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시교육, 가르치려들면 망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3 15:00 조회 7,528회 댓글 0건본문
시와 교육, 잘못된 만남
시가 교육과 결합하는 순간 하나의 교육과정이 된다. 바로 ‘시 교육’이다. ‘시’와 ‘교
육’의 불안한 동거가 시작될 때부터 ‘시 교육’의 파탄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시는
본디 ‘자유’와 ‘일탈’을, 교육은 ‘구속’과 ‘규범’을 생명으로 삼는 존재인 탓이다. 어쩌
면 물과 불과 같은 상극이 만난 셈이다.
결코 공존하거나 상생할 수 없는 존재끼리의 ‘잘못된 만남’으로 해서 시는 시쳇말
로 인생 조져버렸고, 교육은 교육대로 체면 구긴 채, 이젠 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딱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덜컥 낳아버린 ‘시 교육’이란 자식은 아직도 제 꼴을 갖
추지 못한 불구의 몸으로 엉거주춤, 갈팡질팡, 우왕좌왕, 좌충우돌하고 있으니. 쯧쯧
쯧……, 그러게 시와 교육은 애초에 만나서는 안 될 상대라는 것이다.
미리부터 이 정도 악담과 핀잔에 언짢아할 거 없다. 나도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
가지다. 명색이 문학교육 전공자인 데다, 시인의 이름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이라 이
쪽저쪽으로부터 내부 밀고자의 혐의를 사고도 남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뭔가 작정한 듯한 「학교도서관저널」이 하필 내게 한 부탁이 우
리 ‘시 교육 현실을 삐딱하게’ 짚어달라는 것이고, 그렇잖아도 ‘삐딱함’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나로서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이미 흔쾌히 수락해버린 일이
다. 아직 내게 주어진 지면이 200자 원고지 42매 분량은 족히 남았다.
‘창작’ 없는 문학교육애초에 구애를 먼저 한 쪽은 교육 집안이었다. 이놈의 집구석은 돈이 되겠다 싶으면
아무 데나 추파를 던지고 청혼을 해댄다. 이 집안 저 집안 가리지 않고 정략결혼을 일
삼더니 급기야 골프, 제빵, 미용 따위, 사설전문학원가에 맡겨도 좋을 것들까지 집안
으로 끌어들였다. 그 게걸스런 먹성이라니.
본디 문학도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문학은 타고난 사
람만이 하는 것이라 여겼고, 문학연구자들이 하는 일이란 게 고작 ‘저 높은 곳’에 자리
한 작가나 시인, 그리고 그들이 남긴 ‘불후의 명작’들을 읽고, 이리저리 따지고, 견주
고, 매겨서 갈무리하는 일이었다. 이른바 ‘작가론’이고 ‘작품론’이다. 개중에는 작가
들과 그들의 작품을 역사와 연관하여 공시적, 또는 통시적으로 살핀 이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문학사’다. ‘작가론’과 ‘작품론’, ‘문학사’ 이 정도가 그들이 문학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그들은 이것을 용케 ‘문학지식’으로 만들어 ‘일용할 양식’으로 삼은
것이다.
이들이 생산한 ‘문학’ 아닌, 단지 문학지식만을 문학교사들은 버젓이 문학의 이름
으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학생들은 붉은 펜으로 밑줄 긋고,
그 밑에다 교사들이 앵무새처럼 전하는 해석을 깨알같이 적어가며 머리를 싸매고 외
워댔다. 시나 이야기, 수필 따위, 문예작품 쓰기는 과외활동인 문예부 시간에 하거나
집에서 과제로 해오는 게 고작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 ‘문학교실’의 현실이다. ‘교실
안 문학교육’이 보여주는 서글프고 우울한 풍경이다.
기가 찰 노릇, 진일보했으나…
문학이 무엇인가. 문학은 중의성, 즉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에
따라 비문학과 구분된다. 그런데 특정 해석만을 진리로 여겨 정답으로 삼다니. 더구
나 문학 갈래 가운데서도 가장 주관적이고 정의적인 장르인 시에까지 하나의 잣대를
들이대다니, 참 기가 찰 노릇 아닌가. 그러나 문학연구자, 문학교사들의 딜레마와 열
등의식은 정작 딴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행 국어교육과정은 문학교육을 크게 문학작품의 ‘수용’과 ‘창작’으로 나누어
싸잡아 안았다. 사뭇 의미심장하고 그럴싸하게 들리는 ‘수용’과 ‘창작’이란 쉽게 풀
이하면 ‘문학작품 읽기’와 ‘문학작품 쓰기’다. 물론, 문학작품을 주관적으로 읽고, 창
의적으로 쓰라는 의미다. 이렇듯 교육과정만 보면 문학교육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교육과정은 소설, 시, 희곡, 수필 등, 실제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과정을 통해 문학을 이
해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아예 문학작품의 수용과 창작을 문학수업의 원리로 삼았
다. 이것이 현행 7차 국어과교육과정 문학영역 내용체계의 핵심이다(7차 교육과정
시행 후 두 번이나 교육과정이 개정되었지만 내용체계는 거의 그대로이고, 운영체계
만 조금 바꾸었을 따름이다).
