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사들 먼저 커밍아웃 하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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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8 21:49 조회 8,123회 댓글 0건본문
노동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자 - 학교는 노동자인 교사가 노동자의 자녀를 가르쳐 내일의 노동자로 키우는 곳이다
수업 시간 중에 내가 이 노동을 통해 임금을 받고, 이 임금으로 우리 가족이 먹고살기 때문에 이 일은 내게 아주 중요하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당황한다. “그럼, 선생님은 돈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거예요?” “사명감은요?” 가르치는 일이 내게는 참으로 적성에 맞는 일이고, 이 일을 통해 기쁨과 보람을 맛보고는 있으나 그래도 이것이 무급 노동이라면 나는 다른 일을 선택해야 했을 것이라고, 우리 가족이 먹고살 수 있도록 임금을 지급하니 이 일이 더욱 좋다고 대답하면 아이들의 웅성거림은 커져간다.
‘엇, 내가 앞으로 노동자가 될 거라고? 아니야, 나는 전문적인 일을 하면서 살 거야.’ ‘나는 부자가 될 거야.’ ‘기분 나쁘군. 왜 나보고 노동자가 될 거라는 악담을 하는 거야?’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보다 분석적인 친구들은 생각할 것이다. ‘선생님이 노동자라고? 말도 안 돼. 교직은 전문직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노동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공장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거나, 건설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일하는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노동자로 살아간다. 학교는 노동자인 교사가, 노동자의 자녀를 가르치는 곳이면서 내일의 노동자를 키우는 곳이다. 그런데도 학교는 묘하게 노동과 거리를 두고 있다. 학교는 절묘하게 우리 사회를 축소해 놓은 곳이다. 학교가 노동에 대해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노동에 대해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동자라는 것은 우리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노동이 오늘의 인류를 만들었다. 학교는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노동에 대해 말해야 한다. 학생들이, 나아가 이 사회가 갖고 있는 노동에 대한 편견을 깨트리는 일을 학교가 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미분방정식을 풀고 십분위 분배율을 계산해내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당당하게 요구하는 노동자로 키우자 - 미래의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학교의 당연한 책무다
조퇴를 해야겠다기에, 보호자와 전화하게 해달라고 하자, 아이가 난색을 표한다. 엄마가 일하는 동안 직장에 전화하면 안 된단다. 엄마는 전화 못 받는다고. 진짜 다급한 일이 아니면 전화하면 안 된다고 통사정이다. 그렇다. 아이의 엄마는 마트의 계산대에서 일을 하고 있고, 일하는 도중에 전화를 받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배가 아파서 조퇴를 해야겠다는 정도의 사정으로 전화를 해서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는 엄마의 일자리를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얘기 끝에 아이는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참 좋겠어요.” “왜?” “편한 일에,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걱정거리가 없을 것 같아요.” “내가 편해 보이니?” “놀고먹는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고요. 우리 엄마는 정말 힘들게 일하거든요. 모르긴 몰라도 월급도 선생님보다 훨씬 적을 거예요.”
학교는 학생들에게 질서에 순응하고, 권위에 복종하도록 가르친다. 교과서의 내용을 의심 없이 밑줄 긋고 외우도록 가르치며, 선생님 말씀에 따르도록 가르친다. 복장은 단정해야 하며 언행은 학생다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이 학생의 도리라는 규칙을 세우면,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학생들은 이에 따라야 한다. 이것은 학교를 지탱해나가는 방법인 동시에 우리 사회가 부당한 채로 유지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순응을 잘할수록 칭찬받는 학교생활을 하고, 사회에 진출할 때도 유리한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구조 속에서 긴 시간 훈련받으면 누구나 권위에 복종하고 규칙에 따르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이것은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노동에 대해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는 기업들에게 매우 행복한 환경을 만들어준다. 부당함을 지적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꼴사나운 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들 웬만하면 참고 사니까.
