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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무엇이 학교폭력을 만드는가? - 우리 사회의 ‘폭력적인’구조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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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9-02 16:53 조회 7,21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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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연료로 돌아가는 기계
세상 살기 무섭다. 뉴스를 보면 날마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 사고가 등장한다. 그것을 보고 있자면 밤늦게 돌아다녀도 안 될 것 같고, 가까운 사람을 믿어서도 안 될 것 같고, 심지어 식당 김치도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불안감 때문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구당 평균 3.5개의 보험에 가입하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불안을 먹고 돌아가는 기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깊은 불안이 세상을 빨리 돌아가게 하는 추진력이 되어버린 사회. 이런 불안하고 험난한 세상에서 어쩌자고 애들은 태어나는 것이고 이 불쌍한 애들은 도대체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것일까? 누구라도 대상이 될 수 있는 학교폭력은 교육활동을 둘러싼 모든 이들을 두렵게 한다. 어쩌다 이렇게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를 키우는 것을 겁내는 세상이 되어버렸을까?

최소한의 인정이 사라진 세계
학교폭력 이야기를 하다보면 의외로 이런 어른들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학교폭력은 우리 때도 있었는데 왜 요새 그렇게 새삼스럽게 운운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새삼스럽다고? 정말 그런가? 그러나 나는 지금의 시대가 어른들이 자라던 시대와는 다른 사회라고 생각한다. 같은 것이라고는 추억 속 자신의 나이와 지금의 아이들 나이다. 나이만 비슷할 뿐이다. 어른들이 자라던 그때는 공동체가 지금처럼 파괴되지는 않았다. 예전 사람들은 보험에 들지 않아도 자기의 뒷일을 가족이, 그리고 공동체가 해주었다. 상조회사에 가입하지 않아도 상喪이 나면 사람들이 와서 도와주었고, 연금보험이 없어도 늙으면 자식들이 연로한 부모님을 거두었다. 게다가 가만히 있어도 나는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손자이고, 누구네 집 몇째 딸일 수 있었다. 이것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었던 본인의 자리였다.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두들 타인에게서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가지만, 그때는 기를 쓰고 애쓰지 않아도 공동체로부터 받게 되는 최소한의 인정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빠른 산업화 속에서 물질적인 많은 것을 얻었지만 또 한편 소중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지금은 마을은커녕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사람이 타면 불편해 하고, 윗집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뛰면 살인이 나는 세상이다. 나는 사람들이 명절이 되면 그 극심한 교통 정체를 뚫고 시골에 가는 이유를 최소한의 인정이 있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라고 생각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하면서 살아가는 고달픈 영혼들이 좀 위로받고 쉬고 싶어서. 거기에다가 가정이 파괴되면서 우리 아이들은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받아줄, 자기를 인정해줄 최소한의 공간마저 상실해버렸다.

위로받을 자리가 없고, 인정받을 자리가 없는 요즘 아이들은 모든 것을 걸고 싸움을 한다. 외모, 성적, 핸드폰, MP3, 운동화, 말발, 심지어 게임레벨까지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 이렇게 우리 아이들은 최소한의 인정이 사라진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승자 독식의 사회
또 요즘 사회가 옛날과 무엇이 다른가 하면 승자 독식의 사회라는 것이다. 옛날에 시골에서는 늦가을에 까치밥이라고 해서 감나무에 감 몇 개를 남겨 두었다. 그러나 그 감은 때때로 까치가 먹지도 않고 농익어서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걸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적어도 사람이 까치밥을 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돈과 재주와 명예와 권력이 한곳으로 모인다. 갈수록 가진 자가 모든 것을 싹쓸이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요즘 대형 마트로 인해 지역 상권이 죽는다는 얘기를 한다. 그러나 어디 대형 마트뿐인가? 골목을 차지하고 있는 순대집, 떡볶이집 등 자잘한 구멍가게조차도 대기업의 체인점이 싹쓸이를 한다. 사람이 ‘까치밥’마저 탐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익이 되면 체면이고, 상도고,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고, 이런 건 찾아볼 수 없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요즘에는 있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한다는 얘기를 한다. 공부뿐인가? 그런 아이들이 성격도 좋고 외모에서도 부티가 난다고 한다. 깍듯한 상냥함에, 악기를 몇 개쯤 다룰 줄 아는 교양에, 훤칠한 외모에, 공부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엄친아’들이 많다는 뜻이다. 어떤가? 너무 잔인하지 않나? 가난해서 서러운데, 공부도 못하고, 외모도 못나고. 그중 하나도 가지지 못한 아이들이 하나라도 갖기 위해 벌이는 투쟁들이 너무 안쓰럽다. 그것이 요즘 아이들의 세계이다.