어쨌든, 7차 교육과정은 종래의 ‘감상’을 ‘수용’이라는 용어로 대체하고, ‘창작’을
새로이 추가하여 기존의 ‘문학 작품의 이해’와 ‘문학 작품 감상의 실제’ 영역을 ‘문학
의 수용과 창작’과 ‘문학에 대한 태도’ 영역으로 범주화했다. 종래의 텍스트를 중시한
‘형식주의’나 ‘신비평’ 대신, 텍스트보다는 문학 수용자의 입장을 더 크게 고려한 구
성주의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는 ‘수용이론’이나 ‘독자반응이론’ 따위를 반영한 것으
로 보인다. 이는 문학교육에서 문학작품에 대한 객체적인 ‘이해’와 ‘감상’보다는, 수
용자의 더욱 주체적이고도 내면화된 행위인 ‘수용’과 ‘창작’을 강조하며 그 실제적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 이해한다. 분명 진일보했다.
창작이 빠진 문학의 모양새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창작’이다. 문학작품 읽기 지도도 제대로 못
하는 판국에 기어이 창작까지 끌어들였으니 작동은 고사하고, 현장교사들은 아직 제
대로 된 매뉴얼조차 제공받지 못한 채 쩔쩔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창작’은 아예 손
을 놓고 있거나,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고 학생들에게 마냥 퍼 먹이고 있는 실
정이다. 약삭빠른 교육과정 입안자들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인지 미리부터 교육과
정해설서에 ‘창작’을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문학의 수용과 창작’ 범주에서 ‘창작’은 문예창작에 있지 않고 개별 문학작품에 대한 학습자의
문학적 반응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활동에 강조점이 있다. 1)
문학영역에서 ‘창작’이 문예창작에 있지 않다니? 그럼 문학창작이 작곡이나 그림
그리기란 말인가. ‘개별 문학작품에 대한 학습자의 문학적 반응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활동’은 창작활동이 아니라 수용활동에 해당한다. 문학창작이란 오롯이 새
로운 문학작품을 생산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렇듯 말을 비틀고 뒤집어가면서까지
굳이 ‘창작’을 내세워야 하는, 말 못할 저간의 사정이 도대체 뭘까.
사실 문학을, 그것도 창작을 교육 안으로 끌어온 것은 국어교과의 정체성과 관련 있
다. 국어과 영역 중에서 문학과 국어지식(문법)을 빼버리면 국어과는 독립된 교과로 존
재할 근거와 명분이 약해진다.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따위 도구적 기능밖에 남지 않는
탓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을 듣고, 우리말로 말하고, 우리말을 읽고, 우리
말로 쓰지 않는 교과가 어디 있는가. 만약에 국어과가 이런 언어기능만 길러주는 교과
라면 범교과적으로 가르치면 될 일이지, 굳이 독립교과로 둘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희한하게 우리 초등국어 교과서는 ‘국어’가 아니라 ‘말하기·듣기·읽
기·쓰기’ 따위, 언어 기능별로 책이 나눠져 묶여 있다. 문학과 국어지식은 각 영역별
교과서에 흩어져 있을 뿐, 그 흔한 교과서도 따로 없다. 그러면서도 모든 영역이 문학
작품을 요긴하게 바탕글로 삼고 있다. 문학이 오히려 다른 영역의 도구, 또는 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문학을 국어과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다른 영역의 수단으로 삼거나, 기껏
해야 문학작품을 읽고, 밑줄 긋고, 토를 달아 달달 외우고는 있지만, 영 켕기기는 켕겼
던 모양이다. 창작이 빠진 문학은 명분이 서지 않는 데다 온전한 모양새가 아닌 탓이
다. 말마따나 ‘앙꼬 없는 찐빵’ 격이니 말이다. 그래서 보란 듯이 ‘창작’을 문학 안으로
끌어오긴 했는데, 전문창작자나 대학의 문예창작과에서도 하기 힘든 문예창작 지도
를 무슨 수로 한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미리 말한 ‘문학연구자, 문학교사들의 딜레마
와 열등의식’의 실체일 테다.
기왕 시작한 거, 제대로 해 보자
내가 알기론 대부분 전문창작자가 교수로 있는 소위 ‘문창과’에서도 특별한 창작지
도 프로그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작품 합평이나 첨삭 위주의 도제교육을
할 뿐이다.
이마저 일부 시간에 하는 일이고, 대부분의 시간은 문학이론 강의로 채우
고 있을 게 빤하다. 학계에서도 창작방법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은 걸 본적이 없다. 하도 답답하니까 시가 도대체 시인의 어떤 의식 과정
을 거쳐 탄생하는가를 살펴 창작방법론의 실마리라도 찾아보고자 시에 대한 시, 즉
메타시를 붙잡고 씨름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단언컨대, 그래봤자 뾰족한 수가 나
올 리 없다. 시는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감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시가 만약 해박한
이론과 정교한 이성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면, 시론을 전공한 학자가 시인보다 시를
더 잘 쓸 게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이런 형편이니 문학교육이 이루어지는 문학교실의 풍경은 ‘안 봐도 비디오’다. 수용
은 교사용 지도서나 참고서의 해석을 전달하는 데 그치고, 창작은 구체적인 프로그램
을 가지지 못한 채 ‘한번 써봐라’는 식이거나 ‘빈 칸 메우기’가 고작일 것이라는 얘기다.