학교는 학생들이 행복한 시민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대다수 노동자가 될 아이들에게 미래의 노동자들을 위해 합당한 준비를 해주는 것은 학교가 가진 당연한 책무이다. 그중에 하나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배울 기회를 주는 것이다. 너무 위험한 생각이라고?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존 듀이이다. 존 듀이라면? 그렇다. 교육에 한쪽발이라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교육학 시간에 밑줄 그으면서 공부했던 교육학자, 존 듀이.
■노동에 대한 오해 1.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우리는 노동이라고 하면 보통 육체노동을 많이 생각합니다. 건설 현장에서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일이라든지,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일과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도 노동이고, 설계 도면을 그리는 것도 노동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구분하면서 정신노동은 좀 더 중요하고 고상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하는 일은 육체노동일까요, 아니면 정신노동일까요? 가르치는 일은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이니까 정신노동일까요? 그러나 몇 시간 동안 서서 큰 소리로 말하고 학생들과 함께 움직이고, 책상을 옮기고, 교무실과 교실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고, 점심시간에는 밥을 퍼주는 일도 하는 것을 보면 육체노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 하나로 모아져 존재합니다. 인간의 노동 또한 육체와 정신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분리시켜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이와 같은 오해가 생겨났을까요?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직업이 다양하게 분화됩니다. 그 이전의 농업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민이고 약간의 상인과 약간의 관료들이 있을 뿐이었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공장이나 광산에서 몸을 움직이며 일하는 직종과 함께 사무실에서 경리나 회계를 담당하는 직종이 생겨났습니다. 몸을 움직여 일하는 직종은 주로 청색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에 ‘블루칼라’라고 불렀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흰색 셔츠를 입었기 때문에 ‘화이트칼라’라고 불렀습니다. 화이트칼라는 블루칼라에 비해 교육을 많이 받았고, 보수도 더 많이 받았습니다. 그 수도 적었습니다. 화이트칼라는 블루칼라에 비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생각이 오랜 세월 동안 굳으면서 ‘노동’이라고 하면 몸을 움직여 일하는 직종의 일로 오해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류는 참으로 무의미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육체만 움직이는 일도, 정신만 움직이는 일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사이에 차이를 만들어 두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화이트칼라에게는 만족감을 주고 블루칼라에게는 내가 공부를 적게 했으니 할 수 없지, 하는 생각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요?
또 생각해보세요.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무언가를 입력하거나, 쉴 새 없이 고객들의 전화에 응대하는 일을 생산직 노동에 비해 더 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더 많은 임금을 받는 일일까요? 더 많은 교육이 필요한 일일까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이렇게 경계가 모호해지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노동에 대한 오해 2. 노동자와 근로자
한때 노동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신 근로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근로자는 한자로 勤勞者라고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노동자라고 할 때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는 느낌이 담겨져 있지요. 교과서에도 신문에도 공식 문서에도 모두 근로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이 ‘로동당’ ‘로동신문’ 등 ‘로동(노동)’이라는 말을 아주 즐겨 썼거든요.
그게 뭔 상관이냐고요? 크게 상관이 있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분단과 전쟁, 휴전과 냉전으로 이어지던 한반도에는 남한과 북한이 매우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남한에서는 북한에서 즐겨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예를 들어 원래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운동회 때에 청군과 홍군으로 나뉘는 게 맞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청실홍실, 녹의홍상과 같이 청홍의 대조를 매우 즐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빨간색을 좋아하고, 그들을 빨갱이라고 하다 보니, 남한에서는 공식 행사에 빨간색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홍군의 자리에 백군이 들어갔지요.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의 운동회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런 시절이니 노동이라는 말은 불온한 말로 취급되었습니다. 노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사상이 수상한 사람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근로자라는 말을 쓰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말은 노동, 노동자입니다. 노동문제를 담당하는 정부 부서를 ‘노동부’라고 하고, 노동과 관련된 법을 ‘노동법’이라고 하지요.
