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밥상머리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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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3 22:57 조회 7,980회 댓글 0건본문
그때 그 시절의 책읽기
나는 어린 시절 밥 먹으며 책 읽는 것을 버릇 삼아 했는데, 그 버릇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아
내로부터 타박을 받기 일쑤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타박하는 사람이 어머님이나 누나에
서 아내로 바뀐 것 밖에는 없다. 지금도 어머님이, “아, 이눔아! 밥상머리에서 책을 보고 앉
았으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어떻게 아누?” 하시던 말씀이 귓가에 쟁
쟁하다.
사실 밥상머리 독서라고 알려진 나의 이 독서법으로 말하자면 일거양득이요, 양수겸장
이라 밥맛은 밥맛대로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책맛은 책맛대로 그렇게 머리에 쏙쏙 들어
갈 수 없다. 아무리 반찬이 없고, 맛이 없어도 재미있는 책 한 권 들고 밥을 먹어보라. 우리
어머님 말씀대로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어느새 한 그릇 뚝딱 해
치워지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책읽기의 진도도 그냥 책상에 앉아 읽는 것
보다 몇 배나 빨라지고 집중도 잘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 그렇게 밥상머리에서 읽은 책 중에 가장 기억이 남는 책은 펄벅의 『대지』
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 책의 이름을 유감스럽게도 그때는 잘 몰랐는데 왜냐하면 누가
읽다 버려두었는지 시골집에 뒹구는 책의 앞과 뒤표지가 모두 날아가고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을거리가 없어 심심하던 내 손에 우연히 그 책이 잡혔는데 처음엔 좀 어렵다 싶
었지만 계속 읽다보니 ‘무지하게’ 재미있었다. 주인공 왕룽이 부잣집 하녀인 못생긴 오란
을 아내로 맞아 첫날밤을 지내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고추가 섰고, 메뚜기 떼를 물리
치는 장면에서는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떠올리며 나는 모르게 황홀해지곤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책 중에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있었고, 쇼펜하우어의
『인생론』도 있었다. 그 책들 역시 사춘기의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책 중의 하나이다.
그런 책들이 그래도 집안에 뒹굴고 다녔던 것은 아마도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던 둘째형 때
문이었을 것이다. 잰체하길 좋아하는 형은 공대생이었지만 문학에 빠져 방학 때면 그런 책
을 옆에 끼고 내려왔다가 읽는 둥 마는 둥 버려두고 가기 일쑤였는데 그게 내 차지가 된 것
이다. 중학생이 읽기에는 좀 어려운 책이었지만 그래도 힘들여 읽고 나면 무언가 사춘기를
통과해 나온 듯한 뿌듯함과 또래들에 비해 남다른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지곤 했다. 베르
테르와 로테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가슴 졸였고,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세상에 대
한 혐오가 아니라 내게 인생의 달콤한 비밀을 전해주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헤르
만 헤세의 『데미안』을 접한 것도 그때였다.
『좁은 문』과 『데미안』은 내 영혼에 번개를 치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지금껏 이 나이가
들어서도 내가 낭만적 정서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바로 그런 책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 책
들을 바로 그 밥상머리에서 해치웠던 것이다. 어머님이나 누나가 볼 때는 얼마나 보기 싫
었겠는가. 어떤 때는 구박을 하다가 참지 못해 책을 빼앗아 집어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러
나 그럴수록 나는 근질거리는 밥상머리 독서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해 호시탐탐 책을 펴서
곁눈으로 훔쳐보듯 삼매에 빠지고는 했다. 사실 나의 이런 독서 습관은 순전히 나의 잘못
만은 아니다. 빡빡한 학교 교육은 늘 우리의 숨통을 죌 것 같았는데, 그렇게 틈새 독서라도
하지 않으면 무언가에 굶주려있던 우리들이 달리 시간을 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서는 하나의 습관이다. 어떤 친구의 말에 의하자면 일종의 ‘병’이다. 하지만 그게 얼
마나 행복한 병인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이 병을 꽤 일찍이 만났던 것 같다. 아직 글자를 깨우치기 전인 어린 시절 나의 독서는
동네 만홧가게에서 출발했다. 입을 헤 벌리고 읽느라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침을 흘리곤
했는데, 정말 침을 흘리며 보던 『땡이』 시리즈나, 『로봇찌바』, 『모래알 전우들』, 『라이파이』
시리즈 등이 내 유장한 독서의 길을 처음 열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백하자면
나의 밥상머리 독서의 시작도 이 만화들로부터 비롯되었다. 빌려온 만화는 돌려줘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시간에 보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불가불
밥상머리까지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벌어진 소동이야 여기서 일일이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이니 지각은 예사요, 책가방 속에 읽다만 만화를 넣어갔다가 선생님에게 들
켜 혼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며, 나이 많은 누나가 아예 만화책을 뺏어 화덕에다 넣는 바람
에 만화 값을 갚아주느라 혼쭐이 빠진 적도 있다. 그래도 이 무서운 습관은 장차 평생 내게
책과 가까이 지내게 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만화의 시대가 가고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동화의 시대가 왔다. 초등학교 4학년 무
렵이었다. 우리 옆집에 서울에서 이사 온 여학생이 있었는데 마침 같은 학년, 같은 반이 되었
다. 그 아이는 얼굴도 예뻤지만 여러 가지 우리가 보지 못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100권짜리 ‘세계아동문학전집’이었다. 책이 귀했던 시절 그 아이의 삼층 책꽂
이에 꽂힌 100권짜리 전집은 찬란하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 아이의 환심을 사
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는데 다행히 아들이 없던 그 아이 엄마가 내가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친아들처럼 대해주었다. 그래서 그 집에 가서 같이 숙제도
하고 밥도 먹고, 100권짜리 전집을 1권부터 차례대로 빌려다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
이에 ‘작은 사랑’ 같은 것도 싹텄는데, 이제 와서 하는 고백이지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아이와 뽀뽀 같은 것도 했다. 얼마나 달콤했던지 머릿속이 얼얼할 정도였다.
