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강 읽기로 여는 공감하는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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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4-12-02 09:31 조회 105회 댓글 0건본문
『채식주의자』 속 억압과
읽을 권리의 억압을 마주하며
이선영 수원 우만초 사서교사
“선생님, 축하해요!” 지난 10월 11일 아침, 아이들의 북적대는 소리를 뚫고 한껏 들뜬 축하 메시지가 들려왔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잖아요!” 3년째 교사 독서모임을 함께하던 선생님이었다.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가 축하를 받을 줄은 몰랐다. 책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축하받을 일이 아니겠냐는 선생님의 말씀에 눈물이 찔끔 났다. 축하와 감격도 잠시, 경기도교육청의 유해 도서 검열 문제1)로 여러 언론사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경기도 내 학교 중에 한강 작가의 책 2권을 유해도서로 판단하고 폐기한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편집자 주: 지난 2023년 11월, 경기도교육청은 초중고 각 학교마다“ 학교도서관에 비치된 일부 유해한 성교육 도서에 대해 선정성,동성애 조장 등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는 민원이
있으니 조처해 달라”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보수 성향의 학부모단체의 민원으로 사건이 불거졌고, 이로 인해 총 5,000여 권의 도서가 유해 도서로 낙인 찍혀 초중고에서 열람이 제한되거나
폐기 처분됐다. 한강 소설가의『 채식주의자』도 그중 한 권이다.
오천 여권 책들은 서가에서 왜 사라졌을까
2023년, 경기도교육청은 여러 차례 공문을 내려보내면서 성교육 도서와 유해 도서를 심의하라고 했다. 학교도서관의 책들은 모두 ‘학교도서관 운영위원회’ 협의를 거쳐 구입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구입이 결정된 책들까지 다시 심의해서 그 결과(폐기 또는 열람 제한)를 제출하라고 했다. 이 과정 자체가 검열임에도 불구하고, 경기도교육청은 ‘안내를 했을 뿐’ 검열을 지시하지 않았다고 계속 ‘발뺌’ 중이다. (...)
왜 도서관 소장 도서를 재심의하고 폐기 또는 열람 제한하라고 했는지 교육청에 물었다. 관련 부서는 지속적인 민원과 도의원의 문책 때문이었다고 했다. 경기도교육청의 검열이 문제시되기 전인 작년 7월, 충남 지역에선 공공도서관들을 중심으로 민원에 의한 (성평등) 도서 검열이 논란이 되고 있었다. 지역의 차이가 있었을 뿐, 도서관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도서와 유해 도서에 대한 ‘민원 운동’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유독 경기도교육청이 적극적으로 대처한 것은 민원을 제기한 시민단체와 생각을 같이하는 ‘도의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도서 검열은 결국 정치적·종교적 또는 막연한 어떤 ‘신념’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개인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 그리고 읽을 자유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알려진 일주일 뒤, 다섯 선생님과 독서 모임을 가졌다. 우리 모임은 다달이 만나 책 이야기를 해 온 바, 서로 읽고 싶은 한강 작가의 책을 고르며 다음 모임에 이야기를 나누자 약속했다. 평소 선생님들의 생각이 궁금했던 차에 『채식주의자』를 둘러싼 이슈를 공유했다. 이미 『채식주의자』를 읽어 본 A선생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너무 어둡거나 읽기 힘든 내용의 책은 자녀에게 권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평소에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이야기가 어둡고 축축하면 자연스레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소설적 상황이나 이미지 역시 어둡고 축축하기에, 그 느낌이 두려운 적이 있다고 밝혔다. B선생님은 “보통의 교육이 먼저”라는 말씀을 조심스레 꺼냈다. 교육 경력이 가장 긴 선생님이셨다. 아이들에게 즐겁고 행복한 경험, ‘일반적이고 보통’인 것을 가르치고, 예외적이고 특이한 경험은 그 뒤에 해도 되지 않겠냐는 말씀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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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삶은 무엇일까, 그런 삶을 사는 아이들은 보통의 삶을 사는 아이들의 무엇에 공감할 수 있을까, 그 아이들은 무엇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그 선생님의 말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보통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고민이었다(물론 누군가 내게 ‘네가 사는 보통의 삶이 정말 보통이냐’ 묻는다면, 답하기 매우 어렵다). A선생님이 다음 날 오후 『채식주의자』를 빌려 가셨다. 다시 한번 그 책을 읽어 보고 싶다고 했다. 주말이 지나고, 책을 반납하러 오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 저번에 읽었을 때랑 느낌이 또 달라. 마지막 부분에서 울었잖아!” 책은 읽는 사람마다, 읽는 시기마다 받아들이는 깊이나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고 말해 왔는데,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듯해 기뻤다. 이것이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가 아닐까. 타인(작가)이 건네는 위로를 받고, 서로 다른 생각과 위치를 공유하며 너와 나의 차이를 이해하는 힘, 나는 그것이 책에서 온다고 믿는다. (...)