■노동에 대한 오해 3. 노동과 경영
노동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업으로 치자면 경영은 매우 중요하고, 큰 가치를 가진 일이고, 그 일을 담당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로 생각합니다. 노동은 그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반영되어, 노동을 하는 사람에 비해 경영을 하는 사람들은 높은 소득을 얻습니다. 2006년 미국 경제지인 <포춘>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대 기업 CEO 연봉의 중앙값이 1200만 달러(약 110억 원)였다니 수백억 원대 연봉을 챙기는 경영자가 수두룩한 셈입니다. 일반 노동자의 수백 배를 가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더 어렵고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는 우리 사회의 상식에서 출발하더라도 이 차이는 너무도 심합니다.
듀이는 일찍이 학교가 실용적인 기술만을 가르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대신에 젊은 학생들에게 정치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 깨어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습득한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 등을 조목조목 설명해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 토머스 게이건,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p.368
나는 여성민우회 생협에서 장을 본다. 장을 보고 나오는 길에 소식지도 꼭 챙긴다. 그날도 소식지를 보면서 ‘나도 출근 안 하고 집에 있으면 이런 프로그램에도 참가할 수 있을 텐데…’와 같은 맥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식당 노동자들을 위한 소책자를 발간했다는 기사를 본 것이다. 즉시 민우회에 전화를 했다. 내게 소책자를 50부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민우회에서는 물량이 달려서 한 사람에게 50부씩 보내줄 수 없다고 했지만, 내게 보내는 50부는 500명도 넘는 학생들이 보게 될 것이라며 사정했다. 결국 이 소책자로 수업한 내용을 글로 써서 보내주기로 하고 소책자를 받았다.
이 소책자를 학생들과 함께 보고 우리도 이와 같은 소책자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학생들에게 -식당 노동자의 인권 -청소 노동자의 인권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권 -배달 노동자의 인권 -청소년 노동자(청소년 알바)의 인권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인권 -경비 노동자의 인권 -장애인 노동자의 인권 같은 주제를 제시했다. 학생들은 스스로 소책자를 제작했다. 권리에 대해 배우지 못했는데,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어떤 일을 할 것인가? - 학교에서 노동 교육을 하자, 아이들이 진실로 ‘나를 위한 선택’을 하도록 일 깨우자
수능이 끝났다. 수시모집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해도 그건 먼 나라 이야기일 뿐, 우리 학교 아이들은 아직도 이렇다 하게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결국 아이들은 대부분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 진학률 70%라는 통계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대학, 낯선 이름의 학과에 진학한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가는 것은 예사이고, 통학이 불가능해 보이는 지역까지도 간다. 기꺼이. 별 볼일 없는 대학이라고 해서 등록금이 싼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도 간다. 왜 대학에 가나? 아이들은 대답한다. 그래도 안 가는 것보다 나으니까. 조건도 더 괜찮고, 덜 고된 일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중 많은 아이들은 대학을 중도 포기한다. 다행히 졸업하는 아이들은 매우 긴 시간이 걸린다. 한학기 다니고, 등록금 마련하려고 휴학해서 알바 하며 1년 보내고, 이런 시간들을 반복하며 오래오래 걸려 대학을 졸업한다. 졸업하면? 괜찮은 일자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 못 하겠다.
졸업과 동시에 대체로 실업자나 저임금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현실 속에서, 학생들에게 꿈을 좇으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배부른 발상인지는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학생들에게 꿈을 좇으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학생들은 반발한다. 좋아하는 일을 해서 먹고살 수 있냐고. 나는 답한다. 어차피 남들 다 가는 길을 가도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말이다. 이래도 어렵고, 저래도 어렵다면, 이왕이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좋지않겠는가.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나는 꼼수다>는 그런 의미에서 좋은 텍스트이다. <나는 꼼수다>의 네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루저이다. 그들은 모두 꿈을 좇다가 좌절당한 경력이 있다. 그래도 꿈을 좇는다. 꼴리는 대로 산다. 이렇게 꼴리는 대로 사는 네 명이 골방 같은 녹음실에서 떠들어대는 얘기를 방송으로 만들어낸 것이 <나는 꼼수다>이다. <나는 꼼수다>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얻고 있다.