어쨌거나 그 전집 100권을 떼느라 불철주야 책을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속에 있던
책이란 게 지금도 그냥 ‘명작동화’ 십팔번으로 들어가는 『빨간머리 앤』, 『장발장』, 『소공
녀』, 『소공자』, 『그리스 로마 신화』,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것들이었다. 어떤 때는 그 아
이와 사이가 좋지 않아 하루 만에 책을 회수할 때는 급히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어야했다.
신기하게도 그 100권을 거의 다 뗐을 무렵 그 아이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다시 서울로 전학
을 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본 책들은 대부분 부실한 번역에다 일본판에서 중역
한 것이 많았고, 그나마 다이제스트된 것들이어서 그냥 맛만 보여주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실제로 『장발장』의 경우는 빅토르 위고의 장대하고 위대한 작품인 『레미제라블』
의 일부분이고, 『로빈슨 크루소우』의 경우도 원작은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지닌 걸작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어딘가.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의 한 줄의 독서는 나이 들어 한 권의 독서,
아니 수백 권의 독서와 비교할 수 없는 출렁거림을 안겨주지 않는가. 나는 지금도 그 시절
을 생각하면, 석류나무 꽃 환한 그 아이 집 마당과 100권의 양장본 명작이 꽂혀있던 예쁜
책장과 머리에 빨간 리본을 한 그 아이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열병을 앓듯이 청춘을 앓았노라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본격적인 입시체제가 시작되었다. 사당오락. 네 시간 자면 합격하
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말이 유행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한민국 입시생처럼
불쌍한 인생은 없다. 곁눈질할 틈은 물론이거니와 오줌 누고 돌아볼 틈도 없는 것이 그 시
절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성장하는 인간의 내면에
마그마처럼 끓어대는 혼돈이 없을 수가 없다. 대체적으로 고등학교 시절 공부 잘 하는 친
구들이란 정서가 매우 무디거나 안정된 친구들이다. 사춘기를 앓아대는 인간이 그렇게 태
연하게 책가방이나 끼고 부모님과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아침부터 밤까지 목석처
럼 지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당시에 좀 낡은 니체의 산문집 한 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산문집의 뒤표지에는
커다란 글씨로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었다. “오, 나의 청춘이여! 나는 열병을 앓듯이 너
를 앓았노라!” 그 말은 불화살처럼 내 가슴에 와서 박혔고, 그리하여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의 유행가가 되었다. 대구로 올라와 혼자 자취 생활을 하는 내게 그 말은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치명적인 열병에도 친구가 있는 법이다. 재형이란 친구가 있었다. 공부도 잘
했고, 나처럼 낭만적이었으며, 나보다 책을 더 좋아했다. 우리는 방과 후 함께 시청 옆, 헌책
방 거리를 싸돌아다녔다. 그때 만난 이들이 바로 도스토옙스키였으며, 릴케였고, 카프카
와 카뮈,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체호프였고 나중에는 『종의 기원』, 『꿈의 해석』으로 나아
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까지에 이르렀다. 우리의 홀쭉한 주머니 사
정을 아는 헌책방 주인아저씨는, 더구나 대구 최고의 명문인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인 우리
가 그런 류의 두꺼운 헌책을 사고자 할 때에 참으로 고맙게도 절반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
으로 주시고는 했다. 그런 책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책이
란 읽고, 읽지 않고를 떠나 일단 자신의 서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다. 이 위대한 작가, 불후의 사상가들이 내 빈곤한 자취방으로 와 은밀히 말을 걸어오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나는 어디 나갈 때도 그런 두툼한 책을 꼭 옆에 끼고 다녔다. 그것은 나의 자존심이며 내
정신의 장식품이기도 했다. 내 책장에는 학교 참고서와 달리 그런 류의 책들이 꽂혀있다는
것이 못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입시문을 향해 오로지 한눈 팔지 않고
달리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멸시하곤 했다.나는 황제 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친구였
으며, 니체의 제자이자, 도스토옙스키의 이해자였다.