반성 없는 문화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 국회 청문회에서 유행시킨 말이 있다. ‘모릅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가 그것이다. 학교폭력 문제를 접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경험하곤 한다. 가해학생들이 죄의식이 없고 반성할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가해학생은 피해학생의 처지에 잘 공감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런 학생들에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어떤 이들은 청소년기의 뇌발달 이야기를 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궁금한 것은 왜 지금의 청소년들에게서, 그리고 지금의 어른들에게서 그러한 현상이 더 많이 나타나느냐는 것이다.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태연하게 범행을 재현하는 사람들, 대형 금융사기를 저지르고도 버젓이 잘 살아가는 어른들.

반성反省이라는 말 자체에 잘못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반성이란 그냥 돌이켜 살펴본다는 뜻이다. 그런데 돌이켜 살펴보다 보면 잘못한 순간의 자기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돌이켜 살펴보기가 안 되는가? 우리 사회는 앞만 보고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한 방향으로 매진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이다 보니 ‘반성’이라는 개념이 차지할 곳이 없다. 반성은 절대로 후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밀한 의미항을 가지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반성은 후퇴로, 때로는 패배로 인식된다. 또 성공 신화를 향해 질주하면서 좀 잘못을 해도 목표만 달성되면 모두 용서된다. 성격이 좀 나빠도 아이들은 공부 잘하면 되고, 좀 부정한 방법이더라도 어른들은 돈만 많이 벌면 된다. 착하다는 것이 공부 잘하는 것보다 미덕이 되지 못하고, 돈벌이 못한 사람의 정직은 무능력에 대한 변명이 될 뿐이다.
반성 없이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는 우리들. 문제가 있어도 결과만 좋으면 문제 삼지 않는 사회. 어쩌면 사이코패스psycho–path는 유영철 같은 희대의 살인마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일상화된 폭력, 미화된 폭력
교육부는 학교폭력 기본 대책의 하나로 게임 및 인터넷 중독 등 유해요인에 대한 대책을 내놓았다. 이 말에는 폭력영화나 게임 등의 영상매체가 학교폭력과 관련이 있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1)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아이들이 폭력적인 게임이나 영화가 학교폭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향이 있다는 쪽과 영향이 없다는 쪽, 어느 편이 진실일까?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을 탓하기 전에 그런 영상매체가 생산된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해봐야 한다. 폭력적인 영상매체는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먼저 그것이 잘 들어 먹힐 만한 분위기가 조성돼 있어야 하는 것이다. 차로에서 우물쭈물하면 옆에서, 뒤에서 욕이 날아오고, 자기 몸을 던져가며 어떤 주장을 해도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잘 들어주지 않는다. 지속적인 소음 환경에서 살다보면 난청이 발생하는 것처럼, 사회 전반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은 우리를 일상의 폭력에 무신경하게 만든다.
이런 만연된 폭력 위에 대중매체까지 가세한다. 요즘의 영화들은 폭력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다. 불의와 싸운다는 설정 속에서 멋진 남자 배우들의 폭력 연기는 당연하고 심지어 멋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세상은 폭력을 쓴다고 해서 다 강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또 강자라고 해서 다 폭력을 쓰지도 않는다. 그러나 대중매체는 은연중에 이 둘을 연결시킨다. 폭력은 남자다운 것, 멋있는 것으로, 강자의 조건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돈이 되면 뭐든지 하는 세상에서 폭력물은 문화산업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고, 우리도 거기에 길들여진 채 무신경하게 되고, 그러는 사이 반성 없이 폭력이 재생산되고 있다.

엄마, 진짜 공부만 잘하면 돼요?
이번에는 가정으로 눈을 돌려보자. 아이들은 별의 별걸 가지고 다 경쟁하고 있는데 부모님은 공부만 잘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다른 애들이 건들지 못할 거 아니냐고. 그러나 이 역시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예전에는 그 어떤 능력보다도 공부 잘하는 것이 우위에 있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학업을 통한 계층 이동이 지금보다 더 활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 교육은 계층 이동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계층 간의 차이를 심화시킨다.

