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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해마다 오월은 다시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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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2 17:33 조회 7,660회 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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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남도에서 목련은 3월 중순에 피었다가 4월 초순에서 중순이면 진다. 자줏빛 목련도
있지만 목련은 흰빛이 제 빛이다. 나는 목련을 볼 때마다 이제 곧 오월이겠구나, 한다.

그리고 이내 시 한 편을 떠올린다.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 피었다 지는 것
이 목련뿐이랴 /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 어디 목련뿐이랴 / 우리네 오월
에는 목련보다 /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1988년
박용주가 쓴 「목련이 진들」이란 시의 1연이다. 박용주는 이 시로 그해 오월문학상을
받았다. 놀랍게도 그때 그의 나이 열여섯이었고, 전남 고흥 풍양중학교 2학년이었다.
나는 그때 왼 시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이맘때면 나는 이 시를 나작
나작 욀 것이다.

흰 목련꽃은 눈에 잘 뜨이지 않아 마음 써서 안 보면 꽃이 피었는지 안 피었는지 모
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핀다는 말도 없이 피었다가, 진다는 말도 없이 지는 꽃이다. 우
리 민중들의 삶이 그렇다. 1980년 오월 광주 사람들이 그랬다. 어느 날 그 순하고 마음
착한 사람들이 총을 들었다. 하지만 정치군인들처럼 권력을 잡기 위해 총을 들지 않
았다. 그들처럼 총을 무기 삼아 강도짓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 목숨을 지키
기 위해 들었을 뿐이다.

80년 오월의 ‘실체’가 있기나하는 것일까
초등학교 교과서는 1980년 오월 광주의 싸움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기록하고 있
다. 하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보수정권은 ‘폭도들이 일으킨 폭동 또는 사태’라 했
다. 물론 지금도 수구 세력들은 그렇게 말한다. 진보진영에서는 이런 사태나 폭동 규
정에 대항하여 민중항쟁 또는 무장봉기로 80년 오월을 정의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광주 학살의 배후 조종자가 미국이라 하면서 반미 투쟁의 시작으로 삼기도 했다.
1980년 오월 18일부터 27일까지, 그 열흘 동안 광주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 일을 정확히 밝혀낼 수 있을까? 신군부의 사전 시나리오였다는 비밀문서를 찾아
낸다고 해서, 발포 명령자를 밝혀낸다고 해서 ‘광주의 진실이 규명’되는 것인가? 그
게 정말 ‘진실’일까? 적어도 우리는 한때 80년 오월을 두고 ‘본질주의’에 사로잡혀 있
었다. 80년 오월은 분명 ‘실체’가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미처 찾아내지 못한다고 보았
다. 그 실체를 두고 민중항쟁이니, 무장봉기니 하면서 논쟁을 했다. 또 80년 오월을 다
룬 소설이나 영화를 두고 이 소설은, 이 영화는 ‘오월 정신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라
고 비판했다. 그런데 정작 80년 오월의 ‘본질’이 있기나 하는 것일까? 어떤 정해진, 우
리가 미처 찾지 못한 ‘오월 정신’이란 게 어디에 딱 숨어 있는 것일까?

영화 〈화려한 휴가〉를 찍은 김지운 감독은 어느 자리에서 “지금까지 광주를 다룬
영화는 80년 광주의 오월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그
간의 오월 영화가 광주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면, 그가 생각하는 오월의 어떤 실체
(본질)가 따로 있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오월의 어떤 실체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실체를 온전히 밝혀낼 수 없다. 또 그대로 ‘재현’할 수도 없다. 이
제는 그러한 실체나 어떤 본질을 찾는 것에서 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어느 날 그 순하고 마음 착한 사람들이 총을 들었다. 하지만 정치군인들처럼 권력을 잡기 위해
총을 들지 않았다. 그들처럼 총을 무기 삼아 강도짓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오직하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들었을 뿐이다.



윤정모의 『누나의 오월』
‘영원한 오월광대’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박효선이다. 윤상원와 같이 광주 항쟁을 처
음부터 끝까지 이끌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27일 밤 윤상원과 같이 하지 못했다.
그는 그날 밤 도청에서 멀리 떨어진 YWCA회관에 있다가 공수부대가 온다는 말을 듣
고 새벽에 회관을 나왔다. 윤상원은 도청에서 총탄을 맞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뒤 그의 삶은 한시도 80년 오월 현장에서 떠난 본 적이 없다.
1998년 9월 간암으로 죽는 날까지 그는 오월 비디오 영화 <레드브릭>을 찍었다. 살아
남은 자의 죄책감, 그 부끄러움이 평생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박효선은 80년 광주 항쟁 뒤 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81년 윤정모의 집에 잠깐 머
무른 적이 있다. 그때 윤정모는 막 소설을 쓸 때였다. 윤정모는 『누나의 오월』 머리말
에서 “이 소설의 이야기는 거의 박효선 씨한테서 온 것이다. ‘누나의 오월’이라는 제
목도 그이의 ‘금희의 오월’에서 따온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연극 〈금희
의 오월〉과는 아주 다르다. 단지 제목만 비슷할 뿐이다.