영혜가 받는 억압은 소설에만 있지 않다
도서관에 놓인 책들이 민원과 검열의 대상으로 좌지우지되는 현실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도, 어제오늘만의 일도 아니다. 우리는 굉장히 오랜 시간 책이라는 존재에 접근할 수 없었다. 책의 접근, 지식의 소장은 인권(시민권)의 발달과 흐름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특히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이 책을 권할 수 있을까?’라는 논의를 할 때 어린이·청소년을 바라보는 관점은 굉장히 중요한 기준이 된다. 어린이·청소년을 미완성의 객체,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단체는 책이나 교육 내용을 제한하자고 주장한다. 반면 어린이·청소년을 하나의 인간으로 보고 그들의 인권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 고민하는 단체는 책이나 교육 내용도 그들이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당하는 폭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폭력이 견디기 어려운 이유를 보여 주기 위해서 폭력적인 장면을 힘겹게 써야만 했다.” 채식주의자인 영혜가 당했던 폭력은 ‘비주류(소수자)’들이 주류에게서 당하는 기존의 폭력과 직간접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일까, 『채식주의자』를 유해도서로 지정하자는 움직임 역시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생각은 서로 다를 것이고, 판단은 각자의 몫인데 책에 대한 유해 여부를 공식화하고 기득권층, 어른들, 다수(주류)의 집단이 그 반대 집단(소수·비주류)의 접근을 금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양함을 덮지 않는‘ 투명’이라는 윤리
우리는 공식적인 자리나 SNS에서 정치적 의견에 대해 대화하기를 꺼려 한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인플루언서들이나 연예인들에게 ‘중립’을 요구하기도 하고, 그런 언사를 불편해하며 자제시키기도 한다. 당연히 공공기관이나 교육기관에게는 더 날 선 잣대를 들이민다. 정치적 중립뿐만 아니라 사회적 중립도 마찬가지다. 주류들로 둘러싼 자리에서는 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역시 종종 터부시된다(사랑하는 방식이나 인권 운동,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이르는 모든 이슈를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공공기관이 ‘색’을 드러내지 않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깊이 공감하고 동의한다. 그러나 ‘중립’과 ‘어떤 색’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색으로 비유하자면 공공기관이 가져야 할 ‘중립’은 ‘투명’이 아닐까. 모든 색을 쉽게 덮어버리는 ‘검정’도, 연하게 만드는 ‘흰색’도 아닌, 있는 그대로 보여 줄 수 있는 ‘투명’이 중립의 성격을 가장 대변하는 색이라 생각한다. (...)