긴 말 할 것 없이 국어교과서를 보면 이런 사정은 확연히 드러난다. 분명히 ‘창작’
수업을 염두에 두고 설정한 차시인 듯싶은데, 그 내용을 보자면 ‘제시한 시 읽고 느낀
점 쓰기’, ‘보기 글 참고하여 빈 칸 써넣기’, ‘쓴 글을 친구들과 돌려 읽고 좋은 점이나
고칠 점 얘기하기’, ‘고쳐서 다시 쓰기’, 이것이 바로 야심만만하게 내놓은 ‘창작’ 프
로그램의 전부다. 이 정도는 수용이니 창작이니 거창하게 떠벌리기도 전인 구조주의
교육과정에서도 이미 하던 방식이다.
이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소설을 쓰고, 시를 쓰고, 희곡을 쓰고, 수필을 쓴다? 턱
도 없다. 창작, 심지어 논술문 따위 실용문 쓰기까지도 학교 울타리를 넘어간 지 이미
오래다. 하긴 요즘은 ‘방과 후 교실’인가 뭔가 해서 오히려 외부강사를 학교로 모셔와
‘교실 안 글쓰기’를 하긴 하더라만.
물론, 어떤 글이든지 학생들에게 글쓰기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
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일은 모두 학교교육의 몫이 되어야 마땅하다. 문학교육도, ‘시
교육’도, 창작 교육도 아마 그래서 스스로 짊어진 십자가일 것이다. 문제는 기왕에 시
작한 일을 좀 제대로 알고, 제대로 하자는 거다.
‘시 교육’이 아니라 ‘시교육’을 해야 한다
교실에서 여러 교과를 가르치는 초등 교사들은 국어과를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교과로
인식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국어과의 여러 영역 가운데 문학 영역 때문일 것으로 짐작
한다.
특히 문학 가운데서도 ‘시’를 가르치는 일, 곧 ‘시 교육’에 대한 부담 탓일 테다. 이
는 중등 국어교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행 교육과정상 ‘시 교육’은 반드
시 하도록 되어 있다. 부담스럽더라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러니 차근차근 실마리라도
한번 찾아봐야하지 않겠는가. 물론 공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은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간에 교육과정을 모든 교육활동의 기준이나 지침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되새기
건대, 교육과정상 문학교육의 범주에는 문학작품의 ‘수용’과 ‘창작’이 있다. 수용은 주
로 읽기에, 창작은 쓰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문학교육은 학생들이 문학작품을 읽고, 나
름대로 수용하고 실제 문학작품을 창의적으로 생산하는 일이 주된 내용이 된다. 교사
는 학생들의 수용·창작 활동을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역할을 맡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 시를 대입하면 ‘시 교육’의 내용과 방향은 이미 다 드러나 있다. ‘시 교육’이
란 학생들은 시를 읽고, 직접 써보고, 교사들은 이를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일련의 교
육활동이다. 교사의 역할도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
다. 물론 못한 것이겠지만. 그걸 찾아가는 일은 오로지 문학교사의 몫이다. 그러나 지
금까지의 문학과 시에 대한 얄팍한 지식이나 고정관념에 매여 스스로 만든 길을 고수
하는 한, 결코 새 길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길을 하얗게 지운 자에게만 길이 환하게 보
이리라는 얘기다.
시를 가르치려 들기에…
무엇보다 시를 가르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시는 가르치는 게 아니다. ‘시 교육’을
‘시를 가르치는 일’로 여긴 데서부터 ‘시 교육’의 파행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국
어교육, 문학교육, 음악교육……, 심지어 문화교육, 창의성교육……, 이런 것들까지
모두 결합되기 전의 두 낱말을 붙여 쓰는데, 왜 유독 ‘시 교육’만 띄어 써야 하는가 (컴
퓨터를 켜 놓고 있다면, 지금 당장 한글에서 ‘시교육’이라고 쳐봐라. 맞춤법이 틀렸다
고 빨간 줄이 쫙 그어진다. ‘시교육’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거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시를 단지 대상으로 삼아서 ‘시 교육’을 ‘시를 가르치는
일’쯤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탓이다. 더 큰 이유는, 아직도 ‘시 교육’
은 불행하게도 독립된 하나의 교육영역으로서 인정할 만한 나름의 목적과 내용과 프
로그램을 갖추지 못해서이다. 시를 교육으로 끌어들이긴 했지만, 화학적 결합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기계적 결합에 머물러 있는 까닭이라는 말이다(이쯤에서 내가 왜 지
금까지 굳이 시교육을 ‘시 교육’이라고 썼는지 눈치 챘을 테다. 지금부터는 내 식대로
‘시교육’으로 쓰겠다. 빨간 줄이 쳐져도 할 수 없다).