하루는 카뮈의 『이방인』과 『시시포스의신화』를 읽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나는 재
형이란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이 세상의 부조리는 신의 부재로
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자유를 얻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우리들의 중요한 텍스트였다. ‘초인’이
니 ‘운명애’ 같은 단어는 마치 주술처럼 우리를 사로잡았다. 나중에 그의 위대한 저작인
『도덕의 피안』이나 『비극의 탄생』을 읽으며 마침내 니체를 전공하기 위해 철학과로 진학
하겠다고 결심 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나는 그 시절 “오, 나의 청춘이여! 나는 열병을 앓
듯이 너를 앓았노라!”라는 그의 슬로건의 가장 충실한 제자가 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 시절 나는 두 개의 문을 한꺼번에 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입시라는
현실의 문과 청춘이라는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또 하나의 문이었다. 고3이
되자 몸이 아파 두 달간 학교를 쉬었다. 성적도 오르락내리락 제멋대로였다. 입시를 한 달
남겨두고 학교를 떠나 재형이란 친구와 둘이서 서울로 올라왔다. 일종의 탈출이었던 셈이
다. 학원에 적을 두고 하숙을 붙였다. 그해 서울에는 남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눈이 참으로
많이 내렸다.
운이 좋았을까. 아니면 우리 청춘을 온통 사로잡았던 그 위대한 스승들이 도와주었던
덕일까. 우리는 나란히 서울대 인문대와 사회대에 합격했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주관식이
었던 그 당시 서울대 시험 문제가 온통 내가 아는 문제들만 나왔다는 것이다. 객관식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주관식이라면 단연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 이익을 보게 마련이다. 그리고
문제가 어렵고 까다로울수록 더 유리한 법이다. 합격도 언감생심이었는데 몇 퍼센트 안에
드는 상위권이라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했을 것인가. 시골에 계신 부모님
께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님은 소리 내어 우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그때는
감격으로 우신 것이었지만 얼마 후에는 정말 우실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부터 천천히 그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입시와 청춘의 덫에서 풀려나자 나는 정말 자유를 온몸으로 느꼈다. 대학시절 나는 자
유분방 그 자체였다. 머리도 장발로 기르고, 통기타를 두드리며, 생맥주에 미팅에 고고댄
싱에 정말 논다니처럼 놀았다. 가끔 학교 앞 서점에 가긴 했지만 읽을 만한 책도 없었다. 유
신독재 시절이라 약간이라도 저항적인 내용이 있으면 금서가 되었다. 기껏 독일 작가 루이
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서』나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는 류 밖에는
없었는데 사실 그런 책은 고등학교 시절의 독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대신 철학
과에서 접할 수 잇게 된 헤겔, 후설, 베르그송, 아우구스틴, 그리고 동양의 고전들이 그나마
독서의 목마름을 키워주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진짜배기 책다운 책들은 불온서적으로 찍혀 은밀히 지하로 떠돌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유인물로 인쇄된 김지하의 『황토』와 『오적』이 그것이었고, 박현채의 『후
진국 경제론』, 리영희 교수의 『팔억인과의 대화』 등이 그것이었다(시대의 지성이었던 리
영희 선생은 그 후 그 책 때문에 감옥으로 가셨는데, 나도 그때 마침 4학년 말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되어있던 차에 우연히 눈 내리던 날, 영등포 구치소 이발관에서 만났다). 그리
고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이동철의 『어둠의 자식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
찾아왔고, 최인호의 『바보들의 행진』도 열심히 읽었다. 당시 문학책은 그저 문학책이 아니
라 의식화해나가는 젊은이들의 경전과 다름없었다. 우리는 시를 통해 정신의 빛을 얻었고,
소설을 통해 장차 해야 할 일들을 찾았다.
대학 3학년 무렵 나는 드디어 소설 한 편을 썼는데 그것이 대학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
춘문예에 입선이 되었다. 그것이 내가 소설가로 세상에 처음 신고를 한 첫 작품이 되는 셈
인데 그것 때문에 이른바 ‘운동권’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때 처음 발간 준
비 중인 인문대 교지 편집위원에 위촉되었는데, 바로 그 교지 편집실이란 게 역사와 현실
에 고민 많은 친구들의 집합소였던 것이다. 그들이 돌려 가며 읽는 책은 당시로서는 거의
가 불온서적이었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모리스 도브의 경제학서, 라인홀드 니
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E. 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 칼 포퍼의 『열린사
회와 그 적들』 등이 그런 류의 책이었다. 특히 쿠바 혁명을 다룬 『쿠바 혁명의 해부』에서 젊
은 대학생 카스트로가 재판정에서 당시 쿠바와 남미 여러 나라들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이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항변하는 대목에서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번역서가 없어 짧은
영어 실력으로 원서를 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생생한 목소리는 내내 내 가슴을 떠돌았
다. 그리고 나 역시 마침내 대학 4학년 무렵, 학내 사건에 연루되어 다른 편집위원들과 함
께 학교에서 잘려 감옥으로 가는 긴 행렬에 합류하였다.