그래도 대학 가야 먹고살 수 있고, 남들이 선망하는 길을 가야 행복이 보장된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퍼트린 신화일 뿐이다. 그 신화 덕분에 사립대학이 먹고산다. 그들을 위한 신화에 현혹되지 말고, 진실로 나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4만원짜리 청바지를 사면서도 이것저것 따져보는데, 무려 4천만원(기회비용이나 부대비용 빼고 그냥 순수 등록금과 책값만)짜리 상품을 구매하면서 그 상품의 효용을 따져보지 않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 아닌가.
더 절망적인 항변이 들려온다. 좋아하는 일이 없는데요.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없도록, 한 가지 길로만 아이들을 다그쳐서 여기까지 몰고 온 우리들은 그 절망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너무나 지치고, 너무 많이 좌절하며 고등학생이 되었다. 꿈을 꿀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학습된 무력감’이라는 감옥에서 아이들을 풀어줄 수 있도록.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일들을 제대로 못하고 있지? 오랜 시간 대안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해 온 김종휘의 말이 이 의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뜨끔하다.
십대는 이미 학생과 소비자일 뿐 아니라 저임금 파트타임 노동자로, 여러 분야에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생산자로 이 나라 경제에 깊게 참여하고 있다. 나아가 각종 이슈에 대해 여론을 형성하고 행동하는 시민사회의 한 세력이기도 하다. 창업을 해서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세금을 내는 십대도 있다. 이런 십대들에게 시민의 자리를 내어주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 마주하는 것이 어른들에게는 왜 그렇게 어렵고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인식되는 것일까? 변명을 빼면 다른 이유가 없다. 이유란 오직 하나, 그렇게 안 해 버릇했다는 점 말고는 없다.
- 김종휘, 『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 pp.79~80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노동교육이 안 될 이유는 없다. 그냥 우리가 하면 된다. 이를 위한 첫걸음은 교사가 스스로 노동자임을 커밍아웃 하는 일일 것이다. 언제까지 노동자인 자신의 실체를 외면하고 부인할 것인가. 언제까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현실에 눈감을 것인가.
수업 시간 중에 내가 이 노동을 통해 임금을 받고, 이 임금으로 우리 가족이 먹고살기 때문에 이 일은 내게 아주 중요하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당황한다. “그럼, 선생님은 돈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거예요?” “사명감은요?” 가르치는 일이 내게는 참으로 적성에 맞는 일이고, 이 일을 통해 기쁨과 보람을 맛보고는 있으나 그래도 이것이 무급 노동이라면 나는 다른 일을 선택해야 했을 것이라고, 우리 가족이 먹고살 수 있도록 임금을 지급하니 이 일이 더욱 좋다고 대답하면 아이들의 웅성거림은 커져간다.
‘엇, 내가 앞으로 노동자가 될 거라고? 아니야, 나는 전문적인 일을 하면서 살 거야.’ ‘나는 부자가 될 거야.’ ‘기분 나쁘군. 왜 나보고 노동자가 될 거라는 악담을 하는 거야?’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보다 분석적인 친구들은 생각할 것이다. ‘선생님이 노동자라고? 말도 안 돼. 교직은 전문직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노동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공장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거나, 건설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일하는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노동자로 살아간다. 학교는 노동자인 교사가, 노동자의 자녀를 가르치는 곳이면서 내일의 노동자를 키우는 곳이다. 그런데도 학교는 묘하게 노동과 거리를 두고 있다. 학교는 절묘하게 우리 사회를 축소해 놓은 곳이다. 학교가 노동에 대해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노동에 대해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동자라는 것은 우리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노동이 오늘의 인류를 만들었다. 학교는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노동에 대해 말해야 한다. 학생들이, 나아가 이 사회가 갖고 있는 노동에 대한 편견을 깨트리는 일을 학교가 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미분방정식을 풀고 십분위 분배율을 계산해내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당당하게 요구하는 노동자로 키우자 - 미래의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학교의 당연한 책무다
조퇴를 해야겠다기에, 보호자와 전화하게 해달라고 하자, 아이가 난색을 표한다. 엄마가 일하는 동안 직장에 전화하면 안 된단다. 엄마는 전화 못 받는다고. 진짜 다급한 일이 아니면 전화하면 안 된다고 통사정이다. 그렇다. 아이의 엄마는 마트의 계산대에서 일을 하고 있고, 일하는 도중에 전화를 받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배가 아파서 조퇴를 해야겠다는 정도의 사정으로 전화를 해서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는 엄마의 일자리를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얘기 끝에 아이는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참 좋겠어요.” “왜?” “편한 일에,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걱정거리가 없을 것 같아요.” “내가 편해 보이니?” “놀고먹는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고요. 우리 엄마는 정말 힘들게 일하거든요. 모르긴 몰라도 월급도 선생님보다 훨씬 적을 거예요.”