시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시는 세계를 대상화하는 장르가 아니라 주체
화, 또는 자아화하는 문학 갈래다. 그리하여 시는 동화나 투사의 방법으로 끊임없이
세계와 자아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장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시란 ‘세계의 문제를 곧
바로 자아의 문제로 끌어안아 공감하고 공유하는 정서적 반응’쯤으로 이해하시라. 그
래서 시를 서정장르라고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서정성’이란 자아와 세계 사이의
심리적, 또는 정서적 거리가 가까운 정도를 뜻하는 것인데, 그 거리가 가까울수록 서
정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산문은? 산문은 시와 반대로 세계를 대상화하는 문학 갈래다. 세계를 한사코 대상
화하여 이리저리 따지고, 견주고, 값을 매긴다. 이러는 사이, 시간의 경과가 일어나고
사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산문을 서사장르라 일컫는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을 뒷받침하는 정신체계가 바로 우리가 그토록 맹신해 마지않는 ‘이성’이다.
문학교사가 할 일
시가 이처럼 ‘세계의 문제를 곧바로 자아의 문제로 받아들여 공감하고 공유하는 정
서적 반응’으로 이해하면 이제 시교육의 방향이 어렴풋이나마 눈에 보이지 않는가.
시교육에는 ‘시 읽기’와 ‘시 쓰기’가 있을 테다. 이른바 ‘수용’과 ‘창작’이다.
먼저, 시 읽기는 시를 대상화하지 말고 학생들로 하여금 시에 정서적으로 반응하
게 하는 게 옳다. 스스로 느끼고, 깨닫고, 즐기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제대로 된
시여야 이런 정서적 반응이 일어난다. 그런 시를 쓰는 건 시인의 몫이다. 문학교사는
시를 읽는 눈을 틔워서 좋은 시를 골라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선
시(選詩) 능력이야말로 문학교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질이다. 문학교사는 직접
시를 쓸 수는 없어도 좋은 시를 보는 안목은 가져야 한다(문학교사들이여, 제발 시집
좀 사봐라!). 아무튼, 시와 시 읽기의 주체인 학생들을 한 몸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시
읽기의 요체다. 시 읽기에서는 시가 바로 세계가 된다. 시를 이리저리 따지거나 재지
말고 와락 껴안아야 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 쓰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 특히 어린이일수록 시적 사고를 하는 존
재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모두가 시인이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아동성(兒童性)과 시성(詩性)의 연관성을 탐색한 내 연구에 따르면 아동의 고유한
사고 특징, 곧 ‘아동성’은 시의 속성, 즉 ‘시성’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이른바 ‘동일
성’, ‘현재성’, ‘집중성’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2) 이처럼 본디 시적 사고를 하는 아이들
을 대상으로 이미 산문적 사고로 굳어진 어른들이 시를 가르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다. 그러니 그냥 그대로 놔두라. 그러면 된다. 교사가 오직 해야 할 일은 어린이의 사고
와 정서에 깃들어 있는 시성을 일깨우고, 찰랑대는 시심을 퍼 올려주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억지로 퍼 올릴 것이 아니라 마중물 한 바가지쯤 부어주면 되는 일이다.
요컨대, 시교육, 곧 시 읽기든 시 쓰기든, 아동들을 가르칠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당당한 주체로 세우라는 거다. 그들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아동들의 능력을 믿
고 북돋워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문학교사, 아니 모든 교사의 가장 소중하고 빛나
는 권능이다.
시보다 시정신이 중요하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시교육을 하는 것은 학생들을 모두 시인으로 만들고자함이 아닐
테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그건 가능한 일도,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 굳이 자처한 시교육이 보편타당한 명분과 교육적 의의를 가지려면, 시를 쓰는 기
술이 아니라 시정신을 길러주어야 한다. 시정신이란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고 일
체화, 또는 동일화하는 마음이자 의식이다.
오늘날 모든 생명체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거칠어지는 생태위기는 오로지 인간
을 세계의 중심에 놓은 채 인간 아닌 모든 존재를 대상화하고 수단화한 데서 비롯되
었다. 그리하여 오직 인간만의 이익을 좇으며 생명공동체의 파괴를 서슴지 않은 데서
끝내 지구 전체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이 심상찮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자아와 세계를 동일화하는 시
정신의 회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따라서 시정신의 회복이야말로 우리 시교육에 부
과한 막중한 임무이며, 또한 교육적 가능성이다. 이미 이성을 바탕으로 한 산문정신
은 한계에 다다랐다. 그리하여 여기서부터, 시와 교육의 결합은 결코 잘못된 만남의
연장이 아니라 필연적인 만남의 시작이어야 한다. ‘시 교육’이 아니라 ‘시교육’이어
야 한다.
문학교사들이여 힘내자. ‘교실 안 시 쓰기’를 두려워 말자.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
이지 시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시교육을 할 수 있는 이는 우리 문학교사들
밖에 없다. 결국 저 까만 눈동자 가득 시심을 담고 있는 ‘교실 안 아이’들이 우리를 구
원해 주리라.