검열 너머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
성교육 도서·유해 도서 논란을 ‘물 위’라는 사회적 사건으로 떠오르게 해 준 한강 작가께 감사드리며, 이 원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로 2016년 맨부커상을 받았을 당시 “『채식주의자』보다 『소년이 온다』를 더 읽었으면 한다.”라고 밝혔다.『소년이 온다』에 등장하는 인물 김은숙은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한다. 그녀는 군부 검열과의 사전 검열로 극작가의 문장들이 잉크로 지워지다 못해 “곧 부스러질 검은숱” 같아진 가제본을 번역가에게 돌려주며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
시대가 변했다. 사전검열로 문장을 지우거나 작가나 편집자에게 폭력을 행하지도 않는다. 사복경찰들이 극장에 숨어 있다가 덮치는 일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검열의 시대에 살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던 중3 동호를 지키지 못해 “아직은 분수를 틀 때가 아니”라고 말했던 은숙 씨는 작금의 검열 이슈를 보며 우리 (도서관인들)에게 뭐라고 말할까? 『소년이 온다』의 문장으로 답을 대신해 본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한강 읽기, 학교도서관에서 시작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근육을 기르는 북큐레이션
정원진 구미 형곡중 사서교사
도서관 현대화 사업을 마무리하고 한창 재개관을 준비 중이던 9월, 도서관 소장도서 목록을 싹 한번 확인했다. 새 학교로 이동한 첫해에는 학교도서관에 있어야 할 책이 있는
가부터 확인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우리 학교에는 비교적 최근에 발행된 한국 소설이 적었다. 정유정, 김애란, 김금희, 천선란, 최은영, 박상영, 박서련, 최진영… 학생 스스로 책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서 문학의 깊이와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책과 작가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검색해 가며 ‘이 작가님 책이 아직도 없다고?’ 싶은 책들을 신간 구입 목록에 신나게 담았다. 그러다 ‘한강’을 검색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두 권이 소장된 걸 확인했다. 순간 작가의 다른 책들을 수서할지 말지 고민했다. 한강의 책은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대학 시절,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학우들과 나름대로 해석해 보려 했던, 그러나 쉽지 않아 서로 머리 아파했던 흐릿한 기억이 막연히 떠올랐다.
고통을 말하는 소설’을 학생들이 읽을 권리
그럼에도 생각했다. 아이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강 작가의 책은 도서관이라면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고. 인간이 가진 연약함과 폭력성, 그에 따른 크고 작은 상처
들을 세상에 조용히 보여 온 작가가 한강이다.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 어차피 읽지 않을 거라고 단정 짓는 건 나의 위험한 추측일 뿐이고, 만일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도서관에 책을 들여오지 않아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이 책을 도서관에 놓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검열 비슷한 의구심이 들 때마다 생각한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책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반기는 도서관의 존재 의미를. 작가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 『흰』, 『작별하지 않는다』를 1권씩 구입 목록에 추가했고, 한 달여 뒤인 10월 10일, 작가가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 신기해했다. (...)
이 세상에 고통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개개인에게 닥쳐 오는 사소한 아픔이든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크나큰 슬픔이든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마주칠 수밖에 없는, 또 필연적으로 마주쳐야만 하는 고통에 대해 작가와 함께 끊임없이 생각하고 나면 아이러니하게도 위로받은 것처럼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 학교 아이들이 떠오른 것도 이 지점이다. 자신의 아픔을 마주하고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 주변에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아이들이 어쩌면 한강 작품을 통해 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사서교사로서 한강 소설의 매력과 작가의 주제의식을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하고 느낄 수 있게 도와줘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그렇게 현대화 사업 이후 첫 번째로 선보일 북큐레이션 테마를 ‘한강’으로 정했다. 마땅한 일이었다.
한강 북큐레이션을 위한 사서샘의 분류법
북큐레이션의 대략적인 청사진을 그려 보며 문득 한강 작품의 주제를 나타낼 수 있는 키워드들을 뽑아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글을 읽을 때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읽어야 하는지를 알고 책을 접한다면 더 쉽고 깊이 있게 작품을 읽어낼 수 있을 테니까. 큐레이션 서가 한편에는 한강 작가의 주요 작품들을 책 속의 핵심 문장과 함께 전시하고, 반대편에는 작가의 소설에 나타나는 주요 주제와 소재들을 ‘한강의 해시태그’라는 이름으로 분류하여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북큐레이션을 계획했다. 특히 ‘한강의 해시태그’ 코너가 중요했는데, 작가의 작품들을 내 나름대로 해석해볼 필요가 있었다.