어두운 독방에서 만난 자유
2년 가까운 감옥의 독방 생활.
그 시절, 책이 없었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책은 진정으로 내게 위안이었으며, 희
망이었고, 스승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종일 내내 책만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에 차라리 감사했다. 돌이켜보면 감옥은 내게 또 다른 학교나 다름없었다.
다만 어머님에게 불효한 것이 내 생애 두고두고 응어리로 남아 있다. 그 길고 긴 길을 밤
새워 열차를 타고 올라와 추운 여인숙에서 잠깐 눈을 붙이시고 면회를 하러오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느 시집에선가 나는 그때의 시를 썼고, 그때 어머님의 모습도 그렸
다. ‘첫면회 오신 울 어머님, 낮은 어깨 위 내리던 눈 / 약한 맘 따윈 버려뿌라, 늙으신 어머
님 돌아가시던 발길 / 철문은 닫히고 눈은 내리고…….’ 그렇게도 억수처럼 눈이 내리곤 했
던 내 청춘의 겨울이었다.
그 울분과 슬픔의 시간을 나는 묵묵히 책을 읽으며 보냈다. 그때 읽은 책의 목록을 어떻
게 세세히 다 적을 수가 있겠는가. 처음 한동안은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100권을 뗐고,
이어서 박영사 세계문학전집 100권을 마스터하였다. 그리고 철학과 신학, 역사서와 경제
학서, 사회과학서를 읽었다. 나는 내 청춘의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책들은 영혼의 빛이었고, 새로운 세상의 각성이었다.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그때 읽었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
블』의 온전한 형태도 그때 읽었다. 난독이었고, 잡독이었지만 내 허기진 정신에 편식이란
없었다. 그 시절, 내내 책을 넣어주곤 했던 어떤 여성이 있었다. 면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책만 넣어주고 돌아서 가던 그 모습이 지금껏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 세상 사는 일이란 참
으로 많은 미안함으로만 남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적지 않은
사람의 덕과 도움을 받았다. 그 미안함을 위해서도 나는 내 삶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지 않
으면 안 되리라!
어쨌거나 영 점 칠 평의 방 안엔 세 권의 책밖에 허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면회 때
까지 주어진 책은 다 보아야 했다. 점호가 끝나고 취침 시간이 되면 교도관 몰래 이불 속에
서 삼십 촉 희미한 불빛 아래 몰래 책을 읽느라 눈이 사정없이 나빠졌다. 하지만 나는, 행복
했다. 비록 좁은 공간이었지만 나는 정신의 자유를 맛보았고, 뛰어난 사상가와 작가가 이
끄는 대로 상상의 날개를 펴며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었다. 아마 그 시절처럼 열정적으로 책
을 읽을 수 있는 기회는 내 생애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의 지금을 만든, 만들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현재의 자기를 있게 만든 여러 가지 인연들이 있겠지만 나에게 두
가지만 들라면 그 하나는 사람과의 만남이고, 두 번째는 책과의 만남이라고 말하고 싶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좋은 사람과의 좋은 만남이란 얼마나 큰 행운인지 인생을 살아본 사람
이면 누구나 느끼는 바일 것이다. 사실 나도 길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과 영향을 받았다. 어쩌면 나를 생겨나게 한 분
들은 부모님이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이들은 이렇게 만난 배우자, 친구, 그리고 스쳐
지나갔던 무수한 사람들과의 인연일 것이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나의 지금을 만든 것은 바로 책이다. 돌이켜보면 책은 나에게 연인
이자, 스승이었고, 외로울 때의 친구였으며, 상처 받아 괴로울 때의 친절한 의사였다. 책을
통해 나는 황제 아우구스틴의 친구가 되었고, 노예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친구가 되었으며,
러시아의 위대한 정신들을 낳은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를 만났고, 공자와 노자
등의 지혜를 엿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책을 통해 세상의 여러 곳을 여행하였고, 우리나라
와 세계의 역사를 배웠으며, 나무와 풀의 이름을 배웠고, 복잡한 감정의 정체와 단순한 정
신의 위대함을 배웠다.
지식과 지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동물들은 오랜 진화를
통해 본능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간뇌와 중뇌 부분이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위
에 그것을 덮고 있는 회백색의 대뇌 신피질이 더 발달되어 있다. 이 신피질은 절제력과 사
고력, 추리력을 주관한다. 신피질이 없다면 인간 역시 동물처럼 본능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이 신피질을 형성해 주는 것이 바로 독서의 힘이다. 그런 책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
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지의 지를 깨달아 한 평생 조용히 지혜롭게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대개의 경우는 무지와 편견의 암흑 속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어릴 적 밥상머리에서 시작되었던 나와 책과의 인연은 참으로 오랜 세월 지속되었다.
아마 어머님이 지금 살아계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아, 이눔아! 책을 그렇게 좋아하더니, 결국 책을 쓰는 소설가가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숫제 책 만드는 출판쟁이가 되어버렸구나!”