시가 교육과 결합하는 순간 하나의 교육과정이 된다. 바로 ‘시 교육’이다. ‘시’와 ‘교
육’의 불안한 동거가 시작될 때부터 ‘시 교육’의 파탄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시는
본디 ‘자유’와 ‘일탈’을, 교육은 ‘구속’과 ‘규범’을 생명으로 삼는 존재인 탓이다. 어쩌
면 물과 불과 같은 상극이 만난 셈이다.
결코 공존하거나 상생할 수 없는 존재끼리의 ‘잘못된 만남’으로 해서 시는 시쳇말
로 인생 조져버렸고, 교육은 교육대로 체면 구긴 채, 이젠 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딱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덜컥 낳아버린 ‘시 교육’이란 자식은 아직도 제 꼴을 갖
추지 못한 불구의 몸으로 엉거주춤, 갈팡질팡, 우왕좌왕, 좌충우돌하고 있으니. 쯧쯧
쯧……, 그러게 시와 교육은 애초에 만나서는 안 될 상대라는 것이다.
미리부터 이 정도 악담과 핀잔에 언짢아할 거 없다. 나도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
가지다. 명색이 문학교육 전공자인 데다, 시인의 이름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이라 이
쪽저쪽으로부터 내부 밀고자의 혐의를 사고도 남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뭔가 작정한 듯한 「학교도서관저널」이 하필 내게 한 부탁이 우
리 ‘시 교육 현실을 삐딱하게’ 짚어달라는 것이고, 그렇잖아도 ‘삐딱함’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나로서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이미 흔쾌히 수락해버린 일이
다. 아직 내게 주어진 지면이 200자 원고지 42매 분량은 족히 남았다.
‘창작’ 없는 문학교육애초에 구애를 먼저 한 쪽은 교육 집안이었다. 이놈의 집구석은 돈이 되겠다 싶으면
아무 데나 추파를 던지고 청혼을 해댄다. 이 집안 저 집안 가리지 않고 정략결혼을 일
삼더니 급기야 골프, 제빵, 미용 따위, 사설전문학원가에 맡겨도 좋을 것들까지 집안
으로 끌어들였다. 그 게걸스런 먹성이라니.
본디 문학도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문학은 타고난 사
람만이 하는 것이라 여겼고, 문학연구자들이 하는 일이란 게 고작 ‘저 높은 곳’에 자리
한 작가나 시인, 그리고 그들이 남긴 ‘불후의 명작’들을 읽고, 이리저리 따지고, 견주
고, 매겨서 갈무리하는 일이었다. 이른바 ‘작가론’이고 ‘작품론’이다. 개중에는 작가
들과 그들의 작품을 역사와 연관하여 공시적, 또는 통시적으로 살핀 이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문학사’다. ‘작가론’과 ‘작품론’, ‘문학사’ 이 정도가 그들이 문학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그들은 이것을 용케 ‘문학지식’으로 만들어 ‘일용할 양식’으로 삼은
것이다.
이들이 생산한 ‘문학’ 아닌, 단지 문학지식만을 문학교사들은 버젓이 문학의 이름
으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학생들은 붉은 펜으로 밑줄 긋고,
그 밑에다 교사들이 앵무새처럼 전하는 해석을 깨알같이 적어가며 머리를 싸매고 외
워댔다. 시나 이야기, 수필 따위, 문예작품 쓰기는 과외활동인 문예부 시간에 하거나
집에서 과제로 해오는 게 고작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 ‘문학교실’의 현실이다. ‘교실
안 문학교육’이 보여주는 서글프고 우울한 풍경이다.
기가 찰 노릇, 진일보했으나…
문학이 무엇인가. 문학은 중의성, 즉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에
따라 비문학과 구분된다. 그런데 특정 해석만을 진리로 여겨 정답으로 삼다니. 더구
나 문학 갈래 가운데서도 가장 주관적이고 정의적인 장르인 시에까지 하나의 잣대를
들이대다니, 참 기가 찰 노릇 아닌가. 그러나 문학연구자, 문학교사들의 딜레마와 열
등의식은 정작 딴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행 국어교육과정은 문학교육을 크게 문학작품의 ‘수용’과 ‘창작’으로 나누어
싸잡아 안았다. 사뭇 의미심장하고 그럴싸하게 들리는 ‘수용’과 ‘창작’이란 쉽게 풀
이하면 ‘문학작품 읽기’와 ‘문학작품 쓰기’다. 물론, 문학작품을 주관적으로 읽고, 창
의적으로 쓰라는 의미다. 이렇듯 교육과정만 보면 문학교육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교육과정은 소설, 시, 희곡, 수필 등, 실제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과정을 통해 문학을 이
해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아예 문학작품의 수용과 창작을 문학수업의 원리로 삼았
다. 이것이 현행 7차 국어과교육과정 문학영역 내용체계의 핵심이다(7차 교육과정
시행 후 두 번이나 교육과정이 개정되었지만 내용체계는 거의 그대로이고, 운영체계
만 조금 바꾸었을 따름이다).