학교는 학생들에게 질서에 순응하고, 권위에 복종하도록 가르친다. 교과서의 내용을 의심 없이 밑줄 긋고 외우도록 가르치며, 선생님 말씀에 따르도록 가르친다. 복장은 단정해야 하며 언행은 학생다워야 한다고 가르친다.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이 학생의 도리라는 규칙을 세우면,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학생들은 이에 따라야 한다. 이것은 학교를 지탱해나가는 방법인 동시에 우리 사회가 부당한 채로 유지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순응을 잘할수록 칭찬받는 학교생활을 하고, 사회에 진출할 때도 유리한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구조 속에서 긴 시간 훈련받으면 누구나 권위에 복종하고 규칙에 따르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이것은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노동에 대해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는 기업들에게 매우 행복한 환경을 만들어준다. 부당함을 지적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꼴사나운 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들 웬만하면 참고 사니까.
학교는 학생들이 행복한 시민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대다수 노동자가 될 아이들에게 미래의 노동자들을 위해 합당한 준비를 해주는 것은 학교가 가진 당연한 책무이다. 그중에 하나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배울 기회를 주는 것이다. 너무 위험한 생각이라고?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존 듀이이다. 존 듀이라면? 그렇다. 교육에 한쪽발이라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교육학 시간에 밑줄 그으면서 공부했던 교육학자, 존 듀이.
■노동에 대한 오해 1.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우리는 노동이라고 하면 보통 육체노동을 많이 생각합니다. 건설 현장에서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일이라든지,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일과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도 노동이고, 설계 도면을 그리는 것도 노동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구분하면서 정신노동은 좀 더 중요하고 고상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하는 일은 육체노동일까요, 아니면 정신노동일까요? 가르치는 일은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이니까 정신노동일까요? 그러나 몇 시간 동안 서서 큰 소리로 말하고 학생들과 함께 움직이고, 책상을 옮기고, 교무실과 교실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고, 점심시간에는 밥을 퍼주는 일도 하는 것을 보면 육체노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 하나로 모아져 존재합니다. 인간의 노동 또한 육체와 정신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분리시켜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이와 같은 오해가 생겨났을까요?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직업이 다양하게 분화됩니다. 그 이전의 농업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민이고 약간의 상인과 약간의 관료들이 있을 뿐이었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공장이나 광산에서 몸을 움직이며 일하는 직종과 함께 사무실에서 경리나 회계를 담당하는 직종이 생겨났습니다. 몸을 움직여 일하는 직종은 주로 청색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에 ‘블루칼라’라고 불렀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흰색 셔츠를 입었기 때문에 ‘화이트칼라’라고 불렀습니다. 화이트칼라는 블루칼라에 비해 교육을 많이 받았고, 보수도 더 많이 받았습니다. 그 수도 적었습니다. 화이트칼라는 블루칼라에 비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생각이 오랜 세월 동안 굳으면서 ‘노동’이라고 하면 몸을 움직여 일하는 직종의 일로 오해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류는 참으로 무의미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육체만 움직이는 일도, 정신만 움직이는 일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사이에 차이를 만들어 두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화이트칼라에게는 만족감을 주고 블루칼라에게는 내가 공부를 적게 했으니 할 수 없지, 하는 생각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요?