나는 어린 시절 밥 먹으며 책 읽는 것을 버릇 삼아 했는데, 그 버릇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아
내로부터 타박을 받기 일쑤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타박하는 사람이 어머님이나 누나에
서 아내로 바뀐 것 밖에는 없다. 지금도 어머님이, “아, 이눔아! 밥상머리에서 책을 보고 앉
았으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어떻게 아누?” 하시던 말씀이 귓가에 쟁
쟁하다.
사실 밥상머리 독서라고 알려진 나의 이 독서법으로 말하자면 일거양득이요, 양수겸장
이라 밥맛은 밥맛대로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책맛은 책맛대로 그렇게 머리에 쏙쏙 들어
갈 수 없다. 아무리 반찬이 없고, 맛이 없어도 재미있는 책 한 권 들고 밥을 먹어보라. 우리
어머님 말씀대로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어느새 한 그릇 뚝딱 해
치워지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책읽기의 진도도 그냥 책상에 앉아 읽는 것
보다 몇 배나 빨라지고 집중도 잘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 그렇게 밥상머리에서 읽은 책 중에 가장 기억이 남는 책은 펄벅의 『대지』
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 책의 이름을 유감스럽게도 그때는 잘 몰랐는데 왜냐하면 누가
읽다 버려두었는지 시골집에 뒹구는 책의 앞과 뒤표지가 모두 날아가고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을거리가 없어 심심하던 내 손에 우연히 그 책이 잡혔는데 처음엔 좀 어렵다 싶
었지만 계속 읽다보니 ‘무지하게’ 재미있었다. 주인공 왕룽이 부잣집 하녀인 못생긴 오란
을 아내로 맞아 첫날밤을 지내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고추가 섰고, 메뚜기 떼를 물리
치는 장면에서는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떠올리며 나는 모르게 황홀해지곤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책 중에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있었고, 쇼펜하우어의
『인생론』도 있었다. 그 책들 역시 사춘기의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책 중의 하나이다.
그런 책들이 그래도 집안에 뒹굴고 다녔던 것은 아마도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던 둘째형 때
문이었을 것이다. 잰체하길 좋아하는 형은 공대생이었지만 문학에 빠져 방학 때면 그런 책
을 옆에 끼고 내려왔다가 읽는 둥 마는 둥 버려두고 가기 일쑤였는데 그게 내 차지가 된 것
이다. 중학생이 읽기에는 좀 어려운 책이었지만 그래도 힘들여 읽고 나면 무언가 사춘기를
통과해 나온 듯한 뿌듯함과 또래들에 비해 남다른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지곤 했다. 베르
테르와 로테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가슴 졸였고,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세상에 대
한 혐오가 아니라 내게 인생의 달콤한 비밀을 전해주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헤르
만 헤세의 『데미안』을 접한 것도 그때였다.
『좁은 문』과 『데미안』은 내 영혼에 번개를 치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지금껏 이 나이가
들어서도 내가 낭만적 정서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바로 그런 책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 책
들을 바로 그 밥상머리에서 해치웠던 것이다. 어머님이나 누나가 볼 때는 얼마나 보기 싫
었겠는가. 어떤 때는 구박을 하다가 참지 못해 책을 빼앗아 집어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러
나 그럴수록 나는 근질거리는 밥상머리 독서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해 호시탐탐 책을 펴서
곁눈으로 훔쳐보듯 삼매에 빠지고는 했다. 사실 나의 이런 독서 습관은 순전히 나의 잘못
만은 아니다. 빡빡한 학교 교육은 늘 우리의 숨통을 죌 것 같았는데, 그렇게 틈새 독서라도
하지 않으면 무언가에 굶주려있던 우리들이 달리 시간을 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서는 하나의 습관이다. 어떤 친구의 말에 의하자면 일종의 ‘병’이다. 하지만 그게 얼
마나 행복한 병인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이 병을 꽤 일찍이 만났던 것 같다. 아직 글자를 깨우치기 전인 어린 시절 나의 독서는
동네 만홧가게에서 출발했다. 입을 헤 벌리고 읽느라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침을 흘리곤
했는데, 정말 침을 흘리며 보던 『땡이』 시리즈나, 『로봇찌바』, 『모래알 전우들』, 『라이파이』
시리즈 등이 내 유장한 독서의 길을 처음 열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백하자면
나의 밥상머리 독서의 시작도 이 만화들로부터 비롯되었다. 빌려온 만화는 돌려줘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시간에 보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불가불
밥상머리까지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벌어진 소동이야 여기서 일일이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이니 지각은 예사요, 책가방 속에 읽다만 만화를 넣어갔다가 선생님에게 들
켜 혼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며, 나이 많은 누나가 아예 만화책을 뺏어 화덕에다 넣는 바람
에 만화 값을 갚아주느라 혼쭐이 빠진 적도 있다. 그래도 이 무서운 습관은 장차 평생 내게
책과 가까이 지내게 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만화의 시대가 가고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동화의 시대가 왔다. 초등학교 4학년 무
렵이었다. 우리 옆집에 서울에서 이사 온 여학생이 있었는데 마침 같은 학년, 같은 반이 되었
다. 그 아이는 얼굴도 예뻤지만 여러 가지 우리가 보지 못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100권짜리 ‘세계아동문학전집’이었다. 책이 귀했던 시절 그 아이의 삼층 책꽂
이에 꽂힌 100권짜리 전집은 찬란하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 아이의 환심을 사
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는데 다행히 아들이 없던 그 아이 엄마가 내가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친아들처럼 대해주었다. 그래서 그 집에 가서 같이 숙제도
하고 밥도 먹고, 100권짜리 전집을 1권부터 차례대로 빌려다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
이에 ‘작은 사랑’ 같은 것도 싹텄는데, 이제 와서 하는 고백이지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아이와 뽀뽀 같은 것도 했다. 얼마나 달콤했던지 머릿속이 얼얼할 정도였다.