어쨌든, 7차 교육과정은 종래의 ‘감상’을 ‘수용’이라는 용어로 대체하고, ‘창작’을
새로이 추가하여 기존의 ‘문학 작품의 이해’와 ‘문학 작품 감상의 실제’ 영역을 ‘문학
의 수용과 창작’과 ‘문학에 대한 태도’ 영역으로 범주화했다. 종래의 텍스트를 중시한
‘형식주의’나 ‘신비평’ 대신, 텍스트보다는 문학 수용자의 입장을 더 크게 고려한 구
성주의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는 ‘수용이론’이나 ‘독자반응이론’ 따위를 반영한 것으
로 보인다. 이는 문학교육에서 문학작품에 대한 객체적인 ‘이해’와 ‘감상’보다는, 수
용자의 더욱 주체적이고도 내면화된 행위인 ‘수용’과 ‘창작’을 강조하며 그 실제적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 이해한다. 분명 진일보했다.
창작이 빠진 문학의 모양새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창작’이다. 문학작품 읽기 지도도 제대로 못
하는 판국에 기어이 창작까지 끌어들였으니 작동은 고사하고, 현장교사들은 아직 제
대로 된 매뉴얼조차 제공받지 못한 채 쩔쩔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창작’은 아예 손
을 놓고 있거나,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고 학생들에게 마냥 퍼 먹이고 있는 실
정이다. 약삭빠른 교육과정 입안자들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인지 미리부터 교육과
정해설서에 ‘창작’을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문학의 수용과 창작’ 범주에서 ‘창작’은 문예창작에 있지 않고 개별 문학작품에 대한 학습자의
문학적 반응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활동에 강조점이 있다. 1)
문학영역에서 ‘창작’이 문예창작에 있지 않다니? 그럼 문학창작이 작곡이나 그림
그리기란 말인가. ‘개별 문학작품에 대한 학습자의 문학적 반응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활동’은 창작활동이 아니라 수용활동에 해당한다. 문학창작이란 오롯이 새
로운 문학작품을 생산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렇듯 말을 비틀고 뒤집어가면서까지
굳이 ‘창작’을 내세워야 하는, 말 못할 저간의 사정이 도대체 뭘까.
사실 문학을, 그것도 창작을 교육 안으로 끌어온 것은 국어교과의 정체성과 관련 있
다. 국어과 영역 중에서 문학과 국어지식(문법)을 빼버리면 국어과는 독립된 교과로 존
재할 근거와 명분이 약해진다.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따위 도구적 기능밖에 남지 않는
탓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을 듣고, 우리말로 말하고, 우리말을 읽고, 우리
말로 쓰지 않는 교과가 어디 있는가. 만약에 국어과가 이런 언어기능만 길러주는 교과
라면 범교과적으로 가르치면 될 일이지, 굳이 독립교과로 둘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희한하게 우리 초등국어 교과서는 ‘국어’가 아니라 ‘말하기·듣기·읽
기·쓰기’ 따위, 언어 기능별로 책이 나눠져 묶여 있다. 문학과 국어지식은 각 영역별
교과서에 흩어져 있을 뿐, 그 흔한 교과서도 따로 없다. 그러면서도 모든 영역이 문학
작품을 요긴하게 바탕글로 삼고 있다. 문학이 오히려 다른 영역의 도구, 또는 수단이
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문학을 국어과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다른 영역의 수단으로 삼거나, 기껏
해야 문학작품을 읽고, 밑줄 긋고, 토를 달아 달달 외우고는 있지만, 영 켕기기는 켕겼
던 모양이다. 창작이 빠진 문학은 명분이 서지 않는 데다 온전한 모양새가 아닌 탓이
다. 말마따나 ‘앙꼬 없는 찐빵’ 격이니 말이다. 그래서 보란 듯이 ‘창작’을 문학 안으로
끌어오긴 했는데, 전문창작자나 대학의 문예창작과에서도 하기 힘든 문예창작 지도
를 무슨 수로 한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미리 말한 ‘문학연구자, 문학교사들의 딜레마
와 열등의식’의 실체일 테다.
기왕 시작한 거, 제대로 해 보자
내가 알기론 대부분 전문창작자가 교수로 있는 소위 ‘문창과’에서도 특별한 창작지
도 프로그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작품 합평이나 첨삭 위주의 도제교육을
할 뿐이다.
이마저 일부 시간에 하는 일이고, 대부분의 시간은 문학이론 강의로 채우
고 있을 게 빤하다. 학계에서도 창작방법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은 걸 본적이 없다. 하도 답답하니까 시가 도대체 시인의 어떤 의식 과정
을 거쳐 탄생하는가를 살펴 창작방법론의 실마리라도 찾아보고자 시에 대한 시, 즉
메타시를 붙잡고 씨름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단언컨대, 그래봤자 뾰족한 수가 나
올 리 없다. 시는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감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시가 만약 해박한
이론과 정교한 이성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면, 시론을 전공한 학자가 시인보다 시를
더 잘 쓸 게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이런 형편이니 문학교육이 이루어지는 문학교실의 풍경은 ‘안 봐도 비디오’다. 수용
은 교사용 지도서나 참고서의 해석을 전달하는 데 그치고, 창작은 구체적인 프로그램
을 가지지 못한 채 ‘한번 써봐라’는 식이거나 ‘빈 칸 메우기’가 고작일 것이라는 얘기다.
