 내달린다.
또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풍부한 사례와 실험들이 가득하다는 점이다. 자유의지를 다루면서 양자역학의 확률적 법칙을 제시하는 등의 사례는 그야 말로 최첨단이다. 특히 자유의지를 자기제어 능력으로 해석함으로써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둘러싼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대립의 고착 상태를 해소하는 시도는 신선하다.
데닛의 견해를 상세히 소개하면서도 그가 “기본적 자세가 자유란 자기제어의 능력이라는 것은 좋다고 해도 이대로는 조금 자유의지를 너무 싸게 팔지 않았나 하는 느낌”(303쪽)이 든다고 비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중력, 진화, 인과, 미립자 등 자연과학의 핵심 요소들이 철학적 사유에 들어와 어떻게 작동 되는지 등을 새롭게 깨닫게 하는 것은 과학과 철학이 가장 가까워야 하는데도 늘 서로 멀찍이 떨어져 살아왔다는 자성으로 이끈다.
사실 국내에 소개된 일본 저자들의 철학서들은 대부분 가벼워서 흥미를 끌지만 내용은 공허했거나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어서 그다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서양철학을 굳이 일본인들을 통해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심리적 거부감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주저함을 일거에 해소시킨다. 다만 ‘입문서’이면서 과학과 철학의 첨단 과제를 다루고 있기에 만만하게 여겼다가는 절망할 수 있다. 각 장의 마무리가 미흡하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러나 그것은 결론보다 문제의 제기와 탐색이라는 철학적 태도에 적합하기도 하다는 점에서 큰 흠결은 아니다. 철학하는 사람은 ‘입문’이라고 가볍게 여기고 과학하는 사람은 ‘철학’에 꺼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둘을 이렇게 생생하게 묶어낸 멋진 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기획회의> 396호 2015.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