어쨌거나 그 전집 100권을 떼느라 불철주야 책을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속에 있던
책이란 게 지금도 그냥 ‘명작동화’ 십팔번으로 들어가는 『빨간머리 앤』, 『장발장』, 『소공
녀』, 『소공자』, 『그리스 로마 신화』,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것들이었다. 어떤 때는 그 아
이와 사이가 좋지 않아 하루 만에 책을 회수할 때는 급히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어야했다.
신기하게도 그 100권을 거의 다 뗐을 무렵 그 아이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다시 서울로 전학
을 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본 책들은 대부분 부실한 번역에다 일본판에서 중역
한 것이 많았고, 그나마 다이제스트된 것들이어서 그냥 맛만 보여주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실제로 『장발장』의 경우는 빅토르 위고의 장대하고 위대한 작품인 『레미제라블』
의 일부분이고, 『로빈슨 크루소우』의 경우도 원작은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지닌 걸작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어딘가.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의 한 줄의 독서는 나이 들어 한 권의 독서,
아니 수백 권의 독서와 비교할 수 없는 출렁거림을 안겨주지 않는가. 나는 지금도 그 시절
을 생각하면, 석류나무 꽃 환한 그 아이 집 마당과 100권의 양장본 명작이 꽂혀있던 예쁜
책장과 머리에 빨간 리본을 한 그 아이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열병을 앓듯이 청춘을 앓았노라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본격적인 입시체제가 시작되었다. 사당오락. 네 시간 자면 합격하
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말이 유행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한민국 입시생처럼
불쌍한 인생은 없다. 곁눈질할 틈은 물론이거니와 오줌 누고 돌아볼 틈도 없는 것이 그 시
절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성장하는 인간의 내면에
마그마처럼 끓어대는 혼돈이 없을 수가 없다. 대체적으로 고등학교 시절 공부 잘 하는 친
구들이란 정서가 매우 무디거나 안정된 친구들이다. 사춘기를 앓아대는 인간이 그렇게 태
연하게 책가방이나 끼고 부모님과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아침부터 밤까지 목석처
럼 지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당시에 좀 낡은 니체의 산문집 한 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산문집의 뒤표지에는
커다란 글씨로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었다. “오, 나의 청춘이여! 나는 열병을 앓듯이 너
를 앓았노라!” 그 말은 불화살처럼 내 가슴에 와서 박혔고, 그리하여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의 유행가가 되었다. 대구로 올라와 혼자 자취 생활을 하는 내게 그 말은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치명적인 열병에도 친구가 있는 법이다. 재형이란 친구가 있었다. 공부도 잘
했고, 나처럼 낭만적이었으며, 나보다 책을 더 좋아했다. 우리는 방과 후 함께 시청 옆, 헌책
방 거리를 싸돌아다녔다. 그때 만난 이들이 바로 도스토옙스키였으며, 릴케였고, 카프카
와 카뮈,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체호프였고 나중에는 『종의 기원』, 『꿈의 해석』으로 나아
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까지에 이르렀다. 우리의 홀쭉한 주머니 사
정을 아는 헌책방 주인아저씨는, 더구나 대구 최고의 명문인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인 우리
가 그런 류의 두꺼운 헌책을 사고자 할 때에 참으로 고맙게도 절반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
으로 주시고는 했다. 그런 책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책이
란 읽고, 읽지 않고를 떠나 일단 자신의 서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다. 이 위대한 작가, 불후의 사상가들이 내 빈곤한 자취방으로 와 은밀히 말을 걸어오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나는 어디 나갈 때도 그런 두툼한 책을 꼭 옆에 끼고 다녔다. 그것은 나의 자존심이며 내
정신의 장식품이기도 했다. 내 책장에는 학교 참고서와 달리 그런 류의 책들이 꽂혀있다는
것이 못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입시문을 향해 오로지 한눈 팔지 않고
달리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멸시하곤 했다.나는 황제 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친구였
으며, 니체의 제자이자, 도스토옙스키의 이해자였다.