첫째 해시태그 : 기억해야 할 역사 #5·18_광주민주화운동 #제주_4·3_사건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두 작품 모두 변질된 공권력과 극단적인 이념 차이로 처참히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잘 풀어냈다는 평을 받는다. 책을 읽기 전 일련의 역사적 사실을 이해해야 쉽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겠다 싶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제주 4·3 사건을 중학생 수준에서 보기 쉽게 다룬 역사서, 만화책, 소설책을 첫 번째 해시태그 아래 전시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무대가 폭설이 내리는 제주도인데, 작중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눈’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부분이 등장한다.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중략)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133쪽).”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눈은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 위에서 일어난 비극을, 이미 죽은 무고한 사람들을 기억하자는 조용한 외침과도 같다. 기억해야 할 역사는 곧 기억해야 할 고통임을 아이들도 느끼길 바라는 마음으로 큐레이션에 신중히 임했다.
둘째 해시태그 : 우리의 폭력성 #차별과_혐오 #소수자의_삶
2016년 맨부커상을 받은 『채식주의자』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이 정한 ‘보편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인간은 얼마나 연약하고 동시에 얼마나 폭력적인가. 붉은 피가 흥건한 생고기를 마구 먹고 있는 꿈을 꾼 후 채식을 선언한 주인공 영혜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사람들, 여성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순종적인 아내를 원하는 남편,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딸의 뺨을 두 차례 때리고 급기야 얼굴을 움켜잡은 채 탕수육을 입에 강제로 밀어 넣는 아버지는 ‘차별-혐오-폭력’으로 이어지는 안타까운 사이클을 투명히 보여 준다. 육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낀 채식주의자인 동시에 가부장제 사회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여성인 영혜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말하는 부분은 책 속에 단 한 군데도 없다. 1부부터 3부까지 모두 타인이 주인공을 관찰하고 그녀의 생각과 감정을 추측하는 식으로 글이 전개된다. 이처럼 이 소설에서 영혜는 철저히 대상화된다. 보편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난 것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 내가 맞고 네가 틀린 거라고 편리하게 단정 짓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은 작품이 쓰인 2007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2024년 현재의 우리 사회에도 많다.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혐오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 채식주의자뿐만 아니라 장애인과 성 소수자 같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은 실제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알 수 있도록 차별 관련 도서와 소수자가 직접 쓴 에세이를 함께 서가에 전시해 두었다.
셋째 해시태그 : 상실과 아픔 #죽음 #심리
상실과 아픔. 한강의 모든 작품을 아우를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닐까. 『흰』에는 작가 개인이 겪은 상실과 아픔이 도드라진다.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숨을 거둔, 자신의 언니를 생각하며 쓴 자전적 소설로, 작가는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해 냈다. 『흰』의 「파도」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이상 누군가와의 상실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죽음이 아닐까 한다. 『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가족, 친구, 이웃의 죽음을 맞닥뜨리고 혼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며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햇살이 내리쬐는 날뿐만 아니라 찬바람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우리는 잘 살아내야 한다.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과 더불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스스로 알아차리고 그 과정에서 살갗을 후벼파는 크고 작은 생채기들을 어떻게 치유해 가면 좋을지 고민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죽음’과 ‘심리’를 하위 해시태그로 선정했다.
금지보단, 읽고 이해하려는 마음에 의지를
북큐레이션을 완성해 놓으니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반응이 뜨겁다. 특히 선생님들 시선이 오래 머무는 곳이 있는데, 바로 『채식주의자』가 놓인 자리다. 간혹 몇몇 선생님들께서 질문을 하신다. “선생님, 『채식주의자』 요즘 말 많던데, 여기에 있어도 돼요?” 그럼 나는 대답한다. “당연하죠. 여긴 도서관인걸요!” 인터넷에서는 『채식주의자』의 학교도서관 배치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2부 「몽고반점」 때문인 것 같은데, 이해는 된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으로 무언가를 콕 하나 집어 강제적으로 넣거나 제외시키려는 움직임은 명백한 검열 행위다. 이러한 일은, 이용자들의 지적 자유를 보장하고 모든 자료와 이용자를 평등히 대할 의무가 있는 도서관에서는 더더욱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이 바로 한강 작가가 작품을 통해 계속해서 지적해 온 폭력적인 사회의 모습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채식주의자』를 없앨지 말지를 고민할 게 아니라, 학교도서관에서 『채식주의자』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읽히고 교육적으로 활용할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
학교에서 5·18을 감각한다는 것
『소년이 온다』와 함께 떠난 광주민주화운동 체험학습
문진영 여수 부영여고 국어교사
나는 국어교사로서의 16년 중 절반 이상을 ‘인문사회 부장’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리하여 봄, 산수유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할 때부터 준비하는 것들이 있다. 4월과 5월에 으스러져 간 생명들… 모두가 따뜻한 봄이 왔다 말할 때, 교육 공동체 안에서 그들을 기억하자고 이야기하는 일이다. 4월의 세월호와 제주 4·3, 5월의 광주 이야기는 인문사회 부장이 되면서 내가 나에게 부여한 또 다른 숙제였다. ‘학생들에게 인간으로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힘을 길러 주는 교육을 하라’는 숙제. 그렇게 시작한 체험학습이 있다. ‘5·18 발공부(‘발로 하는 공부’라는 뜻에서 이름 붙인 체험학습 활동)’다. 이 수업을 처음 기획한 2017년부터 나는 근무하는 학교에서 꼭 한 번씩은 5·18 발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해 왔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함께, 지난해 학생들과 눈으로 보고 발로 뛰며 함께한 5·18 발공부를 소개한다.