『누나의 오월』은 초등학교 4학년 이기열의 누나 이기순이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어떻게 해서 80년 오월에 저세상으로 떠났는지 말해 주는 소설이다. 아버지
는 기순이 중학교를 졸업하자 더는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둘째 ‘아들’ 기열을 공부시
키기 위해서다. 기순은 기열의 대학 학자금을 모으려고 기르던 암소를 몰래 시장으로
끌고 가 팔려다 아버지에게 붙잡혀 붙들려 온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뒤, 기순은 집을
나간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나 집으로 돌아오고, 이제는 기열을 도시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님도 기순의 말을 따라 기열을 광주로 전학시킨다.

자취방은 금남로 가까이에 있었다. 기열은 4학년이다. 기순은 기열을 공부시키려
면 돈을 더 벌어야 한다며 공장 일을 그만두고 금남로 옆 황금동 황금다방에서 차 배
달을 한다. 바로 이때 5·18이 터진다. 누나는 금남로에서 피가 급하다는 말을 듣고 헌
혈을 한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도 했다. 오월 26일, 기순은 공수부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기열과 함께 시골집으로 간다. 기열을 시골집으로 데려다놓고 다시 광주로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차편이 모두 끊겨 걸어서 가야 했다. 기순은 헌혈을 너무 많이 해
몸이 버텨내지 못한다. 집 가까이에 이르러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쓰러진다. 그리고 결
국 그 다음 날 “아부지, 기열이는 꼭 공부시켜 줘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떠나고 만다.

80년 오월, 그때 광주 시내 모든 병원은 총탄에 맞고 곤봉과 총 개머리판에 얻어맞
아 골병이 든 사람들로 병상이 남아나지 않았다. 피를 흘리는 부상자가 많아 날마다
피가 부족했다. 남자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총을 들고 싸워야 했기 때문에 헌혈을 하
는 것은 여자들 몫이었다. 중고등학교 여학생뿐만 아니라 공장 여노동자를 비롯하여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줄을 섰다. 기순도 그랬다.

그때 춘태여상 3학년 박금희 학생도 날마다 헌혈을 했다. 박금희는 21일 기독교병
원에서 헌혈을 한 뒤 집으로 오다 공수부대가 쏜 총탄을 맞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한
시간 전에 헌혈을 하고 나온 병원으로 다시 시체가 되어 간 것이다.

윤정모는 바로 그때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생을 밀어 넣었던
사람들, 자신이 처한 형편에 따라 딱 그만큼만 내놨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밀고 나갔던 사람들의 생을 붙잡았다. 그 가운데서도 자신의 피를 내놓았
던, 그 여리고 순박한, 채 스무 살도 못 넘기고 저세상으로 떠난 이기순의 생을 들려준
다. 하지만 누가 기순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그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런 것을 낱낱이 말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것은 소설이니
까. 다큐가 아니니까. 바로 그 때문에 80년 오월 광주를 아주 자세히 들려주는 그 어떤
소설보다 더 깊은 감동을 준다.

윤정모는 바로 그때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있는 ‘최대치’까지 생을 밀어 넣었던 사람들,
자신이 처한 형편에 따라 딱 그만큼만 내놨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밀고
나갔던 사람들의 생을 붙잡았다.




한정기의 『큰아버지의 봄』
광주 사람들이 80년 오월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가 또 있다. 김영철이다. 그는 항쟁
지도부 기획실장을 맡았고, 27일 도청에서 윤상원과 함께 끝까지 싸운 사람이다. 다
행히 총알은 피해 갔다. 그는 도청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정신
을 놓아 버렸다. 80년 이후 정신병원에 있다가 1998년 이 세상을 떠났다.