하루는 카뮈의 『이방인』과 『시시포스의신화』를 읽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나는 재
형이란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이 세상의 부조리는 신의 부재로
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자유를 얻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우리들의 중요한 텍스트였다. ‘초인’이
니 ‘운명애’ 같은 단어는 마치 주술처럼 우리를 사로잡았다. 나중에 그의 위대한 저작인
『도덕의 피안』이나 『비극의 탄생』을 읽으며 마침내 니체를 전공하기 위해 철학과로 진학
하겠다고 결심 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나는 그 시절 “오, 나의 청춘이여! 나는 열병을 앓
듯이 너를 앓았노라!”라는 그의 슬로건의 가장 충실한 제자가 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 시절 나는 두 개의 문을 한꺼번에 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입시라는
현실의 문과 청춘이라는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또 하나의 문이었다. 고3이
되자 몸이 아파 두 달간 학교를 쉬었다. 성적도 오르락내리락 제멋대로였다. 입시를 한 달
남겨두고 학교를 떠나 재형이란 친구와 둘이서 서울로 올라왔다. 일종의 탈출이었던 셈이
다. 학원에 적을 두고 하숙을 붙였다. 그해 서울에는 남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눈이 참으로
많이 내렸다.
운이 좋았을까. 아니면 우리 청춘을 온통 사로잡았던 그 위대한 스승들이 도와주었던
덕일까. 우리는 나란히 서울대 인문대와 사회대에 합격했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주관식이
었던 그 당시 서울대 시험 문제가 온통 내가 아는 문제들만 나왔다는 것이다. 객관식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주관식이라면 단연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 이익을 보게 마련이다. 그리고
문제가 어렵고 까다로울수록 더 유리한 법이다. 합격도 언감생심이었는데 몇 퍼센트 안에
드는 상위권이라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했을 것인가. 시골에 계신 부모님
께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님은 소리 내어 우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그때는
감격으로 우신 것이었지만 얼마 후에는 정말 우실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부터 천천히 그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입시와 청춘의 덫에서 풀려나자 나는 정말 자유를 온몸으로 느꼈다. 대학시절 나는 자
유분방 그 자체였다. 머리도 장발로 기르고, 통기타를 두드리며, 생맥주에 미팅에 고고댄
싱에 정말 논다니처럼 놀았다. 가끔 학교 앞 서점에 가긴 했지만 읽을 만한 책도 없었다. 유
신독재 시절이라 약간이라도 저항적인 내용이 있으면 금서가 되었다. 기껏 독일 작가 루이
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서』나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는 류 밖에는
없었는데 사실 그런 책은 고등학교 시절의 독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대신 철학
과에서 접할 수 잇게 된 헤겔, 후설, 베르그송, 아우구스틴, 그리고 동양의 고전들이 그나마
독서의 목마름을 키워주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진짜배기 책다운 책들은 불온서적으로 찍혀 은밀히 지하로 떠돌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유인물로 인쇄된 김지하의 『황토』와 『오적』이 그것이었고, 박현채의 『후
진국 경제론』, 리영희 교수의 『팔억인과의 대화』 등이 그것이었다(시대의 지성이었던 리
영희 선생은 그 후 그 책 때문에 감옥으로 가셨는데, 나도 그때 마침 4학년 말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되어있던 차에 우연히 눈 내리던 날, 영등포 구치소 이발관에서 만났다). 그리
고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이동철의 『어둠의 자식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
찾아왔고, 최인호의 『바보들의 행진』도 열심히 읽었다. 당시 문학책은 그저 문학책이 아니
라 의식화해나가는 젊은이들의 경전과 다름없었다. 우리는 시를 통해 정신의 빛을 얻었고,
소설을 통해 장차 해야 할 일들을 찾았다.
대학 3학년 무렵 나는 드디어 소설 한 편을 썼는데 그것이 대학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
춘문예에 입선이 되었다. 그것이 내가 소설가로 세상에 처음 신고를 한 첫 작품이 되는 셈
인데 그것 때문에 이른바 ‘운동권’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때 처음 발간 준
비 중인 인문대 교지 편집위원에 위촉되었는데, 바로 그 교지 편집실이란 게 역사와 현실
에 고민 많은 친구들의 집합소였던 것이다. 그들이 돌려 가며 읽는 책은 당시로서는 거의
가 불온서적이었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모리스 도브의 경제학서, 라인홀드 니
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E. 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 칼 포퍼의 『열린사
회와 그 적들』 등이 그런 류의 책이었다. 특히 쿠바 혁명을 다룬 『쿠바 혁명의 해부』에서 젊
은 대학생 카스트로가 재판정에서 당시 쿠바와 남미 여러 나라들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이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항변하는 대목에서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번역서가 없어 짧은
영어 실력으로 원서를 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생생한 목소리는 내내 내 가슴을 떠돌았
다. 그리고 나 역시 마침내 대학 4학년 무렵, 학내 사건에 연루되어 다른 편집위원들과 함
께 학교에서 잘려 감옥으로 가는 긴 행렬에 합류하였다.