또 생각해보세요.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무언가를 입력하거나, 쉴 새 없이 고객들의 전화에 응대하는 일을 생산직 노동에 비해 더 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더 많은 임금을 받는 일일까요? 더 많은 교육이 필요한 일일까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이렇게 경계가 모호해지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노동에 대한 오해 2. 노동자와 근로자
한때 노동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신 근로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근로자는 한자로 勤勞者라고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노동자라고 할 때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는 느낌이 담겨져 있지요. 교과서에도 신문에도 공식 문서에도 모두 근로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이 ‘로동당’ ‘로동신문’ 등 ‘로동(노동)’이라는 말을 아주 즐겨 썼거든요.
그게 뭔 상관이냐고요? 크게 상관이 있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분단과 전쟁, 휴전과 냉전으로 이어지던 한반도에는 남한과 북한이 매우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남한에서는 북한에서 즐겨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예를 들어 원래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운동회 때에 청군과 홍군으로 나뉘는 게 맞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청실홍실, 녹의홍상과 같이 청홍의 대조를 매우 즐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빨간색을 좋아하고, 그들을 빨갱이라고 하다 보니, 남한에서는 공식 행사에 빨간색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홍군의 자리에 백군이 들어갔지요.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의 운동회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런 시절이니 노동이라는 말은 불온한 말로 취급되었습니다. 노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사상이 수상한 사람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근로자라는 말을 쓰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말은 노동, 노동자입니다. 노동문제를 담당하는 정부 부서를 ‘노동부’라고 하고, 노동과 관련된 법을 ‘노동법’이라고 하지요.
■노동에 대한 오해 3. 노동과 경영
노동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업으로 치자면 경영은 매우 중요하고, 큰 가치를 가진 일이고, 그 일을 담당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로 생각합니다. 노동은 그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반영되어, 노동을 하는 사람에 비해 경영을 하는 사람들은 높은 소득을 얻습니다. 2006년 미국 경제지인 <포춘>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대 기업 CEO 연봉의 중앙값이 1200만 달러(약 110억 원)였다니 수백억 원대 연봉을 챙기는 경영자가 수두룩한 셈입니다. 일반 노동자의 수백 배를 가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더 어렵고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는 우리 사회의 상식에서 출발하더라도 이 차이는 너무도 심합니다.
듀이는 일찍이 학교가 실용적인 기술만을 가르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대신에 젊은 학생들에게 정치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 깨어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습득한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 등을 조목조목 설명해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 토머스 게이건,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p.368
나는 여성민우회 생협에서 장을 본다. 장을 보고 나오는 길에 소식지도 꼭 챙긴다. 그날도 소식지를 보면서 ‘나도 출근 안 하고 집에 있으면 이런 프로그램에도 참가할 수 있을 텐데…’와 같은 맥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식당 노동자들을 위한 소책자를 발간했다는 기사를 본 것이다. 즉시 민우회에 전화를 했다. 내게 소책자를 50부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민우회에서는 물량이 달려서 한 사람에게 50부씩 보내줄 수 없다고 했지만, 내게 보내는 50부는 500명도 넘는 학생들이 보게 될 것이라며 사정했다. 결국 이 소책자로 수업한 내용을 글로 써서 보내주기로 하고 소책자를 받았다.