아이들의 세계를 잘 모르고서 부모님들이 공부 이야기만 하시니까 아이들은 점점 말을 하지 않는다. 부모님들 말씀이 집에서 애들이 말을 잘 안 한다고 하신다. 소통의 벽이 생기면 아이들은 학교폭력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겪을 때도 부모에게 이야기를 잘 안 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가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하는 부모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해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공부를 잘하면 다른 애들이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이가 열심히 공부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아이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짐작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은 만약 학업 성적이 떨어지면 지나치게 좌절한다. 자신의 존재감을 성적으로 확인받고 있는 아이에게 성적이 떨어진다는 것은 존재 자체가 소멸될지도 모르는 위기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하는 문화 속에서 답답함을 느낀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아이들에게는 입시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타인의 기대와 집착, 그리고 그것을 무시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등이 아이들을 압박한다는 것이다. 부모님들은 아이에게 좋은 것을 많이 주고 싶지만 아이가 받은 최초의 상처는 부모에게서 온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 세계에 대한 무지로 인해 부모님들이 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사랑이 오히려 아이를 아프게 하지 않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교육부는 학교폭력 해결 의지가 있는가
사회가 이런 상황이고, 가정마저 때로는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상황에서 교육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일제고사로 경쟁을 부추기고, 입시전쟁을 주도하는 해묵은 과오는 제쳐 두고라도 올해 2월에 발표된 학교폭력 종합대책을 살펴보면 새로워 보이면서도 무척이나 낡은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학교폭력에 의한 징계사항을 학생생활기록부에 기록하도록 하는 것이 눈에 띄는데, 이것이 새로우면서 낡은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가해학생에 대한 처벌 강화를 통해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태도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을 해결하려면 생기부에 기록할 것이라고 겁을 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친구 관계를 가꾸어가야 하는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또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때 전화로 신고하고 경찰을 불러서 전학이나 퇴학을 시키는 것이 해결이 아니라 아이들의 반성과 화해를 이끌어내는 것이 진정한 해결이다. 교육부는 학교폭력의 진정한 예방과 해결을 위해 교육의 흐름을 바꾸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를 학교에 보급해야 한다.

그러나 학교폭력을 해결하겠다는 교육부 내에는 학교폭력 전담 부서도 없다. 전담팀이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 다른 업무와 병행한다. 내용의 질적인 변화는 형식에 있어서의 변화도 반드시 초래하기 마련이다. 교육부의 정책이 구태의연하듯이, 새 정책을 발표하면서도 교육부의 구조는 여전하여 교육부가 학교폭력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일까 의심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번에 내놓은 정책도 새 부대에 담을 필요가 없는 낡은 것인가 보다.

소통과 연대로 트는 새로운 물길
글 서두에서 식당에서 김치조차 믿고 먹을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고 탄식했다. 그런데 학교폭력을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들을 다시 한번 살펴봐도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세상에 믿을 만한 것이 정말 없구나. 긴 여행 끝에 결국 각자가 자기를 부양해야 하는 각박하고 험난한 레이스 속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됐다.

그러나 사회를 탓하는 중에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 인생도, 우리의 인생도 지나간다. 그러니 각자의 자리에서 학교폭력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빨리 실천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시기에 무엇이 진정으로 필요한가, 특히 피해자를 위해서 당장 무엇이 필요한가를 논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를 비판할 수 없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나는 지금이 굉장히 궁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궁함을 교육부나 사회가 획기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래서 그 궁한 개인이 서로 소통해서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갔으면 한다. 자기 혼자만의 여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같은 아픔을 가지고, 혹은 같은 목적지를 갖고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학교폭력의 피해자 학생과 가족들, 학교폭력으로 곤란을 겪어본 적이 있는 선생님들, 이것의 해결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힘쓰고 있는 사람들. 아직은 미약할지 몰라도 그 사람들이 만들어낸 단단한 길이 그 어떤 보장보험보다 낫지 않겠는가?

1) 교육부는 이 근거를 영상매체(폭력영화, 인터넷, 게임 등)의 학교폭력 영향력을 조사한 결과 영향력이 있다고 대답한 비율이 53.7%에 달한다(‘매우 영향 있음’+‘영향 있음’)는 설문조사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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