눈으로 보고, 책으로 읽고, 발로 공부하는 5·18
2023년 3월의 어느 날이었다. 5·18기념재단으로부터 5·18 교육 자료를 신청하라는 내용의 공문이 도착했다. 나는 5·18 발공부를 위한 체험학습 계획서를 촘촘히 써 내려갔다.
눈으로 보는 5·18 오월의 사진전
발공부에 앞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학교에서 유동인구가 제일 많은 1층 중앙 현관에 ‘5·18, 오월의 사진전’을 열기로 했다. 사진 자료는 모두 5·18기념재단(518.org)으로부터
받았다. 도착한 사진이 꽤 여러 장이었는데 공간이 제한적이라 모두 전시하기가 어려웠다. 시간순으로 5·18 민주화운동의 중요 내용을 담고 있는 사진들을 골라 배치했다. 현시대의 메시지도 덧붙이고자 의도에 맞게 사진을 자르고 붙이는 과정을 더했다. 얼마나 많은 학생이 얼마나 오래 사진전을 보고 갈지 알 수 없었지만 함께 기획한 선생님과 ‘1명의 학생이 단 1분이라도 사진전 앞에서 사유한다면 그걸로 됐다’고 여겼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 멈춰 있던 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는 흐뭇함으로 5월을 보냈다.
책으로 만나는 5·18 주제도서 읽고 독서일지 쓰기
5월 18일이 있는 주, 중간고사가 끝나고 비교적 한가로울 것 같은 토요일을 체험학습 날짜로 잡고 참가할 학생들을 모집했다. 놀러 가는 행사가 아님을 알리기 위해 사전·사후
활동이 있음을 공지했다. 다년간 인문학 주제 체험학습을 다닌 경험으로 깨우친 노하우는 소수의 인원으로 가되, 사전 학습을 면밀히 하는 것이다. 아쉽지만 버스 한 대의 정원을 넘지 않는 희망자 20명을 선발하고 바삐 책부터 구입했다.
체험학습 약 15일 전, 사전 활동을 위해 참가 학생들을 불러모았다. 5·18 관련 책 7종을 소개하며 이 중 한 권을 체험학습 2일 전까지 읽고 독서일지를 써 보도록 했다. 이때,
책 한 권을 읽어 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차분히 문장과 단락들을 곱씹으며 사고의 과정을 충분히 거치기를 강조했다. 책의 줄거리만 파악하는 게 아닌, 각자의 생각을 만들어 체험학습에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한 권씩 마음에 드는 책으로 골라 가져가라고 하니, 어떤 책이 좋냐고 묻는 학생이 많았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권했다. 왜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너희들과 비슷한 나이인 ‘동호’라는 인물을 비롯해 다양한 서술자의 시각으로 5·18의 상처와 아픔을 새파랗게 전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읽으면서 힘이 들더라도 그 인물들이 되는 경험을 해 보면 좋겠다고. 그동안 스스로 안다고 여겼던 5·18을 정말 알고 있던 게 맞는지 의심하며 읽으라고도 덧붙였다. (...)