어두운 독방에서 만난 자유
2년 가까운 감옥의 독방 생활.
그 시절, 책이 없었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책은 진정으로 내게 위안이었으며, 희
망이었고, 스승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종일 내내 책만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에 차라리 감사했다. 돌이켜보면 감옥은 내게 또 다른 학교나 다름없었다.
다만 어머님에게 불효한 것이 내 생애 두고두고 응어리로 남아 있다. 그 길고 긴 길을 밤
새워 열차를 타고 올라와 추운 여인숙에서 잠깐 눈을 붙이시고 면회를 하러오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느 시집에선가 나는 그때의 시를 썼고, 그때 어머님의 모습도 그렸
다. ‘첫면회 오신 울 어머님, 낮은 어깨 위 내리던 눈 / 약한 맘 따윈 버려뿌라, 늙으신 어머
님 돌아가시던 발길 / 철문은 닫히고 눈은 내리고…….’ 그렇게도 억수처럼 눈이 내리곤 했
던 내 청춘의 겨울이었다.
그 울분과 슬픔의 시간을 나는 묵묵히 책을 읽으며 보냈다. 그때 읽은 책의 목록을 어떻
게 세세히 다 적을 수가 있겠는가. 처음 한동안은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100권을 뗐고,
이어서 박영사 세계문학전집 100권을 마스터하였다. 그리고 철학과 신학, 역사서와 경제
학서, 사회과학서를 읽었다. 나는 내 청춘의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책들은 영혼의 빛이었고, 새로운 세상의 각성이었다.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그때 읽었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
블』의 온전한 형태도 그때 읽었다. 난독이었고, 잡독이었지만 내 허기진 정신에 편식이란
없었다. 그 시절, 내내 책을 넣어주곤 했던 어떤 여성이 있었다. 면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책만 넣어주고 돌아서 가던 그 모습이 지금껏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 세상 사는 일이란 참
으로 많은 미안함으로만 남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적지 않은
사람의 덕과 도움을 받았다. 그 미안함을 위해서도 나는 내 삶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지 않
으면 안 되리라!
어쨌거나 영 점 칠 평의 방 안엔 세 권의 책밖에 허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면회 때
까지 주어진 책은 다 보아야 했다. 점호가 끝나고 취침 시간이 되면 교도관 몰래 이불 속에
서 삼십 촉 희미한 불빛 아래 몰래 책을 읽느라 눈이 사정없이 나빠졌다. 하지만 나는, 행복
했다. 비록 좁은 공간이었지만 나는 정신의 자유를 맛보았고, 뛰어난 사상가와 작가가 이
끄는 대로 상상의 날개를 펴며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었다. 아마 그 시절처럼 열정적으로 책
을 읽을 수 있는 기회는 내 생애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의 지금을 만든, 만들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현재의 자기를 있게 만든 여러 가지 인연들이 있겠지만 나에게 두
가지만 들라면 그 하나는 사람과의 만남이고, 두 번째는 책과의 만남이라고 말하고 싶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좋은 사람과의 좋은 만남이란 얼마나 큰 행운인지 인생을 살아본 사람
이면 누구나 느끼는 바일 것이다. 사실 나도 길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과 영향을 받았다. 어쩌면 나를 생겨나게 한 분
들은 부모님이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이들은 이렇게 만난 배우자, 친구, 그리고 스쳐
지나갔던 무수한 사람들과의 인연일 것이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나의 지금을 만든 것은 바로 책이다. 돌이켜보면 책은 나에게 연인
이자, 스승이었고, 외로울 때의 친구였으며, 상처 받아 괴로울 때의 친절한 의사였다. 책을
통해 나는 황제 아우구스틴의 친구가 되었고, 노예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친구가 되었으며,
러시아의 위대한 정신들을 낳은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를 만났고, 공자와 노자
등의 지혜를 엿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책을 통해 세상의 여러 곳을 여행하였고, 우리나라
와 세계의 역사를 배웠으며, 나무와 풀의 이름을 배웠고, 복잡한 감정의 정체와 단순한 정
신의 위대함을 배웠다.
지식과 지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동물들은 오랜 진화를
통해 본능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간뇌와 중뇌 부분이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위
에 그것을 덮고 있는 회백색의 대뇌 신피질이 더 발달되어 있다. 이 신피질은 절제력과 사
고력, 추리력을 주관한다. 신피질이 없다면 인간 역시 동물처럼 본능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이 신피질을 형성해 주는 것이 바로 독서의 힘이다. 그런 책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
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지의 지를 깨달아 한 평생 조용히 지혜롭게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대개의 경우는 무지와 편견의 암흑 속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어릴 적 밥상머리에서 시작되었던 나와 책과의 인연은 참으로 오랜 세월 지속되었다.
아마 어머님이 지금 살아계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아, 이눔아! 책을 그렇게 좋아하더니, 결국 책을 쓰는 소설가가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숫제 책 만드는 출판쟁이가 되어버렸구나!”