『큰아버지의 봄』에 나오는 큰아버지 박원상이 그랬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도청 밖
에서 붙잡혔다. 같이 도청에 있었던 아버지가 형은 꼭 살아야 한다고, 어머니한테는
형이 있어야 한다고, 형이 나가지 않으면 당신도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
려 할 수 없이 도청을 빠져 나왔던 것이다. 그날 아버지와 은수 이모는 어떻게 살아남
았지만 도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다. 큰아버지는 도청에 끝까지 남지
않고 빠져나온 것이 이내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바로 그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이다. 김영철이 그랬듯 박원상 또한 정신을 놓아 버린 뒤 80년 오월 그 한
복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깨어있을 때도 잠을 잘 때도 80년 오월 광주에 있었
고, 그곳에서 살았다. 세월이 흘러도 그는 여전히 광주 그곳에 있었다. 시간도 세월도
그를 잡아끌지 못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 애인 은수 이모는 큰아버지가 그렇게 된 것이 자신들 때문이라
고 괴로워한다. 큰아버지가 마음먹은 대로 그곳에 남았다면 죽든 살든 적어도 지금과
같이 정신병원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저렇게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
각한다. 또 고집을 부려 형을 도청 밖으로 피하게 한 것이 어쩌면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
에 자리 잡고 있었던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의 내면은 동화에서 뚜렷하게 나오지 않는다. 웬만히 행간을
곱씹어 읽지 않고서는 붙잡아 내기 어렵다. 그래서 큰아버지가 죽고 씻김굿을 하는
날 “형님, 내가 잘못했소. 죽는 게 무서워 형을 그리 만들고 말았소. 으흐흐흑! 나는 비
겁한 겁쟁이요. 용서하시오.”라는 말이 절절히 다가오지 않는다. 형이 그렇게 된 게 왜
자기 때문인지, 왜 자기가 겁쟁이인지, 이런 것이 확실히 나와 있지 않다. 작가는 아버
지의 후회와 경록이가 동이의 괴롭힘을 이겨 내는 것을 겹쳐 보여 주면서, 용기가 뭔
지, 그 용기로 무엇을 지킬 수 있는지, 어떨 때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지, 사람이 비겁해
지면 무엇을 잃고 마는지, 이런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내면을
정확히 읽어내기 힘들어 작가의 바람과는 달리 결국 절반만 성공한 셈이 되었다. 이
점이 못내 아쉽다.



자신이 할 수있는 최대치까지생을 밀고 나간 사람들
마무리 글을 쓰기에 앞서 먼저 할 말이 하나 있다. ‘쳐다본다’는 말이다. 모두 알듯이
고개를 쳐들고 보는 것을 ‘쳐다본다’고 하고,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는 것을 ‘내려다
본다’고 한다. 글 쓰는 사람 가운데 이것을 제대로 구별하여 쓰는 사람이 참 드물다.
『큰아버지의 봄』에서는 ‘쳐다본다’는 말이 열네 번 나오는데, 두 번은 알맞게 썼고, 두
번은 좀 애매하고, 열 번은 잘못 썼다. 『누나의 오월』에서는 모두 일곱 번 나오는데, 두
번은 잘 썼고 다섯 번은 잘못 썼다. 나는 이 낱말을 잘 구별해서 써야 하지 않나,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텔레비전과 달리 ‘동영상’이 아니다. 텔레비전은 몸짓과 낯빛을
온전히 보여 주며, 어쩔 때는 눈을 배만치 크게 하여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세심
히 보여 준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 낯빛만 봐도, 눈빛과 입 모양만 봐도 그
사람이 지금 어떤 마음인지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눈빛이 중요하다. 눈빛
하나만 봐도 그 사람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눈빛’을
쳐다본다, 이 한 낱말로 쓰는 것, 나는 이 점이 못마땅하다. 작가는 글을 쓸 때 쳐다본
다, 이 한 낱말로 썼다 하더라도 자신은 그 눈빛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쓸 것이
다. 그렇다면 자기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걸 자세히 써 주었으면 좋겠다. 그 상황
에서 그 눈빛이 말하고 있는 것, 그것을 붙잡아 써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가끔 80년 오월과 같은 역사 시대 한복판에 들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가 많다. 나 같으면 어땠을까? 시민군에 들어가 총을 들었을까, 팔뚝을 걷어 피를 뽑
았을까, 27일 밤 끝까지 남아 항쟁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런데 그날 광
주 시민들은 저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결정을 했다. 더구나 27일 밤 도청
에서는 중고등학생들도 총을 들고 최후의 결전을 치렀다.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 오월의 실체는 없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80년 오월 18일부터 27일
까지, 그 열흘 동안 광주 시민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생을 밀고 나갔다는
점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어떤 책에서 읽었을 때 우리는 어떤 것을 새롭게 배웠다고 말
하지 않는다. 또 머릿속에 훤히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오늘 어떤 것을 새롭게 보
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80년 오월을 다룬 소설과 동화도 그랬으면 좋겠다. 80년 오월
의 본질이나 실체에 얽매일 필요는 없겠다. 아니 그것은 온전히 몰라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해 오월 광주에서는 자신의 생을 끝까지 밀고 나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
다. 그 사람들 이야기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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