긴 말 할 것 없이 국어교과서를 보면 이런 사정은 확연히 드러난다. 분명히 ‘창작’
수업을 염두에 두고 설정한 차시인 듯싶은데, 그 내용을 보자면 ‘제시한 시 읽고 느낀
점 쓰기’, ‘보기 글 참고하여 빈 칸 써넣기’, ‘쓴 글을 친구들과 돌려 읽고 좋은 점이나
고칠 점 얘기하기’, ‘고쳐서 다시 쓰기’, 이것이 바로 야심만만하게 내놓은 ‘창작’ 프
로그램의 전부다. 이 정도는 수용이니 창작이니 거창하게 떠벌리기도 전인 구조주의
교육과정에서도 이미 하던 방식이다.
이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소설을 쓰고, 시를 쓰고, 희곡을 쓰고, 수필을 쓴다? 턱
도 없다. 창작, 심지어 논술문 따위 실용문 쓰기까지도 학교 울타리를 넘어간 지 이미
오래다. 하긴 요즘은 ‘방과 후 교실’인가 뭔가 해서 오히려 외부강사를 학교로 모셔와
‘교실 안 글쓰기’를 하긴 하더라만.
물론, 어떤 글이든지 학생들에게 글쓰기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
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일은 모두 학교교육의 몫이 되어야 마땅하다. 문학교육도, ‘시
교육’도, 창작 교육도 아마 그래서 스스로 짊어진 십자가일 것이다. 문제는 기왕에 시
작한 일을 좀 제대로 알고, 제대로 하자는 거다.
‘시 교육’이 아니라 ‘시교육’을 해야 한다
교실에서 여러 교과를 가르치는 초등 교사들은 국어과를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교과로
인식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국어과의 여러 영역 가운데 문학 영역 때문일 것으로 짐작
한다.
특히 문학 가운데서도 ‘시’를 가르치는 일, 곧 ‘시 교육’에 대한 부담 탓일 테다. 이
는 중등 국어교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행 교육과정상 ‘시 교육’은 반드
시 하도록 되어 있다. 부담스럽더라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러니 차근차근 실마리라도
한번 찾아봐야하지 않겠는가. 물론 공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은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간에 교육과정을 모든 교육활동의 기준이나 지침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되새기
건대, 교육과정상 문학교육의 범주에는 문학작품의 ‘수용’과 ‘창작’이 있다. 수용은 주
로 읽기에, 창작은 쓰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문학교육은 학생들이 문학작품을 읽고, 나
름대로 수용하고 실제 문학작품을 창의적으로 생산하는 일이 주된 내용이 된다. 교사
는 학생들의 수용·창작 활동을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역할을 맡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 시를 대입하면 ‘시 교육’의 내용과 방향은 이미 다 드러나 있다. ‘시 교육’이
란 학생들은 시를 읽고, 직접 써보고, 교사들은 이를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일련의 교
육활동이다. 교사의 역할도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
다. 물론 못한 것이겠지만. 그걸 찾아가는 일은 오로지 문학교사의 몫이다. 그러나 지
금까지의 문학과 시에 대한 얄팍한 지식이나 고정관념에 매여 스스로 만든 길을 고수
하는 한, 결코 새 길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길을 하얗게 지운 자에게만 길이 환하게 보
이리라는 얘기다.
시를 가르치려 들기에…
무엇보다 시를 가르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시는 가르치는 게 아니다. ‘시 교육’을
‘시를 가르치는 일’로 여긴 데서부터 ‘시 교육’의 파행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국
어교육, 문학교육, 음악교육……, 심지어 문화교육, 창의성교육……, 이런 것들까지
모두 결합되기 전의 두 낱말을 붙여 쓰는데, 왜 유독 ‘시 교육’만 띄어 써야 하는가 (컴
퓨터를 켜 놓고 있다면, 지금 당장 한글에서 ‘시교육’이라고 쳐봐라. 맞춤법이 틀렸다
고 빨간 줄이 쫙 그어진다. ‘시교육’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거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시를 단지 대상으로 삼아서 ‘시 교육’을 ‘시를 가르치는
일’쯤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탓이다. 더 큰 이유는, 아직도 ‘시 교육’
은 불행하게도 독립된 하나의 교육영역으로서 인정할 만한 나름의 목적과 내용과 프
로그램을 갖추지 못해서이다. 시를 교육으로 끌어들이긴 했지만, 화학적 결합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기계적 결합에 머물러 있는 까닭이라는 말이다(이쯤에서 내가 왜 지
금까지 굳이 시교육을 ‘시 교육’이라고 썼는지 눈치 챘을 테다. 지금부터는 내 식대로
‘시교육’으로 쓰겠다. 빨간 줄이 쳐져도 할 수 없다).