이 소책자를 학생들과 함께 보고 우리도 이와 같은 소책자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학생들에게 -식당 노동자의 인권 -청소 노동자의 인권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권 -배달 노동자의 인권 -청소년 노동자(청소년 알바)의 인권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인권 -경비 노동자의 인권 -장애인 노동자의 인권 같은 주제를 제시했다. 학생들은 스스로 소책자를 제작했다. 권리에 대해 배우지 못했는데,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어떤 일을 할 것인가? - 학교에서 노동 교육을 하자, 아이들이 진실로 ‘나를 위한 선택’을 하도록 일 깨우자
수능이 끝났다. 수시모집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해도 그건 먼 나라 이야기일 뿐, 우리 학교 아이들은 아직도 이렇다 하게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결국 아이들은 대부분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 진학률 70%라는 통계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대학, 낯선 이름의 학과에 진학한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가는 것은 예사이고, 통학이 불가능해 보이는 지역까지도 간다. 기꺼이. 별 볼일 없는 대학이라고 해서 등록금이 싼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도 간다. 왜 대학에 가나? 아이들은 대답한다. 그래도 안 가는 것보다 나으니까. 조건도 더 괜찮고, 덜 고된 일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중 많은 아이들은 대학을 중도 포기한다. 다행히 졸업하는 아이들은 매우 긴 시간이 걸린다. 한학기 다니고, 등록금 마련하려고 휴학해서 알바 하며 1년 보내고, 이런 시간들을 반복하며 오래오래 걸려 대학을 졸업한다. 졸업하면? 괜찮은 일자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 못 하겠다.
졸업과 동시에 대체로 실업자나 저임금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현실 속에서, 학생들에게 꿈을 좇으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배부른 발상인지는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학생들에게 꿈을 좇으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학생들은 반발한다. 좋아하는 일을 해서 먹고살 수 있냐고. 나는 답한다. 어차피 남들 다 가는 길을 가도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말이다. 이래도 어렵고, 저래도 어렵다면, 이왕이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좋지않겠는가.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나는 꼼수다>는 그런 의미에서 좋은 텍스트이다. <나는 꼼수다>의 네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루저이다. 그들은 모두 꿈을 좇다가 좌절당한 경력이 있다. 그래도 꿈을 좇는다. 꼴리는 대로 산다. 이렇게 꼴리는 대로 사는 네 명이 골방 같은 녹음실에서 떠들어대는 얘기를 방송으로 만들어낸 것이 <나는 꼼수다>이다. <나는 꼼수다>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얻고 있다.
그래도 대학 가야 먹고살 수 있고, 남들이 선망하는 길을 가야 행복이 보장된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퍼트린 신화일 뿐이다. 그 신화 덕분에 사립대학이 먹고산다. 그들을 위한 신화에 현혹되지 말고, 진실로 나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4만원짜리 청바지를 사면서도 이것저것 따져보는데, 무려 4천만원(기회비용이나 부대비용 빼고 그냥 순수 등록금과 책값만)짜리 상품을 구매하면서 그 상품의 효용을 따져보지 않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 아닌가.
더 절망적인 항변이 들려온다. 좋아하는 일이 없는데요.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없도록, 한 가지 길로만 아이들을 다그쳐서 여기까지 몰고 온 우리들은 그 절망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너무나 지치고, 너무 많이 좌절하며 고등학생이 되었다. 꿈을 꿀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학습된 무력감’이라는 감옥에서 아이들을 풀어줄 수 있도록.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일들을 제대로 못하고 있지? 오랜 시간 대안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해 온 김종휘의 말이 이 의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뜨끔하다.
십대는 이미 학생과 소비자일 뿐 아니라 저임금 파트타임 노동자로, 여러 분야에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생산자로 이 나라 경제에 깊게 참여하고 있다. 나아가 각종 이슈에 대해 여론을 형성하고 행동하는 시민사회의 한 세력이기도 하다. 창업을 해서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세금을 내는 십대도 있다. 이런 십대들에게 시민의 자리를 내어주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 마주하는 것이 어른들에게는 왜 그렇게 어렵고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인식되는 것일까? 변명을 빼면 다른 이유가 없다. 이유란 오직 하나, 그렇게 안 해 버릇했다는 점 말고는 없다.
- 김종휘, 『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 pp.79~80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노동교육이 안 될 이유는 없다. 그냥 우리가 하면 된다. 이를 위한 첫걸음은 교사가 스스로 노동자임을 커밍아웃 하는 일일 것이다. 언제까지 노동자인 자신의 실체를 외면하고 부인할 것인가. 언제까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현실에 눈감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