발로 공부하는 5·18 광주 체험학습
유난히 따뜻했던 2023년 5월의 세 번째 토요일, 우리는 평소와 사뭇 다른 모습으로 만나 광주 서구의 ‘5·18 자유공원’으로 향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광주에는 5·18 사적지가 많다. 5·18 자유공원은 광주 시민들이 구금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던 상무대 군사법정과 영창을 복원하고 이를 상황극으로 재현해 둔, 그야말로 역사의 현장이다.
역사가 살아 있던 5·18 자유공원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우리는 5·18 상황 재현극 해설사님이 오시기 전, 영상관에서 영상 한 편을 보고 숙연해진 분위기로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 해설사님들을 따라 세 모둠으로 나뉘어 활동을 시작했다. 사실 많은 사적 중 이곳을 첫 번째 목적지로 정한 이유는 5·18 당시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행자들이 고문과 조사를 받았던 헌병대 내무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군사재판을 받았던 법정, 6개의 감방으로 이루어진 영창, 임시 취조실로 사용한 헌병대 식당, 고문 수사와 재판을 지휘한 특별수사반이 임시 본부로 사용한 헌병대 본부 사무실 등으로 구성된 이곳. 5·18 자유공원에서는 건물마다 그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셨던 역사의 증인들이 상주하며 상황 재현극을 해 주신다. 아이들의 후기를 들어 보니 연출된 상황임을 알면서도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재현극을 통해 마주하는 당시의 폭력과 잔인함에 당황스럽고 섬뜩했다고 한다. 말마따나 나 역시 영창에 들어가 죄인처럼 머리에 손을 올리고 군인들의 살벌한 말들을 듣고 있노라니 가슴이 답답하고 두려웠다. 실제로 그 끔찍한 현장을 경험하신 분들의 생생한 증언까지 함께 들으니 더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
점심을 먹고 이동한 곳은 광주 남구의 ‘빛고을 시민문화관’이었다.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는 대개 예술로 행해지는 인문사회 콘텐츠를 접하지 못하기에, 체험학습을 계획할 때 체험학습 주제와 관련 있는 문화예술 행사가 있는지 꼭 알아보는 편이다. 그런데 마침 5·18 발공부를 계획하며 무릎을 탁 치게 한 것이 바로 뮤지컬 <광주>였다. <광주>는 5·18을 주제로 하는 뮤지컬이자 ‘5월 18일이 포함된 일주일’ 동안만 공연한다! <광주>는 165분간 배우들의 노래와 행위로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전달하려 노력한 뮤지컬이었다. 공연 중간중간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학생들의 소리가 들렸다. 극이 끝나자 학생들은 서로의 얼룩진 얼굴을 놀리기도 하고 슬프다고 말하며 다시 한번 눈물을 왈칵 쏟기도 했다. 그날 학생들이 흘린 눈물은 1980년 5월의 고통과 참담함을 함께 나누었다는 따뜻한 증거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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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속 인물의 고통과 공명하는 아이들
(...) 이 체험학습의 끝이 미약하지 않았음을 1년이 지난 후 알게 됐다. 나는 2024년 1학기, 2학년 대상으로 개설된 ‘심화국어’ 수업에서 수강 학생들과 책을 읽고 모둠별로 토의해 글을 쓰는 수업을 10차시로 진행했다. 대략 30종의 책 목록을 주고, 그중 모둠별 협의를 통해 책을 골라 읽기로 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3개 분반 속 15개 모둠의 절반 정도 되는 7개의 모둠이 『소년이 온다』를 선택해 읽은 것이다. 살포시 『소년이 온다』를 읽자고 제안한 학생들을 찾아 이유를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얘기들이 나왔다. ‘작년에 체험학습을 가기 위해 읽었는데 다시 친구들과 읽고 싶어서’ ‘체험학습에 참여한 친구가 읽던 모습이 생각나 읽어 보고 싶어서’ ‘체험학습에 참여한 친구의 추천을 받아서’. (...)
맛보기로 소개한 특집 외 다양한 이야기는 2024 <학교도서관저널> 12월호에 수록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