시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시는 세계를 대상화하는 장르가 아니라 주체
화, 또는 자아화하는 문학 갈래다. 그리하여 시는 동화나 투사의 방법으로 끊임없이
세계와 자아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장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시란 ‘세계의 문제를 곧
바로 자아의 문제로 끌어안아 공감하고 공유하는 정서적 반응’쯤으로 이해하시라. 그
래서 시를 서정장르라고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서정성’이란 자아와 세계 사이의
심리적, 또는 정서적 거리가 가까운 정도를 뜻하는 것인데, 그 거리가 가까울수록 서
정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산문은? 산문은 시와 반대로 세계를 대상화하는 문학 갈래다. 세계를 한사코 대상
화하여 이리저리 따지고, 견주고, 값을 매긴다. 이러는 사이, 시간의 경과가 일어나고
사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산문을 서사장르라 일컫는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을 뒷받침하는 정신체계가 바로 우리가 그토록 맹신해 마지않는 ‘이성’이다.
문학교사가 할 일
시가 이처럼 ‘세계의 문제를 곧바로 자아의 문제로 받아들여 공감하고 공유하는 정
서적 반응’으로 이해하면 이제 시교육의 방향이 어렴풋이나마 눈에 보이지 않는가.
시교육에는 ‘시 읽기’와 ‘시 쓰기’가 있을 테다. 이른바 ‘수용’과 ‘창작’이다.
먼저, 시 읽기는 시를 대상화하지 말고 학생들로 하여금 시에 정서적으로 반응하
게 하는 게 옳다. 스스로 느끼고, 깨닫고, 즐기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제대로 된
시여야 이런 정서적 반응이 일어난다. 그런 시를 쓰는 건 시인의 몫이다. 문학교사는
시를 읽는 눈을 틔워서 좋은 시를 골라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선
시(選詩) 능력이야말로 문학교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질이다. 문학교사는 직접
시를 쓸 수는 없어도 좋은 시를 보는 안목은 가져야 한다(문학교사들이여, 제발 시집
좀 사봐라!). 아무튼, 시와 시 읽기의 주체인 학생들을 한 몸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시
읽기의 요체다. 시 읽기에서는 시가 바로 세계가 된다. 시를 이리저리 따지거나 재지
말고 와락 껴안아야 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 쓰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 특히 어린이일수록 시적 사고를 하는 존
재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모두가 시인이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아동성(兒童性)과 시성(詩性)의 연관성을 탐색한 내 연구에 따르면 아동의 고유한
사고 특징, 곧 ‘아동성’은 시의 속성, 즉 ‘시성’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이른바 ‘동일
성’, ‘현재성’, ‘집중성’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2) 이처럼 본디 시적 사고를 하는 아이들
을 대상으로 이미 산문적 사고로 굳어진 어른들이 시를 가르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다. 그러니 그냥 그대로 놔두라. 그러면 된다. 교사가 오직 해야 할 일은 어린이의 사고
와 정서에 깃들어 있는 시성을 일깨우고, 찰랑대는 시심을 퍼 올려주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억지로 퍼 올릴 것이 아니라 마중물 한 바가지쯤 부어주면 되는 일이다.
요컨대, 시교육, 곧 시 읽기든 시 쓰기든, 아동들을 가르칠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당당한 주체로 세우라는 거다. 그들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아동들의 능력을 믿
고 북돋워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문학교사, 아니 모든 교사의 가장 소중하고 빛나
는 권능이다.
시보다 시정신이 중요하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시교육을 하는 것은 학생들을 모두 시인으로 만들고자함이 아닐
테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그건 가능한 일도,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가 굳이 자처한 시교육이 보편타당한 명분과 교육적 의의를 가지려면, 시를 쓰는 기
술이 아니라 시정신을 길러주어야 한다. 시정신이란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고 일
체화, 또는 동일화하는 마음이자 의식이다.
오늘날 모든 생명체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거칠어지는 생태위기는 오로지 인간
을 세계의 중심에 놓은 채 인간 아닌 모든 존재를 대상화하고 수단화한 데서 비롯되
었다. 그리하여 오직 인간만의 이익을 좇으며 생명공동체의 파괴를 서슴지 않은 데서
끝내 지구 전체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이 심상찮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자아와 세계를 동일화하는 시
정신의 회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따라서 시정신의 회복이야말로 우리 시교육에 부
과한 막중한 임무이며, 또한 교육적 가능성이다. 이미 이성을 바탕으로 한 산문정신
은 한계에 다다랐다. 그리하여 여기서부터, 시와 교육의 결합은 결코 잘못된 만남의
연장이 아니라 필연적인 만남의 시작이어야 한다. ‘시 교육’이 아니라 ‘시교육’이어
야 한다.
문학교사들이여 힘내자. ‘교실 안 시 쓰기’를 두려워 말자.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
이지 시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시교육을 할 수 있는 이는 우리 문학교사들
밖에 없다. 결국 저 까만 눈동자 가득 시심을 담고 있는 ‘교실 안 아이’들이 우리를 구
원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